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픽션2.0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왜 우롱당하고 모욕당했다는 느낌이 들까? 어제 영화를 보고 나서 너무 기분이 안 좋아서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일단 첫 번째로 이 영화가 ‘계급 없는 계급 영화’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박찬욱은 과거에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을 드러낼 때 계급 간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쁘띠 부르주아인 동진과 공장 노동자인 류가 그야말로 ‘어쩔 수가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해친 것은, 자본주의 구조가 만들어낸 계급 모순의 초상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완전히 삭제된다. 만수는 공장에서 평생 일해왔지만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에서 살 정도로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쁘띠 부르주아이며, 그의 경쟁자들 또한 모두 비슷한 위치의 남성들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실직의 위기’는 사회 전체의 불안이 아니라, 특정 계급 내부에서 벌어지는 자리싸움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단순히 노동자가 빠졌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의 생활상 자체가 현실의 계급적 리얼리티와 맞지 않는다. 제지공장 중간관리자가 어떻게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2층 저택에 살며 막내딸은 첼로 레슨을 받고, 아내는 테니스 레슨과 춤을 배우러 다니며 마당 그네에는 뱅앤올룹슨 스피커가 걸려 있을 수 있는가? 그것도 막내딸이 혼자 전용으로 즐기는 수준으로. 이 모든 디테일은 현실의 중간관리자와는 거리가 먼, 고급취향을 가진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더 기만적인 건 가정 내부 묘사다. 그렇게 넓은 마당을 가진 2층 집에서, 아들 하나에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어린 딸을 둔 아내가 어떻게 가정부도 하나 없이 살림과 양육을 도맡아 다 하면서 테니스 레슨을 받고 춤도 배우러 다닐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현실적으로는 가정부나 돌봄 인력이 필수적일 상황이지만 영화는 그 노동을 공기처럼 삭제한다. 이는 단순한 연출상의 과실이 아니라, 가사노동의 현실과 계급적 조건을 무시하는 감독의 감각 부재를 드러낸다. 왜 제지공장인지도 끝까지 납득할 수 없다. <어쩔수가없다>의 원작인 <The AX>가 출판된 1996년은 미국의 탈산업화가 본격화 되어, 제지, 철강, 자동차 등 전통적인 제조업의 구조조정과 해외 이전, 자동화가 이루어져 많은 노동자들이 급격히 일자리를 잃고 난 시기였다. 주인공이 사는 미국 동북부 산업지대는 지역 경제가 하나의 제조업에 기대고 있어 그 업종이 아니면 일자리를 찾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어쩔수가없다>의 배경은 현대 한국인 것 같긴 하지만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는 일인지를 알 수가 없다. 마당 딸린 교외의 2층 주택은 한국 사람에게 낯선 주거형태이며, 한국의 공단 주변은 보통 공장, 원룸촌, 상가, 치킨집, 노래방 같은 가게들이 붙어있는데 영화는 산, 절벽, 바다, 공장, 거주지가 한데 모여서 세트처럼 조립된 풍경으로 보인다. 제지회사라는 설정도 너무 옛 시대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제조업이 구조조정 당한 건 2~30년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남성가장에 의해 지탱되는 중산층 가정이 맞이하는 가장의 ‘평생직장’ 실직으로 인한 위기? 이건 IMF 시대에나 느꼈을 정서이다. 요즘 50대 중간관리자들은 실직하거나 퇴직하면 택시기사나 자영업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진짜 공포는 택시 운전사와 치킨집 사장과 경비조차 AI로 대체되어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정년개념이 희박해지고 고용불안정이 일상화된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공포에 AI라는 소재를 억지로 이어붙인 느낌이다. <어쩔수가없다>는 현재 한국인들의 현실과 감각에서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 노동자 계층에 대한 무관심, 그들의 경제적 수준과 삶의 감각, 고용 시장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지로 인해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희미해지고 남는 것은 자기 계급 안에서 흔들리는 부르주아의 불안, 곧 감독 자신의 그림자다. 더 큰 문제는 그 자화상을 대중영화라는 포장으로 감춘 태도다. 추석 시즌 개봉, ‘가족끼리 볼 수 있는 영화’, ‘잔혹하지 않다’는 홍보는 관객을 향해 친절한 척 다가가지만, 정작 영화 속에는 뜬금없는 잔혹한 장면들이 삽입되고, 공감 불가능한 부르주아 이야기만 남는다(그것도 대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어느 지역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이 괴리 속에서 관객은 배신감을 느낀다. 박찬욱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자기 세계의 불안(나름 명성이 있는 성공한 감독인데 끝까지 천만 못 찍고 은퇴할까봐 두려워)이라면 그것을 솔직히 밀고 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성을 위장한 채 지리멸렬한 자기 이야기를 애매하게 들이 밀었고, 대중성 혹은 작품성을 기대하던 관객들을 기만했다. 이건 단순히 못 만든 영화가 아니라 정말이지 너무 무책임하고 질이 나쁘다.Like819Comment29
다영
4.0
This may contain spoiler!!
2X8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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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실
4.5
아이폰을 심었더니 사과 나무가 자라났어요
이동진 평론가
4.0
어쩔 수 없다고 내세우는 자들이 만들어낸 실낙원의 통렬한 순환.
씨네픽션
2.0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왜 우롱당하고 모욕당했다는 느낌이 들까? 어제 영화를 보고 나서 너무 기분이 안 좋아서 하루 종일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일단 첫 번째로 이 영화가 ‘계급 없는 계급 영화’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박찬욱은 과거에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을 드러낼 때 계급 간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쁘띠 부르주아인 동진과 공장 노동자인 류가 그야말로 ‘어쩔 수가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해친 것은, 자본주의 구조가 만들어낸 계급 모순의 초상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완전히 삭제된다. 만수는 공장에서 평생 일해왔지만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에서 살 정도로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쁘띠 부르주아이며, 그의 경쟁자들 또한 모두 비슷한 위치의 남성들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실직의 위기’는 사회 전체의 불안이 아니라, 특정 계급 내부에서 벌어지는 자리싸움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단순히 노동자가 빠졌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의 생활상 자체가 현실의 계급적 리얼리티와 맞지 않는다. 제지공장 중간관리자가 어떻게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2층 저택에 살며 막내딸은 첼로 레슨을 받고, 아내는 테니스 레슨과 춤을 배우러 다니며 마당 그네에는 뱅앤올룹슨 스피커가 걸려 있을 수 있는가? 그것도 막내딸이 혼자 전용으로 즐기는 수준으로. 이 모든 디테일은 현실의 중간관리자와는 거리가 먼, 고급취향을 가진 상류층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더 기만적인 건 가정 내부 묘사다. 그렇게 넓은 마당을 가진 2층 집에서, 아들 하나에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어린 딸을 둔 아내가 어떻게 가정부도 하나 없이 살림과 양육을 도맡아 다 하면서 테니스 레슨을 받고 춤도 배우러 다닐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현실적으로는 가정부나 돌봄 인력이 필수적일 상황이지만 영화는 그 노동을 공기처럼 삭제한다. 이는 단순한 연출상의 과실이 아니라, 가사노동의 현실과 계급적 조건을 무시하는 감독의 감각 부재를 드러낸다. 왜 제지공장인지도 끝까지 납득할 수 없다. <어쩔수가없다>의 원작인 <The AX>가 출판된 1996년은 미국의 탈산업화가 본격화 되어, 제지, 철강, 자동차 등 전통적인 제조업의 구조조정과 해외 이전, 자동화가 이루어져 많은 노동자들이 급격히 일자리를 잃고 난 시기였다. 주인공이 사는 미국 동북부 산업지대는 지역 경제가 하나의 제조업에 기대고 있어 그 업종이 아니면 일자리를 찾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어쩔수가없다>의 배경은 현대 한국인 것 같긴 하지만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는 일인지를 알 수가 없다. 마당 딸린 교외의 2층 주택은 한국 사람에게 낯선 주거형태이며, 한국의 공단 주변은 보통 공장, 원룸촌, 상가, 치킨집, 노래방 같은 가게들이 붙어있는데 영화는 산, 절벽, 바다, 공장, 거주지가 한데 모여서 세트처럼 조립된 풍경으로 보인다. 제지회사라는 설정도 너무 옛 시대의 이야기로 느껴진다. 제조업이 구조조정 당한 건 2~30년 전의 이야기인 것이다. 남성가장에 의해 지탱되는 중산층 가정이 맞이하는 가장의 ‘평생직장’ 실직으로 인한 위기? 이건 IMF 시대에나 느꼈을 정서이다. 요즘 50대 중간관리자들은 실직하거나 퇴직하면 택시기사나 자영업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진짜 공포는 택시 운전사와 치킨집 사장과 경비조차 AI로 대체되어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정년개념이 희박해지고 고용불안정이 일상화된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공포에 AI라는 소재를 억지로 이어붙인 느낌이다. <어쩔수가없다>는 현재 한국인들의 현실과 감각에서 철저히 유리되어 있다. 노동자 계층에 대한 무관심, 그들의 경제적 수준과 삶의 감각, 고용 시장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무지로 인해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희미해지고 남는 것은 자기 계급 안에서 흔들리는 부르주아의 불안, 곧 감독 자신의 그림자다. 더 큰 문제는 그 자화상을 대중영화라는 포장으로 감춘 태도다. 추석 시즌 개봉, ‘가족끼리 볼 수 있는 영화’, ‘잔혹하지 않다’는 홍보는 관객을 향해 친절한 척 다가가지만, 정작 영화 속에는 뜬금없는 잔혹한 장면들이 삽입되고, 공감 불가능한 부르주아 이야기만 남는다(그것도 대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어느 지역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이 괴리 속에서 관객은 배신감을 느낀다. 박찬욱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자기 세계의 불안(나름 명성이 있는 성공한 감독인데 끝까지 천만 못 찍고 은퇴할까봐 두려워)이라면 그것을 솔직히 밀고 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성을 위장한 채 지리멸렬한 자기 이야기를 애매하게 들이 밀었고, 대중성 혹은 작품성을 기대하던 관객들을 기만했다. 이건 단순히 못 만든 영화가 아니라 정말이지 너무 무책임하고 질이 나쁘다.
손정빈 기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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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수/(Binary)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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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좋은데리뷰하기는귀찮은인간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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