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phile5.0세상엔 항상 부당함과 불공평함이 가득할 것이며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독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이 그러하다는 점은 사람이 희생하는 삶을 살면서 나와 같은 타인의 고통에도 함께 울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Like299Comment11
Sleep away4.5참 세련된 방식으로 찍은 영화인 듯. 몇 수위에서 놀고 있는 듯한 높은 미의식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밤씬들은 아예 넋을 놓고봤다. 영화미학의 또다른 극단을 본 느낌. '날 바꾸려들지 마라' 이건 분명 정당한 요구인 데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생각해보면 좀 위험하게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병렬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을 개도의 대상으로 보고 바꾸고 싶어하는 샤오츠의 독선적인 욕망과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정당한 욕망이 이 병치속에서 비슷한 것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축인 아버지의 경우를 보면 영화가 샤오츠의 폭력을 그렇게까지 보고 있다는 생각은 또 안 들었다. 국가의 폭력에 정신을 파괴당한 아버지는 약해져서 그만 가족들에게 '치졸한' 폭력을 휘두른다. 이 폭력은 분명 '치졸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샤오츠의 폭력도 아버지의 폭력처럼 그렇게 '치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바깥에서 싸움에서 진 남성들은 그 실패를 복구하고자 여자친구나 가족들을 통제하려든다. 아버지가 '나한텐 이제 당신과 아이들 밖에 없다'고 말할 때 과연 그 의미가 무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지하고 사랑할 사람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상처입은 권위를 복귀할 대상을 말하는 건가? 사회적 권위를 잃었으니 이제 가정안에서 너희에게만 내 권위를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인가? 어머니는 함께 싸우자고 겁나지 않는다고 말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료가 되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애초에 여자를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답답한 장면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러한 아이디어는 살면서 한 번도 머릿속에 떠올려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샤오츠도 마찬가지다. 샤오마나 허니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여자친구와 함께 '편을 먹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여자친구를 동료가 아니라 그냥 보호하거나 취하거나 개도해야할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다. 남자들 이야기를 볼 때의 어떤 답답함이 있다. 답이 안나온다. 매번 같은 잘못을 질리지도 않고 반복한다. 이야기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어쨌든 이 뒤틀린 폭력을 합리화하기 보다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긴했다. 연민도 있고. 근데 이것도 좀 그렇다. 대체 언제까지? 연민은 물론 고마운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바뀔 생각을 해야지 연민을 면죄부로 삼아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매번 당해야하는 사람은 심정이 어떻겠는가? . 남자 주인공에게는 바깥세계가 타자화 되어있는 것 처럼 여성들 또한 늘 타자화 되어 있다. '나는' '세계를' 바꾼다. '나는' '세계와' 싸운다. 처럼........ '나는' '이 여자를' 어째야한다. 근데 따지고보면 자기도 세상의 일부이고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근데 이상하게도 남자 친구들과는 함께 싸우고 함께 슬픔을 나누고 다 할 수 있지만........ 여자는 '여자문제'가 될 뿐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현실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영화였던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에필로그를 대학합격 발표로 끝낸 건 참 아쉬웠다. 마지막에 생각해야 할 것이 고작 그런 것이었을까? 비할바없이 탁월한 미적감각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도무지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 주체는 내맘대로 안되는 게 당연하지만 대상은 내맘대로 안될 때 분노하게 된다. 대상이 내맘대로 안되면 대상을 '다루는' 자신의 능력이 의심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근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사람은 다 주체이다.Like232Comment11
정환5.0“이미 흘러간 진실의 자리로 향했던 발걸음을 멈추어 카메라 하나를 내려놓는 영화는 그저 이러한 일들이 있었음을, 그들과 그것들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을 때, 이를 알면서도 기어이 모든 것을 담아내려 했던 가장 한계에 가까이 도달한 영화.” 개인의 성장과 역사의 흐름과 시대의 혼란들 사이에서 대담하게 포착했던 순간조차도 온전하지 못한 시간의 파편들에 불과하듯, 제아무리 담아봐야 그 안의 개인의 시선들을 대변하지 못한 채 개입한 또 다른 렌즈에 불과하듯, 사실을 옮기려는 노력들조차 결코 현실일 수 없는 한낱 영화에 불과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영화였다. 겨우 237분의 영화를 보며 느낀 것들을 글로도 온전히 옮길 수 없던 내가, 영화가 결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을 때, 이를 알면서도 기어이 모든 것을 담아내려 했던 가장 한계에 가까이 도달한 영화 앞에서 할 수 있던 건, 몇 문단의 글 따위로 감상에 가까이 닿도록 최대한 온전하게 옮기는 대신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나의 하루에 이 시간을 다시 한 번 더 흘러가게끔 만드는 것 밖에 없었다. 영화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풍경과 소년 개인이 지닌 어린 날의 비극 모두를 옮기려는 무모한 용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변하지 않을 세계를 향해 무언가를 바꿔보겠다는 대단한 시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어두운 시대를 조명하던 소년의 손전등을 이리저리 따라가던 영화는 현실 그 자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가 지나간 역사나, 왜곡된 기억들을 담아낸다는 것은 뒤늦게서야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대를 지나쳐 온 우리가 이제는 무언가를 다 알고 있다는 선언도 아니다. 이미 흘러간 진실의 자리로 향했던 발걸음을 멈추어 카메라 하나를 내려놓는 그들은 가짜들로 다시 한번 진짜를 만들어보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이러한 일들이 있었음을, 그들과 그것들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바뀌지 않을 세상이기에, 바꾸려고 하는 대신 옮기기 시작한다. 온전히 담을 수도 없기에, 옮기는 대신 일부를 선택할 뿐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카메라의 몫이었다. “그곳에 있었던 사실”이라는 문장을 “사실이 그곳에 있었다고”바꾸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다. 그래, 우린 거기에 없었으나 영화는 거기에 있었다. 영화는 비록 진짜를 담아내려 한 가짜에 불과하지만, 그때의 역사에 함께하지 못했던 우리를 대신하여, 영화는 역사에 함께한다. 영화는 역사와 함께했고, 그렇게 가짜로서의 영화가 진짜라는 현실 속 세상의 일부가 되는 법을 터득했다.Like131Comment0
크크
4.0
This may contain spoiler!!
김혜리 평론가 봇
5.0
한편의 영화가 꿈꿀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진 영화
Cinephile
5.0
세상엔 항상 부당함과 불공평함이 가득할 것이며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독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이 그러하다는 점은 사람이 희생하는 삶을 살면서 나와 같은 타인의 고통에도 함께 울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
Sleep away
4.5
참 세련된 방식으로 찍은 영화인 듯. 몇 수위에서 놀고 있는 듯한 높은 미의식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밤씬들은 아예 넋을 놓고봤다. 영화미학의 또다른 극단을 본 느낌. '날 바꾸려들지 마라' 이건 분명 정당한 요구인 데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생각해보면 좀 위험하게 읽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병렬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을 개도의 대상으로 보고 바꾸고 싶어하는 샤오츠의 독선적인 욕망과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정당한 욕망이 이 병치속에서 비슷한 것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축인 아버지의 경우를 보면 영화가 샤오츠의 폭력을 그렇게까지 보고 있다는 생각은 또 안 들었다. 국가의 폭력에 정신을 파괴당한 아버지는 약해져서 그만 가족들에게 '치졸한' 폭력을 휘두른다. 이 폭력은 분명 '치졸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샤오츠의 폭력도 아버지의 폭력처럼 그렇게 '치졸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바깥에서 싸움에서 진 남성들은 그 실패를 복구하고자 여자친구나 가족들을 통제하려든다. 아버지가 '나한텐 이제 당신과 아이들 밖에 없다'고 말할 때 과연 그 의미가 무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지하고 사랑할 사람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상처입은 권위를 복귀할 대상을 말하는 건가? 사회적 권위를 잃었으니 이제 가정안에서 너희에게만 내 권위를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인가? 어머니는 함께 싸우자고 겁나지 않는다고 말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료가 되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애초에 여자를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답답한 장면중 하나였다. 어쩌면 그러한 아이디어는 살면서 한 번도 머릿속에 떠올려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샤오츠도 마찬가지다. 샤오마나 허니도 마찬가지고. 그들은 여자친구와 함께 '편을 먹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여자친구를 동료가 아니라 그냥 보호하거나 취하거나 개도해야할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다. 남자들 이야기를 볼 때의 어떤 답답함이 있다. 답이 안나온다. 매번 같은 잘못을 질리지도 않고 반복한다. 이야기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어쨌든 이 뒤틀린 폭력을 합리화하기 보다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긴했다. 연민도 있고. 근데 이것도 좀 그렇다. 대체 언제까지? 연민은 물론 고마운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바뀔 생각을 해야지 연민을 면죄부로 삼아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매번 당해야하는 사람은 심정이 어떻겠는가? . 남자 주인공에게는 바깥세계가 타자화 되어있는 것 처럼 여성들 또한 늘 타자화 되어 있다. '나는' '세계를' 바꾼다. '나는' '세계와' 싸운다. 처럼........ '나는' '이 여자를' 어째야한다. 근데 따지고보면 자기도 세상의 일부이고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근데 이상하게도 남자 친구들과는 함께 싸우고 함께 슬픔을 나누고 다 할 수 있지만........ 여자는 '여자문제'가 될 뿐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현실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영화였던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에필로그를 대학합격 발표로 끝낸 건 참 아쉬웠다. 마지막에 생각해야 할 것이 고작 그런 것이었을까? 비할바없이 탁월한 미적감각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도무지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 주체는 내맘대로 안되는 게 당연하지만 대상은 내맘대로 안될 때 분노하게 된다. 대상이 내맘대로 안되면 대상을 '다루는' 자신의 능력이 의심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근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사람은 다 주체이다.
메뚜리언
4.5
불안한 시대의 물결 속 일렁이는 청춘은 어디로 흘러가는걸까? 바랬던건 이런게 아닌텐데.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거야.
JE
5.0
This may contain spoiler!!
정환
5.0
“이미 흘러간 진실의 자리로 향했던 발걸음을 멈추어 카메라 하나를 내려놓는 영화는 그저 이러한 일들이 있었음을, 그들과 그것들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을 때, 이를 알면서도 기어이 모든 것을 담아내려 했던 가장 한계에 가까이 도달한 영화.” 개인의 성장과 역사의 흐름과 시대의 혼란들 사이에서 대담하게 포착했던 순간조차도 온전하지 못한 시간의 파편들에 불과하듯, 제아무리 담아봐야 그 안의 개인의 시선들을 대변하지 못한 채 개입한 또 다른 렌즈에 불과하듯, 사실을 옮기려는 노력들조차 결코 현실일 수 없는 한낱 영화에 불과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영화였다. 겨우 237분의 영화를 보며 느낀 것들을 글로도 온전히 옮길 수 없던 내가, 영화가 결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을 때, 이를 알면서도 기어이 모든 것을 담아내려 했던 가장 한계에 가까이 도달한 영화 앞에서 할 수 있던 건, 몇 문단의 글 따위로 감상에 가까이 닿도록 최대한 온전하게 옮기는 대신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나의 하루에 이 시간을 다시 한 번 더 흘러가게끔 만드는 것 밖에 없었다. 영화는 혼란스러운 시대의 풍경과 소년 개인이 지닌 어린 날의 비극 모두를 옮기려는 무모한 용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변하지 않을 세계를 향해 무언가를 바꿔보겠다는 대단한 시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어두운 시대를 조명하던 소년의 손전등을 이리저리 따라가던 영화는 현실 그 자체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가 지나간 역사나, 왜곡된 기억들을 담아낸다는 것은 뒤늦게서야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대를 지나쳐 온 우리가 이제는 무언가를 다 알고 있다는 선언도 아니다. 이미 흘러간 진실의 자리로 향했던 발걸음을 멈추어 카메라 하나를 내려놓는 그들은 가짜들로 다시 한번 진짜를 만들어보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이러한 일들이 있었음을, 그들과 그것들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바뀌지 않을 세상이기에, 바꾸려고 하는 대신 옮기기 시작한다. 온전히 담을 수도 없기에, 옮기는 대신 일부를 선택할 뿐이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카메라의 몫이었다. “그곳에 있었던 사실”이라는 문장을 “사실이 그곳에 있었다고”바꾸는 것이 영화의 역할이다. 그래, 우린 거기에 없었으나 영화는 거기에 있었다. 영화는 비록 진짜를 담아내려 한 가짜에 불과하지만, 그때의 역사에 함께하지 못했던 우리를 대신하여, 영화는 역사에 함께한다. 영화는 역사와 함께했고, 그렇게 가짜로서의 영화가 진짜라는 현실 속 세상의 일부가 되는 법을 터득했다.
...
5.0
실화소재 영화를 이토록 집요하게 만들어놓고 "그래봤자 영화"라고 나지막이 말하는 대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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