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까모까3.50. 근 4달동안 영화를 한편밖에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타가 왔다. 위장병에 스트레스가 쥐약임에도 도전하기로 맘 먹었다. 19번째로 보는 고다르 영감의 장편영화 <열정>에 대한 단상들. (영화보다가 이 영화랑 관계없이 영화비평계에 종사하는 어떤 멍청한 옛 지인이 떠올랐고, 그걸 반박하기위해 쓴글이라 영화에 다소 충실하지 않은 감이 있습니다.) 1. 일단 영감님의 전작들 <주말>+<알파빌>+<미녀 갱 카르멘>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가져와 자신의 작가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작가주의를 지향한다면 일관된 작가성을 보여줘야하는데, <열정>뿐만 아니라 필모 전체를 두고 봐도 일관된 철학이라 설명되진 않는다. 실제 영감님이 이런 의도를 가지진 않았겠지만, <열정>은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아메리칸 뉴웨이브 이후 작가이론이랍시고 들고와서는 감독들을 줄세우기 바빴던 평론가들이 얼마나 똥멍청이였는지... 2. 고다르의 영화에서 고다르의 일관된 작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관총부대>에서 자신의 철학만을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다, 관객과 평단에게 참교육을 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당시에는 일부 철학에 능통한 평단과 관객들만 이해할수 있었을거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이후 영화부터 고다르는 말(본인의 원칙)을 굉장히 많이하게 된다.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ㅈ같은 시나리오 작가로 발돋움한다. 3. 많은 사람들이 고다르의 작가주의하면 실존주의를 떠올리지만,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작가성이 아닌 아이디어다. 아이디어와 이를 지키려는 원칙!그의 영화에서 실존주의를 논하는건 <네멋대로 해라>에서 끝나야한다. 그의 영화가 제4의 벽 어쩌고 저쩌고하는건, 배우들의 관계나 카메라의 포커스와 관계없이 영화의 대사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걸 직접 보여주기 위함이다. 고다르의 필모 전체를 관통할 일관된 실존주의의 개념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또한, 매우 당연하게도 이걸로 고다르 필모의 전체를 평가하려는 것은 매우 멍청한 일이다. 분명 실존과 본질의 차이가 그의 가치관에 중대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구현하는건 데뷔하면서 끝났고, 그의 관심사는 '정치, 어느 소재나 아이디어, 철학적 관념을 어떻게 영화로 구현하는가'로 바뀌기 때문이다. 4. <열정>에서 그가 내세우는 것은 '비슷하면서 비슷하지 않은 것과 분리되있으면서 분리되지 않은 것'을 '광원과 명암의 대조'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 전제는 영화 초반부에 독백으로 나온다. 고다르의 영화는 초반부의 독백이 매우 중요하다. 한 영화를 만드는 원칙이 독백에서 시작하며, 충실하게 이를 구현하는 것이 고다르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각 작품들에서는 개인의 주관에 따르지, 이를 구현하는데 일관된 방법론를 택하진 않는다. 5. 고다르가 ㅈ같은 시나리오 작가로 발돋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사가 3가지로 난립하며 쓰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인 이야기를 이어주는 대사들, 그리고 감독 본인의 원칙을 드러내는 독백, 마지막으로 아무런 쓰잘데기 없고 감정도 안들어가있는 멋대가리 없는 대사들.. 하지만, 그가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인 이유는 이 ㅈ같은 시나리오들을 배치를 통해 의미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6. 영화는 3가지 이야기를 조금씩 뒤섞는다. 영화를 만들며 고뇌하는 감독과, 그와 깊은 관계인듯하지만 영화에 출연치 않는 여인과 공장에서 탈출하려는 다른 여인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들은 <주말>처럼 노골적이기보다는 그져 스쳐가듯 연관없이 이어진다. 7. 3가지 종류의 골라먹는 ㅈ같은 대사들은 하나같이 중구난방 뒤섞여있다. 하지만, 광원과 명암의 대조는 레인보우 샤베트에 엄마는 외계인을 뒤섞은듯했던 기괴한 대사들을 민트초코로 변모시킨다. 대사들의 개연성은 어디까지나 광원이 제시된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며, 명암이 대조(혹은 반전)이 일어나고 공간이 바뀌면, 다시 중구난방으로 뒤섞이게 된다. 광원과 명암은 이 이야기가 성립되게 하는 일종의 시각적 신호다. 이미 고다르는 빛과 명암의 반전을 통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낸적이 있다. 1965년작, 베를린 황금곰을 받아낸 <알파빌>. 8. 여기서 감독의 이야기만 이어붙이면 굉장히 재밌는 일이 일어난다. 돈 아끼려고 후시녹음을 했나 싶을정도로 입모양도 못맞추는 엉성한 시퀀스들이, 점차 개연성을 갖추며 영화를 완성하고 싶은 한 감독의 이야기로 바뀌어나간다. 고다르의 필모에서 중구난방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점점 이어맞춰지는 작품이 하나 있다. 심지어 음악으로 그 과정을 조율해나간... 1981년작 <미녀 갱 카르멘>. 9. 영화에서 난투극이 하나 있다. 해당 시퀀스는 제작자가 감독에게 배우를 데려오서는 '이야기가 없다구?!'라고 절규하는 장면, 이후 엉성한 난투극이 이어진다. 이후 이야기는 어떤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절규는 배우를 향하지만 동시에 제 4의 벽을 깨부순다. 10. 결국 첫번째 전제, '비슷하면서 비슷하지 않은 것과 분리되있으면서 분리되지 않은 것'은 결국 영화 찍는 현장(영화상에서)이다. 사실감이 1도 없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듯허지만, 그래도 미묘하게 어울리는 공간. 그곳에서 현실적인 대화(영화상에서는 공장으로 잡혀가는 현실의 여성이 다시 잡혀가며 나온다) 와 이상하게 연기하는 배우들, 배우들이 아닌 엄한 곳을 찍는 감독. 그러나 이야기가 없다는 대사가 나오는 순간, 이야기의 윤곽이 서서히 맞춰져간다. 11. 그럼 완성된 영화는 무엇인가라고 했을때, 우리는 그걸 말할수 없다. (이야기가 없다잖아...ㅜㅜ) 고다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떠한 영화를 완성했다가 아닌, '영화가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체감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영화의 각 요소가 '조율'되는 과정을 느끼게 하려고 일부로 불협화음을 만들어놓고는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는 <미녀 갱 카르멘>의 연출론과 일치한다. 실제로 이야기는 영화의 완성으로 마무리 되지 않고, 3명의 인물들이 차타고 갈길 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참고로, 결말에 상관치않고 갑자기 이야기가 끝나는 엔딩은 80년작 <인생>의 오마주로 보인다. 번역제는 '할수 있는 자가 구하라' (오마쥬라기엔 당시기준 너무 최근작이긴 하지만...) 12. 그렇다면 나는 왜 서문에서 작가니 뭐니하는 했을까? 언뜻 단편으로 보기에는 이는 작가성에 충실한듯 보인다. 그러나 예시로 언급된 영화들은 전부 다른 원칙으로 구성된 작품들이다. 우리는 크리스토퍼 놀란을 <인셉션>이나 <테넷>으로 떠올리며, 그를 작가주의 감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작가주의 감독인 이유는 '인셉션'과 '인버전'을 다루어서가 아니다. 명백히 다른 쇼트들을 몽타주로 뒤섞어 시간구조를 바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놀란이 이를 일관되게 사용하냐면 그것도 아니긴하지만..) 마찬가지다. 고다르의 작가성은 저러한 철학적 사유를 이미지로 구현했다는데 있지 않다. 아이디어와 소재를 영화의 편집과 조율하여 구현하는 과정과 방법 그 자체에 있으니까. 13. 영화를 조금 깊은 관심을 가진 이라면 '누벨바그'라는 단어와 '작가주의'를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게 같아지지는 않는다. 작가주의랍시고 기성영화들을 제단하고, 감독을 줄세우기 바빴던 평론가들은 그 원칙보다는 정작 그 작가들의 개인적인 의미에 대해 각기의 해석만 찾기 바쁘다. 그 시기 미국 평론가들은 히치콕을 재평가했지만, 정작 이야기가 나오는건 서스펜스나 맥거핀만 떠올리는 것처럼말이다.(프랑스에선 이미 몇십년 전에 바쟁이 발굴하고 트뤼포가 쟁점화시켰다.) 히치콕은 소비에트 영화의 정수로 불리던 몽타쥬의 방식을 한 쇼트에 이접시켰고, 거기서 서스펜스를 발견했다. 맥거핀은 그 반대고. 히치콕은 이러한 연출방식을 정말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며 각기 다른 이야기에 정말 자연스럽게 안착시켰다. 그게 히치콕이 위대한 감독인 이유인데, 항상 히치콕이 왜 위대하냐고 이유를 물어보면 그의 명언이나 필모만 말해주지 이런 사실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정작 커리어는 낮은 편(당시에 인정을 못받았으니까)이었고, 명언이나 작품 목록 따위는 그냥 검색해서 알수 있는데말이다. 14. 내가 영화이야기를 잘하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쓴건, 작가주의를 언급하면서 잘난체하는 똥멍청이를 영잘알이라며 빨아주던, 그리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던 4-5년전 나의 옛모습들이 다시 생각해도 너무 쪽팔리기 때문이다. 15. 작가주의는 작품의 우열관계를 나눠주는 척도가 될수 없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감독의 원칙에 불과하다. '나는 영화를 이렇게 찍을꺼야.' 그리고 이말을 지키면 그게 작가주의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의 연출 원칙을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활용해 구현한 고다르, 가장 순수한 감정을 담은 시네마토그래피를 찍겠다던 브레송이 프랑스 작가주의 감독 중에서도 끝판왕 대우를 받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영화를 현학적이라며 외면해도 말이다. 고다르에게 작가성을 논할수 있다면 이를 구현하는 원칙이지, 어떤 철학적 개념을 구현했다는게 사실 자체가 작가의 이유가 될수 없다. 17. 그게 이 영화랑 무슨 상관이냐 묻는다면, 아무 상관없다. 연출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정체성 정치에 편승해서 과대평가받는 ㅂㅈㅎ을를 작가주의랍시고 추앙하는 일전에 알고지내던 어느 멍청한 평론가가 떠올라서 쓴 디스글일 뿐이다. 결론) 고다르의 시나리오는 이말년이다.Like13Comment0
Dh
3.5
세상에 죄를 없애신다는 주님, 고단함도 없애주소서 #흔적
모까모까
3.5
0. 근 4달동안 영화를 한편밖에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타가 왔다. 위장병에 스트레스가 쥐약임에도 도전하기로 맘 먹었다. 19번째로 보는 고다르 영감의 장편영화 <열정>에 대한 단상들. (영화보다가 이 영화랑 관계없이 영화비평계에 종사하는 어떤 멍청한 옛 지인이 떠올랐고, 그걸 반박하기위해 쓴글이라 영화에 다소 충실하지 않은 감이 있습니다.) 1. 일단 영감님의 전작들 <주말>+<알파빌>+<미녀 갱 카르멘>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가져와 자신의 작가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작가주의를 지향한다면 일관된 작가성을 보여줘야하는데, <열정>뿐만 아니라 필모 전체를 두고 봐도 일관된 철학이라 설명되진 않는다. 실제 영감님이 이런 의도를 가지진 않았겠지만, <열정>은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아메리칸 뉴웨이브 이후 작가이론이랍시고 들고와서는 감독들을 줄세우기 바빴던 평론가들이 얼마나 똥멍청이였는지... 2. 고다르의 영화에서 고다르의 일관된 작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관총부대>에서 자신의 철학만을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다, 관객과 평단에게 참교육을 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당시에는 일부 철학에 능통한 평단과 관객들만 이해할수 있었을거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이후 영화부터 고다르는 말(본인의 원칙)을 굉장히 많이하게 된다.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ㅈ같은 시나리오 작가로 발돋움한다. 3. 많은 사람들이 고다르의 작가주의하면 실존주의를 떠올리지만,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작가성이 아닌 아이디어다. 아이디어와 이를 지키려는 원칙!그의 영화에서 실존주의를 논하는건 <네멋대로 해라>에서 끝나야한다. 그의 영화가 제4의 벽 어쩌고 저쩌고하는건, 배우들의 관계나 카메라의 포커스와 관계없이 영화의 대사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걸 직접 보여주기 위함이다. 고다르의 필모 전체를 관통할 일관된 실존주의의 개념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또한, 매우 당연하게도 이걸로 고다르 필모의 전체를 평가하려는 것은 매우 멍청한 일이다. 분명 실존과 본질의 차이가 그의 가치관에 중대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구현하는건 데뷔하면서 끝났고, 그의 관심사는 '정치, 어느 소재나 아이디어, 철학적 관념을 어떻게 영화로 구현하는가'로 바뀌기 때문이다. 4. <열정>에서 그가 내세우는 것은 '비슷하면서 비슷하지 않은 것과 분리되있으면서 분리되지 않은 것'을 '광원과 명암의 대조'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 전제는 영화 초반부에 독백으로 나온다. 고다르의 영화는 초반부의 독백이 매우 중요하다. 한 영화를 만드는 원칙이 독백에서 시작하며, 충실하게 이를 구현하는 것이 고다르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각 작품들에서는 개인의 주관에 따르지, 이를 구현하는데 일관된 방법론를 택하진 않는다. 5. 고다르가 ㅈ같은 시나리오 작가로 발돋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사가 3가지로 난립하며 쓰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인 이야기를 이어주는 대사들, 그리고 감독 본인의 원칙을 드러내는 독백, 마지막으로 아무런 쓰잘데기 없고 감정도 안들어가있는 멋대가리 없는 대사들.. 하지만, 그가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인 이유는 이 ㅈ같은 시나리오들을 배치를 통해 의미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6. 영화는 3가지 이야기를 조금씩 뒤섞는다. 영화를 만들며 고뇌하는 감독과, 그와 깊은 관계인듯하지만 영화에 출연치 않는 여인과 공장에서 탈출하려는 다른 여인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들은 <주말>처럼 노골적이기보다는 그져 스쳐가듯 연관없이 이어진다. 7. 3가지 종류의 골라먹는 ㅈ같은 대사들은 하나같이 중구난방 뒤섞여있다. 하지만, 광원과 명암의 대조는 레인보우 샤베트에 엄마는 외계인을 뒤섞은듯했던 기괴한 대사들을 민트초코로 변모시킨다. 대사들의 개연성은 어디까지나 광원이 제시된 공간에서만 이루어지며, 명암이 대조(혹은 반전)이 일어나고 공간이 바뀌면, 다시 중구난방으로 뒤섞이게 된다. 광원과 명암은 이 이야기가 성립되게 하는 일종의 시각적 신호다. 이미 고다르는 빛과 명암의 반전을 통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낸적이 있다. 1965년작, 베를린 황금곰을 받아낸 <알파빌>. 8. 여기서 감독의 이야기만 이어붙이면 굉장히 재밌는 일이 일어난다. 돈 아끼려고 후시녹음을 했나 싶을정도로 입모양도 못맞추는 엉성한 시퀀스들이, 점차 개연성을 갖추며 영화를 완성하고 싶은 한 감독의 이야기로 바뀌어나간다. 고다르의 필모에서 중구난방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점점 이어맞춰지는 작품이 하나 있다. 심지어 음악으로 그 과정을 조율해나간... 1981년작 <미녀 갱 카르멘>. 9. 영화에서 난투극이 하나 있다. 해당 시퀀스는 제작자가 감독에게 배우를 데려오서는 '이야기가 없다구?!'라고 절규하는 장면, 이후 엉성한 난투극이 이어진다. 이후 이야기는 어떤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절규는 배우를 향하지만 동시에 제 4의 벽을 깨부순다. 10. 결국 첫번째 전제, '비슷하면서 비슷하지 않은 것과 분리되있으면서 분리되지 않은 것'은 결국 영화 찍는 현장(영화상에서)이다. 사실감이 1도 없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듯허지만, 그래도 미묘하게 어울리는 공간. 그곳에서 현실적인 대화(영화상에서는 공장으로 잡혀가는 현실의 여성이 다시 잡혀가며 나온다) 와 이상하게 연기하는 배우들, 배우들이 아닌 엄한 곳을 찍는 감독. 그러나 이야기가 없다는 대사가 나오는 순간, 이야기의 윤곽이 서서히 맞춰져간다. 11. 그럼 완성된 영화는 무엇인가라고 했을때, 우리는 그걸 말할수 없다. (이야기가 없다잖아...ㅜㅜ) 고다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떠한 영화를 완성했다가 아닌, '영화가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체감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영화의 각 요소가 '조율'되는 과정을 느끼게 하려고 일부로 불협화음을 만들어놓고는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는 <미녀 갱 카르멘>의 연출론과 일치한다. 실제로 이야기는 영화의 완성으로 마무리 되지 않고, 3명의 인물들이 차타고 갈길 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참고로, 결말에 상관치않고 갑자기 이야기가 끝나는 엔딩은 80년작 <인생>의 오마주로 보인다. 번역제는 '할수 있는 자가 구하라' (오마쥬라기엔 당시기준 너무 최근작이긴 하지만...) 12. 그렇다면 나는 왜 서문에서 작가니 뭐니하는 했을까? 언뜻 단편으로 보기에는 이는 작가성에 충실한듯 보인다. 그러나 예시로 언급된 영화들은 전부 다른 원칙으로 구성된 작품들이다. 우리는 크리스토퍼 놀란을 <인셉션>이나 <테넷>으로 떠올리며, 그를 작가주의 감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작가주의 감독인 이유는 '인셉션'과 '인버전'을 다루어서가 아니다. 명백히 다른 쇼트들을 몽타주로 뒤섞어 시간구조를 바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놀란이 이를 일관되게 사용하냐면 그것도 아니긴하지만..) 마찬가지다. 고다르의 작가성은 저러한 철학적 사유를 이미지로 구현했다는데 있지 않다. 아이디어와 소재를 영화의 편집과 조율하여 구현하는 과정과 방법 그 자체에 있으니까. 13. 영화를 조금 깊은 관심을 가진 이라면 '누벨바그'라는 단어와 '작가주의'를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게 같아지지는 않는다. 작가주의랍시고 기성영화들을 제단하고, 감독을 줄세우기 바빴던 평론가들은 그 원칙보다는 정작 그 작가들의 개인적인 의미에 대해 각기의 해석만 찾기 바쁘다. 그 시기 미국 평론가들은 히치콕을 재평가했지만, 정작 이야기가 나오는건 서스펜스나 맥거핀만 떠올리는 것처럼말이다.(프랑스에선 이미 몇십년 전에 바쟁이 발굴하고 트뤼포가 쟁점화시켰다.) 히치콕은 소비에트 영화의 정수로 불리던 몽타쥬의 방식을 한 쇼트에 이접시켰고, 거기서 서스펜스를 발견했다. 맥거핀은 그 반대고. 히치콕은 이러한 연출방식을 정말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며 각기 다른 이야기에 정말 자연스럽게 안착시켰다. 그게 히치콕이 위대한 감독인 이유인데, 항상 히치콕이 왜 위대하냐고 이유를 물어보면 그의 명언이나 필모만 말해주지 이런 사실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정작 커리어는 낮은 편(당시에 인정을 못받았으니까)이었고, 명언이나 작품 목록 따위는 그냥 검색해서 알수 있는데말이다. 14. 내가 영화이야기를 잘하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쓴건, 작가주의를 언급하면서 잘난체하는 똥멍청이를 영잘알이라며 빨아주던, 그리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던 4-5년전 나의 옛모습들이 다시 생각해도 너무 쪽팔리기 때문이다. 15. 작가주의는 작품의 우열관계를 나눠주는 척도가 될수 없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감독의 원칙에 불과하다. '나는 영화를 이렇게 찍을꺼야.' 그리고 이말을 지키면 그게 작가주의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의 연출 원칙을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활용해 구현한 고다르, 가장 순수한 감정을 담은 시네마토그래피를 찍겠다던 브레송이 프랑스 작가주의 감독 중에서도 끝판왕 대우를 받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영화를 현학적이라며 외면해도 말이다. 고다르에게 작가성을 논할수 있다면 이를 구현하는 원칙이지, 어떤 철학적 개념을 구현했다는게 사실 자체가 작가의 이유가 될수 없다. 17. 그게 이 영화랑 무슨 상관이냐 묻는다면, 아무 상관없다. 연출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정체성 정치에 편승해서 과대평가받는 ㅂㅈㅎ을를 작가주의랍시고 추앙하는 일전에 알고지내던 어느 멍청한 평론가가 떠올라서 쓴 디스글일 뿐이다. 결론) 고다르의 시나리오는 이말년이다.
즐즐거운 하루
5.0
영화는 삶이다. 영화와 삶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장 뤽 고다르 (고다르 인터뷰집' 고다르X고다르'중에서.)
unaola
WatchList
비디오가게에서 찾았는데 영어자막 없어서 안 샀어요
s au
2.5
This may contain spoiler!!
규현
5.0
사랑(빛)에 너무 가까워질 때. 이야기를 멈추어야 한다.
Lois Song
3.0
삶에 이야기가 있을리가 삶은 그냥 삶이다
이원일
3.0
이야기의 윤곽선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Please log in to see mor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