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height of the First World War, two young British soldiers, Schofield and Blake are given a seemingly impossible mission. In a race against time, they must cross enemy territory and deliver a message that will stop a deadly attack on hundreds of soldiers—Blake's own brother among them.
이동진 평론가
4.0
지도보기도 못하면서 우연히 피택된 자가 계속 길을 가려면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
정환
4.0
전쟁에서 생존이란 승리겠지만, 오늘 하루를 이긴다 해도 내일 전쟁이 끝나지 않기에, 개인에게 생존은 그저 하루를 살아도 내일 또다시 반복될 임무일 뿐이다. 때문에 언제 끝날지도 모를 시간 속에 무엇을 위해 다투는지도 모르는 하루가 이토록 무력하면서도 간절하다. 갈 곳 잃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야하는지 . 2시간의 영화가 하나의 원테이크로 이어지는 방식을 택한 건 혁신적이거나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그럼에도 한 번의 끊임없는 샷으로 제공하는 놀라움은 여전히 많은 관객들을 자극할 수 있다. <1917>이 보여주는 기술적인 성취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닌 단점들은 아마 기획할 때부터 예견되었을 필연과도 같다. 영화의 이야기가 매우 간결하고 카메라는 제3의 동행자가 되어 두 병사의 앞과 뒤를 오가며 끝내 우리도 함께 체험하게 만든다. 하지만, 보고 있으면 입이 벌어지는 놀라운 기법의 단면은 모두를 현혹시키기에는 힘들 것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이 영화가 고집한 방식의 성취의 단면에는 지나치게라는 부사가 붙어있다면 말이다.(그 누군가 중 한명은 내가 되었고 나는 아마 다른 것들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매우 간결하지만 누구에게는 매우 간단할 것이다. 기술에 너무 집착하여 영화에 대한 작고 큰 것들을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버릴지도. 롱테이크의 존재 이유가 영화에서 흐르는 시간과 객석에서 흐르는 시간을, 그리고 카메라가 머무르는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동일해지는 순간 우리는 영화 속에 있다는 몰입감을 느끼게 해서 일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중간의 편집점을 찾거나 어떻게 촬영했을까에 대한 감탄의 의문이 피어나는 순간, 롱테이크의 가장 큰 목적인 몰입감만은 실패하게 된다. 아마 이 영화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놓친 부분이라기보다는 필연적으로, 그러기에 고의적으로 두고 선택한 과감한 시도의 피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결과일 테다. 적어도, 이 영화가 왜 롱테이크를 고집해야만 했을까에 대한 이유는 분명한 듯하다.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경이감이 든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몰입이 되기도 하지만, 몰입이 깨지는 순간의 이유가 너무도 놀라운 촬영이기에 잠시 집중을 못했던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플레어 불빛이 마을의 새벽을 밝히던 순간부터 불타는 교회를 바라보는 그 장면까지는 영화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장면 중 하나로 화자 될 것이 분명하다.(타르코프스키 감독의 거울 속 한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려질 것이다.) 조명과 동선, 구도가 완벽하게 짜인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보면서 거슬렸던 영화의 모든 단점들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롱테이크의 이유는 앞서 말했듯 영화에서 흐르는 시간과 객석에서 흐르는 시간, 그리고 카메라가 머무르는 시선과 관객의 시선을 동일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초반부터 주인공 두 명이 임무를 받으면서 자연스레 우리의 공동의 적은 제한된 시간이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적은 시간이다. (전장에서 누가 죽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추모할 시간조차 없다. 그저 사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추모하기 위해서는 한명이라도 반드시 살아야만 한다.) 영화 <덩케르크>와 이 영화는 관객에게 전쟁을 체험하게 만드는 점에서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지만 끝내 말하는 건 전혀 다르다. 영화 <덩케르크>가 전쟁을 재난으로 치환하고 생존을 승리의 희망으로 담아내었다면, 영화 <1917>은 적을 영속된 시간으로 치환해버린 까닭에 생존이라는 명을 받은 인간의 무력함이 느껴진다. 전쟁에서 생존은 곧 승리겠지만, 개인에게 생존이란 오늘 하루를 살아도 내일을 살아남아야만 하는 끝나지 않을 임무일 뿐이다. 하루를 이긴다해도 내일 전쟁이 끝이 나지는 않기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기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기에. 때문에 시간과 다투는 매일이 버겁고 막연하다. 고작 몇m를 더 차지하기 위해 며칠을 싸우고, 무작정 뛰어나가 싸울 수도 없었던 세계 1차대전은 말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영화가 롱테이크를 사용했기 때문에 관객인 나는 메신저 둘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제3의 동행자가 될 수 있고, 영화가 시간을 적이라고 말하기에 나 역시 시간을 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나는 1917년 4월 6일 전쟁 속 한복판의 상황을 시간과 부딪혀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에 대한 비유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적과 부딪히며 간신히 버틴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저 운인걸까. 무력함과 허무함이 밀려오는 경우를 생각해볼 때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떠오른다. 그 모든 역경의 시간을 하나의 방향만을 바라보며 버텨왔지만, 끝내 다다랐을 때에 그만큼의 보람과 비례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렇게 바라왔던 끝을 봤지만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만일 우리의 숙제가 살아 남는 거라면 우리가 인생에 대해 느끼는 모든 무력감과 허무함의 근원은 시간이다. 그렇게 버티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렇게 버텼음에도 나의 시간은 여전히 남아있기에. 두 눈은 어쩔 수 없이 계속 감기고 어쩔 수 없이 떠야만 한다. (극도로 피로함을 느끼는 주인공이 눈을 감고 싶어도 떠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죽지 않는 이상 잠을 자도 계속 떠질 두 눈이기에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을 눈을 떠야 하는 것으로도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생을 두 눈을 뜨고 있을 때와 두 눈을 붙이고 있을 때로 나뉘는데 결국에 우리는 눈을 떠야지만 기록되는 삶이므로 두 눈을 뜨며 기억되는 이 모든 순간은 영화가 끊임없는 하나의 컷으로 확장되는 개념과도 상당히 겹쳐 보인다. 이 영화의 원테이크가 이토록 집요하고 처절하며 피로한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하지만 이 비참함과 처절한 생존의 현장에도 분명 비참한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그것이 나의 의지가 아닐지라도(블레이크는 혈연과 관계가 있을지라도 스코필드는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명받은 임무이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필연된 인간이 영원한 개념의 시간과 맞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어리석은 만큼 무척이나 아름답다. (더군다나 그저 껍데기뿐인 부조리한 전쟁을 위해 희생되는 여러 젊은이들의 사투 역시)이것이 생존이 그 자체로도 위대하게 보이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이유를 그저 한낱 운이라고 치부하지는 못하겠다. 행운은 눈을 뜨고 있는 이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눈을 뜨고 있는 순간에 다가온다. 생존의 이유가 확장되는 순간(내가 무심코 받은 우유가 한 생명을 살릴 때 처럼),비참한 아름다운 삶 속에서 머무르는 행운들이 시간을 연장시킨다. 우리는 그 행운들을 마주할 때와 깨달을 때마다 잠시 눈을 붙이는 것처럼 이 삶에서 잠시 기대어 쉬어가는 나무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을테고, 우리가 해야할 숙제가 있을테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그저 무너진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다. 나는 눈을 감아서도 안된다. 이 모든 것들이 끝나기 전까지 멈춰서도 안된다. 그러나 가만히 숨어있을 수도 없고,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다. 그때 나를 비추는 빛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데, 어둠 속에 초라한 나를 비추는 것인지 혹은 내가 가야하는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인지. 갈 곳 잃은 나를 향해 쏟아지는 이 빛이 야속하면서도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세상이 눈을 감은 이 세상에서도 눈을 떠야만 한다. 아니,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 세상에서는 절대 우리를 눈감게 만들지 않는다. 영화는 두 명의 인물을 조명한다. 두 눈이 먼 자의 앞에서 생존을 외치는 사람과 두 눈이 감기는 자를 품어 삶을 말하는 사람. 행운을 빈다는 말은 두 번 나온다. 단 하루만을 버티기 위해 목숨을 내건 타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하면서도, 이보다 절실할 수 없는 말. 두 그루의 쉬어갈 나무도 나온다. 모든 생명의 시작점이자 모든 것들의 쉼터이자 모든 것들의 끝지점. 두 눈을 감아 쉬어갈 나무 한 그루와 그곳에서 다시 시작될 두 눈을 뜰 수 밖에 없는 생존이라는 명. 쓰러져도 다시 꽃 피울 체리나무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우두커니, 굳건히 버티었던 나무처럼. 그 지독한 시간들을 지나 내가 얼마나 무력한 사람인지 이 고된 삶에서 잠시 눈 붙이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살아가면서 설정한 목적지와 제각각의 임무들이 끝나는 순간마다 허무함이 밀려온다면 잠시 내 두 눈으로 담았던 풍경들을 저만치 멀리서 돌아보자. 롱테이크가 끝나는 순간은 내가 눈을 감게 되는 순간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엔딩을 보게 된다면, 생존이라는 임무를 받고 시간이라는 적과 싸울 우리가 잠시 쉬어가야 할 나무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p.s 영화 전체가 원테이크라지만 한번 끊기는 부분이 있긴 있습니다. 너무 감탄하느라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로 압도적인 촬영입니다. 부디 가장 큰 화면에서 체험하세요. at Scotiabank Theatre Montréal 2018/1/18 같은 극장에서, 같은 관에서, 3번 관람 두번째부터 편집점의 호기심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다, 세번째에 다다르니 그제서야 보인다. 갈 곳 잃은 내가 내일은 또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
재원
4.0
무탈한 오늘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 하루인지 제대로 깨우쳐 주는, 두 병사의 잔혹한 하루. 소름 끼치도록 리얼한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당분간 '하루'라는 단어 앞에 '고작','겨우' 따위의 부사는 감히 붙이지 못할 것 같다. ps. 오스카 후보작들을 하나씩 감상해 볼수록 봉 감독의 수상이 실로 값지게 느껴진다. 92회 아카데미 정말 치열했으며, 누가 받아도 이상할리 없었고, 촬영상을 받은 로저 디킨스 촬영 감독에게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게 된다.
chan
4.5
영웅서사의 허무한 퇴장, 시간과 사투하며 온몸으로 지옥을 통과하는 인간서사의 시작. 그 생지옥을 구현한 샘 멘데스와 로저 디킨스의 협업이 그저 경이롭다. . (스포일러)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와 샘 멘데스의 <1917>은 국가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나 인간 대 인간의 혈투를 주로 다뤄온 무수한 전쟁영화들과 궤를 달리하고 되려 인간과 시간의 대립구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는 지점에서 퍽 흥미로운 전쟁영화의 유형이다. . 보다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인간의 숨통을 점차 조여 오는 이 시간이라는 모티브에 대해 두 영화가 전혀 다른 방법론을 들고 접근했다는 사실이다. 딱 잘라 말하자면 한 쪽은 편집이고 다른 한 쪽은 촬영의 방법론이다. 해변에서의 일주일을 보내야하는 병사들의 지루함,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하늘에서 1시간을 싸워야하는 공군들의 긴박함. <덩케르크>는 이러한 시간의 상대적인 감각을 편집의 방법론을 통해 극대화한다. 지극히 놀란다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 반면에 <1917>의 형식은 <덩케르크>의 대척점에 서있다. 물론 <1917>은 편집점이 없지 않다. 참호 속 어둠에 프레임이 가려지는 순간, 폭발로 인해 파편이 튀기는 순간 등등 영화는 다소 고전적인 방식을 통해 관객의 인지를 현혹한다. 하지만 비록 이러한 눈속임의 과정이 있다할지라도 공식적으로 <1917>은 두 개의 숏을 가진 영화임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리 잡는다. 굳이 힘겹게도 영화 전체를 롱테이크의 형식으로 찍어야 할 당위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전체를 하나로 찍으면 하나로 찍을 것이지 왜 굳이 영화는 무지화면을 통해 눈에 뛰는 편집점을 남겨 영화를 하나의 숏이 아닌 두 개의 숏으로 보이게 한 것인가. . 사실 그 당위성에 대한 답변은 꽤나 단순하다면 단순한 것 같기도 하다. 샘 멘데스가 해석하는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한, 마치 통제변인과도 같은 절대적인 조건이다. <1917>의 시간은 인간 특유의 상대적 감각으로 되돌리거나 빨리 감을 수도 없다. 즉,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그 자체로 외면할 수 없는 일종의 부조리인 셈이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영화 전체를 통일된 숏으로 찍는 건 너무 과잉의 수사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법도 하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지적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입장이긴 하나 그럼에도 나는 그 비판의 잣대에 대해 결국엔 동의할 수 없다. . 시간을 절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영화의 전제가 성립되기 위해선 반드시 모든 장면은 단일한 숏 내에 속해 있어야만 한다. 만약 전장에서의 폭격이나 추격에서의 총격과 같은, 서스펜스나 스펙터클이 강조되는 장면에서만 이를 더 부각하기 위해 롱테이크의 촬영을 사용했다면 그건 말 그대로 촬영의 순간적인 임팩트를 강조하기만 할 뿐인 영화적 기믹인 것이다. 두 주인공이 쓸데없어 보이는 잡담을 나눌 때, 혹은 잠시 앉아 목을 축일 때 등등 이 사소한 순간들 까지 롱테이크의 범주 내에 속해야만 영화 내에서 시간이란 개념은 그 자체로 인간의 대립항 자리에 놓여 그들의 영속하는 적이 되는 것이며 그래야만 비로소 영화의 기술적 요소는 테크닉의 과시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주제를 위한 일종의 봉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내가 이 영화의 방법론에 완전히 동의할 수 있었던 기점이 된 부분 역시 웅장한 스펙터클의 순간이 아니라 사소한 감정적 순간에 있다. 임무수행 도중 갑작스레 블레이크가 전사한 슬픔의 순간에, 영화의 형식은 스콧필드에게 애도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점프 컷이나 무지화면을 통해 다른 타임라인으로 넘어갔다 올 수 조차 없는 영화의 형식은 보통의 영화 같으면 인물을 위로해야할 타이밍에 되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스콧필드를 다시금 총격의 현장으로 곧장 밀어 넣는다. 시간을 적으로 삼는 영화가 시간의 악마성을 강조하는 영화의 형식을 명징하게 들어내 보이는 굉장히 탁월한 대목이다. . 시종 3개의 타임라인을 뒤섞어대는 놀란의 <덩케르크>에서, 후에 그 다중의 시간대가 겹쳐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해 있던 그들은 그 순간 어느새 같은 타임라인에 귀속되어 서로가 서로를 구해내고 있다. 즉, <덩케르크>는 시간의 상대성과 싸우다 시간대가 겹치지는 시간의 절대적인 순간에 일말의 희망을 포착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샘 멘데스의 <1917>은, 희망이란 없는 절대적 시간에 던져진 인간을 바라보는 영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따라서 두 영화는 시간이란 개념을 서로 달리 바라보기에 당연히 서로의 방법론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제 두 번째 의문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 영화의 중반 정도의 무렵에, 적이 매복해 있는 건물 내에서 스콧필드가 총격에 부상을 당하자 영화는 갑작스레 그 순간을 기점으로 숏의 흐름을 뚝 끊어 버린다. 그리고 스콧필드가 다시 눈을 뜨자 시간은 한참 흘러 새벽을 향해 있고 그는 다시 발걸음을 움직여 어느 프랑스인의 가정집으로 몸을 피신한다. 도대체 왜 이 사이에 샘 멘데스는 편집이란 결단을 했는가. 딱히 1,2부를 구분 짓는 템포 조절용이라 보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촬영의 당위성에 대한 해답을 시간이란 개념에서 찾을 수 있었듯 나는 편집의 당위 또한 시간의 개념에서 찾아보려 한다. . 친절한 집주인덕에 가뭄에 비와 같은 잠깐의 휴식을 보내는 그에게 갑자기 시계종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이 다 지나갔음을 알려오는 시계종 소리 말이다. 스콧필드가 총격으로 인한 부상으로 잠시 기절했을 동안, 아마도 꽤 많은 시간이 지체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 문장에서 ‘꽤 많은 시간’이라 내가 수식한 시간은 비록 나는 그 정확한 수치를 알 도리가 없으나 분명 그 자체로 정확한 값이 있는 시간이다. 추측한다면 초저녁에서 거의 새벽이 다 끝나갈 무렵까지의 시간일 것이다. 헌데 스콧필드가 총격을 당한 뒤 이어지는 몇 초간의 암전은 사실 상 기절상태의 스콧필드가 그 ‘꽤 많은 시간’을 느끼는 지극히도 개인적이며 상대적인 감각이다. 시종 이어지는 숏을 통해 극중 인물의 1분 1초를 곧 관객의 1분 1초와 동일시했던, 즉 시간의 절대적임을 부각했던 영화는 숏이 끊어지는 순간에 시간의 상대성을 급격히 대두시킨다. . 스콧필드가 시간을 상대적으로 감각한 것의 결과는 과연 어떠한가. 돌려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의 상황이다. 그는 그 ‘꽤 많은 시간’의 절대적인 수치를 고스란히 휴식으로 가져간 것이 아니라 단 몇 초간의 기절로 체감했을 뿐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상대성으로 인해 그가 적들의 눈을 피해 이동하기에 가장 유리한 시간대인 새벽타임이 고스란히 증발돼버렸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스콧필드는 블레이크에게 밤에 이동할 것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낮에서 초저녁으로 이동한 영화는, 편집의 순간을 통해 그가 원하던 한 밤의 순간을 모두 삭제하고 다시금 낮의 순간으로 점프한다. 이처럼 영화는 촬영과 편집이란, 영화의 기술적 요소를 한데 모아 시간을 그 자체로 악으로 치환하며 인물을 전방위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 앞서 말했듯 <1917>은 두 개의 숏으로 보이는 영화이긴 하나 편집점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모든 원테이크 영화가 그렇듯 <1917>의 원테이크 역시 편집의 과정을 통해 다수의 롱테이크를 이어 붙인 원테이크다. 헌데 따지고 보면 그 말인즉슨 그 편집의 눈속임 역시 롱테이크 형식의 보조수단이 되며 시간의 절대성을 강조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은가. 결국 촬영이든 편집이든, 달리말해 시간의 절대성이든 상대성이든, <1917>의 세계 속에서 시간은 고무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 어쩌면 샘 멘데스에게 진정 중요한 건 시간의 절대성이나 상대성이 아니라 시간이란 개념 자체 일지도 모르겠다. . 말해 무엇하겠냐만 영화의 기술적 요소는 흠 잡을 구석이 단 한 가지도 없다. 특히 <1917>은 촬영의 부문에서 21세기 영화사에 오래토록 남을 기념비적인 성취를 일궈냈다 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을 것 같다. 첫째론 그 기술적 성취로 인해 오히려 기술이 영화 보다 더 돋보이는 기믹의 결과물이 나온 게 아니냐는 비판. 둘째론 기술적 성취에 도취되어 이에 연연하느라 서사가 너무 빈약한 것은 아니냐는 비판. 전자의 경우엔 나름의 입장을 말한 것 같으니 영화에 완전히 사로잡힌 입장에서 두 번째 잣대에 대해서도 내 나름의 변호를 하고 싶어진다. . 비할 건 못되겠지만 히치콕의 <싸이코>를 극장에서 처음 봤던 당시 관객들의 느낌이 이랬을까? 극중 불의의 사고로 블레이크가 사망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에 놀란 이들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순간 내가 당황했던 이유는 굉장히 간단하다. 이 영화는 당연히도 블레이크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의 절반도 오지 않은 시점에서 블레이크가 갑자기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이러한 의외성은 <1917>의 의도된 트릭이며 그 의도에 <1917>의 서사의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영화는 첫 머리부터 이건 블레이크의 이야기임을 관객에게 명확히 전언한다. 프레임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 역시 스콧필드가 아닌 블레이크이며 카메라는 줄곧 의욕에 찬 블레이크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스콧필드를 조연의 자리로 몰아간다. 무엇보다도 블레이크에겐 전쟁영화의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일종의 특징이 그대로 있다. 그는 훈장의 명예와 권위를 자랑스레 여기는 애국자이며 가족의 소중함과 그리움을 절실히 느끼는 인간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이번 작전 역시 그는 아군의 안위라는 대의와 함께 자신의 형을 지켜야한다는 개인적인 목적이 있다. 즉 여러모로 그에겐 주인공이 될 명분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주연임을 방증하듯 곧이어 그는 독일군의 참호에서 조연 스콧필드를 구해내며 의로운 영웅으로 서사 내에 자리한다. . 반대로 스콧필드는 주인공은커녕 영화에 등장할 이유조차 불분명한 캐릭터라 해도 무방하다. 명령을 알든 알지 못했던 자신의 의지로 작전에 투입된 블레이크와 달리 그는 영화의 시작부터 태평하게 낮잠을 청하고 있다가 후에 블레이크의 요청에 의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전을 명받은 인물이다. 그 외에도 영화는 줄곧 스콧필드는 전형적인 주인공 유형의 인물이 아님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는 옷자락 내의 가족사진을 꺼내보며 묵상에 잠기는 전쟁영화의 클리셰를 따르긴커녕 오히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꺼려하는 인물이며, 몰래 배급음식을 빼돌리기나 하고 훈장의 권위를 와인 한 병과 맞바꿔먹는 행동을 일삼는다. 정리하자면 그는 애국심이 투철한 인물도 아닐뿐더러 가족에 대한 마음이 그리 애틋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에겐 특별히 그 작전을 수행해야하는 스토리상의 이유도 부재하다. 따라서 그는 블레이크와 달리 주인공이 될 수 없다. .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영화의 초중반 부에 목숨을 잃는 건 스콧필드가 아닌 블레이크다. 도대체 왜 영화는 스콧필드가 아닌 블레이크를 죽였는가. . 그건 바로 영화가 전쟁을 그 자체로 영웅의 영웅적 태도가 통용되지 않는 부조리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블레이크는 다소 무모하게도 적군의 파일럿을 구출해내려다 되려 본인의 목숨을 잃고 만다. 상투적인 드라마 서사에선 모르겠지만 <1917>이 해석하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건 적군까지 살리려 힘쓰는 아둔한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 살아남을 수 있는 인물은 훈장의 권위에 집착치 않고 과감히 이를 술과 맞바꿔 자신의 목을 축이는 이기적이되 융통성있는 인간이다. 블레이크가 죽는 순간 영화는 형을 만나기 위한 블레이크의 영웅서사에서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명받은 임무 하나만 붙들고 있는 스콧필드의 서사로 급전환된다. 그렇게 영웅서사의 전형처럼 보였던 흐름에서 영웅이 허무하게 퇴장하니 이어서 오로지 시간 하나와 사투할 뿐인 인간의 숭고한 서사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도 이것이 진정 영화 전체의 방법론과 조응하는 서사라고 생각한다. . 우리가 흔히 전쟁영화 장르에서 클리셰로 부르곤 하는 가족사진을 꺼내보는 병사의 장면은 엔딩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등장한다. 생지옥의 과정을 통과하며 살아내는 것의 의미를 체감한 스콧필드는 비로소 가족의 안정된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에 새기게 되며 그들의 사진을 꺼내본다. 비록 장면 자체는 클리셰에 가까울지라도 우리는 이런 영화의 엔딩을 클리셰라 여기지 않는다. 물론 이는 블레이크의 심리적 개연성을 위해 마련된, 아이를 키우는 어느 프랑스 여성, 혹은 블레이크의 형제 관계 등과 같은 가족관계적 설정이 깔린 각본 덕이 아니라 그 생지옥의 물성을 생생히 구현한 영화의 기술적 성취의 공인 것에 가깝다. . 허나 내말의 요지는 본 영화의 서사와 각본이 뛰어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영화의 결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온몸으로 부조리의 공간을 통과한 한 인물의 마음을 영화의 끝자락에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이유엔 분명 영웅서사를 과감히 버리고 인간의 서사를 취한 각본상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1917>의 이야기가 더욱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멋이 나지만 미련한 영웅의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되 숭고한 어느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윤제아빠
4.0
두 병사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속에 잡힌 처참한 전장과 참호의 비참함이 모든 연기를 대신한다. 화면속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라 이 영화에서 미장센은 주인공이며 서사이고 플롯이다. . . #하나의전언을위해그길을가야하고 #서로의이념때문에전쟁을해야하고 #산자와죽은자들모두에게상처뿐인 #이토록잔혹한전쟁사로세워진세상 #이모든걸감내한이세상은무엇일까 #이모든것을롱테이크로찍어내다니
메뚜리언
4.0
전장의 공포는 컷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생에 대한 갈망 그 짧고도 머나먼 하루를 따라서.
석미인
3.5
감독의 컷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잘랐다던 전설의 촬영감독은 백발노인이었다. 샘 멘데스는 로저 디킨스를 만나자마자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로저는 조용히 타이머를 켤 뿐이었다. '초일류 촬감은 미팅도 시간당 보수를 받는 건가' 생각만 했을 뿐인데 귀싸대기가 날라왔다. 몸이 휘청이며 미세하게 틀어져있던 샘의 셔츠 깃 균형이 맞춰졌다. 로저는 말했다. ‘구도’ 샘 멘데스가 놀라서 뺨을 어루만지자 로저는 그의 눈에 급작스럽게 플래시를 들이댔다. 샘의 탁한 동공에 반사됨이 없음을 확인하자 로저는 말했다. ‘자연광’ 샘의 흐린 눈앞에 계약서의 싸인이 보였다. 로저 디킨스는 타이머를 멈추고 떠났다. ‘원테이크’ 타이머는 정확히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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