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ough the Olive Trees Zire darakhatan zeyton
زیر درختان زیتون
1994 · Drama · Iran, France
1h 43m · PG-13

The movie focuses on one of the events in Zendegi Edame Darad (1992), and explor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vie director, and the actors. The local actors play a couple who got married right after the earthquake. In reality, the actor is trying to persuade the actress that they should get married.
폐허 위에 세워진 또 하나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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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
5.0
태생적으로 허구일 수밖에 없는 영화에서, 진실한 순간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 (스포일러)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은 바로 호세인과 테헤레의 할머니가 결혼에 대해 언쟁을 벌이는 대목이 뜬금없이 플래시백의 형태로 제시되는 부분이다. 우선, 해당 장면은 정보의 측면에서 서사에 불필요한 잉여의 장면이다. 우리는 해당 플래시백이 없더라도 테헤레의 할머니가 호세인과 테헤레의 결혼을 적극 반대하고 있음을 그 이전, 혹은 이후의 장면들에서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그건 둘째치더라도 오프닝부터 스스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자처한 본 영화가 왜 굳이 극에 불필요한 정보를 가장 극영화적 형식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닌 플래시백의 형태로 전달한 것일까. 누가보아도 다큐멘터리인 영화의 오프닝과 달리, 해당 장면의 플래시백은 인물에 심리에 근거한 극영화의 드라마투르기에 가깝게 구성되어있기에 우리에게 강한 이질감을 안긴다. . 이처럼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가운데 곧이어 우리의 머리를 치게 하는 누군가의 신호음이 들려온다. 영화 속의 영화감독인 케샤바르쯔 감독이 컷 사인을 외치며 촬영현장을 방해하고 있는 호세인을 나무라는 순간, 우리는 그동안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음을 마침내 깨닫는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감독의 전작인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촬영현장을 기록한 케샤바르쯔 감독의 모큐멘터리일 뿐만이 아니라, 테헤레에 대한 호세인의 지고지순한 순정을 필두로 진행되는 (영화의 실제 감독인)키아로스타미 감독의 극영화이기도 하다. 극중 호세인과 테헤레를 비롯한 인물들이 영화 속 영화의 촬영현장 바깥에 있는 순간마저도 엄밀히 따지자면 영화의 진짜 감독 키아로스타미의 디렉션 하에 촬영된 허구의 장면들, 즉 이것 역시 정교하게 연출된 또 하나의 영화이지 않은가. . 이처럼 두 갈래로 양분되어 있는 본 영화의 양태를 방증하기 위해서 영화는 오프닝의 형식과 극명히 대조되는 극영화적 플래시백을 이야기 도중에 삽입해야 했고, 구태여 호세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플래시백 씬 도중에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케샤바르쯔의 컷 사인을 흘려보냄으로서 케샤바르쯔가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내에서 촬영하는 영화 속 영화의 플롯과 키아로스타미가 촬영하는 극영화의 플롯을 명확히 구분 지으며 이 둘은 엄연히 서로 다른 디제시스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양자 모두가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둘 사이엔 명백히 보이지 않는 틈이 있기에, 영화 속 인물이 영화 속 영화라는 이중의 허구로 편입되기 위해선 영화 속 영화를 총괄하는 영화 내 감독의 컷사인 이라는 허가신호가 필요한 것이다. 도식화하자면 이는 실재에 기반을 둔 허구 속의 허구와 실재처럼 보이는 허구의 경계인 셈이다. . 하지만 이렇게 단순히 단정 짓기엔 꽤나 큰 역설이 발생한다. 앞전 문장에서 내가 실재라고 언급한 것은 키아로스타미가 본 영화 이전에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라는 영화를 찍었다는 실제 사실을 가리킨다. 허나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라는 영화 역시 그 자체로 실재에 기반을 둔 사실상의 허구적 결과물이며, 또 영화의 내용 역시 키아로스타미가 배우 2명을 캐스팅하여 이들에게 실제 자신과 자신의 아들인 것처럼 연기할 것을 주문한 허구의 결과물이다. 결국 우리가 본 영화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희미하게 잔존하는 일말의 실재와, 그와 대조적으로 또렷하게 존재하며 우리를 수시로 교란하는 허구의 중층구조인 셈이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이러한 진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허구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위치와 역할을 자문한다. . 이와 같은 영화 속 경계의 불분명함을 생각하고 있자면, 극중 묘사된 몇몇 인상적인 순간들이 개인적으로 상기된다. 지그재그 3부작에 속하는 앞선 두 영화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가 그러했듯,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 역시 굉장히 사소한 필치만으로 관객의 깊은 사유를 이끌어낸다는 지점에서 감독의 역량에 탄복하게 된다.(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1편부터 3편까지의 엔딩이 모두 감탄스럽다.) 예컨대 전작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와 더불어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역시 차 안에서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숱하게 등장한다. 헌데 전반부에 등장하는 딱 하나의 대화 장면이 예사롭지 않게 찍혔으며 다른 대화 장면들과 자동적으로 유비된다. 바로 영화의 스탶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교사역할로 출연했던 한 남성과 대화하는 대목에서, 영화의 촬영은 심히 이질적이다. . 딱 잘라 말하자면 궁금한 건 단 하나다. 왜 그 순간 영화의 카메라는 두 인물이 속해 있는 차량 내부가 아닌 차 바깥의 풍경으로 향해 있는가. 이건 운전수의 시점이라 보기도 애매하며 굳이 그 순간 영화가 텍스트 바깥의 인물인 운전수의 시점을 대변해야할 필요가 전무하지 않은가. .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선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방향의 의문에서 위치의 의문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그 순간 카메라가 차량 전방을 찍었느냐 후방을 찍었느냐 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쩌면 그 순간 카메라가 과연 어디에 놓여있었느냐에 대한 질문이 진정 필요한 것 같다. 우선 그때 당시 두 남녀가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먼저 여자가 남자에게 영화<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언급하며 당시 정말 교사처럼 보였다고 그의 연기를 칭찬한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은 실제로도 교사라는, 다소 예상 밖의 답변으로 여자의 말을 받아친다. 여자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허구의 창작물 안에서, 남자 역시 교사라는 허구의 배역을 본인의 상상력을 가미해 연기한 것이라 전제하고 그에게 질문했다. 허나 남자가 정말로 실제 교사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다름이 아니라 그렇다면 ‘연기’라는 허구의 모사행위에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진실성이 첨가되어 모든 것을 허구로 단정했던 여자의 전제가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 하지만 진정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도 교사라고 말하는 이 남자의 말이 영화의 감독 키아로스타미가 의도하여 지어낸 정교한 거짓의 대사일 가능성을 절대 배제할 수 없다. 결론은, 그는 그의 말대로 정말 교사일수도 있지만 그저 키아로스타미감독의 디렉팅 안에서 그가 쓴 각본상의 거짓된 대사를 읽은 연기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차량 내부에선 진실과 허구가 마구 뒤섞인 대화가 난무하는 중이다. . 그렇다면 차량 바깥은 어떤가. 언뜻 보기에 차 외부의 풍경은 그 자체로 일말의 불순물조차 없는 실재 그 자체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풍경 역시 극영화라는 포맷 안에 귀속돼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예컨대 영화 촬영의 용이함을 위해 주변 도로를 미세하게 매만졌는지를 과연 누가 알겠는가.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도로나 풍경 역시, 극영화촬영의 메커니즘 하에 카메라를 통해 사각의 프레임으로 구현되는 순간 온전한 실재가 아닌 것이 되며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디제시스로 전환된다. 결국 이때의 카메라는 진실인지 허구인지 알 도리가 없이 애매하기만 한 상황, 그리고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극영화 속의 배경. 그 사이에 붙박인 채 영화의 다음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해당 장면은 교사인지 배우인지 알 길이 없는 남성이 진실과 허구가 혼재된 대화를 끝마치고 차에서 하차한 뒤 실재처럼 보이지만 결코 실재라고 단정할 수 없는 다른 배경으로 이동해 또 다른 차량에 탑승해 프레임아웃을 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물론 이러한 나의 시각을 과잉해석이라 볼지도 모르겠다. 허나 수많은 차량 대화 장면 중 왜 이 장면 하나만 이러한 독특한 형식으로 찍혔는지에 대해 자문을 해봤을 시 내 좁은 영화적 식견으로는 도무지 이러한 답 외에 별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에게 해당 장면은 키아로스타미의 사소하면서도 위대한 결단으로 읽히며, 동시에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 예술이라는 당연한 전제를 새삼 일깨워준 사례였다. . (이 부분부터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스포일러도 포함합니다.) . 교사 캐릭터와 더불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등장했던 또 다른 캐릭터들 역시 본 영화에 재차 등장하며 영화 속 세계관의 모호함을 배가시킨다. 영화의 중반 즈음에, 영화의 스태프가 탑승한 차량 앞으로 낯익은 소년 두 명이 불쑥 나타난다. 바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촬영당시 메인캐릭터인 아마드와 네마자데를 연기했던 아역들이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를 본 관객이라면 틀림없이 그 순간 묘한 감정에 휩싸였을 것이다. 아마드와 네마자데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던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와 달리, 우연찮게 그들의 무사함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그 묘한 감정의 근원에 대해 자문해보자면 또 골치 아픈 문제가 떠오른다. 우리가 안도한 까닭은 과연 누구의 안위를 확인했기 때문일까? 정말 아마드와 네마자데를 연기한 실제 아역들의 살아있음을 눈으로 보았기에 우리는 그 순간 뭉클하였던 걸까? 어쩌면 아마드와 네마자데라는 허구의 캐릭터의 무사함을 확인하였기에 그러하였던 건 아닐까?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가 정서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은 아마드와 네마자데로 분한 ‘실제 아역배우’가 아니라, 끝끝내 친구의 공책을 전달하려는 선의를 보였던 아마드와, 마침내 그 의지를 전달받아 울음을 뚝 그친 네마자데라는 ‘허구의 영화적 캐릭터’가 아닌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를 모두 품고 있는 본 영화에서, 이러한 특별출연은 비단 순간의 반가움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쉽게 간과하지 못할 어떠한 질문들로 연쇄된다. . 앞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등장했던 교사캐릭터가 하나의 씬이 종결됨과 동시에 퇴장했던 것과 다르게 이들은 이후의 장면에서도 재차 등장하며 영화의 텍스트를 보다 더 복잡하게 만든다. 본 영화 속의 감독 케샤바르쯔가 영화 속에서 촬영 중인 영화인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내용은 대지진 이후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했던 아이들의 생사가 걱정되어 영화를 촬영했던 감독이 아이들이 거주하는 코케에 직접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헌데 후에 등장하는 영화 속 영화인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촬영장 후방을 유심히 보고 있으면 아마드와 네마자데를 연기한 아이들이 촬영장에 놀러와 아무렇지도 않게 현장을 구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감독이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플롯의 영화를 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결국엔 그가 그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며 끝나는 영화를 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가 무색하게 영화 밖 촬영장에서 이들은 서로 버젓이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며 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는 마치 자신이 아직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 냥 연기를 하고 있다. 어차피 짜고 치는 모큐멘터리의 결과물임을 알며 봤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진실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던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가 사실은 굉장히 허구적이었다는 사실을,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폭로한다. . 영화촬영현장을 담은 본 영화의 후반부에 따르면, 허구이긴 하지만 실제상황에 가깝게 보였던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가 사실은 배우의 의상부터 제스처 그리고 대사까지, 연기하는 이의 의지가 묵살되고 감독의 고집만이 투영된 결과물이었음이 들어난다. (물론 실제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촬영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냥 영화<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가 아니라 <올리브 나무 사이로>라는 영화 안에 속한 영화<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이기 때문에, 그 말인즉슨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각본이 실제 사실을 교묘하게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이 대목에서 호세인과 테헤레, 그리고 케샤바르쯔 이 셋이 2대1로 나뉜 채 극명한 의견차를 보이며 대립하고 있는 모습은 꽤나 흥미롭다. 대지진으로 인해 65명이 죽었다는 케샤바르쯔의 대사를 거부하고 실제 결과인 25명이 죽었다는 내용으로 이를 대체하려는 호세인과 더불어 테헤레는 남편에 대해 존칭을 붙일 것이 명시된, 자신이 사는 고장의 특색이 무시된 시나리오상의 설정을 거듭 무시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테헤레는 약간은 편견에 찬 듯 보이는 스태프의 의상선택을 단호히 거절한 바가 있다. 어차피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허구일 수밖에 없다면, 그 허구가 마땅히 보여야 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약간의 이질감을 감수하더라도 최대한 실재를 높은 비율로 반영하는 것? 아니면 이왕 허구의 결과물을 찍는 것이니 거짓을 조금 더 보태더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더 그럴듯하게 느낄만한 무언가를 찍는 것. 이들의 대립은 이와 같이 도식화가 가능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역설이 하나 있다면, 실제론 65명이 아닌 25명이 죽었다라고 말하는 호세인의 주장 역시 정말 실재인 것이 아니라 키아로스타미가 쓴 시나리오상의 설정일 확률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결국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포함한 이 지그재그 3부작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가. 라는 해묵은 논제에 대한 키아로스타미 감독 나름의 답변이다. . 허구와 진실이 무작위로 혼재하는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 영화가 영화 속의 영화에 비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예단하는 건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극중에서 케샤바르쯔 감독이 찍고 있는 영화<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는 케샤바르쯔가 속해있는 모큐멘터리의 디제시스에서 한 겹의 허구가 더 추가된 이중의 허구임이 명백하다.(후반부 촬영장면에서, 영화는 청각적으로는 케샤바르쯔의 컷 시그널을, 시각적으로는 슬레이트 인서트 숏을 추가하여 이전처럼 서로를 구분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명확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그건 케샤바르쯔가 속해 있는 허구가 그가 찍고 있는 영화인 허구 속의 허구보다 더 투명함을 재단할 근거는 못된다. 다름이 아니라 실재에 가까운 설정을 추가하자는 배우들의 의견을 뒤로 한 채 허구적인 설정들을 마구 추가하며 그 영화 속 영화의 허구성을 더 짙게 만드는 당사자가 다름 아닌 허구 속에 존재하는 케샤바르쯔 감독 본인이기 때문이다. . 테헤레에 대한 호세인의 기구한 순정역시 그의 뜻과 무관하게 영화 속의 모호한 경계와 우연찮게 엮임으로서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영화의 촬영현장에서 컷 사인이 들려오기 이전에, 호세인은 테헤레에게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강하게 항변하며 그녀의 환심을 사고 있다. 이때의 호세인은 케샤바르쯔 감독과 같은 시공간인 일차적 허구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투명한 진심에도 불구하고 호세인은 그 순간 테헤레와 말 한마디조차 섞을 수 없는 애처로운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데, 감독의 컷 사인이 개입하여 호세인이 영화 속 영화라는 이차적 허구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상황이 역전된다. 촬영이 시작되면 그 순간의 호세인은 테헤레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 아니라 그토록 염원하던 일인 테헤레와의 혼인에 성공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가 그녀의 곁에 얼쩡거리며 치근대는 남자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 되기 위해선 그냥 허구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며 허구 속의 허구, 즉 한 겹의 허구가 추가로 요망된다고 보아도 무방한 시각이다. .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숏을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지체 없이 고르고 싶은 숏이 하나 있다. 바로 촬영장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케샤바르쯔와 이하 스탶들, 그리고 케샤바르쯔의 카메라를 모두 함께 담은 숏이 내겐 유독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 순간 케샤바르쯔와 그의 카메라를 찍고 있는 대상은, 달리말해 그 순간 케샤바르쯔의 카메라와 마주보고 있는 것은 영화의 진짜 감독인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다. 이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시사한다. 앞전에 케샤바르쯔 감독이 영화 속 영화를 찍으며 배우들에게 거짓된 설정들을 소화하도록 종용했다면, 이 모든 것의 뒤에 숨어 케샤바르쯔 감독에게 거짓을 종용하게끔 종용한 이가 바로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라는 사실 말이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와 같은 현실이라는 실재의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건 두말할 것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헌데 그 실재라는 공간에 숨어 하나의 허구 내에서 이토록 수많은 허구를 임의로 조작했다면 과연 그가 속해있는 실재를 순수한 실재라고 보아도 무방한 부분인걸까? 어쩌면 이를 ‘허구적 실재’ 라고 명명하는 것이 올바른 처사가 아닐까? . 적어도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3부작에 근거했을 시, 순수한 실재는 없다. 허구적인 실재와 비교적 진실한 허구. 그 사이를 유영하는 여러 관념들만이 어렴풋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절망적으로 해석될 법한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의 엔딩을 통해 기어코 기상천외한 일말의 희망을 만들어낸다. 영화 속 영화라는 이중적 허구를 통해 희망의 씨앗을 엿보았던 호세인의 사례처럼 말이다. . 영화촬영이 끝난 뒤, 허구 속의 허구에서 나와 일차적 허구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호세인은 다시금 테헤레와 멀어지며 그의 진심은 그녀에게 재차 짓밟히고 만다. 하지만 여기서 키아로스타미는 약간의 형식적 변화를 가져오며 교묘하게 허구의 틈을 허물어버린다. 차에 탑승하려는 호세인에게 케샤바르쯔 감독은 그러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을 하며 테헤레를 끝까지 따라가 보라는 언지를 그에게 슬쩍 남긴다. 이는 사실상 케샤바르쯔 감독이 호세인에게 주는 또 하나의 디렉팅이다. 여기에 이전과 다른 점 하나가 있다면 이번엔 이전과 다르게 허구의 경계를 구분 짓는 감독의 컷 사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진짜 감독인 키아로스타가 쓴 각본상의 디렉팅을 받은 케샤바르쯔가 호세인에게 지시한, 마치 릴레이 바통과도 같은 그 연쇄적 디렉팅엔 이제 더 이상 별다른 경계가 있는 게 아닌 셈이다. . 영화의 엔딩은 익스트림 롱숏의 화면 하에 멀어져간 테헤레에게 뛰어가 자신의 마음을 다시금 고백한 뒤 어떠한 대답을 듣고 돌아오는 호세인의 모습으로 처리가 되어 있다. 이 구도가 예사롭지 않은 부분은 바로 이러한 익스트림 롱숏의 촬영구도가 영화 내내 가짜 취급을 받았던 영화 속 영화인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엔딩 구도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허구 속의 허구의 엔딩구도로 영화를 마무리 짓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이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선 픽션과 리얼의 경계가 완전히 무화됐음을 방증하는 부분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엔딩씬의 익스트림 롱숏은 나에게 분명히 희망의 영화적 구현으로 보였다. 비록 한 가지 장면엔 수십 가지의 해답이 있겠다만 혼자서 차로 오르지 못한 언덕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올라가게 되고, 후에 도와준 이를 차에 태워주어 도움의 객체에서 도움의 주체가 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엔딩은 나로선 희망의 시각화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엔딩역시 구도자체를 차용한 만큼 그 맥락의 부분역시 일정 부분 차용한 지점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엔딩에서의 희망은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에서처럼 가시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마지막의 테헤레가 호세인의 고백을 받아주었는지 아니면 거절하였는지에 대한 확실한 결말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엔딩을 희망적이라 볼 수 있는 까닭은 시종 허구와 진실이 뒤섞여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었던 영화의 이전과 다르게 그 순간엔 어떠한 일치의 순간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 딱 잘라 말하자면, 영화의 엔딩은 과연 누구의 시점인가. 먼저 이건 영화를 감독한 키아로스타미의 시점이다. 그리고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의 엔딩구도와 동일함으로)본 영화 내에서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를 감독한 것으로 줄곧 묘사된 케샤바르쯔 감독의 시점이기도하다. 더 나아가 이건 완전히 텍스트 바깥에 위치한 관객의 시점이기도하다. 그렇게 영화의 엔딩에 이르면 복잡하기 그지없었던 경계는 지워지고 시점은 공동의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소년의 순수한 마음이 소녀에게로 전달되기를 기원한다. 소녀가 소년의 마음을 받아주고 말고 와는 무관하게, 이토록 수많은 겹으로 짜여진 허구의 틈 사이에서 영화의 감독이든, 영화 내의 영화감독이든, 아니면 영화의 관객이든, 모두가 뜻을 모아 누군가를 응원하는 영화적 일심동체의 순간이 도래하였다면, 그거야말로 예술이 만든 희망 내지는 사소한 기적이 아니겠는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손에 쥔 소재에 대한 깊은 숙고가 가득하며 그와 더불어 그 소재를 다루는 창작자의 솜씨마저 경탄스럽기 그지없는 실로 완전한 영화다.
Cinephile
5.0
‘영화’라 함은 결국 현실이 만든 또 다른 삶의 맥락에 불과하다고 은유가 되면서, 작품 속의 그 맥락과 작품 밖 현실의 맥락은 서로를 비평하는 평등한 관계에 놓인다.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인물 역할을 영리하게 활용할 뿐인 예술의 겸손한 순기능이 아름답다.
환타맛유리
2.5
싫대잖아
P1
3.5
고마 아가씨요 내랑 결혼하입시더 애들 순풍순풍 막 낳고 오손도손 행복하입시더 예?돈읍이도 내 행복하게 해줄께! 알아들어씸니꺼?말좀 해보시라요 아따마 거참 답답하구로 알았는교 몰랐는교? 이러는 상황..한국에선 이제 있을 수 없는 쌍팔년도식 이야기다..
Jay Oh
4.0
영화를 향한 구애로도 느껴졌다. 예술을 담은 삶을 담은 예술, 그 속에서 또 삶을 보았다. A pursuit, and a zigzag of life and art.
나현
2.5
호하다 추세인..
샌드
5.0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을 보며 결국 영화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 생각했을 때, 영화가 곧 인생이고 인생이 곧 영화라는 얘기를 들은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영화도 역시 그랬습니다. 영화의 실험적인 것들이나 많은 것들을 세우고 무너뜨리는 과정 역시 중요하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소중한 영화였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다가온 작품이기도 했고, 물론 영화로 이런 걸 해결한다는 덴 큰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간접적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키아로스타미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상당히 마음에 오래 남을 한 편의 영화기도 했습니다.
희♡
4.0
밤늦게 커피를 마신탓인지 이 시간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 어제 보다가 잠들었던 이 영화를 오늘 다시 봤다 역시 이 감독의 영화는 결말이 애매모호하다.. '체리향기'에서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다 좋은 영화란 이런걸까.. 답이 아닌 질문과 사색을 던져주는, 극장밖에서 진짜 시작되는 이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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