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onster Calls
A Monster Calls
2016 · Adventure/Drama/Family/Fantasy · UK, Spain, United States
1h 48m · PG-13
A boy imagines a monster that helps him deal with his difficult life and see the world in a different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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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tante
4.0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이론과 영화 <몬스터 콜> 해설 :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꿈의 해석」을 통해 우리의 꿈이 “무의식적 소망의 충족”에 기인한다는 점을 수차례 역설했으며 실제로 히스테리(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할 때 그들의 꿈을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코너’ 역시 한 명의 환자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소망 충족의 수단’으로써의 꿈에 대해 접근해 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코너의 꿈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절벽에 매달린 엄마의 손을 놓쳐버리는 악몽이다. 이 악몽은 영화에서 여러 번 플래시백 되듯 실제로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코너의 꿈이다. 이 꿈을 통해 코너가 충족하려 했던 소망은 무엇인가? 뒤늦게 드러난 것이지만, 사실 코너는 그 꿈에서 엄마의 손을 조금 더 잡을 수 있는 여력이 있었음에도 그에 앞서 놓아 버렸다. 이것은 몬스터가 요구하는 네 번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코너가 끝내 털어놓은 ‘진실’은 바로, 평소 엄마가 병으로 결국은 떠날 거란 걸 알면서도 그 모습을 보며 버티는 게 고통스러웠기에 꿈에서는 엄마의 손을 놓아 버렸다는 것이다. 코너의 소망은 모든 걸 다 끝내 버리고 엄마를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었다. 코너는 꿈일지라도 엄마를 놓아 버린 죄책감에 시달린 채, 그런 마음을 가진 벌로는 죽음도 가당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허나 어느 누가 죄책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다시 프로이트를 찾을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소망)을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으로 분리했다. 전자는 ‘에로스,’ 후자는 ‘타나토스’라 불리며,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본능은 ‘파괴의 본능’으로도 불린다.(‘타노스’는 아마 여기서 따오지 않았을지.) 쉽게 말해 에로스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랑, 타나토스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파괴의 본능이다. 코너의 욕동의 기저에는 이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혼재되어 있다. 아주 거시적인 관점에서 코너의 에로스의 대상은 엄마와 자기 자신, 그리고 타나토스의 대상은 흥미롭게도 역시 엄마와 자기 자신이다. 이는 영화 전후를 관통하는 코너의 악몽으로써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코너는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엄마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엄마가 낫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죽기를 바란다. 따라서 엄마는 코너에게 있어 에로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타나토스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한 코너는 엄마에 대한 그런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진 이유로 죄책감에 시달리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정신적 행위이며, 계속해서 타인에게 처벌 받으려는 생각을 갖는 것 역시 파괴의 본능에 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코너에게는 그 괴로운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못된 생각을 했지만, 괜찮아 라는 자기 위안을 갖고 싶어 한다. 자기 보존의 본능이 공존하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코너 역시 스스로의 타나토스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에로스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제는 두 번째의 꿈, 몬스터가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도 역시 이 이야기들에는 코너의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각각 존재한다. 특히 타나토스는 그 대상이 각 이야기마다 달라지며, 에로스는 몬스터가 이 이야기들을 통해 전하는 교훈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는 살인자이면서도 성군이었던 왕자와 마녀이면서도 살인자가 아니었던 왕비에 대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코너의 타나토스는 할머니에게 향한다. 영화에서 코너는 왠지 모르게 할머니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아마도 할머니의 성격적인 측면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무의식적 소망이 있다. 코너의 죄책감은 자신이 엄마를 죽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는데, 그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코너가 할머니에게 심리적 누명을 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할머니는 아픈 엄마를 다그치는 나쁜 사람이고 그런 점이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무의식적이며 따라서 코너 자신도 모르는 새 할머니에 대한 적대감은 더 커져간다. 이런 맥락은 몬스터가 들려준 첫 번째 이야기에 고스란히 대입된다. 왕비는 왕위를 꿰차려는 목적으로 왕을 독살하고 여왕이 된다. 그녀는 왕좌를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왕자의 결혼을 막으려 그의 연인 역시 살해한다. 왕자는 그에 분노해 병사를 일으키고 여왕을 전복시킨 후 왕이 되어 만인의 추앙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사실 왕비는 비록 마녀의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왕을 독살하지 않았고 왕자의 연인 역시 죽이지 않았다. 왕은 그저 병으로 죽은 것이었으며, 왕이 되려는 생각으로 왕자가 그의 연인을 직접 죽이고 여왕에게 누명을 씌울 음모를 실행한 것이었다. 자신의 왕위를 위해 왕비에게 누명을 씌운 왕자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할머니에게 누명을 씌운 코너는 완벽히 동일시된다. 이 이야기의 반전이 드러나기 전, 코너가 몬스터에게 우리 할머니 좀 어떻게 해 줄 수 없냐고 묻는 대사 역시 코너의 생각 속에서 할머니와 왕비가 악인으로서 동일시 됨을 보여 준다. 또한 이는 코너가 몬스터를 타나토스의 집행자 격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몬스터는 타나토스의 집행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코너에게 교훈을 주는, 에로스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 코너는 몬스터에게 묻는다. 마녀를 왜 살려 주었냐고. 몬스터는 여왕이 살인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살인자인 성군, 살인자가 아닌 마녀. 코너는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어느 쪽에도 선한 사람이 없다며 말이다. 이에 몬스터는 모든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회색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허나 코너는 그래서 나를 할머니로부터 어떻게 구해 줄 거냐 묻는다. 그 질문은 코너가 아직 이 이야기의 함의와 교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몬스터는 네가 구해질 것은 할머니로부터가 아니라는 말을 하며 사라진다. 이는 할머니를 절대악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나, 엄밀히는 코너에게 더 의미 있게 다가가는 말이다. 코너가 엄마에게 품었던 나쁜 마음 역시 순수 악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이 이야기는 코너가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인 자의식을 품게끔 만들기 위한 이야기였던 셈이다. 이어 두 번째 이야기에서 타나토스는 엄격한 룰의 공간인 할머니의 집을 대상으로 한다. 코너는 내 집, 내 방, 내 물건을 필요로 하는 예술적인 인간이다. 그런 코너를 이해하고 여러 모습으로 고무시켰던 엄마와 달리 할머니는 그런 성향의 사람이 아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할머니에게 향했던 적대감은 이제는 할머니의 집으로 이어진다. 이에 코너는 시계를 돌려 때를 앞당겨 몬스터를 소환한다. 여기서 이 시계는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시계로 뛰어난 정확성을 자랑하며 아주 오랫동안 물려 내려온 시계이다. 코너가 이 시계를 임의로 돌려 버린다는 것은 완벽주의적인 정확성과 전통이라는 관습에 반립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게 나타난 몬스터가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는 한 목사와 그의 아픈 두 딸의 이야기이다. 믿음이란 것은 치유의 절반이라 할 만큼 중요하다. 나을 거라는 믿음, 미래에 대한 기대. 그러나 이 목사는 믿음(신앙)이 없는 신자였고, 그의 두 딸은 결국 죽게 된다. 믿음이 없는 목사와 치유되지 못한 두 딸.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 역시 스토리에 그대로 담겨 있다. 엄마의 치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코너에게 그 믿음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후 몬스터는 코너의 타나토스 역시 충실히 충족시켜 준다. 목사의 집을 부순다는 것은 사실 코너가 파괴의 대상으로 삼는 할머니의 집을 깨부수는 일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에서 타나토스는 늘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에게로 향한다. 이 이야기는 한 투명 인간의 이야기이다. 실은 투명 인간도 아닌, 그저 사람들의 관심을 사지 못할 뿐인 한 인간. 왜 아무도 자신을 봐주지 않는 것인지, 내가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지, 의문을 품은 그는 결국 괴물을 불러낸다. 투명 인간과 그 안의 괴물, 이 이야기는 온전히 코너 스스로의 이야기이다. 코너는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겠다는 동급생을 마치 괴물처럼 때려눕힌다. 즉 여기에서는 코너와 몬스터의 동일시가 발생하는 셈이다. 사실 강력한 힘을 지닌 괴물에 대해 코너가 갖는 동경과 동일시는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한 바 있다. 바로 코너가 엄마와 영화 킹콩을 보는 장면이다. 코너는 사람들이 왜 킹콩을 죽이려 하는 거냐며 킹콩이 다 깨부수면 될 텐데, 그것도 산산조각으로 라고 말한다. 여기서 코너는 사람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킹콩을 자신과 동일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킹콩이나 몬스터의 그런 힘을 소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코너는 이런 소망을 이제는 현실에서 충족하게 된다. 말마따나 이 세 번째 이야기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 보여진다. 몬스터를 불러낸다는 것 자체는 마치 그것이 꿈인 듯, 몬스터에 도움을 받는 것처럼 설정되어 있으나 사실상 코너는 이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힘을 지닌 상태인 것이다. 즉 코너가 자기 안의 몬스터를 불러낼 줄 아는 힘에 대한 소망, 다시 말해 자기 보존의 본능, 에로스를 충족한 것이다. 이는 코너의 엄마가 “뭔가 부수고 싶거든 그냥 부숴”라는 말로 전해 주었던 교훈이기도 하다.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가 얘기해야 하는 그의 악몽 이면의 진실이다. 이 이야기에서 코너의 타나토스는 끝내 자기 자신으로 향한다. 코너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소망하고 있다. 이는 코너가 몬스터에게 진실을 털어놓은 후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씬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몬스터는 그런 코너를 살리고, 코너는 왜 자신을 죽이지 않는지 묻는다. 본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며 말이다. 사실 이 ‘벌’이라는 것은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가장 근원적인 타나토스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처벌이라는 자기 파괴 본능인 것이다.(‘처벌’은 ‘도덕적 매저키즘’으로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코너가 할머니의 집을 부순 것도, 친구를 때려눕힌 것도 모두 그의 타나토스에 의해, 즉 처벌에 대한 소망으로 자행한 행위일지 모른다. 프로이트 이론에서의 타나토스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인간의 파괴 본능이지만, 이 영화에서 코너의 타나토스는 유목적적으로 보인다. 그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어떤 유형으로든 벌을 받고 싶은 것이다. 흥미롭게도 코너는 여러 번의 사건에 걸쳐 자신을 벌하지 않을 거냐고 묻지만 그의 아빠도, 교장 선생님도, 몬스터도 하나같이 처벌의 무의미함에 대해 얘기한다. 코너는 이것을 지표로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하는 에로스를 무의식적으로 충족하기도 한다. 즉 네 번째 이야기의,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교훈은 코너 스스로의 무의식적 치유였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의 역학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외부 세계의 기본적인 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몬스터가 코너에게, 그리고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를 말하는 데에 있다. 이는 어린 아이인 코너에게는 성장의 밑거름을, 그리고 관객에게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벗어나는 철학적 ‘꿈’을 선물한다. 한편으로는 관객에 대한 치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나 자신의 심연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귀중한 경험을 얻는다. 우리는 이따금 생각의 너무나 가벼운 가변성을 되뇌이곤 한다. 사실 그것은 인간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만약 상영 한 시간 반가량이 되었을 쯤 코너가 주목 밑에서 잠이 든 쇼트를 끝으로 크레딧이 올라갔다면 가히 최고의 영화로 기억됐을 것이란 생각이 있다. 할머니와의 관계 개선을 직접적으로 보여 준 것은 분명 사족이라 판단된다. 하지만 코너가 엄마의 스케치북에서 몬스터의 그림을 발견한 것은 누구나 내면의 상처가 있고 그 상처와 진실을 들여다보며 직접 마주할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는 일종의 메타포로써 그럴듯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이론이 서사의 전반과 디테일에까지 너무나 잘 녹아들어 생각의 확장을 끝없이 불러일으켰다는 점만으로도 큰 애정이 간다. 루이스 맥더겔의 연기가 대단하기도 했던 영화이다.
이동진 평론가
4.0
가려진 환부를 찾아내 정확히 위무하는 힐링 시네마. 이야기는 이야기되어야 한다.
메뚜리언
4.0
'네가 날 부른 거란다, 코너 오말리'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순간, 마법 같은 일들이 일어났으면 싶을 때가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순간을 맞이한 소년과 그를 찾아온 몬스터에 대한 얘기다. 'Nonstop Looking' 영화를 보고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 생각났다. 비슷한 또래의 주인공이 그랬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현실과 보기 싫은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 사이의 동질감을 느낀 것 같다. 두 편 모두 소설 원작이라는 점도 동일하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보면 떠난 아빠가 스크랩 해둔 신문 속에 ‘notstop looking’ 이라는 문구가 있다. ‘찾는 걸 멈추지 마라, 보는 걸 멈추지 마라’는 짧은 한마디의 문구가 몬스터 콜에서도 말하고 있는 동일한 내용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가지 이야기' (이 밑으론 스포일러 있어요) 몬스터 콜의 소년은 악몽 같은 현실을 겪고 있다. 가정이나 학교 어디하나 마음 둘 곳 없이 불편하고 힘든 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믿을 수 없는 몬스터가 다가와 말을 건낸다. 이 몬스터가 전한 세 가지의 이야기는 인간의 양면성과 이기적이고 비겁한 믿음, 보이지 않으며 존재하는 투명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세 가지 이야기 모두 우리네 삶은 생각보다 모순적이며 복잡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악몽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소년의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사실 몬스터가 얘기한 세 가지 모두 소년의 현실을 투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세 가지 이야기가 끝나면 소년은 진실의 네 번째 이야기를 직접 해야 한다. '네 번째 이야기' 앞서 세 가지의 이야기는 소년이 네 번째 이야기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며 미래를 기대하는 만큼 믿음의 중요함도 알았다. 마지막으로 삶에 있어서 행동의 중요함도 보았다. 드디어 네 번째 이야기. 소년은 진실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것은 소년이 보기 싫은 현실을 마주 보는 일이었다. 소년은 그렇게도 꺼내기 싫던 말을 꺼냄으로써 악몽으로부터 깨어나 잠깐의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제는 마지막 12시 7분으로 가야할 시간이다. 든든한 조력자도 생겼다. 그렇게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을 맞으러 간다. ‘환상은 진실을 보기 위한 거울이다’ 진실을 마주보고 견뎌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실에는 많은 힘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성인이 되서도 마주보기가 두려워 외면하고 사는 진실들이 많다. 이 사회는 어린 아이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환상적인 이야기로 무마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결딜수 없다는 이유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한다. 몬스터콜은 그런 점을 역으로 비틀어 버린다. 환상은 진실을 마주보기 위한 거울이 된다. '두려운게 당연하지. 하지만 넌 이겨낼거야' 아이라 하기엔 너무 크고, 어른이라 하기엔 너무 어린 소년의 과도기는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몬스터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며 이겨낼 수 있을거란 말을 건낸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갈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점에서 잘 들어나는 것 같다. 옆여서 힘든 시기를 지켜봐주고 들어주며 어설픈 충고나 설교가 아닌 공감할 수 있는 작은 위로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해변의 카프카'의 한 구절을 끝으로 맺을까 한다.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살아 남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폭풍이 정말 끝난 건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한가지 폭풍을 겪기 전과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닌 점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폭풍이다.'
지영
4.0
그래. 사실 인생은 모순덩어리인걸. 보내줄 수 없음을 고백했을때가 되어야 결국 보내줄 수 있던것처럼.
HGW XX/7
3.0
결핍이 창조한 슬픈 빙봉과 함께 만들어 낸 아픈 동화. 때로 누군가의 성장은 피와 눈물을 거름삼아 억지로 이뤄진다.
손정빈 기자
4.0
"당신에게도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몬스터 콜'(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은 동화가 아니다. 12살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것, 밤 12시7분에 그를 찾아오는 나무괴물이 존재한다는 게 이 작품을 동화처럼 보이게 할 여지가 있어도 이 영화를 '동화 같다'는 식으로 표현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따위의 동화 속 가르침을 걷어차는 게 '몬스터 콜'이다. 대신 영화는 잘 살기 위해서, 잘 사는 게 벅차다면 최소한 버티기 위해서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스려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이건 교훈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다. '몬스터 콜'을 성장영화로 분류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영화 속에서 성장은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하는 것 혹은 작은 것이라도 깨달음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할텐데, 코너 오말리(루이스 맥더겔)에게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 중요한 건 '발전' 같은 게 아니다. 이 붕괴와 함께 흔들리는 삶을 지키는 것 그것 만이 지상과제다.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아니겠냐고 할지도 모르나 나이가 많다고 해서 덜 흔들리고, 어리다고 해서 더 흔들리는 건 아니다. 코너 오말리는 하루하루가 힘겹다. 사랑하는 엄마는 중병을 얻어 힘겹게 투병 중인데,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혼자 만의 세계에 빠져사는 코너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동급생들은 그를 어떻게든 괴롭히려 든다. 게다가 엄마의 병세가 악화해 입원하면서, 성격이 잘 맞지 않아 싫어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코너는 악몽을 꾸고 깨어난 어느 날 밤 12시7분, 정체 불명의 나무괴물을 만난다. 이 괴물은 앞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새 영화는 형식과 이야기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모범 사례로 앞으로 거듭 언급될 작품이다. 점점 지쳐 더 큰 슬픔에 젖어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현실이 아닌 환상인지도 모른다. 코너 역시 그렇다. 그가 그림을 그리며 미쳐버릴 것만 같은 이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과 나무괴물의 갑작스럽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등장은 결국 같은 말이다. 그러면서도 '몬스터 콜'은 장르영화 틀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이 판타지를 둘러싸고 있는 건 엄중한 현실이다. 환상은 오히려 현실을 더 극명하게 보여줘 어찌됐든 살아가야 하는 지독한 세상을 인정하게 한다. 이 작품은 위로의 영화이고, 위안이 되는 감격적인 108분을 선사하지만, 코너와 관객을 무작정 끌어안아 보듬어주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나무괴물은 부모도, 교사도, 멘토도, 친구도 아니다. 그는 그저 1000년 가까이 인간들을 면밀히 들여다본 냉혹한 선지지다. 나무괴물은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한 뒤 "네 번째 이야기는 네가 해야 한다"고 반복 강조한다. 스스로 고백하라는 것,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 나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 나무괴물은 오히려 가혹하다. 그는 코너를 위로하기는커녕 네 번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세계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이같은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몬스터 콜'이 뜨거운 눈물을 쏟게 하는 건 게으른 긍정이나 싸구려 위로를 뛰어넘는 포용을 보여줘서다. 나무괴물은 코너를 뻔한 윤리와 도덕으로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두려워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순된 감정들을 솔직하게 꺼내놓으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잘못하는 게 아니라고, 그 죄책감까지도 안고 가야 하는 게 삶이라고 말한다. 코너가 반복해서 꾸는 악몽의 가장 두려운 부분이 비로소 드러났을 때, 그제서야 그가 다시 명백한 현실로 복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코너가 세상을 노려보며 화를 낸 이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나도 킹콩처럼 다 부숴버리고 싶다"라는 대사). 그는 먼저 자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고, 사랑하지 못했기에 다른 곳에 연신 화풀이를 해댔다. 나도 모르는 이가 세상을 알 수 있을리가 없다. 나무괴물은 "네가 나를 불러냈다"며 "네 번째 이야기를 하라"고 말하고, 코너는 "난 널 불러낸 적이 없다"며 "나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맞선다. 그러나 몬스터는 코너가 불러낸 것이었고, 그에게는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건 '몬스터 콜'을 보는 모든 관객도 마찬가지다. 손정빈 기자 jb@newsis.com
거리에서
4.5
나를 모르고 부정하는 것 만큼 슬픈 삶도 없다. 주변 환경에 눈이 멀어 내 자신을 못 보는 일이 없길.
영우
4.0
진심으로 위로 받고 싶을 때 꼭 봐야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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