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3.0김곡 감독의 <고갈>은 폐허가 된 공장부지 근처 갯벌에 있는 여자를 한 남자가 집으로 데려가 돌봐준 뒤 성매매 일에 가담시키다 우연히 여자 배달부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매캐한 연기가 지독히 자욱하게 깔려 있는 작품입니다. - 김곡 그리고 김선 감독까지 국내 독립영화에서 자극적인 소재와 거친 표현 방식으로 사회 문제를 직격으로 마주하는 작품을 만들어 온 몇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작품이 <고갈>입니다. 전반적인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충격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일련의 영화 중에서 이름을 남길 만합니다. 다만 그런 불쾌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 원래 좀 뭉툭하고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로 이야기의 일부가 비슷한 작품인 <벼랑 위의 남매>같은 영화도 그런데, <고갈>은 필름을 손수 하나씩 특수처리한 뒤 촬영해 만든 노이즈가 잔뜩 낀 거친 화면으로 내내 그려지고 있어 그 뭉툭 함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영화로 보이는데, 다루는 이야기와 그를 전달하는 방식과 거친 질감을 써 화면을 직접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연출 기법 등으로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지만 두번 볼 순 없는 정신적으로 지치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Like5Comment0
허문영 평론가 봇-정치영화의 새로운 표현- 김곡, 김선(이하 그들의 영화사인 '곡사'로 약칭)의 영화는 혼란스럽고 정신 사납다. 그 혼란스러움과 정신 사나움이 곡사의 매력이지만 말로 그것을 정리하려니 난감하다. 좀 에둘러보자. 그들의 영화 마지막에 늘 등장하는 곡사의 로고는 호러영화 제목의 형상이다. 그들이 구성한 밴드의 이름은 '불길한 저음'이다. 그들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영화가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기을 바란다고 말했다. 유령, 불길한 저음, 바이러스. 그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혹은 자신들의 영화 만들기 행위가 그런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명료하게 보이거나 들리지 않지만 우리 주변을 맴돌거나 은밀히 침투해 우리의 정신을 혹은 우리가 속한 어떤 시스템을 불안과 교란에 빠뜨리는 에이전트로서의 영화. 이런 표현은 20세기 초반의 초현실주의자들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거의 한 세기 전에 그들은 재현의 사실성과 서사의 선형성이라는 규칙이 아니라 꿈과 광기와 자유연상의 시정(詩情)을 기치로 예술사에 일대 소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구호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자아중심성이 아니라 타자를, 시공간적 연속성이 아니라 균열을, 상징과 재현이 아니라 감각과 표현을, 질서가 아니라 혼돈을. 이 구호는 20세기 유럽 아방가르드 영화 일반의 것이기도 하며 거의 곡사의 바식이기도 할 것이다. 양자는 물론 정치적 급진성이라는 지향도 공유한다. 하지만 그 정치적 급진성이 정치적 진술의 급진성으로 오해되어서는 곤란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형식의 급진성 혹은 감각의 급진성이며, 그것이야말로 고다르의 말대로 정치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드는 주요한 방식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급진적 정치 주장이 담긴 관습적 형식의 좌파영화(예컨대 켄 로치의 영화)보다, 정치적으로 모호한 아방가르드 영화들이 더 급진적이다. 물론 곡사는 후자에 가깝다. 나는 곡사의 영화를 지지한다. 그것도 무조건 지지한다. 그 지지는 그들의 영화에 담긴 진술의 깊이는 물론 그들의 재능과도 무관하다. 그들의 아방가르드적 방식과 태도 때문이다. 한 사람의 관객/평자는 결국 어느 한쪽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완성인가, 놀라움인가. 나는 후자에 내기를 건다. 곡사가 혼돈과 불확실성을 택하는 순간 지지는 불가피하다. 내가 본 아홉 편의 곡사 영화 중에서 내가 지지하지 않는 단 한 편은 인권영화프로젝트에 참여한 <Bomb Bomb Bomb>(2006)이다. 그것은 대단히 세련됐지만 거기엔 놀라움이 없기 때문이다. 곡사는 연관된 두 가지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지식 계급의 지지를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류는 작품에 담긴 진술과 감흥, 놀라움까지 자신들의 뇌에 새겨진 미학적 지도를 재작성하는 데 사용한다. 곡사가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 자신의 영화가 기능하기를 바란다고 했을 때, 그들은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를 공언한 것이다. 20세기 유럽 아방가르드의 실패는, 그들이 공언한 예술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통합적 실천이 물질화할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급진적 정파와의 연대는 늘 잠정적인 것으로 끝나거나 내분을 초래했다. 물론 그들은 20세기 미학의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이라는 지위를 얻었지만, 이 지위야말로 그들의 정치적 실패를 반영한다. 같은 미학적 정치적 신념을 공유한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공감과 찬미를 넘어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장으로 확장하는 것. 물론 이것은 평자의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실패와 연관된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그들이 채택한 형식과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택한 시공간적 연속성의 파괴, 비선형적 몽타주, 실사와 그래픽의 이접, 패러디와 혼성모방 등은 20세기 말의 뮤직비디오, 광고, TV쇼 등 상업적 대중문화에 수용되어 일상적이고 유희적인 기법으로 전용되었다. 아방가르드와 주류 문화를 그 형식과 스타일에서 구분하는 것이 난망해진 오늘에, 미학적 완성에 이르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소란을 일으키려는 정치적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어떤 형식적 수단이 남아있을까. 이 사태가 보기보다 심각한 이유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것은 이미 발생했고, 새로워 보이는 무언가가 출현해도 거대 미디어는 즉각 흡수한다. 오늘의 미디어가 현대인에게 제공하는 세계는, 보드리야르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모든 차이를 먹어치워 즉시 그것을 동일자의 무한 증식으로 바꿔치기하는 시뮬라시옹이기 때문이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과 쌍둥이빌딩의 재난의 스펙터클을 그리고 쓰나미가 뱉어낸 시신들의 파노라마를 충격과 동시에 쾌락으로 수용한 현대인에게 어떻게 계급의 실재를 감각케 할 것인가. 달리 물어볼 수 있다. 오늘의 아방가르드는 <무한도전>보다 더 정치적일 수 있을까, 혹은 서태지의 뮤직비디오보다 더 급진적일 수 있을까. 내가 본 곡사의 초기작들에선 이런 질문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물론 빛나는 순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예컨대 <자본당선언>(2003)에서 카메라의 시선과 등장인물의 시선의 지위를 교란하는 트릭('형님들'의 도박 장면을 지켜보며 꿈틀거리던 카메라의 시선이 종반에 이르자 그들을 덮치는 다리 잃은 걸인의 시선으로 변한다)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고, 그 시선의 차이도 결국 자본주의적 질서로 편입시키는 농담과 같은 장면(다리 잃은 걸인이 휴대전화로 국제적 비즈니스를 논한다)들은 기발했다. 거기에 거의 인공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극도로 빈곤하고 추레한 미장센은 가난한 프로덕션의 흔적이라기보다는 미디어의 잔여물로 남음으로써 거대 미디어의 흡수력에 저항하려는 일종의 안간힘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게 더 흥미로운 건 최근작들이다. 21세기의 영화는 세상과 싸울 수 있는가, 혹은 20세기의 아방가르드는 거대 미디어의 대적자가 될 수 있는가. 주류 영화계에서는 포기된 이 질문이 그 안에 싱싱하게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 질문에 대한 가능한 대답 가운데 하나는 참여적 퍼포먼스이다. 어떤 형식과 표현도 실험적이라는 이름의 유희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면 그 스스로 사회적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정당정치의 역습>(2006)에서 세 여전사가 전경들이 포진한 공간 사이를 누비고 다닐 때, 혹은 <자가당착>(2008)에서 유괴범 인형이 촛불 시위대가 모인 무대에 올라가 기괴한 동작을 펼쳐 보일 때, 그 순간은 어떤 재현적 체계에도 흡수되지 않는 사회적 사건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자기를 사건화하기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한 경향이므로, 이 방식을 곡사의 고유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퍼포먼스를 담은 재현물의 지위이다. 사건화되는 건 퍼포먼스와 그 수행자이지 그것의 기록물은 아니다. 영화 만들기는 사건화되었지만, 영화는 사건이 되지 못할 때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수행되었는가. 게다가 그 영화 만들기가 수행한 사건은 과연 현실에 작용하는 어떤 소란, 최소한 어떤 소음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고갈>(2008)을 말해야 할 지점에 왔다. 이 작품은 곡사의 필모그래피에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가장 중요한 영화로 보인다. 여기엔 젊은 실험영화 작가의 고민이 집약되어 있고, 고민이 어떤 성취에 이르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고갈>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모두 떠나버린 듯한 황폐한 공장 지대에 한 남자가 있고 한 여자가 있다. 남자는 여관방에서 여자의 몸을 판다. 어느 날 또 다른 여자(아름이)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가려 한다. 여자는 돌아오고, 아름이는 여자의 몸을 사기 위해 여관방에 온다. 곧이어 여자는 죽은 아이를 낳는다. 여자는 자신의 유두를 자르고...... <나쁜 남자>(김기덕)의 후일담처럼 보이기도 하고, <길>(펠리니)의 제3세계 버전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영화는 이렇게 요약된 이야기만으로는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곳이 타자(공장이라는 기계장치 그 자체, 혹은 그것을 운영하고 여자를 사러 오는 몇몇 외국인 노동자)의 땅이며, 그 땅마저 출구가 없는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사실 외에는. <고갈>은 체험되어야 할 영화다. 혼란스럽고 거칠고 불투명한 이 영화의 표면이 전하는 감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어떤 질문에 이른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고갈>은 당겨 말하면 어떤 장소에 관한 영화이며 그 장소는 간주관적 공간으로서의 영화적 장소이다. 그들의 장소를 말해보자. 우리 눈에 보이는 건 거대한 공장들의 괴기스런 형상, 인적 없는 그곳에서 마치 저 홀로 움직이는 듯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굴뚝들, 말라비틀어진 풀들이 미라의 머리카락처럼 듬성듬성 솟아 있는 들판, 바닷물이 빠져나간 뻘인지 기름이 뒤범벅된 진흙탕인지 불분명한 갯벌. 기계 소리도 아니고 바람 소리도 아니며 웅성거림도 아닌 정체불명의 소음들. 우리의 눈과 귀를 괴롭히는 저곳은 어디인가. 저 끔찍하게 황량한 공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곡사가 '지금, 이곳'에서 영화를 찍는, 그럴 수밖에 없는 영화작가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한, 새만금에서 촬영된 저 공간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속한 영토의 일부이며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혹은 우리가 그 작동을 정치적으로 승인한 시스템의 산물이다. 그 공간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곡사가 몇몇 전작들에서 전하려고 애썼던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상과 구조보다 깊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찔러온다. 하지만 <고갈>은, 정의롭지 않고 불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우리의 개선 노력 혹은 정치적 저항을 촉구하는 계몽의 기획이 아니다. 이 공간의 질감은 사실주의적으로 재현되어 있지 않다. 흑백에 가깝게 탈색된 화면, 낡은 필름처럼 거친 입자와 스크래치들, 그리고 노이즈로 가득한 무지 쇼트들. 관객의 투명한 관찰을 방해하는 이 셀룰로이드적 잉여들 혹은 필름의 물질적 상처들을 제외하고 <고갈>의 체험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불투명화의 잉여들을 20세기의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가 공히 신봉했던 브레히트적 거리 두기의 방식으로 보는 건 이 영화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옳을 것이다. 이 잉여들은 우리의 망막과 피사체 사이에 외삽된 장애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된 것의 일부로 그 내부에 새겨져 있다. 그들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상징이 아니며, 우리에게 다르게 감각되기를 촉구하는 흔적이다. 물론 이것은 <데쓰 프루프>나 <플래닛 테러>처럼 노스텔지어에 호소하는 낡음의 모조와 아무 관계가 없다. <고갈>의 스크래치와 필름그레인과 노이즈(편의상 이들을 통칭해 노이즈로 부르기로 하자)는 어떻게 감각되는가. 낡은 비디오테이프, 오래된 뉴스 화면, 혹은 잦은 고장의 고물 TV 등등. 이들을 오랫동안 접해온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갈>에서 표면의 물질적 잉여들은 우리에게 과거완료형의 시간 감각을 느끼게 한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더 중요하게는 닫혔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곡사는 현재를 찍어놓고 왜 우리에게 그것을 과거완룟셩의 시간 감각으로 제시하는가. 고쳐 묻자면, 그렇게 제시될 때, 우리는 어디서 이 영화를 보게 되는가. 몇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먼저, 이것은 현재를 미래의 시점에서 보는 것과 같은 착시 효과를 유발한다. 물론 이를 말하기 위해선 <고갈>의 서사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공간은 폐허가 되어 있고 아이는 죽었으며, 여자는 유두를 절단한다. 그리고 아름이는 자궁을 난자한다. 인간사의 연속성은 실패한다. 현재는 이미 폭파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미래에서 이 영화를 안전하게 볼 수 있는가. 농담 같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유령이거나 외계인이다. <고갈>의 노이즈는 그것을 보는 우리의 현존을 은밀하게 위협한다. 당신은 이미 죽었거나 부재한다. 당신의 현실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노이즈는, 우리의 합리적 이성과의 협상을 거절하는, 완강한 소멸의 흔적이다. 반대의 대답도 가능하다. <고갈>의 서사를 우리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일로 지각한다. 현재의 사건을 과거완료형으로 만드는 것은 자기기만을 필요로 한다. 이 기만은 이미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이루어져왔다. 예컨대 용산참사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이지만 그것을 과거완료의 사건으로 만드는 선전 혹은 망각의 기획은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다. 계급은 실재가 아니라 정말 산업화 시대에 완료된 기억으로만 남은 것인가. 그렇게 믿으려 할 때 우리는 현실의 사건에서 현재성을 삭제해야 한다. <고갈>의 노이즈는 그 자기기만이 자명해야 할 현재에 가한 폭력의 흔적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폭력의 흔적을 흡수해 기어이 자신을 드러내는 현실의 이멀전(emulsion)이다. 어느 한쪽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현재의 자리에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습적 방식으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이즈들은 이미 낡아버린 미래, 혹은 도착하지 않은 과거라는 교란된 시간 감각을 물질화함으로써, 피사체에게도 우리에게도 전적으로 속하지 않은 채, 완강한 소멸과 강인한 잔존 사이를 진동하는 또 하나의 에이전트이다. 그 노이즈들과 함께 우리는 <고갈>의 이야기를 만난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나 사건이라기보다 어떤 몸짓이다. 그 몸짓은 코맥 맥카시의 소설 <로드>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동물적 생존에 모든 것을 바치는 몸짓이다. 대재난이 일어났고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 살아남은 자들의 생명 연장을 위한 필사적인 몸짓. <고갈>이 더 심각할 수도 있다. 남자와 여자에겐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언어 능력이 없다. 남자는 "엄마가 나를 낳았댄다, 글쎄"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자명한 진실이 잊혀진 풍문이 될 때, 인간의 역사도 잊혀진 풍문이 된다. 이상한 상황들이 있다. 첫째, 여자가 외국인 노동자의 몸을 받고 있을 때 남자는 수간 비디오를 보고 있다. 여자와 개의 성교. 이것이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록이며 기억이다. 왜 인간 남녀의 성교 기록이 아닐까. 둘째, 아름이는 여자를 데리고 가려다 여자가 다시 남자 곁으로 돌아오자, 여자를 찾아와 몸을 산다. 그리고 여자 앞에서 접신 굿과 같은 몸짓을 하고 자신의 자궁을 찌른 후 여자의 목을 조르다 남자에게 죽는다. 그녀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려 했을까. 셋째, 몇 번의 탈출을 하려다 실패한 여자는 죽은 아이를 낳고 자신의 유두를 잘라 흘려보낸다. 그리고 태아의 시신을 들고 들판에 나서 무언가를 외친다. 그녀는 무엇을 외치려 하는 걸까. <고갈>은 다의적이고 모호한 몸짓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것들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여기엔 인간의 총체적 실패라는 관점이 작용하는 것 같다. 문명은 파산했고, 자연은 사라졌으며, 인간의 종족적 연속성도 잊혀진 풍문이 되었다. 철저한 실패의 폐허에서 벌어지는 반인간적이며 자해적인 혹은 주술적인 몸짓들. 여기가 정말 끝일까? <고갈>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짐작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인간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만을 말해야 한다. 그러니 마지막에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그 더럽혀진 자궁이 아이를 다시 품을 수 있을까.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이 오염되고 황폐한 땅에서 엄마의 유두 없이도 살아낼 수 있을까. 죽은 태아, 철조망 너머에 반복적으로 펼쳐진 폐허, 버려진 굴뚝 밑에서 보이는 손바닥만한 하늘, 그리고 손상되고 오염된 생식 기관들, 결국 고갈된 미래.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불안과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재가 고갈되어간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미 우리 몸 어딘가가 고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알레고리가 이완된 틈새에 들어선 육체. 강요된 거리와 오염과 자학과 피학으로 고통 받는 육체. 이중으로 부과된 죽음 앞에서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그 육체가 우리의 지각과 두피를 찔러온다. 이것이 곡사가 이른 정치영화의 새로운 표현 방식이다. (<독립영화> 2009년 가을호)Like5Comment0
조명진5.0이런 영화가 존재 했다. 이번년도에 본 어느 영화보다 기억 된다고 확신한다. 아. 왜 바다는 씻겨낼까? 왜 육지는 더러워지고? 씻겨내는 바다와 더러워지는 육지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당길 뿐 공존하지 못 한다. 아. 영화는 내게 파도 같았다.Like4Comment0
Indigo Jay4.0<고갈> (2008)을 '곡사의 페르소나' 장리우 배우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박상훈 감독의 <벌거숭이> (2012), 2011년 KU 시네마테크에서 곡사의 단편 <자살변주> (2007), <임계밀도> (2007), <빛과 계급> (2007) 을 상영할 때 '소니마주'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밴드에서 아스트로 노이즈와 같이 인성으로 했던 연주가 인상깊었다. 뒤늦게 개봉한 <방독피> (2010)에서는 늑대 소녀 역의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옴니버스 <원 나 잇 스탠드> (2010) 에서도 선글래스녀로 나왔었다.Like4Comment0
샌드
3.0
김곡 감독의 <고갈>은 폐허가 된 공장부지 근처 갯벌에 있는 여자를 한 남자가 집으로 데려가 돌봐준 뒤 성매매 일에 가담시키다 우연히 여자 배달부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매캐한 연기가 지독히 자욱하게 깔려 있는 작품입니다. - 김곡 그리고 김선 감독까지 국내 독립영화에서 자극적인 소재와 거친 표현 방식으로 사회 문제를 직격으로 마주하는 작품을 만들어 온 몇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작품이 <고갈>입니다. 전반적인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충격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일련의 영화 중에서 이름을 남길 만합니다. 다만 그런 불쾌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 원래 좀 뭉툭하고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로 이야기의 일부가 비슷한 작품인 <벼랑 위의 남매>같은 영화도 그런데, <고갈>은 필름을 손수 하나씩 특수처리한 뒤 촬영해 만든 노이즈가 잔뜩 낀 거친 화면으로 내내 그려지고 있어 그 뭉툭 함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영화로 보이는데, 다루는 이야기와 그를 전달하는 방식과 거친 질감을 써 화면을 직접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연출 기법 등으로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지만 두번 볼 순 없는 정신적으로 지치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허문영 평론가 봇
-정치영화의 새로운 표현- 김곡, 김선(이하 그들의 영화사인 '곡사'로 약칭)의 영화는 혼란스럽고 정신 사납다. 그 혼란스러움과 정신 사나움이 곡사의 매력이지만 말로 그것을 정리하려니 난감하다. 좀 에둘러보자. 그들의 영화 마지막에 늘 등장하는 곡사의 로고는 호러영화 제목의 형상이다. 그들이 구성한 밴드의 이름은 '불길한 저음'이다. 그들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영화가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기을 바란다고 말했다. 유령, 불길한 저음, 바이러스. 그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혹은 자신들의 영화 만들기 행위가 그런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명료하게 보이거나 들리지 않지만 우리 주변을 맴돌거나 은밀히 침투해 우리의 정신을 혹은 우리가 속한 어떤 시스템을 불안과 교란에 빠뜨리는 에이전트로서의 영화. 이런 표현은 20세기 초반의 초현실주의자들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거의 한 세기 전에 그들은 재현의 사실성과 서사의 선형성이라는 규칙이 아니라 꿈과 광기와 자유연상의 시정(詩情)을 기치로 예술사에 일대 소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구호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자아중심성이 아니라 타자를, 시공간적 연속성이 아니라 균열을, 상징과 재현이 아니라 감각과 표현을, 질서가 아니라 혼돈을. 이 구호는 20세기 유럽 아방가르드 영화 일반의 것이기도 하며 거의 곡사의 바식이기도 할 것이다. 양자는 물론 정치적 급진성이라는 지향도 공유한다. 하지만 그 정치적 급진성이 정치적 진술의 급진성으로 오해되어서는 곤란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형식의 급진성 혹은 감각의 급진성이며, 그것이야말로 고다르의 말대로 정치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드는 주요한 방식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급진적 정치 주장이 담긴 관습적 형식의 좌파영화(예컨대 켄 로치의 영화)보다, 정치적으로 모호한 아방가르드 영화들이 더 급진적이다. 물론 곡사는 후자에 가깝다. 나는 곡사의 영화를 지지한다. 그것도 무조건 지지한다. 그 지지는 그들의 영화에 담긴 진술의 깊이는 물론 그들의 재능과도 무관하다. 그들의 아방가르드적 방식과 태도 때문이다. 한 사람의 관객/평자는 결국 어느 한쪽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완성인가, 놀라움인가. 나는 후자에 내기를 건다. 곡사가 혼돈과 불확실성을 택하는 순간 지지는 불가피하다. 내가 본 아홉 편의 곡사 영화 중에서 내가 지지하지 않는 단 한 편은 인권영화프로젝트에 참여한 <Bomb Bomb Bomb>(2006)이다. 그것은 대단히 세련됐지만 거기엔 놀라움이 없기 때문이다. 곡사는 연관된 두 가지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지식 계급의 지지를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류는 작품에 담긴 진술과 감흥, 놀라움까지 자신들의 뇌에 새겨진 미학적 지도를 재작성하는 데 사용한다. 곡사가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 자신의 영화가 기능하기를 바란다고 했을 때, 그들은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를 공언한 것이다. 20세기 유럽 아방가르드의 실패는, 그들이 공언한 예술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통합적 실천이 물질화할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급진적 정파와의 연대는 늘 잠정적인 것으로 끝나거나 내분을 초래했다. 물론 그들은 20세기 미학의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이라는 지위를 얻었지만, 이 지위야말로 그들의 정치적 실패를 반영한다. 같은 미학적 정치적 신념을 공유한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공감과 찬미를 넘어 그것을 정치적 실천의 장으로 확장하는 것. 물론 이것은 평자의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실패와 연관된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그들이 채택한 형식과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 택한 시공간적 연속성의 파괴, 비선형적 몽타주, 실사와 그래픽의 이접, 패러디와 혼성모방 등은 20세기 말의 뮤직비디오, 광고, TV쇼 등 상업적 대중문화에 수용되어 일상적이고 유희적인 기법으로 전용되었다. 아방가르드와 주류 문화를 그 형식과 스타일에서 구분하는 것이 난망해진 오늘에, 미학적 완성에 이르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소란을 일으키려는 정치적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어떤 형식적 수단이 남아있을까. 이 사태가 보기보다 심각한 이유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운 것은 이미 발생했고, 새로워 보이는 무언가가 출현해도 거대 미디어는 즉각 흡수한다. 오늘의 미디어가 현대인에게 제공하는 세계는, 보드리야르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모든 차이를 먹어치워 즉시 그것을 동일자의 무한 증식으로 바꿔치기하는 시뮬라시옹이기 때문이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과 쌍둥이빌딩의 재난의 스펙터클을 그리고 쓰나미가 뱉어낸 시신들의 파노라마를 충격과 동시에 쾌락으로 수용한 현대인에게 어떻게 계급의 실재를 감각케 할 것인가. 달리 물어볼 수 있다. 오늘의 아방가르드는 <무한도전>보다 더 정치적일 수 있을까, 혹은 서태지의 뮤직비디오보다 더 급진적일 수 있을까. 내가 본 곡사의 초기작들에선 이런 질문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물론 빛나는 순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예컨대 <자본당선언>(2003)에서 카메라의 시선과 등장인물의 시선의 지위를 교란하는 트릭('형님들'의 도박 장면을 지켜보며 꿈틀거리던 카메라의 시선이 종반에 이르자 그들을 덮치는 다리 잃은 걸인의 시선으로 변한다)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고, 그 시선의 차이도 결국 자본주의적 질서로 편입시키는 농담과 같은 장면(다리 잃은 걸인이 휴대전화로 국제적 비즈니스를 논한다)들은 기발했다. 거기에 거의 인공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극도로 빈곤하고 추레한 미장센은 가난한 프로덕션의 흔적이라기보다는 미디어의 잔여물로 남음으로써 거대 미디어의 흡수력에 저항하려는 일종의 안간힘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게 더 흥미로운 건 최근작들이다. 21세기의 영화는 세상과 싸울 수 있는가, 혹은 20세기의 아방가르드는 거대 미디어의 대적자가 될 수 있는가. 주류 영화계에서는 포기된 이 질문이 그 안에 싱싱하게 살아있다고 느낀다. 그 질문에 대한 가능한 대답 가운데 하나는 참여적 퍼포먼스이다. 어떤 형식과 표현도 실험적이라는 이름의 유희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면 그 스스로 사회적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정당정치의 역습>(2006)에서 세 여전사가 전경들이 포진한 공간 사이를 누비고 다닐 때, 혹은 <자가당착>(2008)에서 유괴범 인형이 촛불 시위대가 모인 무대에 올라가 기괴한 동작을 펼쳐 보일 때, 그 순간은 어떤 재현적 체계에도 흡수되지 않는 사회적 사건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자기를 사건화하기는 현대 다큐멘터리의 한 경향이므로, 이 방식을 곡사의 고유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퍼포먼스를 담은 재현물의 지위이다. 사건화되는 건 퍼포먼스와 그 수행자이지 그것의 기록물은 아니다. 영화 만들기는 사건화되었지만, 영화는 사건이 되지 못할 때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수행되었는가. 게다가 그 영화 만들기가 수행한 사건은 과연 현실에 작용하는 어떤 소란, 최소한 어떤 소음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고갈>(2008)을 말해야 할 지점에 왔다. 이 작품은 곡사의 필모그래피에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가장 중요한 영화로 보인다. 여기엔 젊은 실험영화 작가의 고민이 집약되어 있고, 고민이 어떤 성취에 이르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고갈>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모두 떠나버린 듯한 황폐한 공장 지대에 한 남자가 있고 한 여자가 있다. 남자는 여관방에서 여자의 몸을 판다. 어느 날 또 다른 여자(아름이)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가려 한다. 여자는 돌아오고, 아름이는 여자의 몸을 사기 위해 여관방에 온다. 곧이어 여자는 죽은 아이를 낳는다. 여자는 자신의 유두를 자르고...... <나쁜 남자>(김기덕)의 후일담처럼 보이기도 하고, <길>(펠리니)의 제3세계 버전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영화는 이렇게 요약된 이야기만으로는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곳이 타자(공장이라는 기계장치 그 자체, 혹은 그것을 운영하고 여자를 사러 오는 몇몇 외국인 노동자)의 땅이며, 그 땅마저 출구가 없는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사실 외에는. <고갈>은 체험되어야 할 영화다. 혼란스럽고 거칠고 불투명한 이 영화의 표면이 전하는 감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어떤 질문에 이른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고갈>은 당겨 말하면 어떤 장소에 관한 영화이며 그 장소는 간주관적 공간으로서의 영화적 장소이다. 그들의 장소를 말해보자. 우리 눈에 보이는 건 거대한 공장들의 괴기스런 형상, 인적 없는 그곳에서 마치 저 홀로 움직이는 듯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굴뚝들, 말라비틀어진 풀들이 미라의 머리카락처럼 듬성듬성 솟아 있는 들판, 바닷물이 빠져나간 뻘인지 기름이 뒤범벅된 진흙탕인지 불분명한 갯벌. 기계 소리도 아니고 바람 소리도 아니며 웅성거림도 아닌 정체불명의 소음들. 우리의 눈과 귀를 괴롭히는 저곳은 어디인가. 저 끔찍하게 황량한 공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영토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곡사가 '지금, 이곳'에서 영화를 찍는, 그럴 수밖에 없는 영화작가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한, 새만금에서 촬영된 저 공간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속한 영토의 일부이며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혹은 우리가 그 작동을 정치적으로 승인한 시스템의 산물이다. 그 공간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곡사가 몇몇 전작들에서 전하려고 애썼던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상과 구조보다 깊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찔러온다. 하지만 <고갈>은, 정의롭지 않고 불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우리의 개선 노력 혹은 정치적 저항을 촉구하는 계몽의 기획이 아니다. 이 공간의 질감은 사실주의적으로 재현되어 있지 않다. 흑백에 가깝게 탈색된 화면, 낡은 필름처럼 거친 입자와 스크래치들, 그리고 노이즈로 가득한 무지 쇼트들. 관객의 투명한 관찰을 방해하는 이 셀룰로이드적 잉여들 혹은 필름의 물질적 상처들을 제외하고 <고갈>의 체험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불투명화의 잉여들을 20세기의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가 공히 신봉했던 브레히트적 거리 두기의 방식으로 보는 건 이 영화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옳을 것이다. 이 잉여들은 우리의 망막과 피사체 사이에 외삽된 장애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된 것의 일부로 그 내부에 새겨져 있다. 그들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상징이 아니며, 우리에게 다르게 감각되기를 촉구하는 흔적이다. 물론 이것은 <데쓰 프루프>나 <플래닛 테러>처럼 노스텔지어에 호소하는 낡음의 모조와 아무 관계가 없다. <고갈>의 스크래치와 필름그레인과 노이즈(편의상 이들을 통칭해 노이즈로 부르기로 하자)는 어떻게 감각되는가. 낡은 비디오테이프, 오래된 뉴스 화면, 혹은 잦은 고장의 고물 TV 등등. 이들을 오랫동안 접해온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갈>에서 표면의 물질적 잉여들은 우리에게 과거완료형의 시간 감각을 느끼게 한다.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더 중요하게는 닫혔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곡사는 현재를 찍어놓고 왜 우리에게 그것을 과거완룟셩의 시간 감각으로 제시하는가. 고쳐 묻자면, 그렇게 제시될 때, 우리는 어디서 이 영화를 보게 되는가. 몇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먼저, 이것은 현재를 미래의 시점에서 보는 것과 같은 착시 효과를 유발한다. 물론 이를 말하기 위해선 <고갈>의 서사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공간은 폐허가 되어 있고 아이는 죽었으며, 여자는 유두를 절단한다. 그리고 아름이는 자궁을 난자한다. 인간사의 연속성은 실패한다. 현재는 이미 폭파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미래에서 이 영화를 안전하게 볼 수 있는가. 농담 같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유령이거나 외계인이다. <고갈>의 노이즈는 그것을 보는 우리의 현존을 은밀하게 위협한다. 당신은 이미 죽었거나 부재한다. 당신의 현실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노이즈는, 우리의 합리적 이성과의 협상을 거절하는, 완강한 소멸의 흔적이다. 반대의 대답도 가능하다. <고갈>의 서사를 우리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일로 지각한다. 현재의 사건을 과거완료형으로 만드는 것은 자기기만을 필요로 한다. 이 기만은 이미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이루어져왔다. 예컨대 용산참사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이지만 그것을 과거완료의 사건으로 만드는 선전 혹은 망각의 기획은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다. 계급은 실재가 아니라 정말 산업화 시대에 완료된 기억으로만 남은 것인가. 그렇게 믿으려 할 때 우리는 현실의 사건에서 현재성을 삭제해야 한다. <고갈>의 노이즈는 그 자기기만이 자명해야 할 현재에 가한 폭력의 흔적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폭력의 흔적을 흡수해 기어이 자신을 드러내는 현실의 이멀전(emulsion)이다. 어느 한쪽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현재의 자리에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습적 방식으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이즈들은 이미 낡아버린 미래, 혹은 도착하지 않은 과거라는 교란된 시간 감각을 물질화함으로써, 피사체에게도 우리에게도 전적으로 속하지 않은 채, 완강한 소멸과 강인한 잔존 사이를 진동하는 또 하나의 에이전트이다. 그 노이즈들과 함께 우리는 <고갈>의 이야기를 만난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나 사건이라기보다 어떤 몸짓이다. 그 몸짓은 코맥 맥카시의 소설 <로드>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동물적 생존에 모든 것을 바치는 몸짓이다. 대재난이 일어났고 모든 것이 사라진 뒤에 살아남은 자들의 생명 연장을 위한 필사적인 몸짓. <고갈>이 더 심각할 수도 있다. 남자와 여자에겐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언어 능력이 없다. 남자는 "엄마가 나를 낳았댄다, 글쎄"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자명한 진실이 잊혀진 풍문이 될 때, 인간의 역사도 잊혀진 풍문이 된다. 이상한 상황들이 있다. 첫째, 여자가 외국인 노동자의 몸을 받고 있을 때 남자는 수간 비디오를 보고 있다. 여자와 개의 성교. 이것이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록이며 기억이다. 왜 인간 남녀의 성교 기록이 아닐까. 둘째, 아름이는 여자를 데리고 가려다 여자가 다시 남자 곁으로 돌아오자, 여자를 찾아와 몸을 산다. 그리고 여자 앞에서 접신 굿과 같은 몸짓을 하고 자신의 자궁을 찌른 후 여자의 목을 조르다 남자에게 죽는다. 그녀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려 했을까. 셋째, 몇 번의 탈출을 하려다 실패한 여자는 죽은 아이를 낳고 자신의 유두를 잘라 흘려보낸다. 그리고 태아의 시신을 들고 들판에 나서 무언가를 외친다. 그녀는 무엇을 외치려 하는 걸까. <고갈>은 다의적이고 모호한 몸짓들로 가득하다. 나는 그것들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여기엔 인간의 총체적 실패라는 관점이 작용하는 것 같다. 문명은 파산했고, 자연은 사라졌으며, 인간의 종족적 연속성도 잊혀진 풍문이 되었다. 철저한 실패의 폐허에서 벌어지는 반인간적이며 자해적인 혹은 주술적인 몸짓들. 여기가 정말 끝일까? <고갈>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짐작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인간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만을 말해야 한다. 그러니 마지막에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그 더럽혀진 자궁이 아이를 다시 품을 수 있을까.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이 오염되고 황폐한 땅에서 엄마의 유두 없이도 살아낼 수 있을까. 죽은 태아, 철조망 너머에 반복적으로 펼쳐진 폐허, 버려진 굴뚝 밑에서 보이는 손바닥만한 하늘, 그리고 손상되고 오염된 생식 기관들, 결국 고갈된 미래.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불안과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재가 고갈되어간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미 우리 몸 어딘가가 고통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리라. 알레고리가 이완된 틈새에 들어선 육체. 강요된 거리와 오염과 자학과 피학으로 고통 받는 육체. 이중으로 부과된 죽음 앞에서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그 육체가 우리의 지각과 두피를 찔러온다. 이것이 곡사가 이른 정치영화의 새로운 표현 방식이다. (<독립영화> 2009년 가을호)
조명진
5.0
이런 영화가 존재 했다. 이번년도에 본 어느 영화보다 기억 된다고 확신한다. 아. 왜 바다는 씻겨낼까? 왜 육지는 더러워지고? 씻겨내는 바다와 더러워지는 육지는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당길 뿐 공존하지 못 한다. 아. 영화는 내게 파도 같았다.
Indigo Jay
4.0
<고갈> (2008)을 '곡사의 페르소나' 장리우 배우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박상훈 감독의 <벌거숭이> (2012), 2011년 KU 시네마테크에서 곡사의 단편 <자살변주> (2007), <임계밀도> (2007), <빛과 계급> (2007) 을 상영할 때 '소니마주'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밴드에서 아스트로 노이즈와 같이 인성으로 했던 연주가 인상깊었다. 뒤늦게 개봉한 <방독피> (2010)에서는 늑대 소녀 역의 연기를 볼 수 있었다. 옴니버스 <원 나 잇 스탠드> (2010) 에서도 선글래스녀로 나왔었다.
kiwikiwi
3.0
느리고무겁고지루하고짜증나고징그럽고인내심고갈되고관객고문시키고남자배우박지환닮았다생각했는데진짜박지환이였슴ㄷㄷ
서채원
1.5
공감각적 심상이란 이런건가?.....영상에서 하수구 냄새가 나는거 같아....도저히 못봐주겠네..... 짱깨 배달부 너무 불쌍해...
또로로
3.5
장이수 형님 개고생하면서 사셨네요 이젠 진흙밭 말고 꽃밭 걸으십쇼
신동철
2.0
무엇을 표현하든 영화라면 최소한 카메라 초점은 맞추자.. 눈아프고 도저히 집중해 보기가 힘들다. 의도라면 제발 그런거 의도하지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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