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y Oh3.5삼각관계에서 전쟁 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의 독일이 보인다. A love triangle and a post-war retrospect. (여기부터 해석 및 스포일러) 불명예 제대(제2파 세계 대전 패전) 후 돈까지 다 빼앗긴 토마스는 오이를 캐며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이후 알리(소련)의 도움을 통해 살아가지만 토마스(동독)가 로라(서독)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봅니다. 알리(해외 개입)가 더 설 자리가 없어지니 그는 죽음(장벽 붕괴)을 맞이합니다. 영화는 이 시점에서 애매한 감정을 남기고 끝나지만, 역사를 생각했을 때 토마스와 로라는 이후 같이 정말 잘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 감독이 트랜짓과 운디네에서 역사를 다룬 방법을 생각했을 때 이 해석이 터무니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서독과 동독의 경계선이었던 엘베강으로부터 살짝 동쪽에 있는 독일 지명 Jerichow가 아닌 <열망>으로 제목을 번역하면서 이런 해석이 더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게 된 게 아닌가 싶어 살짝 아쉽기도 합니다. 아무튼 셋의 삼각관계, 사랑과 돈 이야기를 하면서 독일에서의 해외 이민자에 대한 시선을 포함했을 뿐 아니라, 역사가 녹아든 듯한 서사까지 만들어낸 펫졸드 감독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Like69Comment2
인프피4.0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느슨하게 각색한 이 영화는 무척이나 정치적으로 읽힌다. 인물들은 명백히 시대의 한 조각의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자본가-훈육자인 알리는 로라와 토마스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가난에서 구제해준다. 로라에게는 결혼이라는 방식을, 토마스에게는 일자리라는 방식을 통해 빚을 청산해주고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한다. 동시에 그는 로라를 수감자, 토마스를 노동자로 바꿔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그려진 인물이 바로 자본가-훈육자인 알리이다. 그는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그랬던 바로 그 방식으로 진화한다. 몇 가지 장면이 있다. 토마스가 알리를 불법행위로부터 구해준 바로 그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인서트하는 돈다발은 무엇을 몽타주 하는가. 토마스의 선행은 그 인서트로 인해 종속변수가 되어버린다. 또 다른 장면에서 이제 막 일을 시작한 토마스를 떠보는 알레의 질문을 상기시켜보자. 그 테스트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약 27명의 면접자들이 실패한 문제의 정답을 한번에 맞춘 토마스는 자발적으로 알리를 보호한다. 두 씬 사이의 행간은 앞서 설명한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시퀀스들은 차이를 수반한 반복이다. 동시에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훌륭한 감시자다. 근대의 상징으로서 그는 자신이 감시한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스스로의 권위를 내세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드러난 감시는 괴멸하기 마련이다. 그의 감시가 더 강하게 발동되는 것은 여행을 떠난다고 말한 후, 카메라가 다시 택시를 타는 알리를 보여주는 그 장면 이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명백히 근대를 벗어나 탈근대로 이행해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주기적으로 전화를 해야하고, 보이는 즉시 미행하고, 언어와 행위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들이 비효율적임을 그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체는 사라져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의 시선이 사라진 바로 그 장면 - 공항에 도착하고 토마스 몰래 택시를 잡는 장면 - 에서부터 카메라는 알리의 시선을 내면화한다. 알리가 사라진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과 그것을 보는 관객들 사이의 서스펜스는 바로 그 시선으로 인해 발생한다. 마크 피셔의 말처럼 '권력이 무한히 지연되는 양식을 취함에 따라 외적인 관리는 내적인 관리로 대체된다.' 알리가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갔는지는 중요치 않는 이유는 관객들이 그 시선을 '느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이 영화의 경계가 현실과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알리는 왜 스스로 몸을 던졌는가? 알리의 나타남과 사라짐이 로라/토마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생각해보자. 알리가 근대적 감시자일 때, 로라는 수감자였으며, 토마스는 노동자였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순간에 그들은 혁명가/반역자가 된다. 그들이 계획하고 공모한 이후로 알리가 나타난다.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르려던 그들 앞에서 알리의 고해는 로라를 연인으로, 토마스를 심판자가 아닌 가해자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들춰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간에 알리는 순교자가 된다. 로라와 토마스는 검은 연기가 치솟는 절벽 너머로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이 알리의 죽음에 책임을 느낄 때, 다시 말해 감정을 통제당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족쇄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 뿐일 것이다.Like31Comment1
JE3.5"돈이 있어야 사랑을 한다"는 말. 경제적으로 곤궁한 두 남녀가 만난다. 이들에겐 노동자와 전과자라는 옷도 입혀진다. 그 사이에 있는 자본가이자 (흡사 간수와도 같이 느껴지는) 감시자 알리. 심지어 영화는 그런 알리에게 시한부와 이민자라는 설정까지 준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처럼 통속적이고 고전적인 이야기에다 다양한 맥락이 결부된다. 독일을 둘러싼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 다방면으로 설명될 관계들을 차마 독해할 자신은 없으나, 기본적으로 (격정의) 멜로에 덧씌워진 묘한 무력감이나 서스펜스가 흥미롭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알리가 거짓으로 터키로 떠난 뒤의 시퀀스. 알리가 떠나자 토마스와 로라의 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로라가 자신의 처지를 고백함으로써 설정을 강화하고 국면을 새로이 하기도 하나, 그보다 앞선 장면에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택시를 탄 채 어디론가 떠내는 알리 탓에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굉장한 긴장감을 띤다. 더구나 바로 앞 시퀀스는 알리가 로라의 외도를 의심하며 거래처 사장을 조진 뒤 아니던가. 히치콕적인 서스펜스 속, 마치 감시 권력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감시가 잔존한 듯,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케 하며 관객의 심리를 장악하는 밀도가 감탄스럽고도 섬찟하다. 의도한 텍스트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어쨌든 간결하고 뻔해 보이는 상황이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해석적으로든 감각적으로든 심상치 않은 잔향을 (지극히 유려하게) 남기고야 마는 점이 감독의 가장 큰 매력 같다.Like18Comment0
드플레4.0오인과 혼동.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 가운데 하나다. 치정극의 외피를 두른 남녀의 대립과 갈등은 시종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이때 영화 속 세 사람의 갈등이 곧 통독 이후 현대 독일 사회에 내재된 불안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속성들이 인물들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적나라함이 감독의 작가적 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의 관객에게 인상 깊게 다가갈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페촐트 영화가 좋다. 감독이 매달리는 유령적 존재들 때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미학적인 특성 때문에 그렇다. 프레임 내부를 떠도는 피사체들, 인물을 배치하는 구도들, 내(외)재적 사운드의 활용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옐라>와 <열망>은 돌출점이 감지된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페촐트의 영화는 <바바라> 이후 매끈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열망>은 <바바라>의 전작이라는 점에서 그 유려함과 거친 질감이 공존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 터키계 이민자가 맞이하는 최후의 방식,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두 토착 독일인들. 이 영화가 제시하는 결말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페촐트의 유령들은 늘 모종의 알레고리 하에 묶인 은유적 존재들인데, 이 영화의 세 사람은 <트랜짓> 속의 유령들이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난 소외된 존재라는 명확한 속성을 부여받은 소수자 포지션에 처한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는 곧 인물들을 정치사회적 메신저로 활용하는 감독의 의도와 호응하게 된다. 어쩌면 모호함보다는 선명함이 부각되는 영화다. 결국 녹아들지 못한 채 소멸하는 자를 향한 두 독일인의 응시, 우두커니 멈춰 있는 남자와 홀린 듯 달려가는 여자. 페촐트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면서 영화를 끝내지만, 두 인물의 행위가 갈라지는 지점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열망>은 오히려 솔직한 사회 보고서이자 반성문이 된다.Like15Comment0
Jay Oh
3.5
삼각관계에서 전쟁 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의 독일이 보인다. A love triangle and a post-war retrospect. (여기부터 해석 및 스포일러) 불명예 제대(제2파 세계 대전 패전) 후 돈까지 다 빼앗긴 토마스는 오이를 캐며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이후 알리(소련)의 도움을 통해 살아가지만 토마스(동독)가 로라(서독)에게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봅니다. 알리(해외 개입)가 더 설 자리가 없어지니 그는 죽음(장벽 붕괴)을 맞이합니다. 영화는 이 시점에서 애매한 감정을 남기고 끝나지만, 역사를 생각했을 때 토마스와 로라는 이후 같이 정말 잘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후 감독이 트랜짓과 운디네에서 역사를 다룬 방법을 생각했을 때 이 해석이 터무니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서독과 동독의 경계선이었던 엘베강으로부터 살짝 동쪽에 있는 독일 지명 Jerichow가 아닌 <열망>으로 제목을 번역하면서 이런 해석이 더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게 된 게 아닌가 싶어 살짝 아쉽기도 합니다. 아무튼 셋의 삼각관계, 사랑과 돈 이야기를 하면서 독일에서의 해외 이민자에 대한 시선을 포함했을 뿐 아니라, 역사가 녹아든 듯한 서사까지 만들어낸 펫졸드 감독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Dh
3.5
외부인-우정-사랑으로 엮인 지독한 트라이앵글 #절벽 끝 #CGV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전
조조무비
3.5
#🚐 누구나 죄를 짓기에, 모두가 아프다.
인프피
4.0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느슨하게 각색한 이 영화는 무척이나 정치적으로 읽힌다. 인물들은 명백히 시대의 한 조각의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자본가-훈육자인 알리는 로라와 토마스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가난에서 구제해준다. 로라에게는 결혼이라는 방식을, 토마스에게는 일자리라는 방식을 통해 빚을 청산해주고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한다. 동시에 그는 로라를 수감자, 토마스를 노동자로 바꿔버린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그려진 인물이 바로 자본가-훈육자인 알리이다. 그는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그랬던 바로 그 방식으로 진화한다. 몇 가지 장면이 있다. 토마스가 알리를 불법행위로부터 구해준 바로 그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인서트하는 돈다발은 무엇을 몽타주 하는가. 토마스의 선행은 그 인서트로 인해 종속변수가 되어버린다. 또 다른 장면에서 이제 막 일을 시작한 토마스를 떠보는 알레의 질문을 상기시켜보자. 그 테스트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약 27명의 면접자들이 실패한 문제의 정답을 한번에 맞춘 토마스는 자발적으로 알리를 보호한다. 두 씬 사이의 행간은 앞서 설명한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시퀀스들은 차이를 수반한 반복이다. 동시에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훌륭한 감시자다. 근대의 상징으로서 그는 자신이 감시한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스스로의 권위를 내세운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드러난 감시는 괴멸하기 마련이다. 그의 감시가 더 강하게 발동되는 것은 여행을 떠난다고 말한 후, 카메라가 다시 택시를 타는 알리를 보여주는 그 장면 이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명백히 근대를 벗어나 탈근대로 이행해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주기적으로 전화를 해야하고, 보이는 즉시 미행하고, 언어와 행위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들이 비효율적임을 그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체는 사라져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의 시선이 사라진 바로 그 장면 - 공항에 도착하고 토마스 몰래 택시를 잡는 장면 - 에서부터 카메라는 알리의 시선을 내면화한다. 알리가 사라진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과 그것을 보는 관객들 사이의 서스펜스는 바로 그 시선으로 인해 발생한다. 마크 피셔의 말처럼 '권력이 무한히 지연되는 양식을 취함에 따라 외적인 관리는 내적인 관리로 대체된다.' 알리가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갔는지는 중요치 않는 이유는 관객들이 그 시선을 '느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이 영화의 경계가 현실과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알리는 왜 스스로 몸을 던졌는가? 알리의 나타남과 사라짐이 로라/토마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생각해보자. 알리가 근대적 감시자일 때, 로라는 수감자였으며, 토마스는 노동자였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순간에 그들은 혁명가/반역자가 된다. 그들이 계획하고 공모한 이후로 알리가 나타난다. 이제 막 살인을 저지르려던 그들 앞에서 알리의 고해는 로라를 연인으로, 토마스를 심판자가 아닌 가해자로 변모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들춰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간에 알리는 순교자가 된다. 로라와 토마스는 검은 연기가 치솟는 절벽 너머로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이 알리의 죽음에 책임을 느낄 때, 다시 말해 감정을 통제당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족쇄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 뿐일 것이다.
RAW
3.5
가질 수 없는 것을 열망할수록 깊어지는 추락 3.6/5점
JE
3.5
"돈이 있어야 사랑을 한다"는 말. 경제적으로 곤궁한 두 남녀가 만난다. 이들에겐 노동자와 전과자라는 옷도 입혀진다. 그 사이에 있는 자본가이자 (흡사 간수와도 같이 느껴지는) 감시자 알리. 심지어 영화는 그런 알리에게 시한부와 이민자라는 설정까지 준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처럼 통속적이고 고전적인 이야기에다 다양한 맥락이 결부된다. 독일을 둘러싼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 다방면으로 설명될 관계들을 차마 독해할 자신은 없으나, 기본적으로 (격정의) 멜로에 덧씌워진 묘한 무력감이나 서스펜스가 흥미롭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알리가 거짓으로 터키로 떠난 뒤의 시퀀스. 알리가 떠나자 토마스와 로라의 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로라가 자신의 처지를 고백함으로써 설정을 강화하고 국면을 새로이 하기도 하나, 그보다 앞선 장면에서 비행기를 타지 않고 택시를 탄 채 어디론가 떠내는 알리 탓에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굉장한 긴장감을 띤다. 더구나 바로 앞 시퀀스는 알리가 로라의 외도를 의심하며 거래처 사장을 조진 뒤 아니던가. 히치콕적인 서스펜스 속, 마치 감시 권력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감시가 잔존한 듯,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케 하며 관객의 심리를 장악하는 밀도가 감탄스럽고도 섬찟하다. 의도한 텍스트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어쨌든 간결하고 뻔해 보이는 상황이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해석적으로든 감각적으로든 심상치 않은 잔향을 (지극히 유려하게) 남기고야 마는 점이 감독의 가장 큰 매력 같다.
leo
3.0
돈에 의해 속박된 위태로운 관계
드플레
4.0
오인과 혼동.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 가운데 하나다. 치정극의 외피를 두른 남녀의 대립과 갈등은 시종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이때 영화 속 세 사람의 갈등이 곧 통독 이후 현대 독일 사회에 내재된 불안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속성들이 인물들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적나라함이 감독의 작가적 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의 관객에게 인상 깊게 다가갈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페촐트 영화가 좋다. 감독이 매달리는 유령적 존재들 때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미학적인 특성 때문에 그렇다. 프레임 내부를 떠도는 피사체들, 인물을 배치하는 구도들, 내(외)재적 사운드의 활용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옐라>와 <열망>은 돌출점이 감지된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페촐트의 영화는 <바바라> 이후 매끈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열망>은 <바바라>의 전작이라는 점에서 그 유려함과 거친 질감이 공존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 터키계 이민자가 맞이하는 최후의 방식,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두 토착 독일인들. 이 영화가 제시하는 결말은 무엇을 표상하는가. 페촐트의 유령들은 늘 모종의 알레고리 하에 묶인 은유적 존재들인데, 이 영화의 세 사람은 <트랜짓> 속의 유령들이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난 소외된 존재라는 명확한 속성을 부여받은 소수자 포지션에 처한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는 곧 인물들을 정치사회적 메신저로 활용하는 감독의 의도와 호응하게 된다. 어쩌면 모호함보다는 선명함이 부각되는 영화다. 결국 녹아들지 못한 채 소멸하는 자를 향한 두 독일인의 응시, 우두커니 멈춰 있는 남자와 홀린 듯 달려가는 여자. 페촐트는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만 보면서 영화를 끝내지만, 두 인물의 행위가 갈라지는 지점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열망>은 오히려 솔직한 사회 보고서이자 반성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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