서문
1장 인간 쓰레기
2장 배신당한 혁명
3장 믿음과 이성
4장 문화와 야만
옮긴이의 글
추천의 글
인명 해설
신을 옹호하다
테리 이글턴
264p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와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이른바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의해 다시 지펴진 신에 관한 논쟁에 테리 이글턴도 참여했다. 마르크스주이자의 시선으로 무신론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우리 시대의 앎과 삶 전반에 관한 새로운 관점과 분석틀을 제안한다. 원제 ‘이성과 믿음과 혁명’에서도 드러나듯이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자 자본주의와 정치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삶의 기본 조건과 관념들, 그리고 역사를 다시금 곱씹어 보라고 우리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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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Description
'이글턴은 무엇을 말하는가 몇 개의 하이라이트'
디치킨스 신에 무지한 무신론자들
『신을 옹호하다』의 주된 논적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이며 새로운 무신론자의 대표 격인 도킨스와 히친스, 그리고 편의상 그 둘을 합성한 인물인 ‘디치킨스’다(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점도 적잖지만 과학과 종교를 철저히 분리하여 절대적으로 대립시킨다는 점에서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예컨대 기독교 신앙을, 과학과 대립되는 우주관을 제시하면서 세상을 설명하는 야바위 이론이라고 여긴다. 이글턴의 풍자를 보자.
“이런 점에서 도킨스는, 소설을 서툴게 짜깁기한 사회학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소설이라는 형식의 취지를 이해 못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막스 베버의 사회학 책을 읽으면 그만인데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과 힘들게 씨름할 이유가 뭐냐는 식이다.……크리스토퍼 히친스도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망원경과 현미경 덕분에 [종교는] 이제 어떤 중요한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애초부터 뭔가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따라서 히친스의 말은 전기 토스터가 나왔으니 체호프는 잊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아퀴나스에게 하느님은 우주의 생성을 놓고 과학과 경쟁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실 아퀴나스는 세상에는 어떤 기원도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도킨스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일종의 범주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과학과 신학은 대부분의 경우에 같은 종류의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 치과 교정학과 문학비평의 대상이 다르듯이 말이다. 이는 과학과 신학 간에 어처구니없는 오해들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다.……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은 충분하게 멀리 올라가지 않는다. 왜 애초에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렇게 생겨난 사물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것은 어째서인지 같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기독교 신앙에서 일차적인 것은 초월자인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둠과 고통과 혼란 속에 허덕이며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이다.”
예수 자기를 버리며 세상 바꾸기
“신약 성경에는 영웅적이라 할 이야기가 없다. 예수는 구세주치고는 너무나 구차스럽다. 메시아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지 않는다.……그러나 예수 시대에 산 독실한 유대인이라면 하느님의 것에는 정의를 위해 힘쓰는 일과 이민자를 따뜻이 맞아주는 일, 잘살고 힘 있는 사람들의 콧대를 꺾는 일 등이 포함된다는 점을 알았을 터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처형당한 예수의 몸은 온갖 패배자와 낙오자, 하층민, 그리고 부역자들에게 바쳐진 새로운 성전이 된다. 그는 못쓰게 돼버린 우리 세상을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전위적으로 보여주고 깨우치라고 촉구한다. 과거의 모든 형상과 언설을 뛰어넘는 체제, 정의와 우애가 살아 숨 쉬는 세계 말이다. 그런 삶이 진정 가능한지를 양파 값을 아는 식으로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우리에겐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여도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 이것은 냉정한 현실주의이며, ‘역사는 아직 꾸준하게 발전하는 중’이라는 디치킨스의 순진한 승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인간 조건의 적나라한 시니피앙은 사랑과 정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엉망으로 훼손된 시신이 인류 역사의 충격적 진실이다. 죄 없이 고통받은 사람의 그런 끔찍한 형상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류의 무한정한 진보라는 순진한 꿈을 곧이곧대로 믿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꿈은 디치킨스가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적이며 현실적인 정의의 핵심은 역시 사랑이다.
“기독교가 직관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 세계관의 중심에 사랑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말을 인정하기가 어려워진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역사의 중심이 아닌 게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가 사랑마저 실질적으로 사유화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다.”
이글턴이 전하는 신학에 굳이 해방신학이란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을 테다. 모든 진정한 신학은 해방의 신학이므로. 그리고 그 해방엔 동과 서의 구분이 없다.
“우리는 9 11 사태 이후 인종차별주의가 지식인 세계에서 다시 존중받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히친스, 마틴 에이미스, 살만 루슈디, 이언 매큐언 같은 자유주의 문인들은 그들이 편협하고 몽매한 이슬람주의라고 적절하게 규정한 것에 맞서서 자유로? 표현의 가치를 웅변적으로 역설해 왔다. 이는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살만 루슈디는 얼마 전 자신이 이제 정치에서 아주 멀어졌다고 선언했는데, 서구에 사는 그의 동족들이 오래전 식민 지배 아래 놓였던 시절 이후로는 유례가 없는 사나운 공격을 받고 지독한 모욕과 경멸을 당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이는 희한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혁명적 기원, 누추한 배신
기독교 비판자들이 지적으로 조잡해진 데 대한 일차적 책임은 기독교 자체에 있다. 역사적 운동 중 기독교처럼 그 혁명적 기원을 누추하게 저버린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오래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서 부유하고 공격적인 사람들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런 유의 신자들은 여자의 노출된 젖가슴에는 호들갑을 떨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끔찍한 불평등에는 무덤덤하다. 낙태에 대해서는 한탄하면서도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아이들을 불태워 죽이는 일에 대해선 동요하는 빛이 안 보인다.……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은 테러의 유일한 치유책이 정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신앙의 성서적 유형과 이데올로기적 유형의 차이다. 니체가 말했듯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구해내는 일”이 필요한 셈이다. 한데, 종교가 그 주춧돌 같은 원칙들을 명백하게 저버렸다면 자유주의는 어떤가 계몽주의의 다른 후예인 정치적 좌파는 모두 스스로 내세운 이상을 실천하는 데 실패했다. 이성과 합리성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 걸까.
믿음과 이성과 광기
“이성의 과잉은 일종의 광기로 귀착될 수 있다.……계몽주의가 내세운 이성이 더없이 소중하기는 해도, 그 자체와 정반대의 것을 불러오기 또한 쉽다는 사실이 이런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보의 이데올로기에서 보면 과거란 선사시대의 원시림으로 추방해야 할 유치한 무엇일 따름이다.……과거를 지움으로써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과거가 결국은 복수의 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종교가 부흥하는 현상은 바로 이런 ‘억압된 것의 회귀’를 보여주는 사례다. 자기도취에 빠진 계몽주의적 이성은 종교적 신앙의 본질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제국주의의 역사와 그 후유증도 이성의 광기라는 맥락 안에 놓여 있다.
“서구의 논평자들은 이슬람의 테러 행위에 겁을 먹고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지만, 그들이 속한 이른바 계몽된 문명사회가 저질러 온 숱한 잔혹 행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인 적이 거의 없다. 어째서 그들은 9 11 사태 이후에야, 다시 말해서 처음으로 그들 자신이 잠재적 공격 목표가 된 후에야 도덕적 분노를 요란하게 터뜨리기 시작한 걸까 피에 굶주려 우리의 팔다리를 날려 버리려는 광신자들을 비난하는 일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런 범죄가 자행되는 데에는 서구가 지난날 남들에게 저지른 치욕적 행위들이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기본적인 정의감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성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성이 없다면 우리는 시체와 다름없겠으나, 이성이 우리 존재의 궁극적 토대는 아니며, 우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