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와 열녀는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였다?
교묘하게 덧칠당한 옛이야기, 그 속에서 찾아낸 ‘스위트홈’의 허상!
효성스러운 아들, 절개를 지키는 열녀, 지엄한 남편과 정숙한 부인이 아닌, 자식을 생매장하는 부모와 부모의 간을 빼먹는 딸, 자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버지 등 불온하고 끔찍한 모습들이 우글우글한 우리 옛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소장파 국문학자인 유광수 연세대 교수가 고소설과 현대소설, 우리 설화와 외국 옛이야기를 넘나들며 그 속에 숨어 있던 삶의 진실을 찾아낸다.
고전은 차마 들춰보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다. 때로는 참혹하고 모골이 송연해지겠지만, 마음 깊이 도사린 음험한 생각들을 꺼내들어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운 현실을 피해 이야기 속에 꼭꼭 숨겨둔 가족의 신음과 한숨, 통곡을 들어보자.
* 왜 배 좌수는 장화를 시집보내지 않았을까?
: 부모와 자식, 선택할 수 없는 자들의 비극
삼국유사에는 〈손순매아(遜順埋兒)〉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우리 옛이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인 ‘효자담’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가장인 손순이 노모를 더욱 극진히 모시기 위해 자신의 어린 자식을 땅에 묻으려고 산에 올라갔다가 땅에서 돌 종을 발견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임금이 손순을 ‘지극한 효자’로 칭송하여 상을 내렸다는 줄거리다.
정말 손순은 효도하기 위해 아이를 생매장하려던 것일까? 그리고, 효를 위해서라면 자식을 살해하려던 아비의 죄는 용서될 수 있는 것일까? 저자의 생각은 단호하다. 아무리 손자가 밥상의 음식을 날름날름 집어먹는다 해도 노모가 손자를 땅에 묻어버리길 원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손순은 가난한 살림에 하나라도 먹을 입을 덜기 위해 자식 살해를 모의했던 것이고, 그것을 ‘효’라는 명목으로 치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잔혹한 얘기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환상적인 과자 집이 등장하는〈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도 끔찍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계모의 윽박을 못 이긴 무능한 아버지가 깊은 산속에 어린 남매만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흉년이 들어 살림이 궁핍해지자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남매를 유기한 것이다.
자식을 해치려는 일이 꼭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화홍련전〉의 계모 허씨는 전처소생인 장화와 홍련을 시기하여 구박하고 결국 두 자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계모만의 잘못일까? 계모가 그토록 딸들을 구박하고 음해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배 좌수는 왜 장성한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고 옆에 끼고 있었던 것일까? 계모의 다른 음해에는 꿈쩍도 않던 배 좌수가 왜 아이를 사산했다는 모함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친딸 장화를 죽이는 데 동조했던 것일까? 여기서 저자는 배 좌수와 두 딸 사이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즉 성적 학대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살기 어렵고 무지했던 옛날의 일이라고, 꾸며낸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을 편치 않다. 바로 오늘날, 현실에서도 똑같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어린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보험금을 타내려던 아버지, 키우기 힘들다며 어린 아이를 굶어죽게 방치한 젊은 엄마, 친딸을 성폭행하고 임신까지 시킨 인면수심의 아버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실리는 끔찍한 기사들은 앞에서 언급한 옛이야기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잔혹하다. 이 책은 가족이라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때로는 얼마나 억울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만들어내는지를 옛이야기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일러준다.
* 기녀들아, 앵혈을 지켜라. 본부인아, 투기하지 마라
: 폭력적이고 탐욕스런 가부장의 시선이 만들어낸 일그러진 여성상
가부장의 시선으로 쓰인 고소설들은 폭력적으로, 또 탐욕스러운 눈으로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다. 악독한 계모와 음탕한 첩들은 물론이고 지조 있는 기녀, 절개를 지키는 열녀, 현숙한 부인처럼 긍정적으로 묘사된 여인들 역시 한 꺼풀 벗겨보면 가부장의 욕망에 의해 일그러진 여성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고전소설을 보면 유독 사악한 첩들의 이야기를 자주 만나게 된다. 대부분 가문의 요구에 의해 맺어지는 본처와의 결혼과 달리 첩은 남자가 원하는 여자라면 언제든, 누구든 맞이할 수 있었다. 사랑 없는 본처보다 애정 관계로 맺어진 첩이 남편에게 더 사랑받고 살았을 텐데, 왜 그렇게 악독했을까?
양반 집안에는 처첩간의 위계가 분명했다. 아무리 총애를 받아도 첩은 첩일 뿐 절대로 처가 될 수 없다. 본처가 죽으면 다시 양반집 규수를 새로운 처로 맞지, 첩을 처로 ‘승격’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첩이 낳은 자식들도 모두 본처를 ‘어머니’로 부른다. 첩은 그저 가장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마음이 언제고 돌아서면 목숨조차 담보할 수 없는 것이 첩의 현실이었다. 첩이 언제든 사악해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처라고 해서 삶이 평화로운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나면 남편이 원하는 대로 아들을 낳고, 첩이 들어오는 것도 마다않고 받아야 한다. 여자니까 남편보다 뛰어나서도 안 되고, 남편이 사랑하여 데려온 첩을 투기해서도 안 된다. 〈옥루몽〉의 주인공인 양창곡은 2처 3첩을 거느리는데, 제2 부인인 황 부인이 첩 벽성선을 투기했다가 ‘더럽고 음란한 년’으로 몰려 지옥을 경험한 후 ‘남편 말 잘 듣는 현숙한’ 여인으로 새로 태어난다. 물론 가장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본 황 부인은 소심하고 얼빠진,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인형이나 다름없다. 첩을 무조건 총애하고자 한 가장의 욕망에 반하는 행동(투기)을 한 대가다.
처든 첩이든 무조건 가장에게 복종하고 가장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다 바쳐야 한다는 점은 동일했다. 대부분 가장의 욕망은 성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앵혈’이다. 꾀꼬리의 피를 뜻하는 앵혈은 궁중에서 궁녀를 들일 때 소녀들의 처녀성을 감별하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꾀꼬리의 피를 팔목에 묻혀서 묻으면 순결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앵혈이 남자와 동침을 하고 나면 사라진다고 믿었다.
〈옥루몽〉에서 양창곡의 3첩 중 강남홍과 벽성선은 원래 기녀였다. 기녀라는 직업상 무수한 남자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 남자들도 그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가당치도 않게 기녀에게 절개를 바란다. 이른바 ‘지조 높은 기녀’ 판타지다. 그리하여 양창곡은 강남홍과 벽성선의 팔뚝에 앵혈이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첩으로 받아들였다. 양창곡의 아버지인 양기성 역시 기녀 설중매와 빙빙과 어울렸지만, 그들을 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서는 앵혈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염된 몸’이라는 뜻이다.
기녀에게 순결을 요구했던 양창곡은 더 해괴한 짓까지 벌인다. 적들이 코앞에 들이닥친 군중(軍中)에서 강남홍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다. 무술을 배워 남장을 하고 양창곡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강남홍을 그저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의 손에 운명을 맡겨야 했던 여인들에게 ‘자기 정체성’이란 먼 나라 이야기였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양창곡과 그의 아버지 양기성 모두 정의로운 인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간신과 목숨을 걸고 맞서는 기백, 당당하고 공명정대한 언술, 소신과 강단 있는 행동을 많은 이들이 칭송하였고, 그것이 그들의 비열하고 파렴치한 행동까지도 정당한 것으로 포장해버렸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양창곡의 후손들이 주위에 널려 있는데도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못한 채 넘어가는 우리의 어두운 눈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 자식을 거부한 아버지, 부모를 배반한 자식
: 가족의 균열과 전복, 그리고 재탄생
아버지가 아들을 부정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부하는 이야기도 우리 고전에서 찾아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