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sif, a railwayman, and his son Elie fall in love with the beautiful Norma (whom Sisif rescued from a train crash when a baby and raised as his daughter), with tragic results. Originally running over nine hours, its recent editions have been cut to about four hours.
Jay Oh
4.0
굴러가기 시작한 바퀴는 운명과도 같이 계속해 굴러간다. 당시에 이런 연출과 편집을 했다는 것도 신기하고, 그때 선보인 영화 문법을 아직 쓰고 있다는 것도 놀라울 따름. The wheels of cinema that started then are still turning today.
떼오
3.5
프랑스 인상주의 작품 중 하나. 싱글 프레임 쇼트를 사용한 최초의 영화.
Talk
3.0
광주 극장에서 아벨 강스의 <철로의 백장미>를 보면서 떠오른 것들. 이 영화에는 제목의 문제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원제인 <바퀴>외의 제목으로 부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철로의 백장미>는 영화를 통속적인 내러티브의 외피에 갖히게 만든다. '백장미'는 가련한 여주인공을 상징한다. '철로'는 빈한한 장소에서의 고난이라는 관습적인 모티프를 호명한다. 결국 <철로의 장미>는 (그리피스의 <흩어진 꽃잎>을 연상시키는) 내러티브의 영화로 기억된다. 반면 <바퀴>는 흥미로운 제목이다. 우리를 도상과 운동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영화는 흔히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 하에 있는 영화로 기억된다. 이 같은 배경 지식 역시 우리가 화면과 내러티브의 대립구도에서 화면의 우위를 선언하도록 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인상주의 영화'인 이유는 뭘까? 회화에서의 인상주의는 색채를 회화의 본질로 끌어올리지 않았던가? 이 영화는 흑백인데 어떻게 이것이 '인상주의'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인상주의의 특징인 색채에 대한 탐구가 본질적으로는 내러티브에 대한 화면의 우위와 같은 성격을 띄는 것이라 믿는다. 인상주의의 영향은 다음 세대에 세잔과 큐비즘을 촉발시켰다. 형태와 색체는 서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결국 인상주의는 화면의 어느 한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측면을 동시에 부상시키게 되었다. 기존의 회화가 화면과 그 내용이라는 이항대립을 기반으로 존재했다면, 인상주의의 등장은 내용은 무엇이든지 상관없지만 화면을 구성함에 있어서 어느 한 측면을 강조하는 사조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색체와 형태라는 이분법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방법론이 인상주의 회화와 다른 것에 의구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했을까? 우리는 그 화면 각각을 하나의 회화적 구성품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시네마토그라프가 아니며 노골적인 몽타주를 사용하고 있지도 않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화면의 physica이다. 결국 영화의 제목 <바퀴>는 운동성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면 속의 개개 구성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1. 기계는 회전한다. 시지프라는 주인공의 이름은 당연히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를 염두에 둔 것이다. 신화적인 내러티브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긴 하지만, 이를 뒤로 미루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목과 동일하게 바퀴이기 때문이다. 바퀴와 그것의 원 운동은 근대 문명을 지탱하는 기계 동력을 기호화한 것이다. 영화는 4부 구성이지만, 공간적 배경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후부 2부 구성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신화 속의 시지프는 산 위로 (바위를) 굴리는 자다. 영화는 이 구르는 바위의 이미지를 기계 동력의 원운동과 병치한다. 1부에서 원 운동이 제시된다면, 2부에서는 '산 위로' 열차가 굴러감으로써 근대적 지향을 제시한다. 이것은 1부의 죄악, 2부의 속죄라는 도덕적인 내러티브와 결합한다. 시지프가 산 위로 바위를 굴리며 속죄하는 것처럼, 근대 문명도 자신의 죄악을 속죄할 의무를 갖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집요할 정도로 원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영화의 1부에서 내가 찾은 예시들을 보자. 1. 화면은 원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때로 이는 화면을 가득 메우는 바퀴나 시계, 혹은 열차의 계기판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2. 열차 사고에서 아이를 구한다. 바퀴는 대량 인명사고의 비극과 연결된다. 또한 노마는 조종사의 집에서 열차 장난감으로 사고를 재현한다. 이는 미래를 예견한다. 3. 바퀴에서 시계로 연결되는 이미지들. 기계의 원 운동은 현대적인 시간과 연결된다. 시지프는 노마를 희롱한 남자의 목을 조르지만 6시 7분 발 열차가 도착해 그를 보내줘야 했다. 시간에 종속되는 모습. 4. 술집 장면. 지하실에서 직원이 수직으로 튀어나오고 술집 밖에서 들어온 취한 남자가 빙글 빙글 돌며 술집 안을 엉망으로 만든다. 5. 노르마와 오빠는 장난치다가 서로를 잡으려고 테이블 주위를 둥글게 돈다. 노마는 장난의 와중에 기차에 치여 죽을 뻔 한다. 6. 남자가 배수 펌프의 원형 레버를 잘못 조작해 흠뻑 젖는다. 7. 기차의 전면부 원형 엔진에 사람이 갇힌다. 그는 연기에 질식할 뻔 한다. 8. 시지프는 노마의 팬티를 엿보려 한다. 치마가 원형으로 다리를 둘러싼다. 9. 집 앞 우물과 그곳에 비친 달. 시지프는 그곳에서 스스로를 질식시키려 한다. 이렇듯 1부에서 원은 비극을 상징한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인 죄악이면서 근대적 시간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기계 시대의 새로운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짓밟는 폭력적 기재이다. 이제 세계는 사람이 아닌 기계동력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기계에 맞추거나, 아니면 파멸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근대의 원죄이다. 1부의 마지막 장면은 딸의 이름을 붙인 노마호를 스스로 폐차 시킨 후에 시지프가 차고지에서 열차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이다. 카메라가 그의 주변을 회전하며 소용돌이처럼 헤어나올 수 없는 원죄를 상기시킨다. 2부로 넘어가기 전에 이 영화가 제기하는 또 다른 감각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겠다. 원 운동이 시각적인 문제라면, 열차의 또 다른 속성이 근대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답답함을 느낄 때 일반적으로 후각이라는 감각을 떠올린다. 그것은 아마 해소될 수 없는 문제는 많은 경우에 벅차오르는 호흡이라는 신체적 현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헤어나올 수 없는 원죄라는 관념도 많은 경우에 후각적인 것이다. 영화에서는 질식에 대한 후각적인 공포라 할 만한 것이 드러난다. 시지프는 노마를 희롱한 사람의 목을 조르고, 연기는 사람을 질식케하며, 우물에서 질식사하는 것으로 속죄하려 한다. 원죄와 질식의 연관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열차의 굴뚝에서 피어나오는 연기에 노마의 얼굴이 이중 인화되는 장면이다. 이랬던 원이 2부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이제 열차는 산을 오른다. 평지를 굴러갈 뿐이던 돌이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춤추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원은 스위스의 산악을 끝까지 오른다. 이는 근대적 비극이 극복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시지프가 애지중지하던 열차 모형이 파괴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영화의 초반에 노마가 열차 장난감으로 사고를 재현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같은 이미지임에도 각각 비극과 탈속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 이미지를 러다이트적인, 기계 문명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걸 안다. (1. 노마가 열차에 노마3라는 이름을 붙인 시지프에게, 기계가 아닌 자신이 노마라고 부르짖는 장면 2.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둥글게 모여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원 운동) 그러나 영화가 근대를 유일한 죄의 근원으로 제시한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을 배경으로 열차의 '바퀴'가 이중인화되는 장면은 원이라는 새로운 근대적 운동에 사람들이 적응했음을 보여준다. 근대 문명의 죄악을 속죄하고, 기계적 리듬보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우선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근대적 리듬에 적응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근거가 빈약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엔 내러티브에 기반하여 영화에 접근해 보려 한다. 내러티브 1. 서론 : 시지프스 테마 영화의 주인공은 시지프.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에 대응한다. 그는 신에 대항한 벌로 자신의 죄악을 상징하는 바위를 산 위로 굴려야 하는 자다. 그는 바위를 산 위로 굴러 올리는 순간 해방되지만 신에 의해서 그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영원한 형벌이 이어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 바위는 열차의 바퀴라는 이미지로 변형되었다. 1부에서 바퀴는 시지프의 죄악을 상징하고 2부에서는 그 죄악을 산 위로 밀어올리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리뷰에 다루었다. 시지프스 테마의 본질은 '오르지 못하는 자'다. 시지프의 딸 노마의 위치가 항상 공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1. 1부의 집에서 노마의 방은 2층에 위치한다. 시지프는 몇 번이고 딸을 겁탈할지 고민하지만 계단을 끝까지 오르지 못한다. 2. 2부에서 아들이 바이올린 제작법을 발표하러 공연장을 찾는다. 시지프는 아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다가 자신은 그런 높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계단을 내려온다. 그런데 그 공연장에는 노마가 있었다. 시지프는 이번에도 노마 앞에서 좌절 당한다. 3. 스위스의 산간 속 오두막집. 노마는 남편과 오빠의 죽음 이후 아버지와 살게 된다. 노마의 공간은 집의 나머지 부분보다 높아서 짧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이것은 신화적인 테마이면서 어쩌면 계급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그 증거는 영화 곳곳에서 산재해 있는데, 앞서 언급한 바이올린 발표회 장면이 그 한 예다. 시지프의 아들은 바이올린을 통해 명성을 얻고 상류층에 편입된다. 노마의 결혼은 남자의 자본과 연관되어 이해된다. 그녀는 돈 때문에 결혼한 것이고, 가난이 그들을 '질식시키기' 전에 팔려나간 것이다. 이전 리뷰에서 근대 문명의 원 운동이 질식과 연관되어 이해된다고 했었다. 그 기재는 가난함이고 계급의 문제다. 남매는 스위스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아버지를 버려두고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노마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을 때, 상류층의 두 남자는 역시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시지프스 - 프롤레타리아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2. 근친상간과 오이디푸스적 테마 그렇다면 시지프스 - 우리의 현대인 반영웅 - 의 죄성은 무엇일까. 바로 딸을 탐했고 그녀를 넘보던 두 남자가 죽기를 간절히 바랬다는 것이다. 시지프의 딸인 노마를 넘보던 두 남자는 그녀의 오빠와 남편이다. 둘은 서로 싸우다가 죽음에 이르지만 그 책임은 시지프에게 있다. 그 이유는 1차적으로는 시간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차의 바퀴가 근대적인 시간을 상징한다는 설명은 지난 리뷰에서 했었다. 시지프는 그의 아들이 죽은 직후에 사건 현장에 도착한다. 새로운 근대적인 리듬하에서 죄는 때로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글의 후반부에 다루게 될 것인데, 바로 시지프가 대속자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뒤에 설명하겠다. 근친상간하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신화가 있다.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는데, 시지프의 눈이 영화에서 먼 것 역시 명백하게 이 전통을 따르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말한다. 이 눈이 나에게 죄를 짓게 했구나. 이는 영화 속의 시지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네를 타는 노마의 치마 속을 훔쳐보는 장면, 그리고 플래시백으로 연장되는 시각적인 묘사들이 시지프 - 오이디푸스의 죄성을 나타낸다. 3. 죄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자 예수. 요약하면 우리는 시지프스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죄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자.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가? 기독교 문화의 일부였던 사람이라면 보다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 죄를 짊어지고 산(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자의 이름은 예수다. 영화 속에서 시지프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아들이 죽은 산을 오른다. 작중 처음으로 시지프는 산의 정상에 도달한다. 이것은 그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아들과 사위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는 의미에서 대속자이기도 하다. 타인의 죄를 대신 해소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지프 - 예수는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선지자인가. 성경의 창세 신화와 관련된 모티프가 등장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 창세기 27장 중에서] 열차가 시지프, 혹은 노마와 이중 인화되는 장면들이 있다. 열차의 증기는 노마의 얼굴과 겹쳐보이며, 열차는 곧 시지프와 동일시된다. 이제 우리는 영화가 기독교적 창세 신화를 재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신은 기계이고 이는 곧 근대성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와 닮아있다. 4. 유혹하는 자 앞선 문단이 다소 과격한 주장처럼 느껴질 수 있다. 너무 과대해석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영화를 면밀히 본다면 영화가 일종의 근대성의 창세 신화로 해석되어야 할 이유를 알 수 있다. 1) 흑염소 영화의 초반에 노마는 흑염소를 타고 등장한다. 흑염소는 악마의 유명한 상징이며, 섹슈얼리티의 암시이기도 하다. 아들과 사위가 죽자 시지프는 노마를 비난한다. "너 때문에 아들이 죽었어, 썩 꺼져버려!" 2) 추방의 테마 영화의 1부는 되풀이해서 추방의 테마를 등장시킨다. 누군가는 집에서 떠나야 한다. 노마와 아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지프는 이해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딸에게 음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결국 딸은 철로로 둘러싸인 낙원 - 집을 그리워 함에도 그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버지도 낙원을 떠나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3) 원 운동 앞선 리뷰에서도 언급됐던 장면이 결말의 원을 이루고 춤추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퀴와 함께 이중인화되면서 유사성을 강조하는 수법에 의해 부각되고 있다. 우리가 기계를 근대의 신으로 보는 견해를 취한다면 이 장면은 자연스레 피조물과 신의 유사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4) 검댕과 흰색. 영화의 1부에서 시지프는 얼굴에 검은 연기를 뒤집어 쓰지 않고는 부끄러워서 딸을 볼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창세기에서 죄를 범한 인간이 신 앞에서 부끄러워 한 것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속죄가 이루어진 영화의 결말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게 칠해진다. 시지프의 시야는 하얗게 멀어버리고, 노마는 집을 온통 하얗게 칠한다. 요약해보자. 근대성이 탄생했고, 기계적인 원 운동이 그것의 새로운 신이다. 시지프와 노마는 각각 죄를 범한 아담과 이브였다가, 시지프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벗어던진다. 5. 에필로그 - 미소지니 영화의 인터미션 시간에 여성 관객들이 영화의 시각에 당혹을 표하는 것을 엿들었다. 물론 영화의 여성관은 고리타분하다. 여자는 남자를 유혹한 존재로 등장하는데, 사실 작중의 노마가 일방적인 희생양에 가깝다는 것을 감안하면 공감하기 힘들다. 이는 성경의 창세기를 모티프 삼았기 때문에 더욱 대두되는 문제다. 고대 근동의 성 관념을 그대로 현대에 끌고 온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냥 100년 전 영화니까 그런 셈 치자. 이렇게 변명할 수 밖에. 이제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영화임은 여러모로 분명하다.
우울한cut과 유쾌한song
0.5
눈 먼자들의 영화
이영민
5.0
흑백영화, 7시간... 아, 취적 취적
Sg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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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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