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5.0이태원에서 159명이 죽었을 때 시민들의 ‘트라우마’를 염려하는 기사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전국민이 차라리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깊이깊이 입었으면 좋겠다고. 산 자들의 정신 건강이 돌이킬 수 없게 훼손되고 다함께 앓을 수 있게 언론에서 더 주구장창 다루길 바랐다. 잔혹한 현장 사진들이 우리 각막에 영구적으로 새겨지길 바랐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일상에 잊히지 않도록. ‘빨리’나 ‘안전’ 같은 단어만 들어도 5000만 명의 팔다리에 소름이 돋도록.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선 긋지 말고 우리 모두가 당사자이자고. 그래서 ‘싸게 치는’ 선택을 모두가 자동반사처럼 두려워하고, 조금 지겨운 과정이 수반되더라도 사람이 타는 배에 1000톤 넘게 화물이 과적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아파트 청약을 신청하는 사람들의 고막에 그 아파트를 짓다가 죽은 사람의 절규가 들릴 수만 있다면. 뭐가 되었든 가치가 있을 거라고 너무나 믿는다. 설레는 두번째 데이트에서 내가 삼겹살을 싸먹는 바로 그 깻잎을 땄던 이주 노동자가 비닐 하우스에서 얼어죽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이 영화에서 불에 타 죽는 사람들과 달리 아주 고요하게 저승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그런 걸 두번째 데이트에서 언급해도 될까. 따위가 내가 관심 있는 유일한 ‘깻잎 논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안겨주는 감각적인 트라우마에 감사하다. 새 옷을 사려고 쇼핑앱을 들여다보다가, 그 옷들이 생산되는 공장이 안일하게 망가뜨린 강물에서 죽어간 생명들의 호흡이, 그 오염수로 피부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망울이 내게 더 가까이 와닿는 데에 기여하는 경험이다. 영화는 이래서 오감의 예술이다. 이 영화에 유머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국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채상병 특검법이 어떤 폭력을 방지하기 위함인지에 관심 없으면서 이 영화에 만점을 주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이 영화의 블랙 코미디일 것이다. 어딘가에서 무작위로 선택되어 발생한 죽음과, 죽은 군인과 또래인 아들을 생각하여 내부고발했다는 죄로 처벌 받은 박정훈의 용기에, 그 이름 석자에 경탄하지 않을 거라면 이런 영화에 감탄하는 당신의 시끄러운 육성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침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대당하다시피 공부하는 청소년들의 인권 조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거라면, 세상사를 따라잡기엔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명목으로 한없이 미룰 거라면, 이 영화는 영원히 당신을 짝사랑할 수밖에 없다. 웃음을 주는 각종 영상들에서 암담한 기사들까지의 거리는 터치 하나만큼의 거리다. 당신 손가락과 화면 사이의, 깻잎 한 장만큼의 거리. 담장 하나의 차이에 경악했다면 그 정도 거리는 단숨에 넘어서길 바란다. 누가 되었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울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해관계의 구역이자 관심이 가는 곳. 이 영화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그곳이길 바란다.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이들의 존엄이 우리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얽혀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구역이길. 모두의 관심을 붙드는 영역이길. *수많은 의제들 중 굳이 하나의 특검법을 호명한 건 지난 일년 남짓한 시간 동안 국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고 최근 야당의 0순위 사안이기도 했고, 대통령이 수사외압을 행사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아닙니다. 영화 속 히틀러는 이름으로만 등장합니다. 꼭대기의 권력보단 그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직원’으로서의 군인에 집중합니다. 헌신하는 아빠, 아내를 생각하는 남편. 널리고 널린 부류. 한 사람을 갈아끼우는 것보다 구조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유인합니다. 동네 식당이든 학교든 군대든, 시스템에 내는 균열이 불가능했을 때의 풍경은 유사할 것입니다. 저는 구조에 의문을 품은 목소리가 음소거당한 사건을 가져온 것입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수상 소감으로 가자지구의 희생자들과 하마스 공격의 희생자들을 동일선상에 두어 이스라엘 지지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가자 공격을 dehumanization이라고 불렀다. 사람을 3만 명 넘게 죽이는 일이 ‘방어’의 일환으로 불가피하다는 이스라엘의 지난한 주장에 맞서는 일이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문제를 건드리기 전에 그는 수백 번 고민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말렸을 것이다. 소감이 적힌 종이가 그의 손에서 덜덜 떨렸다. 나는 그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지지한다. 사람이 만든 시스템으로 죽은 모든 사람은, 사람의 노력으로 반복을 막을 수 있는 모든 죽음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Like2341Comment46
김필립5.0악에 대한 영화에 악을 행하는 장면이 없고 비극을 다룬 영화에 비극이 벌어지는 장면이 없다. 그저 어떤 잔인한 묘사보다 소름끼치는 지루하고 따분하며 현실적인 일상이 있을 뿐.Like503Comment0
정환5.0이미지를 압도하는 사운드 디자인, 어떻게든 거리를 둬보겠다는 겨우 담장 하나와 스크린을 넘어 마치 혼(魂)이 산 사람의 발목을 붙잡듯이 들려온다. 우리와는 무관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이기적이고 편의적인 최면에 가까운 믿음. 역사 너머로 박제될 미래와 잊고 있었던 관심 너머의 영역을 공유하며 스크린과 현실의 경계를 부수는 영화의 또 다른 영역을 제시하다. . 평화로움 속에서 섬뜩하게 건네받는 몇 마디의 말들과 분명 이름 모를 이의 육신과 관련된 흔적들이 물 흐르듯 흘러 지나 갈 때면 이를 보고 있는 우리가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곳은 저것들이 흘러갈 하류가 아닌, 근원지인 상류에 따로 있음을 일깨운다. 화목한 가족들의 일상을 보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관심 영역은 다른 곳을 향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은 하나의 미술품처럼 정갈한 이미지들을 압도해버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녔다. 온몸의 세포가 반응하듯 신경질적인 음악 이전에,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총 소리와, 영문 모를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들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심지어 (영화가) 보여주지도 않는 것들을 강제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어떻게 직접 보는 것보다 스스로 표상한 것이 더 생생하고 끔찍할 수가 있을까. 제아무리 끔찍한 것을 보더라도 이것이 영화임을 인식할 뿐이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스크린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스크린은 영화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현실에 도달할 수 없게끔 걸러주는 거름망 같은 것이다. 영화를 본 후 감정적 경험은 고스란히 앉고 가면서, 동시에 영화와 현실은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고 느껴지는 거리감은 오직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일 때만 의도적으로 멀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면하고 싶은, 책임지고 싶지 않은, 함부로의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내 일이 아니라며 안심하는 일들 말이다. 어떤 방면에서든 영화가 끔찍함을 직접 보여준다는 것은, 이런 현실이 있다며 억지로 들이밀어 보여주는 것과 같다. 비극의 역사와 반복되면 안 될 역사임을 다소 충격적인 요법을 강행해서라도 강조하고 싶었다지만, 관객은 고개를 돌리거나 눈 감아 버리면 그만이다. 감독이 만든 스크린 속 가상의 비극의 참상을 보면, 그 충격의 여운은 오래 남아있을지는 몰라도 그 감정의 공간에는 관객의 잘못(탓)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끔찍한 참상이 펼쳐지더라도 스크린이라는 필터가 나와는 무관한 세상임을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 뭐랄까, 비극을 다룸에 있어서 조금의 책임이나 죄의식이 있다면 그것들을 봐버린 관객의 몫이 아니라 이를 억지로라도 기어코 보여준 영화에게 더 크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이 영화가 제시하는 비극의 시각적인 부분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돌린다. 인물들에겐 관심 영역 밖의 일들이었고, 관객들에겐 관심 영역 밖으로 되어버린 지 오래된 비극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더 이상 누군가가 만들어낸 스크린 속 가상의 비극을 보는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떠올려버리는 비극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인 서사나 사건을 스크린에서 과감하게 지워버린다. 우리가 벽 너머의 일들을 떠올려보는 과정에서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자 현실이었다는 지식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구조이므로, 우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끔찍한 일들은 어떤 영화들보다 사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 위험한 상상에는 다른 비극을 다뤘던 영화들과는 달리 관객의 죄의식과 책임이 곁들어있는 법이었다. 앞서 말했듯, 그 상상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이다. 소리는 어떻게든 거리를 둬보겠다는 겨우 담장 하나와 스크린 하나를 넘어 마치 혼(魂)이 산 사람의 발목을 붙잡듯이 들려온다. 없다시피한 서사 대신 카메라의 집요한 동선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대체한다. 수레는 무엇을 끌고 누구에게로 가는지. 그 수레에는 어떤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지. 무엇을 소개해 주고 싶은지. 나의 관심 영역 주위에서 계단을 걷는 일들이나 복도의 불을 끄는 일들, 혹은 계속해서 문을 여닫는 일들이다. 반복적이고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다른 동선처럼 더불어 영화 편집의 리듬마저 비슷한 듯 불일치하다. 그렇지만 하나의 틈새도 없이 정교하게 영화의 변주를 이어나간다. 영화의 절제됨은 오히려 과감하다. 그들의 관심 영역 너머에 벌어지는 일들은 철저히 제외한다. 그 과정에서는 심지어 완전히 다른 방식, 다른 카메라로 담아내기도 한다. 영화의 목표이자 관심 영역은, 서사나 사건, 인물 따위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 영역 너머의 것들을 기어코 끄집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의도적인 무시였거나, 혹은 무지였거나, 나와는 무관하다는 최면에 가깝다시피한 믿음이었건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끼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들과 들려오는 것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읽지 못하는 악보의 노랫말들을 자막으로 보여주는 불편한 친절함에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결국은 영화는 관객과의 필연적인 거리감을 좁히고 싶은 것. 더 나아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쌓인 악(惡)이 식도 너머로 뿜어져 나올 때 누군가에겐 역사 너머로 박제될 미래를, 누군가에겐 잊고 있었던 관심 너머의 영역을 공유하게 만든다. 이제 그 비극의 책임은 비단 영화에게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맡긴다. 우리와는 무관한 이들의 울부짖음이고 다른 이들의 신발에 묻은 피일뿐 우리와는 다른 이야기일 뿐이라는 이기적이고 편의적인 그 믿음. 그것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가장 무섭고 끔찍한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Like457Comment4
이동진 평론가
5.0
이미 다 소화해버린 악에 대하여, 체온으로만 볼 수 있는 선에 관하여.
천수경
5.0
이태원에서 159명이 죽었을 때 시민들의 ‘트라우마’를 염려하는 기사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전국민이 차라리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깊이깊이 입었으면 좋겠다고. 산 자들의 정신 건강이 돌이킬 수 없게 훼손되고 다함께 앓을 수 있게 언론에서 더 주구장창 다루길 바랐다. 잔혹한 현장 사진들이 우리 각막에 영구적으로 새겨지길 바랐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일상에 잊히지 않도록. ‘빨리’나 ‘안전’ 같은 단어만 들어도 5000만 명의 팔다리에 소름이 돋도록.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선 긋지 말고 우리 모두가 당사자이자고. 그래서 ‘싸게 치는’ 선택을 모두가 자동반사처럼 두려워하고, 조금 지겨운 과정이 수반되더라도 사람이 타는 배에 1000톤 넘게 화물이 과적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아파트 청약을 신청하는 사람들의 고막에 그 아파트를 짓다가 죽은 사람의 절규가 들릴 수만 있다면. 뭐가 되었든 가치가 있을 거라고 너무나 믿는다. 설레는 두번째 데이트에서 내가 삼겹살을 싸먹는 바로 그 깻잎을 땄던 이주 노동자가 비닐 하우스에서 얼어죽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이 영화에서 불에 타 죽는 사람들과 달리 아주 고요하게 저승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그런 걸 두번째 데이트에서 언급해도 될까. 따위가 내가 관심 있는 유일한 ‘깻잎 논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안겨주는 감각적인 트라우마에 감사하다. 새 옷을 사려고 쇼핑앱을 들여다보다가, 그 옷들이 생산되는 공장이 안일하게 망가뜨린 강물에서 죽어간 생명들의 호흡이, 그 오염수로 피부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망울이 내게 더 가까이 와닿는 데에 기여하는 경험이다. 영화는 이래서 오감의 예술이다. 이 영화에 유머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국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채상병 특검법이 어떤 폭력을 방지하기 위함인지에 관심 없으면서 이 영화에 만점을 주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이 영화의 블랙 코미디일 것이다. 어딘가에서 무작위로 선택되어 발생한 죽음과, 죽은 군인과 또래인 아들을 생각하여 내부고발했다는 죄로 처벌 받은 박정훈의 용기에, 그 이름 석자에 경탄하지 않을 거라면 이런 영화에 감탄하는 당신의 시끄러운 육성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침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대당하다시피 공부하는 청소년들의 인권 조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거라면, 세상사를 따라잡기엔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명목으로 한없이 미룰 거라면, 이 영화는 영원히 당신을 짝사랑할 수밖에 없다. 웃음을 주는 각종 영상들에서 암담한 기사들까지의 거리는 터치 하나만큼의 거리다. 당신 손가락과 화면 사이의, 깻잎 한 장만큼의 거리. 담장 하나의 차이에 경악했다면 그 정도 거리는 단숨에 넘어서길 바란다. 누가 되었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울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해관계의 구역이자 관심이 가는 곳. 이 영화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그곳이길 바란다.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이들의 존엄이 우리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얽혀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구역이길. 모두의 관심을 붙드는 영역이길. *수많은 의제들 중 굳이 하나의 특검법을 호명한 건 지난 일년 남짓한 시간 동안 국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고 최근 야당의 0순위 사안이기도 했고, 대통령이 수사외압을 행사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아닙니다. 영화 속 히틀러는 이름으로만 등장합니다. 꼭대기의 권력보단 그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직원’으로서의 군인에 집중합니다. 헌신하는 아빠, 아내를 생각하는 남편. 널리고 널린 부류. 한 사람을 갈아끼우는 것보다 구조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유인합니다. 동네 식당이든 학교든 군대든, 시스템에 내는 균열이 불가능했을 때의 풍경은 유사할 것입니다. 저는 구조에 의문을 품은 목소리가 음소거당한 사건을 가져온 것입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수상 소감으로 가자지구의 희생자들과 하마스 공격의 희생자들을 동일선상에 두어 이스라엘 지지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가자 공격을 dehumanization이라고 불렀다. 사람을 3만 명 넘게 죽이는 일이 ‘방어’의 일환으로 불가피하다는 이스라엘의 지난한 주장에 맞서는 일이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문제를 건드리기 전에 그는 수백 번 고민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말렸을 것이다. 소감이 적힌 종이가 그의 손에서 덜덜 떨렸다. 나는 그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지지한다. 사람이 만든 시스템으로 죽은 모든 사람은, 사람의 노력으로 반복을 막을 수 있는 모든 죽음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재원
4.0
결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서 우리 두 눈 옆엔 귀가 달려있나 보다.
이승희
5.0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 한나 아렌트
조조무비
4.0
#🌺 모든게 계획대로 되돌아가던 와중에, 문득 헛구역질이 올라온 이유는.
김필립
5.0
악에 대한 영화에 악을 행하는 장면이 없고 비극을 다룬 영화에 비극이 벌어지는 장면이 없다. 그저 어떤 잔인한 묘사보다 소름끼치는 지루하고 따분하며 현실적인 일상이 있을 뿐.
남연우
4.5
이런 게 진정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정환
5.0
이미지를 압도하는 사운드 디자인, 어떻게든 거리를 둬보겠다는 겨우 담장 하나와 스크린을 넘어 마치 혼(魂)이 산 사람의 발목을 붙잡듯이 들려온다. 우리와는 무관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이기적이고 편의적인 최면에 가까운 믿음. 역사 너머로 박제될 미래와 잊고 있었던 관심 너머의 영역을 공유하며 스크린과 현실의 경계를 부수는 영화의 또 다른 영역을 제시하다. . 평화로움 속에서 섬뜩하게 건네받는 몇 마디의 말들과 분명 이름 모를 이의 육신과 관련된 흔적들이 물 흐르듯 흘러 지나 갈 때면 이를 보고 있는 우리가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곳은 저것들이 흘러갈 하류가 아닌, 근원지인 상류에 따로 있음을 일깨운다. 화목한 가족들의 일상을 보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관심 영역은 다른 곳을 향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은 하나의 미술품처럼 정갈한 이미지들을 압도해버릴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녔다. 온몸의 세포가 반응하듯 신경질적인 음악 이전에,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총 소리와, 영문 모를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들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심지어 (영화가) 보여주지도 않는 것들을 강제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어떻게 직접 보는 것보다 스스로 표상한 것이 더 생생하고 끔찍할 수가 있을까. 제아무리 끔찍한 것을 보더라도 이것이 영화임을 인식할 뿐이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스크린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스크린은 영화에서 펼쳐지는 일들이 현실에 도달할 수 없게끔 걸러주는 거름망 같은 것이다. 영화를 본 후 감정적 경험은 고스란히 앉고 가면서, 동시에 영화와 현실은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다고 느껴지는 거리감은 오직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일 때만 의도적으로 멀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면하고 싶은, 책임지고 싶지 않은, 함부로의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내 일이 아니라며 안심하는 일들 말이다. 어떤 방면에서든 영화가 끔찍함을 직접 보여준다는 것은, 이런 현실이 있다며 억지로 들이밀어 보여주는 것과 같다. 비극의 역사와 반복되면 안 될 역사임을 다소 충격적인 요법을 강행해서라도 강조하고 싶었다지만, 관객은 고개를 돌리거나 눈 감아 버리면 그만이다. 감독이 만든 스크린 속 가상의 비극의 참상을 보면, 그 충격의 여운은 오래 남아있을지는 몰라도 그 감정의 공간에는 관객의 잘못(탓)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끔찍한 참상이 펼쳐지더라도 스크린이라는 필터가 나와는 무관한 세상임을 인식하게 만들어버린다. 뭐랄까, 비극을 다룸에 있어서 조금의 책임이나 죄의식이 있다면 그것들을 봐버린 관객의 몫이 아니라 이를 억지로라도 기어코 보여준 영화에게 더 크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이 영화가 제시하는 비극의 시각적인 부분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돌린다. 인물들에겐 관심 영역 밖의 일들이었고, 관객들에겐 관심 영역 밖으로 되어버린 지 오래된 비극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더 이상 누군가가 만들어낸 스크린 속 가상의 비극을 보는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떠올려버리는 비극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인 서사나 사건을 스크린에서 과감하게 지워버린다. 우리가 벽 너머의 일들을 떠올려보는 과정에서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자 현실이었다는 지식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구조이므로, 우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끔찍한 일들은 어떤 영화들보다 사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 위험한 상상에는 다른 비극을 다뤘던 영화들과는 달리 관객의 죄의식과 책임이 곁들어있는 법이었다. 앞서 말했듯, 그 상상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이다. 소리는 어떻게든 거리를 둬보겠다는 겨우 담장 하나와 스크린 하나를 넘어 마치 혼(魂)이 산 사람의 발목을 붙잡듯이 들려온다. 없다시피한 서사 대신 카메라의 집요한 동선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대체한다. 수레는 무엇을 끌고 누구에게로 가는지. 그 수레에는 어떤 흥미로운 것들이 있을지. 무엇을 소개해 주고 싶은지. 나의 관심 영역 주위에서 계단을 걷는 일들이나 복도의 불을 끄는 일들, 혹은 계속해서 문을 여닫는 일들이다. 반복적이고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다른 동선처럼 더불어 영화 편집의 리듬마저 비슷한 듯 불일치하다. 그렇지만 하나의 틈새도 없이 정교하게 영화의 변주를 이어나간다. 영화의 절제됨은 오히려 과감하다. 그들의 관심 영역 너머에 벌어지는 일들은 철저히 제외한다. 그 과정에서는 심지어 완전히 다른 방식, 다른 카메라로 담아내기도 한다. 영화의 목표이자 관심 영역은, 서사나 사건, 인물 따위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 영역 너머의 것들을 기어코 끄집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의도적인 무시였거나, 혹은 무지였거나, 나와는 무관하다는 최면에 가깝다시피한 믿음이었건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끼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들과 들려오는 것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읽지 못하는 악보의 노랫말들을 자막으로 보여주는 불편한 친절함에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결국은 영화는 관객과의 필연적인 거리감을 좁히고 싶은 것. 더 나아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쌓인 악(惡)이 식도 너머로 뿜어져 나올 때 누군가에겐 역사 너머로 박제될 미래를, 누군가에겐 잊고 있었던 관심 너머의 영역을 공유하게 만든다. 이제 그 비극의 책임은 비단 영화에게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맡긴다. 우리와는 무관한 이들의 울부짖음이고 다른 이들의 신발에 묻은 피일뿐 우리와는 다른 이야기일 뿐이라는 이기적이고 편의적인 그 믿음. 그것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가장 무섭고 끔찍한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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