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metery of Splendour
Rak ti Khon Kaen
2015 · Drama/Fantasy/Mystery · Thailand, UK, Germany, France, Malaysia, Korea, Mexico, United States, Norway
2h 00m

In a hospital, ten soldiers are being treated for a mysterious sleeping sickness. In a story in which dreams can be experienced by others, and in which goddesses can sit casually with mortals, a nurse learns the reason why the patients will never be cured, and forms a telepathic bond with one of them.
Jay Oh
4.0
삶에 가려진 죽음을 응시하는 행위. 현실에 가려진 꿈을 상기하는 행위. 현재에 가려진 과거를 불러오는 행위. 눈을 뜨라, 기억하라. 찬란하리라. Open your eyes to the simultaneity.
Dh
3.5
깊게 잠들지 못하고 깨어난 그곳에는 정처 없이 흔들리는 나뭇잎들만 존재했다 #Dead Tree #혼재&슬픔&응시
별,
4.5
깨지 못하는 자는 현실의 한 곳에 머물며 과거를 맴돌고, 깨어 있는 자는 꿈의 어느 곳을 맴돌며 현실에 머문다. 과거와 현재(또는 꿈과 현실)가 만나는 순간의 "찬란함의 무덤". - 육체와 영혼이 현실과 꿈으로, 다시 현재와 과거로 치환된다. 영혼이 육체에 구속되듯이 과거는 현재에 종속되고, 따로 또 같이 그것들은 전혀 별개이지만 또한 하나이다. - 그렇기에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어야 한다. 과거는 언제나 현실 속에 살아있기에.
조영재
5.0
영화는 결국 기억을 도굴하는 과정이다. 도굴해 내는 것은 눈을 부릅떠야 하는 이유 한 가지씩.
오세일
5.0
젠지는 자신이 과거에 다니던 학교가 병원으로 변해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며 그리워한다. 그에 반해, 병원에서 잇이 군인 영혼의 과거를 보고 있다고 하자 군인의 어머니는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태국 정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과거의 고향에 존재하였던 후손들을 위해 싸웠던 조상들이 묻혀있는 무덤을 포크레인으로 사정없이 파내고 훼손시킨다. 이러한 연출로 더 이상 과거를 존중하고 그리워할 시간이 없어진 각박한 사회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과거를 훼손하는 태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이 비판은 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오염된 또 다른 나라들에도 충분히 대입이 가능하다. 영화는 이런 사회에서도 과거를 존중하고 그리워하는 젠지에게 한 켠의 희망을 품고, 젠지의 시각으로 우리 모두 과거를 잊지 말자고 암시한다. 후반부의 정글을 무대로 왕실을 돌아나니는 씬은 스크린 너머로 손을 뻗어 과거를 어루만지는 가히 영화적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를 창조하는 작법으로도 보인다. 또한 지금까지의 아피찻퐁 영화에서는 태국의 정글이 매우 자주 등장했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태국의 정글이 주 무대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열대병'이나 '엉클 분미'에서 보여줬던 어두운 분위기의 정글들과는 달리, 아름다운 햇빛이 내리쬐는 밝고 신비로운 정글을 비춘다. 태국의 정치적인 면을 비판하는 동시에, 태국의 아름다운 정글로 꾸며진 영상미와 아피찻퐁 감독만이 해낼 수 있는 현실과 영적 세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연출을 통한 신비로움까지 느낄 수 있는 내 생애 최고의 영화적 체험.
Cinephile
4.0
하늘도 덮을만큼 커다란 미로 속에서 태어난 자라면, 그 외벽이 무너지기 전까진 그 미로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할 것이다. 정치의 직접적인 상징들이 환상을 무디게 하는 면이 있으나, 한국에도 유효한 답답함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상맹
4.5
[서울아트시네마 2022 시네 바캉스 미니 아피찻퐁전] 그런즉 믿음, 타인, 과거,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화해라 - ‘찬란함의 무덤’ by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 모르겠다, 미래가 망가져 버린 언제부턴가 다들 화려했던 과거만을 찾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살지도 못했던 호황기의 향수가 포장지로 바뀌어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과 잉여가치를 낳는다. 다시 말하면 고향없는 노스탤지어, 고향없는 실향의 감정이다. 학교 앞의 큰 포크레인처럼 무작정 찬란함의 무덤을 도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도굴을 멈추게 하는 것으로 결말을 낸다. 과거는 찬란함이 아니다. 과거는 변증법처럼 지양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부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던 과거는 이제 화해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탑건의 이례적인 흥행도 이런 맥락일까). 그래서 찬란함의 무덤이다. 하지만 이제는 흐릿하게 기억나거나 기억나지 않는 걸, 어디서부터 과거와 화해할 수 있을까. 영화는 타인의 과거를 화해시키는 봉사적인 행동에서 시작한다. 2000년전 원한인지 직업적 과거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군인은 병원 내에서 내내 자고 있다. 주인공 첸은 말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을 돌본다. 그리고 잠자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한다. 첸은 말하지 못하는 것에도 보이지 않는 것에도 듣지 못하는 것에도 발화가 있다고 믿는다. 신과 기도를 빌어서라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거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과거를 본다. 서로의 세계를 믿으니 서로의 세계를 경험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삼위일체. 서구의 양 축인 헬레니즘이 보이는 것만 믿는 믿음이라면 헤브라이즘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제야 보이는 것이다. 그 믿음과 시도에서 자신의 과거와도 마주치게 된다. 잠자는 자는 화해의 짧은 순간에 다시금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시 원래대로 잠든다. 매번 실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순간들에 주인공과 군인은 영화를 보고 과일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과거를 나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들과 화해한다. 그러다보면 은은히 변하는 스탠드 조명에 따라 군인의 꿈 속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현실이 꿈처럼 되기도 한다. 환상에 깊숙히 들어온 주인공은 깨기 위해서 눈을 부릅 뜬다. 다시 나로 현실로 돌아와야하니까. 타인의 과거의 화해를 돕는 것으로 스스로가 구원받는 서사. 여기서 층위는 개개인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고대 왕국과 도시화된 현대이기도 하고, 할머니와 아들 세대이기도 하고 과거 전쟁 세대와 현재 세대이기도 하다. 또한 환상과 현실이기도 하고 신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이기도 하다. 아피찻퐁 감독은 이걸 모두 한 영화라는 시공간에 능숙하게 중첩시킨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한 공간에서 에어로빅을 춘다. 다들 둘이 앉으려면 떠나는 벤치에서 투 숏이 나오는 건 주인공 둘 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치부된다. 모르는 것 신으로 부를 수 있다면 여전히 니체는 신이 죽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모두가 너무 이미 많이 아는 시대이다. 모든 게 찾으면 보이고 이미지는 범람하고 시각권력에 포착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로, MBTI로 타인을 알지만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아니 이해하는 데에 드는 그 수고를 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에 대해 겸허한 사람만이 알고 싶어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모르는 걸 모르는 채로 두는 사람만이 앎을 넘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두 주인공처럼. 첸의 다리처럼 이 과정이 모두 끝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군인이 아무리 자신의 꿈속에서 기도해주고 어루만져줬어도 첸은 여전히 절뚝일 것이고 군인은 여전히 잠들어있다. 그래도 왠지 모르지만 도굴은 멈춰졌다. 더 나아가야한다. 다시 눈을 부릅떠야한다. 우리도 누군가의 화해를 만들어준 이런 꿈같은 영화가 끝나면 눈을 부릅떠야하니 마지막 숏은 부릅뜬 눈의 숏이 되어야한다. 영화는 끝날테고 우린 다시 잠들테니까. 흙이 나뒹구러진 화해의 찬란한 무덤 앞에서 도굴은 멈추고 아이들은 이제 공놀이를 하고 있다. 오늘 읽은 폐허의 영화 텍스트와 역시 매번 나오는 벤야민의 영화 철학. 감독님 매번 이렇게 잘 만들으시면 어떡합니까 정말. 씨네필 뉴비라 서울 아트 시네마 첨 가보는데 엔딩크레딧 다 올라가기 전까지 불 안 꺼주는 극장도 다 보는 관객들도 끝나고 나와서 혼자 고민하는 모습의 씨네필들도 같이 토론하는 씨네필들도 어느 시네마에서도 볼 수 없던 전연령대 씨네필들도.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넘어 동질감과 유대 속에서 행복했다.
김솔한
3.5
매혹적인 공익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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