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y Oh3.5없는 것을 담지는 않았어요. 태국과 라오스의 경계 사이에서, 현실과 연출 사이에서, 역사와 이야기 사이에서 머물다 가세요. 떠나지 못할 듯이 반복되는 선율과 그럼에도 계속 흘러가는 강 사이에서 잠시 시간을 느껴보세요. Enjoy your stay at the in-between.Like48Comment0
mekong19225.0전설은 우리 주변에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의 세상에 비현실적인 전설이 개입해 자신의 세상을 망치는 것이 밉다. 전설도 자신과 맞지 않는 현실에 끼워 맞추며 내장을 훔쳐먹어야 한다는 운명이 밉다. 저항하고 싶다. 그렇지만 영화도, 세상도 그를 영원히 허용하지 않는다. 딸의 내장을 먹으며, 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들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 자신이 귀신인 걸 인지한 순간에만 그 광경을 선연하게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이 운명이다. 귀신과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눈을 감고 싶을 때, 귀를 진정으로 막고 싶을 때 절대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온화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수순을 저항하는 일시적인 허무한 쾌락 끝에는 아마 딸의 내장만이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기에 죽음과 불행에 있어서 떠날 수 없음에 머무는 태도는 능동적인 선택이라기보다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린 불가피한 세상에서 어쩌면, 세상의 피조물쯤인 존재인지 만서도 그 무력함을 하염없이 유영하는 것이다. 메콩강 너머를 바라보며,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물결과 파도들, 그 사이로 지나가는 통나무..통나무는 계속해서 옮겨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몸을 옮겨 내장을 파먹는 영혼처럼 말이다… 나는 인공적인 호텔에 살고 있어도 , 전생과 유령, 항아리는 계속 우리 주위를 맴돌고 우린 그를 정리되지 않은 기억으로 영원히 품고 있다. 품고 있는 사실도 모른 채,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하나의 개념, 상황, 환경의 죽음에는 새로운 개념의 생이 진득하게, 그리고 선연하게 담겨 있다. 감히 생이라고 불러 본다.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 속에서도 나는 통나무와 통기타의 선율을 응원한다. + 이 영화를 디지털로 찍은 것도 연장선의 응원을 이어가게 한다.Like42Comment0
Cinephile4.0영화로 박제되는 것이 예정된 공간을 배회하는 모든 인물들은 작품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인간과 식인귀·감독과 배우 등 현실상의 구분은 그 공간 안에선 평등하게 해체된다. 이를 토대로 정치사와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으로서 스스로 갈 길을 정한다.Like21Comment0
별,4.0인간과 유령의 이질적인 공존이 자연스러워 전혀 낯설지 않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 그 혼란스러운 모호함이 주는 알 수 없는 나른한 체념.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기괴한 영화적 체험.Like15Comment0
양기연5.0현실과 분리된 자리에 온전한 저 자신만의 시공간을 획득한 영화. . (2014.2.18.) (스포일러) . 바깥의 것들을 안으로 응집시키는 동시에 다시 안에서 바깥을 갈망하는 것, 이것은 아마도 영화라는 예술의 기본적 속성 중 하나일 것이다. 각본, 연기, 음악, 미술, 촬영, 연출 등 영화 제작의 과정은 모두 필름 바깥의 영역에서 이루어지지만 결국엔 그 모든 결과물은 필름이란 작은 공간 안에 응집되어 붙박이게 된다. 그리고 이제 필름 안에 응집된 그 모든 것들의 총체는 편집을 통해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덩어리였던 양 애초에 그 각각의 필름 조각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연속성을 획득하려 들고, 그 필름 안의 시간과 공간, 인물들이 모두 필름 바깥까지 연장되어 있는 실제의 무언가인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필름 바깥으로 뛰쳐나가길 갈망한다. . 이 안으로 응집해 가는 구심력과 바깥을 갈망하는 원심력이 공존하는 이 움직임은, 다르게 보면 지금 당장 살아 움직이는 ‘생’의 영역의 것들을 멈추어 버린 ‘사’의 영역으로 불러모은 뒤, 다시 그 정지된 죽음의 영역 위에서 다시 전혀 새로운 양상의 ‘생’을 창출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프레임을 경계 삼아 필름 안과 밖을 오가며 생과 사의 묘한 중첩 위에서 제 나름의 생을 지속해 왔다. . 영화가 아직 필름에 새겨지던 시절에 영화는 일단 바깥의 것들을 필름 안에 응집시킴으로써 그 공간 안에서 고유한 시공간을 창출하되, 점차 그 안의 것들을 조금씩 소실해 가며 필름 밖의 시간을 따라가기도 해야 했다. 필름의 그러한 한계 때문에 영화 ‘안’의 시공간은 어떤 의미에선 그 ‘밖’의 시공간과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바로 이전 장편인 ‘엉클 분미’에서만 해도 아직 필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에도 일부러 필름의 각 릴마다 전혀 다른 양상의 연출법을 채택하고, 현실과 환상, 전생과 현생, 극과 다큐멘터리 등을 뒤섞어 가며 그 안의 시공간을 현실의 그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무언가로 분리시킨 바 있다. 아니, 적어도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만큼은 영화 밖의 공간이 영화 안의 공간에 삼켜져 사라진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옳겠다. 일견 ‘엉클 분미’는 기존 영화들이 영화 안에서 어떤 연속성을 찾으려 한 것과 달리, 그 안의 연속성들을 지속적으로 끊어내는 작업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표면적인 분절은 실상 영화 안에 새로이 창출된 시공간 내에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더 긴밀하게 뒤섞어 ‘하나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기존의 독법이라면 영화적으로 현현해 내기 힘들었을 전생에 대한 비전을 그야말로 지극히 영화적으로 적합하게 풀어내 보였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영화의 미래’라 평했다. . 이번 작품 ‘메콩 호텔’에서 위라세타쿤은 필름이 아닌 디지털을 차용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영화가 디지털을 품음으로써 어떤 위치에 도달해 있는지를 더 분명히 그의 영화로 형상화해 보인다. . 1시간 남짓한 상영시간 내내 영화는 좀처럼 메콩 호텔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모두 메콩 호텔 안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대신 그들은 종종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 바깥의 무언가’를 전제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 통이 처음 등장할 때, 그는 프레임 바깥의 누군가에게 태국의 홍수에 대해 말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통과 폰이 만나는 장면에서도, 통의 존재는 처음에는 그저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 바깥을 바라보는 폰의 시선으로만 전제될 뿐, 그가 다시 프레임 안에 등장해 폰과 만나는 것은 그 다음 숏에서이다. 또한 폰과 통이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들은 프레임 안에 등장하지 않는 ‘개의 시체’ 혹은 ‘항아리’ 등을 언급하고는 한다. 폰과 통, 젠이 대화를 하다 종종 카메라를 응시하곤 하는 것 역시 비슷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극중 인물들이 프레임 안의 영역에 머물며 프레임 바깥의 무언가에 시선을 던지거나 그것을 언급하는 것과 유사하게, 영화 역시 메콩 호텔 안에 머물면서 종종 메콩 호텔 바깥을 ‘바라보곤’ 한다. 호텔 바깥의 풍경들은 늘 호텔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혹은 내려다보는) 방식의 시점 숏으로만 등장한다. 그리고 극중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본인과 마주앉은 기타리스트가 계속해서 연주하는 곡들, 그리고 그와 감독이 나누는 대화가 마치 외부에서 삽입된 음악과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처럼 어떤 경계가 되어 다른 극중 인물들의 이야기 바깥을 맴도는 것처럼, 영화가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메콩 호텔이란 공간 밖을 메콩 강이 돌아 흐르고 있다. 어떤 경계를 두고 그 안으로 응집해 머물되 바깥을 바라보는 극중 인물들과 이 영화 자체의 태도는, 안으로 응집해 머물러 그 바깥을 갈망하던, 그러한 방식을 통해 독자적 시공간 내에서 새로운 ‘생’을 누리던 영화란 예술 그 자체의 속성을 그대로 형상화해 낸 것이나 다름없다. . 그렇다면 영화가 이렇게 획득한 독자적인 시공간, 메콩 호텔 안에서는 어떠한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이야기는 거칠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과 기타리스트가 마주 앉아 짤막한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연주한다. 말한 바와 같이 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늘 다른 이들의 이야기 외부에 머무르며, 이때 연주되는 곡들은 작품 전체의 사운드트랙이 되어 (호텔 옆을 흐르는 메콩 강처럼) 작품 내내 흐른다. 이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작품 안과 밖을 구분하는 어떤 경계처럼 보인다. . 다음으론 통, 폰, 젠 세 인물이 서로에게 혹은 감독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자유로이 풀어놓는 부분들이 있다. 통이 화면 밖의 인물에게 태국의 홍수와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폰이 감독에게 왕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면, 젠이 폰에게 군사 훈련과 이주와 관련된, 어쩌면 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과거의 기억에 대해 말하는 장면, 통과 감독이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강과 제트스키, 옛 애인 등에 대해 자유로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앞서 말한 첫 번째 부분처럼 영화 전체를 둘러싸고 있지도 않지만, ‘폽 유령’과 관련된 세 번째 파트와도 등장 인물들이 겹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이 부분은 차라리 메콩 호텔에서 감독과 배우들이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촬영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메콩 호텔의 직원들이 빨래를 개는 장면 역시 이 부분의 일부로 포섭할 수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어 전달되는 그 말들을 통해, 강이란 자연적 공간, 호텔이라는 인위적 공간, 한 나라의 신화와 역사, 그 땅을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동성 애인을 회상하는 게이, 왕가의 사람들과 평범한 농민들, 이주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특정 민족 등)의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첨예하게 얽혀 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젠이 과거 이야기를 하는 장면들에선 번번이 그녀의 이야기 뒷부분의 말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결국 들리지 않는 연출을 보여주는데, 이 역시 그러한 신화와 역사를 타고 강처럼 그 자리에 흘러 온 (발화되고 있는) 과거와 (발화하고 있는) 현재가 분명한 구분 없이 뒤섞이고 있음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 마지막 부분은 통, 폰, 젠 세 인물이 ‘폽 유령’과 관련해 엮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개 시체, 항아리처럼 프레임 안에 등장하지 않는 것들을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세 인물이 종종 카메라의 눈치를 보곤 한다는 데서 우리는 이것이 온전한 한 편의 극으로 기능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정보 같은 것을 찾아보면 이 부분이 과거 필름 마켓에도 나온 적 있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시나리오 ‘엑스터시 가든’의 내용을 따라 진행하는 리허설 현장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감독은 굳이 이 영화 안에서 그 사실을 명료히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다(내장 먹는 장면 등을 보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정확히 ‘리허설’인지 아니면 ‘리허설 뒤에 만들어진 극 영화 그 자체’인지도 불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그 시나리오 속 내용을 차용해 옴으로써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똑같은 옷을 입은 똑같은 인물들이 여전히 메콩 호텔 안에 머무르며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보이는 각각의 장면들 안에서 그들은 때로는 매우 긴 시간 간격을 두고 혹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재회한 것처럼 대화한다. 안에 머물러 밖을 갈망하던 영화의 태도에서 영화가 획득한, 외부와 전혀 별개로 움직이는 독자적인 시공간의 존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 그 독자적인 시공간 안에서 폽 유령은 폰, 젠, 통 순서로 세 인물의 몸을 모두 거치며 각각 한 번씩 내장을 먹게 한다. 또한 어미에게 내장을 먹혀 죽은 젠은 유령으로 되돌아 오는가 하면, 통이라 불리던 인물은 어느 순간부터 마사토라 불리게 되고 다시 어떤 기계를 통해 그 마사토의 영혼과 통의 육체가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즉, 이 이야기는 전생과 현생을 거듭 연결해 가는 환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앞에 보이는 인물들에 대해 누가 누구라고 명확히 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미로이기도 하다. 폽 유령으로서 내장을 먹던 폰, 젠, 통은 멀쩡히 대화하는 폰, 젠, 통과 동일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가? 같은 외피를 하고 있는 통과 마사토는 동일인인가? 사람 폰과 유령 폰은 무슨 수로 구분한단 말인가? . 첫 번째 파트가 영화 안과 바깥의 경계를 그어 놓으면, 그 안에서는 이제 위에서 언급한 세 부분들이 명확한 구분 없이 뒤엉키기 시작하며 그 미로를 더욱 강화해 나간다. 첫 번째 파트에서 음악을 듣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두 번째 파트에서 인터뷰를 시도하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같은 사람인가? 두 번째 파트의 폰, 젠, 통은 세 번째 파트의 그들과 동일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영화 바깥의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극중에서 그가 말하는 옛 애인 언급 등은 실제 동성애자인 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과 영화 바깥의 실제 기타리스트 및 배우들은 그 중 어느 쪽에 속해 있는 것인가, 아니, 그 중 어느 쪽에 속해 있기는 한 것인가?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가 뒤섞이고, 폽 유령 설화와 실제 태국의 역사가 뒤섞이고, 실제 사람들과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이 뒤섞이는 하나가 되어 버리기에, 우리는 그 어떤 질문에도 명확히 답할 수가 없다. 다만 메콩 강에 가로막힌 메콩 호텔이라는 공간 안에 그 인물들이 마치 연옥 안에 갇힌 영혼들처럼 끝없이 다양한 형태로 환생을 반복하고 있는 듯한 인상만을 받을 뿐이다.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엉클 분미’에서 차용했던 주제와 실험을 이번 ‘메콩 호텔’에서 메콩 강과 메콩 호텔이라는 공간 등을 통해 더욱 간결하지만 더욱 진보한 방식으로 펼쳐 보인다. 영화가 그토록 염원하던, 바깥의 것들을 압도할 수 있는 안으로부터의 독자적인 시공간의 획득, 그 안에서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들을 접합해 가며 기존의 영화에서 제대로 현현해 내지 못한 것들을 좀 더 영화적인 방식으로 다루어 내는 것. 그러나 디지털이라는 매체를 빌어옴으로써 이 시도는 더욱 온전해졌다. 마침내 디지털이 필름을 대체해 가기 시작했을 때, 시간의 흐름 앞에 쉬이 그 무력함을 드러내고 마는 필름과 달리 디지털은 영화가 획득한 나름의 ‘생’을 전자 신호를 통해 조금 더 영속에 가까운 속성의 무언가로 전환시켰고, 동시에 영화 안의 시공간은 영화 바깥의 시공간과 좀 더 분명한 형태로, 때문에 조금 더 비현실적인 양상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엉클 분미’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영화의 미래’로써 보여주었던 것들이 디지털의 영화 산업 내 보편화를 통해 이제는 ‘영화의 현재’가 되어 버렸다. 이제 디지털 영화에서 영화 안의 영역은 연옥처럼 생과 사의 경계에서 그 어떤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영영 동떨어진 어떤 시공간을 품고 가야 할는지도 모른다. 이는 어떤 면에선 환상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선 위험한 일일 것이다. 영화는 폽 유령 이야기로 음산함을 더해 가며, 과거와 현재, 역사와 설화, 극과 현실이 잔뜩 뒤섞인 그 자리에서 디지털이 이뤄낸 위대하고도 불안한 ‘영화의 오늘’을 형상화해 내고 있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 통과 아피찻퐁의 시선을 따른 듯한 카메라가 제트스키들의 움직임을 조용히 바라보던 중에 프레임 우편으로부터 나무토막 하나가 등장한다. 태국의 홍수와 이에 대비하기 위한 뗏목용 나무의 공급 뉴스와도 연관된 듯한 그 나무토막은, 그렇게 태국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르는 메콩 강을 타고 조용히 흘러간다. 그런데 그렇게 마냥 흘러가는 듯하던 나무토막이 프레임 중앙부를 지날 즈음 대뜸 강물을 가르며 강 저편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자연적 운동이 인위적 운동으로 전환되는 절묘한 순간. 그 나무토막이 강 저편으로 서서히 사라져갈 즈음 영화는 끝난다. 내내 강 이쪽 편 메콩 호텔이란 공간 안에만 머물던 영화가 마치 뗏목을 타야 할 수재민들처럼 그 나무토막을 타고 강 저편으로 향해 감은, 디지털로 다다른 ‘영화의 오늘’을 이야기한 감독이 또 다시 그 다음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현실과 분리된 자리에 온전한 저 자신만의 시공간을 획득한 영화는 이제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벌써 ‘영화의 내일’을 바라보고 있다.Like11Comment0
상맹4.0아피찻퐁의 나라에서 본 아피찻퐁의 영화라 더욱 더 좋았가. 메콩 강에는 얼마나 많고 다른 역사들의 살점들과 영혼들이 모였을까. 그 보이지 않는 호텔에 또 누가 머무르고 있으며 투숙객으로 올 것이며 어떤 이야기를 지니고 올 것인가. 현재를 포함해 공간의 통시적 깊이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울 뿐이다.Like10Comment0
Jay Oh
3.5
없는 것을 담지는 않았어요. 태국과 라오스의 경계 사이에서, 현실과 연출 사이에서, 역사와 이야기 사이에서 머물다 가세요. 떠나지 못할 듯이 반복되는 선율과 그럼에도 계속 흘러가는 강 사이에서 잠시 시간을 느껴보세요. Enjoy your stay at the in-between.
mekong1922
5.0
전설은 우리 주변에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자신의 세상에 비현실적인 전설이 개입해 자신의 세상을 망치는 것이 밉다. 전설도 자신과 맞지 않는 현실에 끼워 맞추며 내장을 훔쳐먹어야 한다는 운명이 밉다. 저항하고 싶다. 그렇지만 영화도, 세상도 그를 영원히 허용하지 않는다. 딸의 내장을 먹으며, 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들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 자신이 귀신인 걸 인지한 순간에만 그 광경을 선연하게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이 운명이다. 귀신과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눈을 감고 싶을 때, 귀를 진정으로 막고 싶을 때 절대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온화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수순을 저항하는 일시적인 허무한 쾌락 끝에는 아마 딸의 내장만이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기에 죽음과 불행에 있어서 떠날 수 없음에 머무는 태도는 능동적인 선택이라기보다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린 불가피한 세상에서 어쩌면, 세상의 피조물쯤인 존재인지 만서도 그 무력함을 하염없이 유영하는 것이다. 메콩강 너머를 바라보며,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물결과 파도들, 그 사이로 지나가는 통나무..통나무는 계속해서 옮겨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몸을 옮겨 내장을 파먹는 영혼처럼 말이다… 나는 인공적인 호텔에 살고 있어도 , 전생과 유령, 항아리는 계속 우리 주위를 맴돌고 우린 그를 정리되지 않은 기억으로 영원히 품고 있다. 품고 있는 사실도 모른 채,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하나의 개념, 상황, 환경의 죽음에는 새로운 개념의 생이 진득하게, 그리고 선연하게 담겨 있다. 감히 생이라고 불러 본다.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 속에서도 나는 통나무와 통기타의 선율을 응원한다. + 이 영화를 디지털로 찍은 것도 연장선의 응원을 이어가게 한다.
Cinephile
4.0
영화로 박제되는 것이 예정된 공간을 배회하는 모든 인물들은 작품을 위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인간과 식인귀·감독과 배우 등 현실상의 구분은 그 공간 안에선 평등하게 해체된다. 이를 토대로 정치사와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으로서 스스로 갈 길을 정한다.
별,
4.0
인간과 유령의 이질적인 공존이 자연스러워 전혀 낯설지 않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 그 혼란스러운 모호함이 주는 알 수 없는 나른한 체념.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기괴한 영화적 체험.
김솔한
3.5
메콩 호텔이라는 순환의 세계, <엉클 분미>의 축소판.
양기연
5.0
현실과 분리된 자리에 온전한 저 자신만의 시공간을 획득한 영화. . (2014.2.18.) (스포일러) . 바깥의 것들을 안으로 응집시키는 동시에 다시 안에서 바깥을 갈망하는 것, 이것은 아마도 영화라는 예술의 기본적 속성 중 하나일 것이다. 각본, 연기, 음악, 미술, 촬영, 연출 등 영화 제작의 과정은 모두 필름 바깥의 영역에서 이루어지지만 결국엔 그 모든 결과물은 필름이란 작은 공간 안에 응집되어 붙박이게 된다. 그리고 이제 필름 안에 응집된 그 모든 것들의 총체는 편집을 통해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덩어리였던 양 애초에 그 각각의 필름 조각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연속성을 획득하려 들고, 그 필름 안의 시간과 공간, 인물들이 모두 필름 바깥까지 연장되어 있는 실제의 무언가인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필름 바깥으로 뛰쳐나가길 갈망한다. . 이 안으로 응집해 가는 구심력과 바깥을 갈망하는 원심력이 공존하는 이 움직임은, 다르게 보면 지금 당장 살아 움직이는 ‘생’의 영역의 것들을 멈추어 버린 ‘사’의 영역으로 불러모은 뒤, 다시 그 정지된 죽음의 영역 위에서 다시 전혀 새로운 양상의 ‘생’을 창출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프레임을 경계 삼아 필름 안과 밖을 오가며 생과 사의 묘한 중첩 위에서 제 나름의 생을 지속해 왔다. . 영화가 아직 필름에 새겨지던 시절에 영화는 일단 바깥의 것들을 필름 안에 응집시킴으로써 그 공간 안에서 고유한 시공간을 창출하되, 점차 그 안의 것들을 조금씩 소실해 가며 필름 밖의 시간을 따라가기도 해야 했다. 필름의 그러한 한계 때문에 영화 ‘안’의 시공간은 어떤 의미에선 그 ‘밖’의 시공간과 온전히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바로 이전 장편인 ‘엉클 분미’에서만 해도 아직 필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에도 일부러 필름의 각 릴마다 전혀 다른 양상의 연출법을 채택하고, 현실과 환상, 전생과 현생, 극과 다큐멘터리 등을 뒤섞어 가며 그 안의 시공간을 현실의 그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무언가로 분리시킨 바 있다. 아니, 적어도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만큼은 영화 밖의 공간이 영화 안의 공간에 삼켜져 사라진다고 표현하는 쪽이 더 옳겠다. 일견 ‘엉클 분미’는 기존 영화들이 영화 안에서 어떤 연속성을 찾으려 한 것과 달리, 그 안의 연속성들을 지속적으로 끊어내는 작업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표면적인 분절은 실상 영화 안에 새로이 창출된 시공간 내에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더 긴밀하게 뒤섞어 ‘하나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기존의 독법이라면 영화적으로 현현해 내기 힘들었을 전생에 대한 비전을 그야말로 지극히 영화적으로 적합하게 풀어내 보였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영화의 미래’라 평했다. . 이번 작품 ‘메콩 호텔’에서 위라세타쿤은 필름이 아닌 디지털을 차용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영화가 디지털을 품음으로써 어떤 위치에 도달해 있는지를 더 분명히 그의 영화로 형상화해 보인다. . 1시간 남짓한 상영시간 내내 영화는 좀처럼 메콩 호텔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모두 메콩 호텔 안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대신 그들은 종종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 바깥의 무언가’를 전제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 통이 처음 등장할 때, 그는 프레임 바깥의 누군가에게 태국의 홍수에 대해 말하며 옷을 갈아입는다. 통과 폰이 만나는 장면에서도, 통의 존재는 처음에는 그저 프레임 안에서 프레임 바깥을 바라보는 폰의 시선으로만 전제될 뿐, 그가 다시 프레임 안에 등장해 폰과 만나는 것은 그 다음 숏에서이다. 또한 폰과 통이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들은 프레임 안에 등장하지 않는 ‘개의 시체’ 혹은 ‘항아리’ 등을 언급하고는 한다. 폰과 통, 젠이 대화를 하다 종종 카메라를 응시하곤 하는 것 역시 비슷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극중 인물들이 프레임 안의 영역에 머물며 프레임 바깥의 무언가에 시선을 던지거나 그것을 언급하는 것과 유사하게, 영화 역시 메콩 호텔 안에 머물면서 종종 메콩 호텔 바깥을 ‘바라보곤’ 한다. 호텔 바깥의 풍경들은 늘 호텔 안쪽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혹은 내려다보는) 방식의 시점 숏으로만 등장한다. 그리고 극중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본인과 마주앉은 기타리스트가 계속해서 연주하는 곡들, 그리고 그와 감독이 나누는 대화가 마치 외부에서 삽입된 음악과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처럼 어떤 경계가 되어 다른 극중 인물들의 이야기 바깥을 맴도는 것처럼, 영화가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메콩 호텔이란 공간 밖을 메콩 강이 돌아 흐르고 있다. 어떤 경계를 두고 그 안으로 응집해 머물되 바깥을 바라보는 극중 인물들과 이 영화 자체의 태도는, 안으로 응집해 머물러 그 바깥을 갈망하던, 그러한 방식을 통해 독자적 시공간 내에서 새로운 ‘생’을 누리던 영화란 예술 그 자체의 속성을 그대로 형상화해 낸 것이나 다름없다. . 그렇다면 영화가 이렇게 획득한 독자적인 시공간, 메콩 호텔 안에서는 어떠한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이야기는 거칠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과 기타리스트가 마주 앉아 짤막한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연주한다. 말한 바와 같이 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늘 다른 이들의 이야기 외부에 머무르며, 이때 연주되는 곡들은 작품 전체의 사운드트랙이 되어 (호텔 옆을 흐르는 메콩 강처럼) 작품 내내 흐른다. 이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작품 안과 밖을 구분하는 어떤 경계처럼 보인다. . 다음으론 통, 폰, 젠 세 인물이 서로에게 혹은 감독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자유로이 풀어놓는 부분들이 있다. 통이 화면 밖의 인물에게 태국의 홍수와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폰이 감독에게 왕가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면, 젠이 폰에게 군사 훈련과 이주와 관련된, 어쩌면 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과거의 기억에 대해 말하는 장면, 통과 감독이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강과 제트스키, 옛 애인 등에 대해 자유로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앞서 말한 첫 번째 부분처럼 영화 전체를 둘러싸고 있지도 않지만, ‘폽 유령’과 관련된 세 번째 파트와도 등장 인물들이 겹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이 부분은 차라리 메콩 호텔에서 감독과 배우들이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촬영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메콩 호텔의 직원들이 빨래를 개는 장면 역시 이 부분의 일부로 포섭할 수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어 전달되는 그 말들을 통해, 강이란 자연적 공간, 호텔이라는 인위적 공간, 한 나라의 신화와 역사, 그 땅을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동성 애인을 회상하는 게이, 왕가의 사람들과 평범한 농민들, 이주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특정 민족 등)의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첨예하게 얽혀 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젠이 과거 이야기를 하는 장면들에선 번번이 그녀의 이야기 뒷부분의 말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결국 들리지 않는 연출을 보여주는데, 이 역시 그러한 신화와 역사를 타고 강처럼 그 자리에 흘러 온 (발화되고 있는) 과거와 (발화하고 있는) 현재가 분명한 구분 없이 뒤섞이고 있음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 마지막 부분은 통, 폰, 젠 세 인물이 ‘폽 유령’과 관련해 엮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개 시체, 항아리처럼 프레임 안에 등장하지 않는 것들을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세 인물이 종종 카메라의 눈치를 보곤 한다는 데서 우리는 이것이 온전한 한 편의 극으로 기능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정보 같은 것을 찾아보면 이 부분이 과거 필름 마켓에도 나온 적 있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시나리오 ‘엑스터시 가든’의 내용을 따라 진행하는 리허설 현장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감독은 굳이 이 영화 안에서 그 사실을 명료히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다(내장 먹는 장면 등을 보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정확히 ‘리허설’인지 아니면 ‘리허설 뒤에 만들어진 극 영화 그 자체’인지도 불분명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그 시나리오 속 내용을 차용해 옴으로써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똑같은 옷을 입은 똑같은 인물들이 여전히 메콩 호텔 안에 머무르며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보이는 각각의 장면들 안에서 그들은 때로는 매우 긴 시간 간격을 두고 혹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재회한 것처럼 대화한다. 안에 머물러 밖을 갈망하던 영화의 태도에서 영화가 획득한, 외부와 전혀 별개로 움직이는 독자적인 시공간의 존재가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 그 독자적인 시공간 안에서 폽 유령은 폰, 젠, 통 순서로 세 인물의 몸을 모두 거치며 각각 한 번씩 내장을 먹게 한다. 또한 어미에게 내장을 먹혀 죽은 젠은 유령으로 되돌아 오는가 하면, 통이라 불리던 인물은 어느 순간부터 마사토라 불리게 되고 다시 어떤 기계를 통해 그 마사토의 영혼과 통의 육체가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즉, 이 이야기는 전생과 현생을 거듭 연결해 가는 환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앞에 보이는 인물들에 대해 누가 누구라고 명확히 말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미로이기도 하다. 폽 유령으로서 내장을 먹던 폰, 젠, 통은 멀쩡히 대화하는 폰, 젠, 통과 동일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가? 같은 외피를 하고 있는 통과 마사토는 동일인인가? 사람 폰과 유령 폰은 무슨 수로 구분한단 말인가? . 첫 번째 파트가 영화 안과 바깥의 경계를 그어 놓으면, 그 안에서는 이제 위에서 언급한 세 부분들이 명확한 구분 없이 뒤엉키기 시작하며 그 미로를 더욱 강화해 나간다. 첫 번째 파트에서 음악을 듣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두 번째 파트에서 인터뷰를 시도하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같은 사람인가? 두 번째 파트의 폰, 젠, 통은 세 번째 파트의 그들과 동일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영화 바깥의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극중에서 그가 말하는 옛 애인 언급 등은 실제 동성애자인 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과 영화 바깥의 실제 기타리스트 및 배우들은 그 중 어느 쪽에 속해 있는 것인가, 아니, 그 중 어느 쪽에 속해 있기는 한 것인가?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가 뒤섞이고, 폽 유령 설화와 실제 태국의 역사가 뒤섞이고, 실제 사람들과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이 뒤섞이는 하나가 되어 버리기에, 우리는 그 어떤 질문에도 명확히 답할 수가 없다. 다만 메콩 강에 가로막힌 메콩 호텔이라는 공간 안에 그 인물들이 마치 연옥 안에 갇힌 영혼들처럼 끝없이 다양한 형태로 환생을 반복하고 있는 듯한 인상만을 받을 뿐이다.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엉클 분미’에서 차용했던 주제와 실험을 이번 ‘메콩 호텔’에서 메콩 강과 메콩 호텔이라는 공간 등을 통해 더욱 간결하지만 더욱 진보한 방식으로 펼쳐 보인다. 영화가 그토록 염원하던, 바깥의 것들을 압도할 수 있는 안으로부터의 독자적인 시공간의 획득, 그 안에서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들을 접합해 가며 기존의 영화에서 제대로 현현해 내지 못한 것들을 좀 더 영화적인 방식으로 다루어 내는 것. 그러나 디지털이라는 매체를 빌어옴으로써 이 시도는 더욱 온전해졌다. 마침내 디지털이 필름을 대체해 가기 시작했을 때, 시간의 흐름 앞에 쉬이 그 무력함을 드러내고 마는 필름과 달리 디지털은 영화가 획득한 나름의 ‘생’을 전자 신호를 통해 조금 더 영속에 가까운 속성의 무언가로 전환시켰고, 동시에 영화 안의 시공간은 영화 바깥의 시공간과 좀 더 분명한 형태로, 때문에 조금 더 비현실적인 양상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엉클 분미’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영화의 미래’로써 보여주었던 것들이 디지털의 영화 산업 내 보편화를 통해 이제는 ‘영화의 현재’가 되어 버렸다. 이제 디지털 영화에서 영화 안의 영역은 연옥처럼 생과 사의 경계에서 그 어떤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영영 동떨어진 어떤 시공간을 품고 가야 할는지도 모른다. 이는 어떤 면에선 환상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선 위험한 일일 것이다. 영화는 폽 유령 이야기로 음산함을 더해 가며, 과거와 현재, 역사와 설화, 극과 현실이 잔뜩 뒤섞인 그 자리에서 디지털이 이뤄낸 위대하고도 불안한 ‘영화의 오늘’을 형상화해 내고 있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 통과 아피찻퐁의 시선을 따른 듯한 카메라가 제트스키들의 움직임을 조용히 바라보던 중에 프레임 우편으로부터 나무토막 하나가 등장한다. 태국의 홍수와 이에 대비하기 위한 뗏목용 나무의 공급 뉴스와도 연관된 듯한 그 나무토막은, 그렇게 태국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르는 메콩 강을 타고 조용히 흘러간다. 그런데 그렇게 마냥 흘러가는 듯하던 나무토막이 프레임 중앙부를 지날 즈음 대뜸 강물을 가르며 강 저편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자연적 운동이 인위적 운동으로 전환되는 절묘한 순간. 그 나무토막이 강 저편으로 서서히 사라져갈 즈음 영화는 끝난다. 내내 강 이쪽 편 메콩 호텔이란 공간 안에만 머물던 영화가 마치 뗏목을 타야 할 수재민들처럼 그 나무토막을 타고 강 저편으로 향해 감은, 디지털로 다다른 ‘영화의 오늘’을 이야기한 감독이 또 다시 그 다음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현실과 분리된 자리에 온전한 저 자신만의 시공간을 획득한 영화는 이제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벌써 ‘영화의 내일’을 바라보고 있다.
상맹
4.0
아피찻퐁의 나라에서 본 아피찻퐁의 영화라 더욱 더 좋았가. 메콩 강에는 얼마나 많고 다른 역사들의 살점들과 영혼들이 모였을까. 그 보이지 않는 호텔에 또 누가 머무르고 있으며 투숙객으로 올 것이며 어떤 이야기를 지니고 올 것인가. 현재를 포함해 공간의 통시적 깊이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울 뿐이다.
고민성
5.0
삶과 죽음, 카메라의 안과 밖의 경계를 무화하는 생경한 영화적 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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