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ldovers
The Holdovers
2023 · Comedy/Drama · United States
2h 13m · R


A curmudgeonly instructor at a New England prep school is forced to remain on campus during Christmas break to babysit the handful of students with nowhere to go. Eventually, he forms an unlikely bond with one of them — a damaged, brainy troublemaker — and with the school’s head cook, who has just lost a son in Vietnam.
Where to 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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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
4.0
상처를 안고 홀로 견디는 자들의 시공간을 연결하는 디졸브의 짙은 위로.
천수경
3.5
이 영화의 묘미는 엘리트 사회의 말빨이다. 좀 밉상인 주인공 둘 다 말을 너무 잘해서 덜 밉다. 특히 선생님의 현란하고 문어체적인 대사가 그 사람이 얼마나 사회성 떨어지고 책에 파묻혀 사는지를 잘 드러낸다. 자막이 유머를 난도질했고, 선 넘는 의역도 많다. 심지어 자막 타이밍도 이상해서 지금 2024년도가 맞나 싶었다. 운동 안 하면 body will devour itself!! -> 운동 안 하면 몸이 자기를 먹어치운다! (선생이 한 말을 학생이 똑같이 되갚아줌. 두번 나옴.) ->운동 안 하면 몸이 쇠약해진다! 로 번역함. I‘m not sure I have an entire book in me... -> 책 한 권이 내 안에 과연 있을지. 혹은 -> 책 한 권까지나 쓸 수 있을지. 정도가 딱 알맞다. (선생님이 본인은 책을 쓸 깜냥은 안 된다며 ‘monograph’ 정도를 쓰겠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 책 한 권을 쓸 지식이 내겐 없어. 로 번역함. 책 쓰는 건 우선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이나 통찰의 문제다. 선생님은 본인의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번역가가 자의적으로 “지식”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었다. 무례하고 비윤리적인 오역이다. Your logic is flawless, but ... -> 네 논리는 완벽하지만, ... (이미 소년의 부모에게 당신들의 아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천재까진 아니더라도 정말 명석하다고 주장한 후다.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선생님이 학생을 추앙해주는 장면이다. 비록 소년은 못 듣지만... 그러니까 그 이후에 저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그래 너 잘났다, 의 어감도 있음- 애정을 담는 게 이 선생의 매력임.) -> 말은 된다만, ... 으로 번역함. you entitled little degenerates, -> 너희 특권층 양아치들은, (영화 내내 선생님은 학생들한테 대놓고 너희가 얼마나 복 받았는지에 관해 신랄하게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계급성이다. 너희는 어차피 베트남 안 가고, 가난한 이들이 너희 대신 전쟁 나가서 팔 잃고 온다는 걸 명확하게 짚고 가는 선생님이다.) -> 너희 같은 망나니들, 로 번역함. (망나니로 퉁치면서 그 표현에 내재된 계급에 대한 경멸을 다 날려버리심.) Dumb and rich, it's a popular combination here. -> 멍청과 부자는 꿀조합이죠. (메리는 시종일관 이 학교 부자 새끼들을 작은 악마들로 생각하면서도 애정을 가진 캐릭터임.) -> 멍청한 금수저들 많죠. (메리의 유머감각 싹 날리심. 메리 너무 웃긴 캐릭터인데...) - And I don't have friends here... - Friends are overrated -> 나 여기 친구도 없고... -> 과대평가된 건 필요없어 (영화 번역은 글자 수의 효율을 따져야 하기에 최소한으로 쓰는 게 좋다는 걸 감안하면 이 정도여야 함. 직역하자면 “친구는 과대평가된 개념이야” 정도임.) -> 친구는 사실 필요 없어. 로 번역함. (제발 이 영화에서 말 제일 잘 하는 인간의 정체성 지켜주세요...) You hormonic vulgarian, 무례한 성적 대상화하지 마라~ -> 이 호르몬 짐승아, ~ (학교 밖에서 보니 매력 있는데요? 쌤이랑 케미 좋은데요? 하면서 다른 여자 교직원이랑 엮으려 해서 선생님이 핀잔 줌.) -> 아무리 호르몬이 넘쳐도, ~ 로 번역함. At least pretend to be a human being. -> 인간인 척만이라도 해주세요. (교장이 방학 때 남은 애들 불쌍하니까 좀 살살 다뤄달라고 함. 교장과 선생은 앞서 격렬히 논쟁한 상태고, 교장은 선생님의 학생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엔 친밀함과 긴장이 공존함.) -> 아이들을 너그러이 대해주세요. 로 번역함. (글자의 효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봐주기엔 타이밍 충분했음.) 한 번 밖에 안 봐서 지금 기억나는 게 이 정도고, 부적절한 번역이 열 댓개는 넘었음.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괴팍하게 구는 건가 조금 고민되는데, 번역 때문에 화나는 게 오랜만이라서 끄적여봤다. 알고보니 자막 번역하신 분이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고 착취 당하는 중이라서 시위하듯 의도적 태만을 발휘하신 거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장기적으로 악덕한 회사가 망하도록 누군가 운동을 벌이고 있는 걸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태어나서 영화관에서 처음 보는 영화일 수도 있잖아. 이렇게 파장이 큰 시위에 내가 동의해드릴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어렵다.
STONE
3.5
연대를 이룰 줄 아는 사람만이 홀로서기를 해낼 수 있다.
재원
4.5
앓아본 사람만이 위로할 수 있는 아픔이 있단 걸 아는 어른의 뭉클한 진심, 기성세대의 책임감이 다음 세대의 희망임을 아는 어른의 값진 희생.
양기연
5.0
보는 내내 행복감에 젖어 있던 그 감흥이 워낙 강렬해 끝난 직후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 하루가 지난 지금에서야 빠르게 감상을 써 내려가 본다. . (스포일러) .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옛 영화에서나 삽입되던 관람등급 화면, 옛 제작사 로고 등을 마주하게 된다. 화면에 잔뜩 낀 필름 그레인, 옛날식 오프닝 크레딧까지. 1970년에서 1971년까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아예 스스로 1970년대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다. 영화는 197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에 스스로를 묶어버린 셈이다. . 그리고 영화 본편이 시작되면, 우리는 한 동안 '바튼 아카데미'라는 공간을 떠나지 못한다. 2주 간의 방학을 맞아 대부분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단체로 학교를 떠나고, 그나마 남아있는 몇 명 중 다시 또 대부분이 저 프레임 너머 어딘가로부터 날아온 헬기를 타고 저 프레임 너머 어딘가로 떠나버린 순간, 우리는 정말 '바튼 아카데미'에 '갇혀 버리고 말았음'을 실감한다. 영화는 이제 '바튼 아카데미'라는 공간적 배경에도 스스로를 묶어 버렸다. . 영화가 그렇게 시간적, 공간적으로 두 번에 걸쳐 스스로를 속박시키고, 똑같이 두 번에 걸쳐 일군의 무리들이 바튼을 떠난 뒤에야, 우리는 그 자리에 남은 이들이 어떤 결핍들을 가지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앵거스 털리, 폴 허넘, 메리는 모두 특정 가족 구성원들을 자의로 혹은 타의로 잃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이 영화가 1970년대라는 특정 시점과 바튼이라는 특정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것처럼, 스스로를 그 가족들이 상징하는 과거에 가두고 있다. . 우선 메리가 죽은 아들과 함께 하던 과거라는 시점에, 그리고 아들이 다녔던 바튼이라는 공간에 스스로를 묶어둔 채 계속해서 죽은 아들을 기억하려 한다는 점은 너무 명확해 보인다. 그렇다면 털리와 허넘의 경우는 어떠한가? . 두 번째 무리가 바튼을 떠나기 전 벌어지는 일련의 소동들을 보자. 털리는 쿤츠가 특정 사진을 훔쳐간 데 격노하는데, 후에 그 사진은 가족 사진임이 밝혀진다. 또한, 털리는 예준이 한국의 가족을 그리워 하는 맘을 이해하며 그의 시트 처리를 돕는다. 털리는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보스턴을 들르기로 했다는 약속을 몇 번이고 강조하는데, 보스턴은 바로 그의 결핍을 상징하는 아버지가 갇혀 있는 곳이다. 이처럼 털리는 매 순간 자신의 가족의 이미지, 그 중에서도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하던 과거에 매어 있는 인물이다. 털리는 쿤츠에게 장갑 한 짝을 빼앗겨 잃어버린 친구에게 '한 짝만 갖고 있는 것이 더 열받으니 일부러 한 짝만 빼앗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런 털리의 말을 듣자마자 나머지 한 짝까지 내던져 버려 차라리 그 결핍을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 결과, 털리의 도움으로 시트를 숨긴 친구, 털리의 말을 듣고 남은 장갑 한 쪽을 내던지고 결핍을 망각한 친구는 바튼 너머, 프레임 너머로 헬기를 타고 사라지지만, 털리는 결핍을 간직한 채 바튼에, 이 영화에 갇혀 버린다. . 허넘은 어머니의 죽음 및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한 결핍을 극복하고자 스스로 가족과의 연을 끊고 바튼으로 진학한 뒤 하버드에까지 입학하였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메리나 털리와 정반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버드에서 부유한 가족의 도움을 톡톡이 받던 학우와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결핍을 또 다시 마주하게 되어버린 뒤 사고를 치고, 자신이 실패했다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과거로, 다만 자신이 가족을 잃은 과거보다는 비교적 최근의 과거로 돌아와, 스스로를 딱 그 시점의 과거를 상징하는 바튼에 묶어 버린 인물이다. . 허넘이 보스턴에서 동창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숨기기 위해, 자신이 과거에 스스로를 묶어 버렸음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던 중 털리의 장난으로 인해 우연히 '카메라 옵스큐라'를 언급하게 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공간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으로 들어온 빛을 통해 반대편 벽에 이미지가 새겨지도록 하였던 것으로, 카메라, 영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빛은 그 공간 안에 새어 들어와 반대편 벽에 이미지의 형태로 갇혀 버린다. 각자의 이유로 과거에, 그리고 그 과거를 상징하는 바튼이라는 공간에 묶여 버린 세 인물. 이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영화가 스스로를 1970년대라는 시간, 그리고 바튼이라는 공간에 스스로를 묶은 형상과 유사하다. 결국 바튼은 카메라 옵스큐라, 다시 말해 영화이고, 그 세 인물은 그 영화 안에 흘러들어와 이미지의 형태로 갇혀 버린 세 갈래의 빛줄기인 셈이다. 그 셋이 바튼에 남은 이후 영화가 유독 털리로 하여금 카메라를, 관객을 쳐다보도록 하는 듯한 연출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털리가 열쇠를 훔친 뒤 바튼 내부를 홀로 떠도는 씬을 오래도록 보여주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에게 결여된 가족 구성원의 부분들은 서로에게 남은 부분과 꼭 맞아 떨어지기에, 막상 그들 셋이 식탁 앞에 모여 앉은 모습을 보면 마치 블록 조각이 맞춰진 듯 아버지, 어머니, 아들로 구성된 하나의 가족 형태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바튼의 학생들은 방학이 되면 가족과 외부로 떠난다. 이제 허넘 아버지, 메리 어머니, 털리 아들도 외부로 떠날 시간이다. . 제일 먼저 그들이 바튼 외부로 나가게 되는 순간은, 털리의 부러진 팔을 고치러 병원에 가는 순간이다. 이때 털리는 허넘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병원 측에 거짓말을 한다. 두 번째로 그들이 바튼 외부로 나가게 되는 순간은, 허넘이 짝눈과 트리메틸아민뇨증으로 대표되는 신체적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게끔 파티에 가는 순간이다. 이때 그들은 마치 하나의 가족처럼 파티에 이르러 다른 가족들을 소개받는다. 세 번째로 그들이 바튼 외부로 나가게 되는 순간은, 메리의 여동생의 집을 거쳐 보스턴에 가는 순간이다. 이때 털리는 메리를 부축해 높은 계단을 오르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때 털리는 허넘의 동창 앞에서 자신이 허넘의 조카라고, 허넘이 현재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해 책을 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 이처럼 그들이 바튼 밖으로 떠나는 순간은, 그들 각자 과거에 겪은 가족 구성원 상의 결핍된 부분이 서로 블록 맞추듯 꼭 맞아 들어갔던 것처럼, '털리의 부러진 팔', '허넘의 짝눈과 트리메틸아민뇨증', '메리의 계단을 오르기 힘든 몸 상태' 등 그들의 신체적 하자를 서로 보조하여 극복하도록 돕는 순간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들은 타인에게 서로가 가족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거나, 적어도 가족'인 체 한다'. .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마치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 영화 안에 갇힌 세 개의 이미지와도 같다. 외따로 떨어진 숏들이 모여 그들이 원래부터 한 덩어리였던 것처럼 몽타주라는 '거짓말'을 거쳐 하나의 영화를 구현하는 것처럼, 각각의 결여를 품고 외따로 떨어진 구성원들이 모여 일련의 '거짓말'을 거쳐 하나의 가족을 구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가족의 도움 안에서 자신의 과거와 전면적으로 마주하고자 한다. . 우리는 영화 초반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바튼 졸업생들의 기념비, 나아가 이 영화 배경인 1970년 당시에도 한창이던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메리의 아들의 사진으로 이어지는 숏을 보게 된다. 이 영화가 바튼 안에 머무는 중에도 그밖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다. TV에서 옛날 부부 퀴즈 쇼를 연거푸 재방송하고 새해 맞이 뉴욕의 풍경을 방송할 때에도 그밖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다. 학생들은 바튼에 머무르는 동안만큼은 전쟁의 포화로부터 안전하다. 그러나 바튼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부유층 자제라는 특혜로 명문대에 진학하지 이들은 여전히 전쟁으로부터 안전하나, 그러한 특혜를 갖추지 못하는 이들은 메리의 아들처럼 징집되어 전쟁 한복판으로 내던져지고 만다. 바튼은 일정 기간 동안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가려주는 공간으로 작용하나, 그 기간은 영원할 수 없다. 이는 영화가 일정 시간 동안 현실로부터 도피할 공간을 마련해 주지만,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방학마다 부유한 부모와 함께 바튼을 떠나는 아이들은 아마 바튼을 졸업하는 순간에도 명문대 진학이 정해져 있을 테니 바튼을 영영 떠나게 되는 졸업의 순간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혹자는 영화가 끝나고 다시 어두운 상영관 밖으로 나서서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이 전혀 두렵지 않을 테지만, 혹자는 차라리 영화가 영원하기를 바랄 것이다. 털리가 바튼으로부터 또 다시 쫓겨나 사관학교로 갈 것을 두려워 하는 것처럼. 허넘이 과거에, 바튼에 스스로를 묶어 두고 취해 있는 것처럼. . 그러나 이제 그들은 가족의 곁에 있고, 영화가 끝나는 것을 슬슬 두려워 하지 않기로 한다. 메리는 자신의 임신한 여동생에게 아이의 선물을 건네고 그 아이의 미들네임에 자신의 죽은 아들의 이름을 새기겠다는 약속을 듣는다. 허넘과 털리는 고대의 유물들을 살펴 보고, 그 연장선상에서 허넘의 하버드에서의 일과 털리의 정신병자 아버지를 마주한다. 허넘은 아버지를 닮을 것을 걱정하는 털리에게 '너는 너의 아버지와 다르다'고 말한다. 고대 역사를 가르치던 선생은 자신의 학생이자 대안 아들인 그에게, 그렇게 '과거를 마주하되, 내가 뿌리박은 그 과거와 거기서 자라난 나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선언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카메라 옵스큐라, 자신들의 영화, 바튼으로 돌아와 그 방안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새해를 맞는다(그들이 폭죽을 터뜨리는 순간, 카메라는 건물 바깥으로 서서히 빠져나가 창문 프레임을 보여주는 등 그들이 머무는 공간을 강조한다.). . 메리는 새해에도 학교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렇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돈이 없어 전쟁의 포화로부터 지켜 주지 못했던 아들을 잊지 못해' 남는 것이 아니라 '동생의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돈을 벌고자' 남는 것이다. 바튼에는 남되, 이제 그는 과거에 묶여 있지 않다. . 허넘은 털리에게 '너는 너의 아버지와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털리의 아버지는 망상에 빠져버린 정신병 환자이다. 즉, 그는 영원한 자신만의 영화 속에 사는 인물이나 다름없다. 털리의 대안 아버지인 허넘 역시 과거에, 바튼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살아온, 자신만의 영화 속에 사는 인물이었다. 털리의 새로운 아버지인 허넘이 자신의 영화를 까부수고 현실로 뛰쳐 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생물학적 아버지와 조금 다른 판본의 미래를 보여줄 수 있다면, 털리는 조금 더 희망을 가질지도 모른다. . 허넘은 털리를 변호하여 털리가 사관학교로 전학가는 것을 막음으로써, 바튼의 여타 부모들처럼(그리고 메리가 스스로 해내지 못해 자책했던) 자식을 전쟁으로부터 막아내는 마지막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바튼을 떠나는 길을 택함으로써, 털리가 두려워 하던 미래(영화에 영영 갇혀 버리는 미래)와 다른 판본의 미래를 보여주기로 한다. 허넘과 털리가 마지막으로 마주할 때, 털리는 허넘을 보며 스스로 세상에 나아갈 의지를 얻은 듯 보인다. 털리를 다시 학교로 들여보내고, 허넘은 이제 다시는 취하지 않겠다는 듯 술을 잠깐 입에 머금었다 내뱉고는 어딘가로 차를 운전해 간다. 저 프레임 너머, 영화 밖 어딘가로.
스테디셀러
3.0
물웅덩이도 하늘과 해를 담는다.
정환
4.0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라지만, 삼킨 단 맛보다 내뱉은 쓴맛의 잔향이 더 오래 남기 마련이다. 역경이 우리를 발전시키는 것처럼, 입을 적시곤 바로 뱉어 버리는 그 쌉쌀한 어른의 맛이 내 삶의 풍미를 더해 줄 거라 믿는다. 이 영화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끊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을 그려내며 영화 자체가 어떠한 과거에 대한 향수를 온전히 담아내려는 커다란 목적을 가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옛 시대의 향수를 소비적으로만 사용하던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다. 최근 연말 아카데미 시즌 때마다 호불호 없이 따쓰함을 전달해 주던 모범적인 몇 편의 영화들과도 다르다. 이 영화만의 남다른 유머와 위트가 이들과의 궤를 달리한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만이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유쾌하고 감동적이지만 무엇보다 따뜻해서 좋다. 이 영화에서 앵거스를 연기한 도미닉 세사를 볼 때면, 8,90년대 청춘 영화에 나타난 새로운 스타의 시작을 보는 것 같다. 구도, 비율, 각본에서도 은은하게 묻어나듯 70년대에 나온 코미디 영화의 연출 스타일을 차용한 것을 바탕으로 좋은 각본과 연기를 가진 이 영화의 결 자체가 훗날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새로운 고전 영화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의 영화지만, 차가운 질감 하나 없이 가장 따스한 벽난로 옆에서 찍은 것처럼 매 순간의 톤이 따뜻하다. 연말에 이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모든 영화가 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과, 혹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봤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역사도 아픔도 방향도 다른 개인이 모여 마침내 연대하게 된 단 한순간. 그 기적과도 같은 정서적인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영화일 테니. 촌스럽지 않아서 좋고, 유난 떨지 않아서 좋다. 그렇지만 정말 강한 감정을 안겨준다. 누군가와의 악수만으로 다른 여느 영화의 포옹보다도 더 진하게 다가오던 것처럼.
서진
4.5
오랜만에 사람 냄새 진하게 나는 코미디 영화를 보았다. 관객들로 가득 찬 하늘연극장에서 함께 소리 내 웃으며 영화를 관람한 건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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