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빈 기자4.5 <오펜하이머>는 빛과 어둠의 영화, 입자와 파동의 영화, 컬러와 흑백의 영화, 삶과 죽음의 영화, 구원과 절멸의 영화, 애국과 매국의 영화, 이론과 실험의 영화, 융합과 분열의 영화, 종전과 개전의 영화… (스포 있음) ‘오펜하이머’는 걸작이다. 이 얘기를 여기서 시작하고 싶다. 첫 번째 핵 폭발 실험, 트리니티 테스트 장면 말이다. 이 시퀀스엔 '오펜하이머'의 정수(精髓)가 있다. 대형 폭발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CG) 없이 만들었다는 게 회자되지만, 이 사실은 생각보다 덜 중요하다. 오히려 일부 관객은 이 대목에서 '오펜하이머'에 실망할지 모른다. 폭발의 스펙터클이 예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폭발의 충격이 아니라 의미다. 폭발 직후 사운드를 제거했다가 후폭풍과 함께 느닷없이 굉음이 터져나오게 한 연출. 이건 오펜하이머의 핵 폭탄 개발에 관한 비유다. 핵 개발이 그의 삶과 전 세계 인류에 끼친 영향은 폭탄 제조 직후보다는 시간이 흐른 뒤 더 큰 파급효과로 나타났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핵 폭발로 생긴 빛이 그 장면을 관측하는 오펜하이머의 얼굴로 쏟아지는 바로 그 신(scene) 역시 지나칠 수 없다. 이건 상징이다. 그 강렬한 빛에는 먼지 알갱이가 섞여 있다. 당연히 이 말을 떠올리게 된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엔 양자 역학이 있다. 그리고 빛의 이중성은 곧 오펜하이머라는 인간과 그가 한 일의 이중성이다. 다시 말해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을 극화하고 시각화하며 인간화한다. 그렇게 '핵폭탄의 아버지'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되는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삶을 구체화한다. 이 시도에는 범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야망이 있다. 그리고 놀런 감독에겐 그 야심을 실현해낼 능력이 있다. 스릴러 영화와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SF 영화와 전쟁 영화에서, 그리고 액션 영화에서도 전에 본 적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던 그는 전기(傳記) 영화에 이르러서도 관객이 이 장르 어떤 영화에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한다. 그렇게 '오펜하이머'의 목표는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업적을 추어올리는 게 아니라 이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파내려가는 게 된다. 놀런 감독은 지적이고 정교하게, 감각적이고 격정적으로 영화를 이끌고 전진하면서 관객 역시 오펜하이머가 한 일에 감탄하기보다 오펜하이머와 그가 한 일에 관해 고민하게 한다. 영화와 영화감독에게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오펜하이머'와 놀런 감독에겐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는 리더십과 추진력이 있다. 단언컨대 '오펜하이머'는 걸작이다. '오펜하이머'의 플롯은 곧 메시지다. 영화에는 1954년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 1959년 오펜하이머의 숙적 루이스 스트로스의 상무 장관 청문회, 오펜하이머가 영국과 독일을 거쳐 미국에 와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1945년 일본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기까지를 그린 세 가지 타임 라인이 있다. 여기에 종종 플래시백도 끼어든다. 이 플롯은 쉽게 할 수 있는 얘기를 부러 어렵게 꼬아놓은 기교가 아니라 이렇게 해야만 오펜하이머라는 모호한 인간을 제한된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가늠해볼 수 있다는 고백이다. 오펜하이머에 관해 얘기하는 게 필연적으로 그가 산 격동의 시대를 조망하는 것이라는 점도 영화를 이같은 플롯 안으로 끌어들인다. 심약한 과학자는 세계 명운을 건 프로젝트를 이끈 리더가 됐고, 영웅으로 칭송 받다가 빨갱이로 전락했으며, 잃어버린 명예를 복권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과 종전, 냉전과 매카시즘 등 시대의 혼란 속에서 그의 삶은 요동쳤다. '오펜하이머'의 비선형 플롯은 그의 행적과 그를 감싼 시대상의 조각을 동시에 띄워놓고 어떤 모양이 나타나는지 지켜보는 모자이크 같다. 컬러와 흑백을 오가는 방식은 3단 플롯과 함께 '오펜하이머'를 떠받치는 또 다른 형식적 기둥이다. 영화는 스트로스 청문회와 그의 회고는 흑백으로,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포함한 나머지 부분은 컬러로 보여준다. 컬러 부분은 오펜하이머의 시점이며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인 주장이 있는 공간, 흑백 부분은 스트로스의 시점이며 상대적으로 더 주관적인 주장이 있는 공간으로 추측된다. '오펜하이머'의 컬러-흑백 구도는 이처럼 직접적이고 명확하기에 마치 빛(컬러)을 지지하고, 어둠(흑백)을 탄핵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연출의 목표는 오히려 어떤 시각으로 보더라도 오펜하이머라는 인간과 그의 삶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청문회에선 이 말이 똑같이 반복된다. "이건 재판이 아니다. 발언에 대한 입증 책임이 없다." 더 객관적이고, 더 주관적일 순 있으나 컬러와 흑백 어디에도 완벽한 진실은 없고 주장만 존재하기에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걸 강조하는 대사일 게다. 놀런 감독은 '오펜하이머' 컬러 부분에 '핵분열'(fission), 흑백 부분엔 '핵융합'(fusion)이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것 뿐만 아니라(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을 통한 폭탄을 개발했으나 핵융합을 통한 폭탄 개발엔 반대했다) 이 영화 스토리 자체를 핵분열과 핵융합 그리고 연쇄 반응(chain reaction)으로 구조화 한다. 다시 말해 '오펜하이머'가 곧 핵폭탄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물리학자들이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에 한 데 모이고 미국이 돈과 기술을 맨해튼 프로젝트에 집중시켜 트리니티 테스트를 성공시키기까지는 핵융합처럼 보인다. 핵폭탄이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얼어붙어 세계가 다시 한 번 쪼개지는 건 마치 핵분열 같고, 핵폭탄이 일본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시작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힘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한 건 오펜하이머가 우려한 연쇄 반응처럼 보인다. 오펜하이머 역시 모두가 한 목소리로 자신을 칭송하던 시기와 모두가 다른 목소리로 자신을 비난하며 난도질하는 시대를 차례로 겪었다. 그리고 이제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엇갈려 있다. '오펜하이머'를 이처럼 세 가지 형식으로 구성한 건 그만큼 오펜하이머가 한 두 가지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얘기다. 그는 핵폭탄을 개발해놓고 핵폭탄에 반대했다. 미국의 청년들을 집에 돌아올 수 있게 했으나 최소 20만명의 일본 민간인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구국의 영웅이었다가 간첩질을 한 빨갱이가 됐다.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공산당원 친구가 많았고, 키티를 사랑했으나 진 태틀록을 잊지 못했으며, 천재 과학자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행정가이고 정치인이자 세일즈맨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히틀러에게 핵폭탄을 선사하지 못한 게 한이라고 말하면서도 핵폭탄을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빛과 어둠의 영화이고, 입자와 파동의 영화이고, 융합과 분열의 영화이고, 컬러와 흑백의 영화이고, 삶과 죽음의 영화이고, 구원과 절멸의 영화이고, 애국과 매국의 영화이고, 이론과 실험의 영화이고, 종전과 개전의 영화이다. 오펜하이머는 트리니티 실험에 성공한 뒤 말한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오펜하이머'의 형식과 구조를 관객이 실감하게 하는 건 결국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배우 킬리언 머피다. 얼굴 클로즈업이 유독 많은 이 작품에서 머피는 구원자이자 파괴자인 프로메테우스의 고뇌를 세공한다(이 영화는 마틴 셰인과 카이 버드가 함께 쓴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원작이다). 머피의 연기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절제돼 있다. 그의 무표정에는 자신만만함을 넘어선 오만함이 읽힌다. 마치 불도저 같은 의지도 감지된다. 두려움과 죄의식이 보인다. 좌절과 한탄이 느껴진다. 분노와 당황이 담겨 있다. 머피의 무표정엔 오만가지 감정이 함께 담있다. 이 영화가 끝내 내보이고 싶었던 게 바로 그런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한다. "제 손에 피가 묻은 느낌입니다." 이 대사는 건조하기 짝이 없게 내뱉어지지만, 관객은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만큼 오래 그리고 깊이 고민하지 않은 듯 단순하기만 한 트루먼 대통령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관객에게 이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 그게 머피가 보여준 연기의 경지다.Like1360Comment16
김현승4.5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별을 보고도 죽음을 떠올린다. / 1. 토마스 엘리엇의 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피카소의 그림. 오펜하이머의 고된 타지 생활을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유명 작품들이 다소 느닷없이 영화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 예술가는 모두 근대에서 현대로의 이행을 이끌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한다면 세 작품은 오펜하이머의 업적이 지닌 혁신성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혹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마찬가지로 넓은 분야에 걸친 그의 영특함과 고고한 취향을 드러낸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두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선을 던져보고자 한다. 인간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쥐여준 프로메테우스, 그 또한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오펜하이머가 매료된 아름다움은 시와 그림에 그치지 않는다. 밤하늘에 마음을 빼앗긴 사내는 종종 텅 빈 대지에서 우두커니 별빛을 즐겼다. 뉴멕시코와 물리학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인간의 호기심을 지피는 법이다. 우주의 원리를 살피는 물리학은 별에 다가가는 그만의 방식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물리학자의 머릿속을 재현하듯 반짝이는 빛 놀음으로 가득하다. 이때 입자와 별의 움직임, 물리학 강의, 그리고 예술이 교차한다. 고도의 이성을 요구하는 자연과학과 아름다움에 헌신하는 예술의 접점은 무엇인가. 영화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넌지시 답을 던진다. 오펜하이머의 연구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초신성의 매혹적인 자태가 지구인에게 줄 수 있는 가치는 오직 찰나의 미적 감성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유용함을 산출하지 못하는 과학은 세계의 ‘진실’을 탐닉하는 예술과 닮았다. 자연과학은 순수과학의 이름으로, 또 응용물리학과 대비되는 순수물리학의 이름으로 예술과 상통한다. 하지만 별을 헤던 소년은 끝내 죽음의 화신으로 전락하고 만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절대 무용(無用)의 세계에서 세속의 최전방으로 추락하는 통로와 같다. 학계에서 로스앨러모스로 거처를 옮기며 주인공은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던 세계의 파괴를 기획한다. 우주의 본질적 힘은 어느새 대량 살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2. 핵폭발은 즐거운 쇼가 될 수 있을까?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다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간의 관심은 단 한 장면에 쏠렸다. 그런데, 이 ‘죽음의 쇼’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의 관객만이 아니다. 극 중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도 관객만큼이나 대폭발의 스펙터클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착용한 고글이 3D 안경을 연상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공적인 실험 결과에 과학자들은 환호하며 즐거워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화관의 관객에게 폭발이나 화구 자체에 그다지 큰 힘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폭발의 순간에는 오직 미세한 숨소리와 죽음의 신이 재림했다는 목소리뿐이다. 스펙터클은 오히려 거대한 폭발 이후의 후폭풍이 관객을 덮칠 때 본격화된다. 이로써 극 중 관객과 현실의 관객은 각각 환희와 공포의 영역으로 분리된다. 연설 장면에 이르러 오펜하이머는 현실의 관객에 더욱 가까워진다. 줄곧 주인공을 괴롭히던 발 구르는 소리가 가시화된다. 그의 힘찬 연설에 영화 속 청중은 연신 환호를 내지른다. 하지만 정작 연설의 주인공은 그 환호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환상을 통해 피폭된 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시작된 원죄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낙진에 구토한다. 연설장에서 공포를 느끼는 인물은 오펜하이머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뿐이다. 별을 사랑하던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손에 묻은 피 냄새에 괴로워한다. 죄책감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인지하고 난 뒤에야 느껴진다는 점에서 후폭풍과 낙진을 닮았다. <오펜하이머>는 세계대전 시기의 국제정세, 불륜 등 다양한 레이어를 지닌다. 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심리적 동력은 원자폭탄의 아버지를 고뇌에 빠뜨린 딜레마이다. 영화는 개별적인 시퀀스는 물론 전체적인 플롯의 구성에서마저 ‘후폭풍과 낙진’의 방식을 통해 효과적으로 주인공의 죄책감을 가시화한다. <오펜하이머>가 한 편의 핵폭발이라면, 3막은 오펜하이머를 덮친 낙진과 같다. 무대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워싱턴으로 전환되며 정쟁이 본격화된다. 옳은 일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몇몇 사람들이 이념에 잠식된 난잡한 재판을 바로잡는다. 그러나 영화는 세상에 희망이 남아있다는 메시지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불타오르는 지구의 이미지에 오펜하이머는 눈을 질끈 감는다. 2023년, 오펜하이머가 경고한 파멸의 연쇄작용은 여전하다. 3. “The world forever changes.” 포스터의 로그라인에는 인류 역사를 핵폭탄 발명 전후로 나누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인류는 여전히 핵무기의 자장 속에 있다. 트리니티 실험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적절한 평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지목한 파국의 원흉은 원자폭탄 자체가 아니다.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이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이전에도 인류는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마주했다. 그보다 더 전엔 로스앨러모스에서 쫓겨난 인디언들이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원폭 투하로 자립적인 독립에 실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강제 노역 중인 수많은 재일조선인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인피폭자의 수는 일본인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지도어 박사가 경고했듯, 폭탄은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발명품이 인류의 전쟁을 종식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과거에 기관총이 발명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류는 수소폭탄을 비롯한 무한 군비 경쟁 시대에 돌입한다.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오펜하이머>와 매우 유사한 주제 의식을 갖고 있다. 이념 대립이 인류의 종말을 앞당기고, 미사일 폭격이 평화로운 구름의 이미지를 가로지른다. 극 중 나치 출신 무기 개발자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말한다. “심판의 무기는 작은 원자력만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만들려는 의지입니다.” / 230810 용산 언론시사회 1회차 230822 상암 메가박스 2회차Like727Comment12
이원빈
4.5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자기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니. 로버트는 얼마나 좋았을까.
손정빈 기자
4.5
<오펜하이머>는 빛과 어둠의 영화, 입자와 파동의 영화, 컬러와 흑백의 영화, 삶과 죽음의 영화, 구원과 절멸의 영화, 애국과 매국의 영화, 이론과 실험의 영화, 융합과 분열의 영화, 종전과 개전의 영화… (스포 있음) ‘오펜하이머’는 걸작이다. 이 얘기를 여기서 시작하고 싶다. 첫 번째 핵 폭발 실험, 트리니티 테스트 장면 말이다. 이 시퀀스엔 '오펜하이머'의 정수(精髓)가 있다. 대형 폭발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CG) 없이 만들었다는 게 회자되지만, 이 사실은 생각보다 덜 중요하다. 오히려 일부 관객은 이 대목에서 '오펜하이머'에 실망할지 모른다. 폭발의 스펙터클이 예상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폭발의 충격이 아니라 의미다. 폭발 직후 사운드를 제거했다가 후폭풍과 함께 느닷없이 굉음이 터져나오게 한 연출. 이건 오펜하이머의 핵 폭탄 개발에 관한 비유다. 핵 개발이 그의 삶과 전 세계 인류에 끼친 영향은 폭탄 제조 직후보다는 시간이 흐른 뒤 더 큰 파급효과로 나타났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핵 폭발로 생긴 빛이 그 장면을 관측하는 오펜하이머의 얼굴로 쏟아지는 바로 그 신(scene) 역시 지나칠 수 없다. 이건 상징이다. 그 강렬한 빛에는 먼지 알갱이가 섞여 있다. 당연히 이 말을 떠올리게 된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엔 양자 역학이 있다. 그리고 빛의 이중성은 곧 오펜하이머라는 인간과 그가 한 일의 이중성이다. 다시 말해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을 극화하고 시각화하며 인간화한다. 그렇게 '핵폭탄의 아버지'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되는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삶을 구체화한다. 이 시도에는 범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야망이 있다. 그리고 놀런 감독에겐 그 야심을 실현해낼 능력이 있다. 스릴러 영화와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SF 영화와 전쟁 영화에서, 그리고 액션 영화에서도 전에 본 적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던 그는 전기(傳記) 영화에 이르러서도 관객이 이 장르 어떤 영화에서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한다. 그렇게 '오펜하이머'의 목표는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업적을 추어올리는 게 아니라 이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파내려가는 게 된다. 놀런 감독은 지적이고 정교하게, 감각적이고 격정적으로 영화를 이끌고 전진하면서 관객 역시 오펜하이머가 한 일에 감탄하기보다 오펜하이머와 그가 한 일에 관해 고민하게 한다. 영화와 영화감독에게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오펜하이머'와 놀런 감독에겐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는 리더십과 추진력이 있다. 단언컨대 '오펜하이머'는 걸작이다. '오펜하이머'의 플롯은 곧 메시지다. 영화에는 1954년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 1959년 오펜하이머의 숙적 루이스 스트로스의 상무 장관 청문회, 오펜하이머가 영국과 독일을 거쳐 미국에 와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1945년 일본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기까지를 그린 세 가지 타임 라인이 있다. 여기에 종종 플래시백도 끼어든다. 이 플롯은 쉽게 할 수 있는 얘기를 부러 어렵게 꼬아놓은 기교가 아니라 이렇게 해야만 오펜하이머라는 모호한 인간을 제한된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가늠해볼 수 있다는 고백이다. 오펜하이머에 관해 얘기하는 게 필연적으로 그가 산 격동의 시대를 조망하는 것이라는 점도 영화를 이같은 플롯 안으로 끌어들인다. 심약한 과학자는 세계 명운을 건 프로젝트를 이끈 리더가 됐고, 영웅으로 칭송 받다가 빨갱이로 전락했으며, 잃어버린 명예를 복권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과 종전, 냉전과 매카시즘 등 시대의 혼란 속에서 그의 삶은 요동쳤다. '오펜하이머'의 비선형 플롯은 그의 행적과 그를 감싼 시대상의 조각을 동시에 띄워놓고 어떤 모양이 나타나는지 지켜보는 모자이크 같다. 컬러와 흑백을 오가는 방식은 3단 플롯과 함께 '오펜하이머'를 떠받치는 또 다른 형식적 기둥이다. 영화는 스트로스 청문회와 그의 회고는 흑백으로, 오펜하이머 청문회를 포함한 나머지 부분은 컬러로 보여준다. 컬러 부분은 오펜하이머의 시점이며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인 주장이 있는 공간, 흑백 부분은 스트로스의 시점이며 상대적으로 더 주관적인 주장이 있는 공간으로 추측된다. '오펜하이머'의 컬러-흑백 구도는 이처럼 직접적이고 명확하기에 마치 빛(컬러)을 지지하고, 어둠(흑백)을 탄핵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연출의 목표는 오히려 어떤 시각으로 보더라도 오펜하이머라는 인간과 그의 삶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의 청문회에선 이 말이 똑같이 반복된다. "이건 재판이 아니다. 발언에 대한 입증 책임이 없다." 더 객관적이고, 더 주관적일 순 있으나 컬러와 흑백 어디에도 완벽한 진실은 없고 주장만 존재하기에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걸 강조하는 대사일 게다. 놀런 감독은 '오펜하이머' 컬러 부분에 '핵분열'(fission), 흑백 부분엔 '핵융합'(fusion)이라는 부제를 달아놓은 것 뿐만 아니라(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을 통한 폭탄을 개발했으나 핵융합을 통한 폭탄 개발엔 반대했다) 이 영화 스토리 자체를 핵분열과 핵융합 그리고 연쇄 반응(chain reaction)으로 구조화 한다. 다시 말해 '오펜하이머'가 곧 핵폭탄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물리학자들이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에 한 데 모이고 미국이 돈과 기술을 맨해튼 프로젝트에 집중시켜 트리니티 테스트를 성공시키기까지는 핵융합처럼 보인다. 핵폭탄이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얼어붙어 세계가 다시 한 번 쪼개지는 건 마치 핵분열 같고, 핵폭탄이 일본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시작으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힘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한 건 오펜하이머가 우려한 연쇄 반응처럼 보인다. 오펜하이머 역시 모두가 한 목소리로 자신을 칭송하던 시기와 모두가 다른 목소리로 자신을 비난하며 난도질하는 시대를 차례로 겪었다. 그리고 이제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엇갈려 있다. '오펜하이머'를 이처럼 세 가지 형식으로 구성한 건 그만큼 오펜하이머가 한 두 가지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얘기다. 그는 핵폭탄을 개발해놓고 핵폭탄에 반대했다. 미국의 청년들을 집에 돌아올 수 있게 했으나 최소 20만명의 일본 민간인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구국의 영웅이었다가 간첩질을 한 빨갱이가 됐다.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공산당원 친구가 많았고, 키티를 사랑했으나 진 태틀록을 잊지 못했으며, 천재 과학자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행정가이고 정치인이자 세일즈맨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히틀러에게 핵폭탄을 선사하지 못한 게 한이라고 말하면서도 핵폭탄을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빛과 어둠의 영화이고, 입자와 파동의 영화이고, 융합과 분열의 영화이고, 컬러와 흑백의 영화이고, 삶과 죽음의 영화이고, 구원과 절멸의 영화이고, 애국과 매국의 영화이고, 이론과 실험의 영화이고, 종전과 개전의 영화이다. 오펜하이머는 트리니티 실험에 성공한 뒤 말한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오펜하이머'의 형식과 구조를 관객이 실감하게 하는 건 결국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배우 킬리언 머피다. 얼굴 클로즈업이 유독 많은 이 작품에서 머피는 구원자이자 파괴자인 프로메테우스의 고뇌를 세공한다(이 영화는 마틴 셰인과 카이 버드가 함께 쓴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원작이다). 머피의 연기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절제돼 있다. 그의 무표정에는 자신만만함을 넘어선 오만함이 읽힌다. 마치 불도저 같은 의지도 감지된다. 두려움과 죄의식이 보인다. 좌절과 한탄이 느껴진다. 분노와 당황이 담겨 있다. 머피의 무표정엔 오만가지 감정이 함께 담있다. 이 영화가 끝내 내보이고 싶었던 게 바로 그런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한다. "제 손에 피가 묻은 느낌입니다." 이 대사는 건조하기 짝이 없게 내뱉어지지만, 관객은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만큼 오래 그리고 깊이 고민하지 않은 듯 단순하기만 한 트루먼 대통령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관객에게 이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 그게 머피가 보여준 연기의 경지다.
이동진 평론가
4.5
구조와 플롯 자체가 강력한 핵폭탄이다.
팬서
4.5
마치 핵폭탄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맹렬한 연쇄작용의 내러티브. . . . 수정 전) 8월 14일 입대 진짜 피눈물나네 ㅋㅋㅋㅋ
STONE
3.5
This may contain spoiler!!
김현승
4.5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별을 보고도 죽음을 떠올린다. / 1. 토마스 엘리엇의 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피카소의 그림. 오펜하이머의 고된 타지 생활을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유명 작품들이 다소 느닷없이 영화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 예술가는 모두 근대에서 현대로의 이행을 이끌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한다면 세 작품은 오펜하이머의 업적이 지닌 혁신성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혹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마찬가지로 넓은 분야에 걸친 그의 영특함과 고고한 취향을 드러낸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두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선을 던져보고자 한다. 인간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쥐여준 프로메테우스, 그 또한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오펜하이머가 매료된 아름다움은 시와 그림에 그치지 않는다. 밤하늘에 마음을 빼앗긴 사내는 종종 텅 빈 대지에서 우두커니 별빛을 즐겼다. 뉴멕시코와 물리학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인간의 호기심을 지피는 법이다. 우주의 원리를 살피는 물리학은 별에 다가가는 그만의 방식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물리학자의 머릿속을 재현하듯 반짝이는 빛 놀음으로 가득하다. 이때 입자와 별의 움직임, 물리학 강의, 그리고 예술이 교차한다. 고도의 이성을 요구하는 자연과학과 아름다움에 헌신하는 예술의 접점은 무엇인가. 영화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넌지시 답을 던진다. 오펜하이머의 연구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초신성의 매혹적인 자태가 지구인에게 줄 수 있는 가치는 오직 찰나의 미적 감성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유용함을 산출하지 못하는 과학은 세계의 ‘진실’을 탐닉하는 예술과 닮았다. 자연과학은 순수과학의 이름으로, 또 응용물리학과 대비되는 순수물리학의 이름으로 예술과 상통한다. 하지만 별을 헤던 소년은 끝내 죽음의 화신으로 전락하고 만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절대 무용(無用)의 세계에서 세속의 최전방으로 추락하는 통로와 같다. 학계에서 로스앨러모스로 거처를 옮기며 주인공은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던 세계의 파괴를 기획한다. 우주의 본질적 힘은 어느새 대량 살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2. 핵폭발은 즐거운 쇼가 될 수 있을까?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다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간의 관심은 단 한 장면에 쏠렸다. 그런데, 이 ‘죽음의 쇼’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의 관객만이 아니다. 극 중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도 관객만큼이나 대폭발의 스펙터클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착용한 고글이 3D 안경을 연상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공적인 실험 결과에 과학자들은 환호하며 즐거워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화관의 관객에게 폭발이나 화구 자체에 그다지 큰 힘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폭발의 순간에는 오직 미세한 숨소리와 죽음의 신이 재림했다는 목소리뿐이다. 스펙터클은 오히려 거대한 폭발 이후의 후폭풍이 관객을 덮칠 때 본격화된다. 이로써 극 중 관객과 현실의 관객은 각각 환희와 공포의 영역으로 분리된다. 연설 장면에 이르러 오펜하이머는 현실의 관객에 더욱 가까워진다. 줄곧 주인공을 괴롭히던 발 구르는 소리가 가시화된다. 그의 힘찬 연설에 영화 속 청중은 연신 환호를 내지른다. 하지만 정작 연설의 주인공은 그 환호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환상을 통해 피폭된 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시작된 원죄는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고 낙진에 구토한다. 연설장에서 공포를 느끼는 인물은 오펜하이머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뿐이다. 별을 사랑하던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손에 묻은 피 냄새에 괴로워한다. 죄책감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인지하고 난 뒤에야 느껴진다는 점에서 후폭풍과 낙진을 닮았다. <오펜하이머>는 세계대전 시기의 국제정세, 불륜 등 다양한 레이어를 지닌다. 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심리적 동력은 원자폭탄의 아버지를 고뇌에 빠뜨린 딜레마이다. 영화는 개별적인 시퀀스는 물론 전체적인 플롯의 구성에서마저 ‘후폭풍과 낙진’의 방식을 통해 효과적으로 주인공의 죄책감을 가시화한다. <오펜하이머>가 한 편의 핵폭발이라면, 3막은 오펜하이머를 덮친 낙진과 같다. 무대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워싱턴으로 전환되며 정쟁이 본격화된다. 옳은 일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몇몇 사람들이 이념에 잠식된 난잡한 재판을 바로잡는다. 그러나 영화는 세상에 희망이 남아있다는 메시지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불타오르는 지구의 이미지에 오펜하이머는 눈을 질끈 감는다. 2023년, 오펜하이머가 경고한 파멸의 연쇄작용은 여전하다. 3. “The world forever changes.” 포스터의 로그라인에는 인류 역사를 핵폭탄 발명 전후로 나누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인류는 여전히 핵무기의 자장 속에 있다. 트리니티 실험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적절한 평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지목한 파국의 원흉은 원자폭탄 자체가 아니다. 이념에 사로잡힌 인간이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 이전에도 인류는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마주했다. 그보다 더 전엔 로스앨러모스에서 쫓겨난 인디언들이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원폭 투하로 자립적인 독립에 실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강제 노역 중인 수많은 재일조선인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인피폭자의 수는 일본인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지도어 박사가 경고했듯, 폭탄은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발명품이 인류의 전쟁을 종식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과거에 기관총이 발명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류는 수소폭탄을 비롯한 무한 군비 경쟁 시대에 돌입한다.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오펜하이머>와 매우 유사한 주제 의식을 갖고 있다. 이념 대립이 인류의 종말을 앞당기고, 미사일 폭격이 평화로운 구름의 이미지를 가로지른다. 극 중 나치 출신 무기 개발자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말한다. “심판의 무기는 작은 원자력만으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만들려는 의지입니다.” / 230810 용산 언론시사회 1회차 230822 상암 메가박스 2회차
해일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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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디셀러
5.0
세상의 거시적인 패러다임의 시작은 모두 인간의 미시적인 사색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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