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봄날이 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무도 살아내지는 못한다.” ㆍ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독창적인 관점과 문체를 고수해온 철학자 김영민의 풍경론 ㆍ봄날은 간다는 화두를 통해 흔한 낭만을 거부하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삶의 본질을 되묻다! 책 소개 철학자 김영민이 돌아왔다. 그가 일 년 만에 들고 온 화두는 ‘봄날은 간다’이다. 맑은 날씨와 대조되는 자신의 뿌연 현재를 보면서 무심코 외치는 한숨 섞인 표현에서부터, 어느덧 우리 시대의 문화적 기억이 된 영화 <봄날은 간다>까지, ‘봄날은 간다’란 세속적인 우리의 삶에 스며든 관용어구가 되어왔다. 그러나 저자는 언제나 그렇듯 관습적 어휘와 낭만적인 수사, 흔한 인상비평을 거부하고 ‘어긋남’과 ‘어긋냄’에서 비롯되는 인문人紋의 산책을 감행한다. ‘공제控除의 비망록’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산책자로서의 저자는 지금까지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온 자신의 연륜을 쉽사리 과시하는 고백의 틀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진정 ‘비워내면서’ 마주쳤던 풍경과 그 기록들을 담담히 소개한다. 깨단함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세속의 의미들 “인생은 오직 인생은 짧다는 것이고, 인생이 짧다는 것은 오직 짧아진 다음에야 깨단할 수 있어, 과연 ‘봄날은 간다’는 것만큼 실한 화두는 없을 것입니다. 비용이 없는 진실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봄날이 가는 일을 빼고는 슬픔도 외로움도 지혜도 성숙도 체감할 수가 없지요.” -「서문」- 『봄날은 간다』에서 저자는 우리말의 고유성을 살린 실천적 어휘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다. 그중에서 ‘깨단하다’는 “오랫동안 생각해내지 못하던 일 따위를 어떠한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거나 분명히 알다”라는 뜻으로서, 흩뿌려진 세속의 조각들을 매개로 삼아 저자가 스스로 산책하며 찾아낸 의미를 드러내는 동사로 활용된다. 김영민에게 산책이란 일찍이 『동무론』에서 강조했듯이 “자본제의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삶”이다. 이는 우리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매우 끈질긴 ‘구조’인 ‘어긋남’을 간파하는 실천과 연결된다. 여기서 발생/발견하는 상처와 어리석음을 다루는 실천의 노동은 곧 ‘어긋냄’으로 정의된다(『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참조). 어긋남과 어긋냄 속에서 불화란, 단지 극영화의 비극적 완성도를 위한 서사 장치의 수준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세속을 재정의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 말, 글, 동식물, 사물의 오래된 의미를 다시 해석하는 인문학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망한 식당’에서 맛없음/맛있음이라는 식상한 연유를 떨어내고 자신이 애정을 가진 대상의 사라짐을 소상히 사유하며(망해야 산다, 114~115쪽), ‘라면’을 통해 음식의 매체적 효과를 살펴 밥상머리와 사회적 평등의 연관성을 추적하기도 한다(김치와 라면 혹은 ‘사회적 평등자’, 136~138쪽). 아울러 만학晩學에서 사회의 훈훈함을 짚어내기보다, 그것이 나이의 진정한 뜻을 숨긴 채 ‘아름다운’과 같은 피상적인 낱말로 채워진 이미지로 소비됨을 안타까워하고(만학, 145쪽), 저자를 향한 ‘독자의 호의와 선물’을 책과 글에 대한 관심의 긍정적인 가늠자로 편하게 해석하기보다 인정욕구와의 거리두기, 학적 지식에 대한 적대감, 선물로서의 새 책과 그것을 받고자 하는 속내 등 다채로운 관점으로 분석한다(제자와 독자, 216~219쪽). 현대사회가 무심코 삼켜버린 개념을 톺아보다 “사랑이, 추억이, 쿨함이, 혹은 심지어 아이러니가 상업화될 수 있는 것처럼, 행운은 즉 (…) 자본주의라는 보편적 체계의 틈이라고 오인된 행운은 실은 자본주의의 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틈을 메우는 (틈이 없는) 틈인 것이다.” -「행복, 행운이 아닌」- 『봄날은 간다』는 그 제목이 주는 분위기와 달리 유유자적과 안빈낙도를 견지하는 낭만적인 풍경론이 아니다. 아울러 ‘철학은 펜이 아닌 운동화가 필요한 시대’라는 최근 대세가 되어버린 구호에 맞춰 신변잡기의 리듬을 따르는 이론과 현실의 가벼운 결합을 추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간 한국 사회의 독창적인 인문학자로서, 대중의 속도감 있는 지식의 소비 욕구를 순순히 응하지 않았던 특유의 고집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관점, 형식을 토대로 현대사회가 잠식해버린 개념을 정제된 언어로 톺아본다. 그중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먼저 「행복, 행운이 아닌」에서 저자는 행복과 행운이 혼동된 요즘 시대를 주목하며, 행운이 미디어 친화적이라는 점을 강변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행운은 비록 형식상 요행수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심청이나 콩쥐의 이야기 혹은 영웅 서사에서처럼 천리와 인심 사이의 감응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행운이 점점 신화적 에피소드의 부적으로 기능하던 위상을 잃어버리면서, 신화의 아우라를 벗은 행운은 지질한 서민들의 백일몽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현란한 볼거리 속에 각색ㆍ극화된 행운이 행복의 길들을 점점 삭제하고 있으며, (푸코의 견해를 언급하며) “행복론의 마지막 브랜드는 ‘살 수 있는’/ ‘통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되었다”고 일갈한다. 이러한 저자의 시선은 행복의 왜곡된 대중적 이미지를 소환하면서, 행복 자체가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나 ‘일확천금’을 둘러싼 여론이 자아내는 소위 “로또식 상상력” 혹은 일정한 구매력에 구금되어버린 채 탈정치화의 사사로운 이야기로 숨어버렸다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이외에도 저자는 「언제/어떻게 의심하면 배울 수 있는가?」에서 ‘의심의 인문학적 생산성’이란 주제를 통해 ‘의심’에 담겨 있는 고유한 인문학적 급진성이 소멸된 오늘날의 세태를 꼬집는다. 특히 저자에게 오늘날 의심이란 박학博學과 독지篤志에 터하지 못한 채, 피상적 호기심과 소비자로서의 개인이 갖는 변덕에 되먹혀버린 안타까운 개념이다. ‘호의’ 또한 『봄날은 간다』에서 자주 다뤄지는 개념이다. 이 책에서 40번 넘게 등장하는 ‘호의’란 일종의 기만으로서, 당대 체계의 어떤 사회적 기능성에 의해 오염된 개념으로 해석된다. 그것이 잘 드러난 에피소드는 「다정한 사람, 서늘한 학인」인데, 저자는 여기서 호의 자체를 없애라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나친 사적 호감ㆍ호의를 가진 이가 정작 공적 의욕ㆍ태도에 무관심한 경우를 지적하면서, 이는 소위 질투로 들뜬 애인들(공주들과 왕자들), 변덕스런 소비자들, 그리고 허영에 젖은 구경꾼들의 특성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저자는 호의란 선물에 반드시 투영되는 감정도 아니라고 해석한다. 「불가능한 선물」에서 “모든 선물의 사건이 ‘선물’만큼 즐겁지 않은 이유는 생각보다 더 심오해 보인다. 내가 받은 그 선물이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라는 문장은 주목할 만하다. 선물의 물질성은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선명하게 선물을 준 사람의 호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선물의 비극’이란 표현을 통해 호의라는 것이 타인에게 전달/지속된다는 확신을 경계한다. ‘선물의 비극’은 그것이 결코 전달되지 않으면서도 쉼 없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포함하는데, 저자의 시선 속에서 선물이란 인간이 발명한 가장 깜찍하고 흔한 환상이란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봄날은 간다』는 손쉽게 마음을 말하고 치유를 논하는 인문학이 아니다 저자가 거주했던 전주와 밀양의 정겨운 풍경 속에서도 그 정감에 쉽게 빠져들지 않은 채 표현되는 저자 스스로의 균형감 있는 시선은 단지 냉철하다, 이성적이다라는 표현으로 한정지을 수 없는 그 실천 속 깊은 의도가 들어 있다. 『봄날은 간다』는 “불화를 창의화하는 일, 오인誤認을 생산하는 일, 무능을 급진화하는 일에 미래 인문학 활동의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분명”(305쪽)하다는, 저자의 오랜 견해 속에서 시도된 세속의 체계를 가로지르는 뜻 있는 산책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