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빈 기자5.0시대를 역행해 영화의 존재 의미를 증명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2월12일 공개)는 시대를 역행해 영화의 존재 의미를 증명한다. 온 세상이 도파민을 외치며 즉각적인 자극에 탐닉할 때 브래디 코베(Brady Corbet·37) 감독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도달하려는 경지만 바라보며 최적의 속도로 나아간다. 러닝타임 215분, 서곡과 인터미션, 비스타비전과 70㎜ 필름 카메라 촬영. 그리고 오리지널 각본. 이 작품은 한 때 영화라면 으레 해야만 했던 것들을 공들여 수집해 바로 지금 영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 간다.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쌓아 올리며 정교하고 치밀하게. 극 중 라슬로 토스는 말한다. "내 건축물은 전쟁을 견뎌 살아 남았고 앞으로도 세대를 넘어 살아갈 겁니다. 내 건축물은 어떤 침식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이건 흡사 영화를 만드는 코베 감독의 태도가 아닌가. 말하자면 '브루탈리스트'는 클래식을 갈망하는 걸작이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라슬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번 사업가 해리슨 밴 뷰런(가이 피어스)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브루탈리스트'는 웬만한 영화에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야심으로 그득하다. 가상 인물 라슬로 토스의 곡절 많은 인생엔 아픈 역사가 있고, 예리한 철학이 있다. 예술의 순수와 자본의 잔인이 있고, 건축으로 비유된 영화와 영화를 기어코 압도하려는 건축이 있다. 쇠퇴하는 시대의 자격지심과 떠오르는 시대의 열등감, 나약하기 만한 사랑과 강인하나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랑이 있다. 삶의 공허와 아이러니가 있다. 코베 감독은 이 모든 걸 아우르는 형식과 기술로 찰나의 폭발과 영원의 울림을 동시에 겨냥한다. 215분은 길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브루탈리스트'에만큼은 정합하는 시간이다. 일단 이 얘기부터 해야 한다. 브루탈리스트(brutalist)란 무엇인가. 당연히 이 말은 브루탈리즘(brutalism)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브루탈리즘은 20세기 중반을 지배한 건축 양식.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솔직함'이 핵심이다. 재료를 드러내고, 장식을 최소화해 단순화하며,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건물 자체를 경험케 하는 게 특징이다. 노출 콘크리트, 거대한 덩어리, 빛과 그림자는 브루탈리즘을 상징한다. 주인공 토스는 브루탈리즘 건축가이고, 그가 극 중 인생을 바쳐 완성하려는 작품 역시 브루탈리즘 건물이다. 그러니 '브루탈리스트'라는 제목은 당연히 토스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브루탈리즘 철학으로 토스의 삶 전체를 꿰어낸다. 그러면서 이 남자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역사와 시대와 관계와 시각을 통찰한다. '브루탈리스트'는 바로 그 브루탈리즘으로 이민자 아메리칸 드림을 직격한다. 어쩌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건 주입된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 아메리칸 드림은 이민자가 생각한 적도 없는 꿈을 꾸게 강제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뒤흔들고 그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없게 한다고 지적한다. 토스는 그저 생존을 위해 대서양을 건넜고, 그가 원했던 건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를 다시 만나는 것 뿐이었다. 건설 현장 허드렛일이나 건축 도면 그리는 일 따위도 불평 없이 받아들인 그를 천재로 추앙하며 꿈을 펼치라고 충동질 한 미국인 밴 뷰런이었다. 그리고 밴 뷰런은 토스를 후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꿈을 쥐고 흔들며 토스의 삶을 구원과 나락을 끊임없이 오가는 격동에 빠뜨린다. 미국에 도착한 토스가 처음 마주한 건 자유의 여신상. 어찌된 일인지 이 미국의 상징은 거꾸로 뒤집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코베 감독은 세뇌된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코멘트를 예술과 자본의 격렬한 공생 관계로 확장한다. 예술은 돈에 깃든 힘으로 생존을 보장 받으려 하고, 돈은 예술에 서린 결백으로 공허를 견디려 한다는 것. 토스로 의인화 된 예술은 고고하고 순수하나 여리고 나약하다. 밴 뷰런으로 형상화 된 자본은 당당하고 거침없으나 잔혹하고 변덕스럽다. '브루탈리스트'는 예술과 자본은 서로에게 오만하면서도 굴종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엔 예술의 손을 들어주며 있는 그대로 존재하려는 예술을 자본이 착취하고 변형해 굴복시키려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돈은 예술의 영속을 질투하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토스는 예술과 함께 영원히 살지만 밴 뷰런은 돈과 함께 소멸되니까. '브루탈리스트'는 이 관계를 거대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 건축 예술로 드러내는데, 이건 돈을 가장 가까이 둔 예술인 영화에 관한 메타포로 보이기도 한다. '브루탈리스트'는 아메리칸 드림과 자본을 조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오니즘마저 냉소한다. 토스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건 미국의 성공 신화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의 삶을 멋대로 재단해서 평가하는 바로 그 유대주의이기도 하다. 토스의 재능과 밴 뷰런의 야심과 지역 사회 요구가 혼재된 그 건축물은 훗날 토스의 동포들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그 의미가 변형·변질돼 있다. 이를 비웃듯 코베 감독은 건물 각 부분이 가진 의미를 시오니즘에 기반한 시각으로 해설하는 토스 조카 손주의 모습에 이런 코멘트를 단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늙고 병든 토스가 휠체어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브루탈리스트'는 개인을 일반화·범주화하고 속박하고 옭아매려는 그 모든 시도와 사상과 수단을 거부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브루탈리스트'는 마치 브루탈리즘 건축물 같이 우뚝 선다. 이 길고 깊고 복잡한 얘기들을 어느 것 하나 돌출되지 않게 매끈하고 거대한 한 덩어리 안에 담아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직후 급격한 패러다임 변화와 함께 부상한 미국이 유럽에 가진 열등감, 쇠퇴하는 유럽이 미국에 가진 자격지심이 있다. 시간과 공간과 경험을 압도하려는 토스와 에르제벳의 관계와 사랑도 있다. 기념비를 세우려던 밴 뷰런은 몰락하고, 그저 잘 살아보려던 토스가 기념비 같은 존재가 되는 건 허무와 아이러니가 뒤엉킨 전통적 비극이기도 하다. 그리고 롤 크로울리의 촬영과 대니얼 블럼버그의 음악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떠받들어 실감하게 한다. 이 영화는 잊히기 힘든 장면으로 쉬지 않고 번쩍이고, 귓속을 떠나지 않는 음악으로 내내 울려댄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파아니스트'(2002)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을 연기해 2003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대 최연소인 29살에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애드리언 브로디는 또 한 번 홀로코스트 생존자 역할을 맡아 필모그래피 최고 연기를 했다. 실제로 헝가리계 유대인인 브로디는 라슬로 토스라는 인간의 위대함과 나약함, 겸손과 오만, 위선과 위악은 물론이고 시대가 안겨준 고통과 그 고통이 유발한 트라우마를 가슴에 품은 듯 연기한다. 일각에선 '브루탈리스트'가 인공지능(AI) 기술로 그의 발음 일부를 보정한 걸 두고 진짜 연기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자유의 여신상을 마주한 토스의 감격, 사촌 아틸라를 끌어안으며 흘리는 눈물, 모진 세월 탓에 변해버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억양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브루탈리스트'는 오는 3월2일에 열리는 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남우주연(애드리언 브로디)·남우조연(가이 피어스)·여우조연(펠리시티 존스)·편집·음악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앞서 골든글로브에서 작품·감독·남우주연상을 받아 오스카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브루탈리스트'가 오스카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오스카를 품에 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카데미 수상 여부가 이 영화의 가치를 결정할 순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영화계가 싫어하고 극장업계가 꺼리는 3시간 35분짜리 영화, 인터미션이 15분 포함된 이 영화를 유튜브·인스타그램·틱톡이 장악한 시대에 내놓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두고 두고 회자될 테니까 말이다.Like730Comment11
페리클레스4.01️⃣ 배우 에드리언 브로디 영화의 주연 배우 에드리언 브로디 Adrien Brody는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 Elliot Brody와 헝가리계 유대인 Slyvia Plachy 사이에서 1973년 태어났다. 엄마인 실비아는 자신의 어린 시절인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에드리언 브로디는 영화 <피아니스트>(2002)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을 연기했다. 그의 아버지와 혈통적 배경을 공유하는 배역을 연기하며 그는 아카데미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에드리언은 약 20년이 지나, <브루탈리스트>(2024)에서 헝가리계 유대인 라슬로 토스 역을 맡았다. 아버지에 이어 이번엔 어머니와 연관된 인물 설정인 것이다. 에드리언은 해당 배역을 연기하며 그의 부모와 가계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유대계 이민자들에 대한 정서적 이해가 있었을 것이다. 2️⃣ 2부 구성과 인터미션 (스포 시작) 상영 시간이 3시간 반인 이 영화는 1•2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15분의 인터미션이 있다. 1부인 '도착의 수수께끼'와 2부인 '아름다움의 순수한 본질'을 갈라놓는 서사적 차이 중 핵심은 라슬로의 아내인 엘리자벳의 유무이다. 1부에서는 먼저 미국에 건너온 남편 라슬로와 달리 그의 아내와 조카는 아직 유럽에 남아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내 엘리자벳은 1부에서 편지의 내용을 읽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방식으로만 들려진다. 간접적 등장을 통해 부각되는 아내의 부재는 1부의 전체 내용을 묶는다. 아내의 부재 경험, 그 응축된 고통과 그리움은 라슬로에게 괴로움을 안겼으며, 그것은 라슬로의 건물 설계에도 반영될 만큼 중요하다. 15분의 인터미션은 아내의 부재라는 시간이 그만큼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15분 타이머와 함께, 라슬로의 결혼식 사진이 인터미션 시간 내내 스크린에 띄워진다. 결혼식 사진은 혼란한 전쟁 시대와 이산 가족이란 참화 속에서 라슬로와 엘리자벳이 가족이라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하다. 2부가 시작되고 '아내의 부재'는 극복된다. 아내 엘리자벳과 조카 조피아가 미국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내는 수용소 생활로 걸린 영양실조로 인한 골다공증으로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온전하지 못한 아내와의 재회를 시작으로 2부의 내용이 전개된다. 3️⃣ 건축양식 브루탈리즘의 영화적 도구화 브루탈리즘은 모더니즘 건축 이후 실용주의의 극대화로 유행한 건축 양식이다. 노출 콘크리트가 특징인 브루탈리즘은 단순하고 정직하며 기능적이지만, 동시에 단조롭고 삭막하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파이프와 빔 등 내부 자재들이 마감재 없이 그 구조를 드러내어 눈에 띄기도 한다. 이 영화는 건축적 미학으로서 브루탈리즘과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브루탈리즘은 거친 외부 표면, 거대한 규모와 육중한 양감, 특이하고 낯선 외형을 특징으로 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도 정제되지 않은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 인물을 포착하는 영화의 시선은 인물을 미화하거나 감추려들지 않는다. 주인공 라슬로의 추하고 못난 모습과 방황을 보여준다. 관객은 라슬로가 미국에 도착한 후 매춘부를 찾는 장면, 습관적인 아편류 마약 투여, 채석장 댄스 파티에서의 일탈 등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한 장면들을 포함한 3시간반의 상영 시간은 마치 브루탈리즘 건축물 외관처럼 장중하다. 4️⃣ 의자, 서재, 커뮤니티센터 건축가 라슬로는 영화 속에서 3가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첫번째는 미니멀리즘 양식 의자다. 라슬로는 밴 뷰런과의 대화에서 독일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건축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 의자는 라슬로가 미국으로 건너와 밥벌이를 위해 처음 만든 것으로, 그가 이 의자 디자인을 스케치한 종이는 그의 아내가 보낸 편지의 뒷면이었다. 라슬로의 사촌인 아틸라가 영업하는 가구점 'Millers&sons'의 쇼윈도에서 그 의자를 전시한다. 두번째 결과물은 밴 뷰런의 서재다. 라슬로는 해리슨 밴 뷰런의 아들인 해리 밴 뷰런의 의뢰로 저택 서재를 리모델링하게 된다. 낡은 유리 돔을 드러내고 커튼을 치워 채광을 개선했다. 특히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열리는 책장 덮개들은 세번째 결과물인 커뮤니티센터의 예배당 벽 덮개의 형식에도 고스란히 응용되어 있다. 해리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의뢰로 시작된 두번째 작업처럼, 세번째 작업은 그 아버지 해리슨 밴 뷰런의 의뢰로 시작된다. 죽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펜실베니아 Doylestown에 건축되는 커뮤니티센터는 앞선 작업물인 의자, 서재와 일맥상통한다. 구조물 위의 두 탑 사이로 내려쬐는 빛은 십자가 형상으로 바닥에 투사된다. 앞서 가구점 쇼윈도에 라슬로가 의자를 전시할 때, 아틸라의 아내 오드리는 그 의자를 어떤 가구와 함께 끼워팔지 묻는다. 그러자 라슬로는 그냥 이 의자를 그대로만 놔두라고 말한다. 서재의 독서용 의자는 첫번째 의자와 닮아 있다. 두 의자는 모두 캔틸레버 구조(한쪽 끝만 고정되어 하중을 지지하는 외팔보)이며, 실제로 앉는 용도과 함께 관상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초판본 책만 수집하는 서재의 주인인 밴 뷰런이 실제로 그 의자에 앉아 독서를 했을지는 의문이다.) 직관적이고 명확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라슬로의 의도와 달리, 커뮤니티센터 건축 의도는 미니멀리즘과 멀어진다. 의뢰자인 밴 뷰런은 처음에는 지역주민 소통 장소와 도서관을 만든다고 했다. 그러다 밴 뷰런은 어머니와의 추억이 생각나 체육관도 만들어달라고 한다. 라슬로는 수영장은 어떠냐고 묻는다. 밴 뷰런은 자기는 수영은 할 줄 모른다고 한다. 이미 사적 의미와 용도를 넣어 주민 커뮤니티센터의 목적과는 멀어져버렸다. 게다가 관할 시청의 허가와 감사 과정에서 유대인 건축가의 배경을 못마땅해하며 개신교도들을 위한 예배당을 추가해달라고 한다. 이로써 4개의 건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결국 도서관을 제외한 3개의 건물이 지어지게 된다. 5️⃣ 콘크리트, 철강, 대리석 브루탈리즘 건물을 구성하는 자재는 많지 않다. 라슬로의 건축물을 구성하는 자재는 콘크리트, 철강, 대리석이다. 라슬로가 건물을 짓는 펜실베니아 주는 미국이 1776년 7월 4일 영국령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읽은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이 위치한 역사적 장소이자, 미국 최초의 수도였다. 영화에 삽입된 펜실베니아 홍보 영상에서 철강은 미국의 제조업과 문명을 지탱하는 중추라고 소개한다.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위치한 철강 회사 U.S.Steel은 1901년 설립되어 현재까지도 미국 내에서 두번째로 큰 철강회사로 남아있다. 라슬로는 건축물에 사용된 철강이 펜실베니아 철강이라고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기도 한다. 펜실베니아는 미국 초기 정신의 상징이자, 아메리카드림의 표상인 것이다. 라슬로는 건물에 쓰일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 카라라(Carrara) 채석장까지 간다. 카라라 채석장은 고대 로마부터 질좋은 대리석의 채석지였고, 청회색이 섞인 무늬를 가진 대리석이 생산된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대리석 채굴 업자는 라슬로와 전쟁 때 수용소에서 만난 인연으로 보인다. 라슬로와 함께 카페에서 채굴업자를 기다리던 밴 뷰런은 느긋한 유럽인들은 약속 시간에 늦어서 같이 일하기 싫다며 고정관념적 발언을 뱉는다. 이 채굴업자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 맞서싸운 레지스탕스이며, 동료들은 파시스트들을 대리석으로 깔아뭉개는 아나키스트들이라고 말한다. 채굴업자는 그러한 저항 과정에서 체포되어 수용소까지 가게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모아온 자재인 콘크리트, 철강,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Ven Buren Institution'은 건축적 식견과 안목이 없는 밴 뷰런의 의뢰로 지어진 결정체이자 오욕과 상처가 담긴 집합체이다. 6️⃣ 조피아와 라슬로가 경험한 성추행•강간 라슬로의 조카 조피아는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말을 하지않는다.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함묵증(Mutism, 심리적 이유로 발생하는 실어증)을 갖게 된 조피아에게 해리 밴 뷰런은 껄떡대며 접근한다. 해리는 '말을 건네도 대꾸도 하지 않는 조피아'에 대해 라슬로에게 불평한다. 라슬로가 불쾌하게 바라보자, 해리는 그냥 친해지기 위해였다며 본인이 불순하게 섹스하려고 다가간게 아니라며 흥분하여 항변한다. 술에 취한 듯한 해리는 '욕조에 있는 세 명의 하녀에 대한 음담패설 노래'를 부르며 '물가에 수영복을 입고 앉아있는 조피아'의 옆에 앉는다. 해리는 조피아에게 산책을 하자고 말을 걸지만, 조피아는 역시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면은 전환되지만, 이후 장면에서 헝클어진 머리나 옷매무새를 다듬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조피아가 해리에게 겁탈당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피아는 끝까지 침묵한다. 한편 주인공 라슬로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라슬로는 대리석 채굴장의 파티에서 술에 취해 벽에 기대있다가 허리를 숙여 토를 한다. 그러다가 밴 뷰런에게 강간을 당한다. 다음날, 밴 뷰런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천연덕스럽게 앞서가고, 라슬로는 똥 씹은 표정으로 그를 뒤에서 따라간다. 라슬로는 그 후 괴팍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주말에 유대교 회당에도 나가지 않고, 건설 현장에만 집착적으로 통근한다. 엘리자벳은 조피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네 삼촌이 자신의 제단을 짓고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라슬로는 건설 현장의 비계로 턱걸이를 하는 젊은 인부에게 지나치게 화를 내고, 그를 말리는 흑인 친구 고든에게도 성질을 낸다. 그렇게 라슬로도 조피아처럼 침묵을 지키고, 강간은 둘만 아는 이례적 상황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 남편의 강간 피해를 알게 된 아내 엘리자벳은 보행기를 짚고 밴 뷰런의 저녁식사 자리에 나타나 밴 뷰런의 강간 사실을 밝히고 그 자리를 파탄낸다. 영화에서 강간은 유대인들의 집단 상흔인 홀로코스트와 일련의 핍박•차별의 은유로 보여진다. 누군가는 침묵하지만, 누군가는 결국 목소리를 내 진실을 밝혔다. 유사한 사건에 다르게 대처한 두 인물 조피아와 라슬로는 겹쳐보이면서도 대비된다. 7️⃣ 아메리칸드림과 밴 뷰런 죽을 때까지의 30년치 포르투갈 마데이라 와인을 와인셀러에 쌓아놓은 갑부 해리슨 밴 뷰런은 아메리카드림의 구현처럼 보인다. 밴 뷰런 Van Buren이라는 이름은 미국의 8대 대통령 Martin Van Buren(1782~1862)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계 이민자의 후손인 그는 최초로 미국 땅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었다. 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1840년 대선에서 휘그당 후보 William Henry Harrison에게 패배하여 재선에 실패했다. <브루탈리스트>의 Harrison Van Buren은 미국 8•9대 대통령 이름을 섞어 차용한 것이다. 영화에서 밴 뷰런을 만나기 전, 이민자인 라슬로는 석탄을 캐고 당구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막노동자 신세였다. 라슬로는 이민선의 어두운 선실, 가구점에 딸린 창고, 노숙자 수용소를 전전하는 떠돌이 이방인이었다. 밴 뷰런은 건축 잡지에 실린 그의 서재 때문에 라슬로를 재평가하게 되고 그의 재능과 경력을 보고 그를 고용한다. 라슬로는 그의 사촌에게 버려졌지만, 밴 뷰런이 준 새로운 기회로 다시 건축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라슬로는 그가 아내와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밴 뷰런과 그의 변호사인 마이클에게 말하자, 마이클은 그가 부통령과 일했던 실권자이며 국회에서 유럽 난민 수용법이 통과되었으니 라슬로를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밴 뷰런의 도움으로 라슬로는 유럽에서 아내를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드림은 허영과 탐욕, 좌절과 실패가 동반되었다. 그리고 밴 뷰런은 이상적 인물도, 고상한 후원자도 아니었다. 밴 뷰런은 그의 어머니를 버린 조부모에게 일부러 사인하지 않은 수표를 건네며 조롱하는 행동을 했던 경험을 라슬로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라슬로의 아내 엘리자벳을 밴 뷰런이 처음 만나는 식사 자리에서 밴 뷰런은 라슬로의 영어 실력이 구두닦이 같다며 동전 한 닢을 던지는 무례한 유머를 한다. 밴 뷰런은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고 주변인들을 모욕하며 아메리카드림을 추구한다. 밴 뷰런은 전쟁 때 화물선을 제작하며 돈을 벌었는데, 제작 기간을 단축시켜 납품하면서 거대한 부를 누리게 되었다. 밴 뷰런의 이런 방만한 졸속 처리는 결국 산업 재해로 이어진다. 센터 건설비를 감축하기 위해 협력 업체에서 해야하는 일까지 무리하게 확장해서 하다가 열차 사고가 발생했다. 라슬로는 밴 뷰런에게 사고와 관련된 인부들을 해고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밴 뷰런은 그에게 구걸하지 말라고 고압적으로 말하며 라슬로를 거지 취급한다. 뒤틀린 심성의 밴 뷰런의 태도는 엘리자벳이 밴 뷰런을 강간범이라고 고발하는 장면에서 더욱 드러난다. 밴 뷰런은 라슬로가 술과 마약이 찌들어 살며 그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라슬로를 늙은 개 취급하며 늙은 개가 주인을 문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밴 뷰런이 라슬로를 휼륭한 예술가로 여긴 것이 아니라, 비천한 하인이자 경멸의 대상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8️⃣ 이스라엘과 시온주의 극중 내내 침묵을 일관하던 조카 조피아는 유대인 남자친구와 함께 이스라엘에 가겠다고 말할 때 처음으로 목소리를 크게 낸다. 그녀는 라슬로와 엘리자벳이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강력하게 자신의 이주 의지를 드러낸다. 조피아는 오히려 왜 유대인인데 이스라엘에 돌아가지 않냐고 되묻는다. 라슬로와 엘리자벳은 이스라엘에 가면 유대인이고 가지 않으면 유대인이 아니냐며, 자신들은 유대인이 아니냐고 반박한다. 그리고 조피아에게 너네가 이스라엘에 가면 집과 일자리는 있냐고 묻는다. 엘리자벳은 자신 같은 중년 여성 중에 일자리를 가진 사람이 몇이냐 되냐며 자신이 기자로 일하며 립스틱 광고나 여성 칼럼 같은 글을 쓰지만 이마저도 귀하다고 말한다. 조피아와 그녀의 남자친구는 이스라엘에 가면 아는 사람 집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고,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고 낙관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 후, 조피아는 이스라엘로 떠나고 거기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 라슬로와 엘리자벳은 미국에 남는다. 영화에서 이스라엘 건국과 시온주의는 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1948년 텔아비브에서 초대 대통령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는 연설이 부분적으로 영화에 삽입되었다. 연설에서 벤구리온은 다른 민족들이 주권국가를 설립하고 거주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유대 민족도 그러한 권리가 있으며,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거주할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에레츠-이스라엘(Eretz-Yisrael, 이스라엘의 땅)은 유대민족이 태어난 곳이다. 바로 여기서 유대민족의 영적, 종교적,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유대민족은 여기서 독립을 성취했고, 민족적이고도 보편적인 의미의 문화적 가치를 창조해냈다. 유대 민족은 여기서 성경을 기록했고, 그것을 전 세계에 전해 주었다. 에레츠-이스라엘로부터 강제 유배당한 유대민족은 열방에 흩어진 기간 내내 그 땅에 대한 신앙을 간직했고, 귀환을 위해 기도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 땅 안에서 그들의 정치적 자유가 회복되기를 기도하였고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간 조피아와 그 자식 세대들은 아랍인들을 그 땅에서 폭력적으로 쫓아낸 가담자들이고, 신제국주의 동조자다. 라슬로의 건축물은 뒤틀린 아메리칸드림과 오염된 시온주의의 이상을 모두 담고있다. 에필로그의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라슬로의 센터 건물은 공사가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고 알려진다. 라슬로와 벤 뷰런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는 1960년에 공사가 중단되고, 1973년까지 건물은 미완성이었다고 한다. 1973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되돌아보면, 제4차 중동전쟁이 있던 해다. 그 시점보다 앞선 때에 이스라엘에 건너간 조피아는 중동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휴전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73년 4차 중동 전쟁 이후 가장 큰 무력 충돌이고, 비대칭 전쟁 특성 상 민간인 피해는 더 심각해졌다. 선택된 민족이라는 유대교적 집단 망상과 자기 방어적 파시즘에 사로잡힌 이산 민족의 꿈, Eretz Israel의 꿈은 악몽이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가자 지구가 처한 곤궁과 모멸,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정치적 운동인 시온주의와 그 영토 민족주의적 성격은 종교적 의미와 결부되어 강력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우리는 작품 내에 나타난 시온주의를 작품 외부의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이어지는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가자 지구의 참상은 더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나는 벤구리온의 이스라엘 건국 선언문에 포함된 '아랍인 관련 부분'을 인용해 이•팔 분쟁의 평화적 해결 강구를 촉구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우리에게 자행된 폭력의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아랍 주민들에게 평화를 유지할 것을 당부하고, 또한 완전하고 평등한 시민권과 모든 이스라엘의 임시 또는 영구적 공적 기관들에 대한 그들의 정당한 대표권에 기초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주위의 이웃 국가들과 국민들에게 평화와 친선의 손을 내밀고 있고, 유대인들의 땅에 정착한 주권을 가진 유대민족과 협력 및 상호부조의 연대를 만들어 나갈 것을 그들에게 호소한다." * 다비드 벤구리온의 이스라엘 건국 선언문 내용은 <국제관계사>(박건영 저, 2022)에서 인용Like268Comment8
쌩쌩이💨2.5<부르주아 강자를 은밀히 대변하는 약자코드, 그리고 도구로써의 영화> 확실히 현 할리우드를 알 수 있는 지표가 되는 영화. 유대인 이민자 장애인 여성 그리고 게이. 거의 모든 약자 코드가 있고 전부 다 얄팍하게 다루는데도.. 그게 다 민감한 주제라 다들 눈치보며 옆구리 찌르는 꼴이다. 이러한 아류 홀로코스트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고 도미노 넘어가듯 컨센서스를 얻는다는 것이 이제는 두려운 현상이다. 이 영화는 정식 개봉전 베니스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개봉 전부터 미리 나팔을 불었다. (제2의 존오인을 기대했던 걸까?) 난 반문하고 싶다. 이런 요소들을 한데 우겨넣은 것이야말로 해당 이슈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자본주의 베이스의 할리우드 마인드 아니냔 말이다. 덧붙이자면 약자 코드를 표방하며 사실은 가장 심도있게 다룬 주제인 시오니즘이 흥미로웠다. 에필로그의 연설까지도 시오니즘을 암시하는 연설임이 명백하다. 한국에 사는 나로써는 뜬금없기도 하고, (어느정도는 불쾌하고) 영화계에도 미치는 유대인의 영향력이 실감되기도 했다. 영화 자체를 사랑한다면(적어도 영화가 미디어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것을 좋아할 수가 있을까? 예컨대 에필로그의 연설은 전혀 영화적 경험이 되지도 못했다. 그런 종류의 교조적 발언을 단어의 나열로 전달하고 싶다면 글로도 웅변으로도 다른 어떤 매체를 사용해서 표현하면 되었다. 영화라는 매체로 그 장면을 보았을 때(심지어 감독은 에필로그로 따로 빼기까지 했는데) 색다른 감동을 어떻게 느낄수가 있나? 이제 영화는 그냥 약자를 표방하는 부유한 강자들의 선전물에 불과한가. ㅡㅡㅡㅡㅡ 개봉 당일 영화보고 짧게 작성한 글이라 불친절하게 쓴 부분이 있네요. 다만 이후에도 평론이나 커뮤니티 글들을 읽어보았지만, 영화 주제가 시오니즘은 아니더라도 의미심장한 함의가 있다는 점에는 생각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영화연출이 아니라 주제나 내용에 대해서 논할 때는 오독이나 정독을 정확하게 규정짓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평론의 한계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영화는 재밌게 보았습니다 ㅎㅎ (댓글에 대한 답변과 함께 이어진) 오랜 감상을 마무리하며, 답변한 부분도 코멘트에 함께 이어올립니다. (댓글에 답변 1) 에필로그 등이 사실상 시오니즘에 대한 비꼼/비판이 아니냐는 질문 이동진 평론가도 그런 말을 하셨다고 하고 찬반양론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러나 제 생각은 1. 에필로그가 시오니즘에 대한 돌려까기가 되려면, 우선 영화 전반이 시오니즘을 향한 맹목적 돌진이었어야 순서와 인-과가 맞다고 봐요. 2. 더욱이 영화에서는 캐릭터 설정을 단순화하여, 남주인공을 비롯하여 와이프, 함구증 여조카를 protagonist- 밴뷰런 일가를 antagonist로 배치하였는데 굳이 영화의 protagonist인 여조카의 입을 빌려 그 자신의 정체성을 풍자하도록 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심지어 영화 전반에 걸쳐 주인공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가정과 예술(건축물) 모두에 있어서 박해받는 측면이 골고루 보여졌잖아요. 3. 라즐로의 지친 몸, 죽어가는 몸과 대조되는 조피아의 파워 연설ㅡ이라는 내용의 방법론적 비평은, 유대인 라즐로는 자신의 기력을 다해 다음 세대 멘티 조피아에게 꿈을 이어갈 용기를 넘겨주면서 지난 회한을 돌이키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WASP 남성에게 성희롱 당하고도 말 못하던 어린 여성 조피아가 드디어 입을 열게 된다. 로도 치환될 수 있다고 봅니다. 외부적/실제적 이슈가 개입된 씬에서는 인상비평은 어느정도 자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반적 내용은 WASP 대 이민자, 기득권과 예술가의 불편한 동거를 다루었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겠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또 그것이 주제이고요. 다만 시오니즘이라는 이슈가 섞여 토론의 장작이 타는 것이겠죠. 제가 너무 짧고, 어느 정도 영화를 보고 무례하게 쓴 감이 있어서.. 답변하며 약간 더 보충하여 정리하였는데, 여러모로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 (댓글에 답변 2) 마이너리티, 그리고 유태인에 대한 이해. (유태인,게이 등이 마이너리티냐는 질문에 답함) 말씀해주신 마이너리티의 기준을 영화계로 좁혀 살펴보자면 우선, 아카데미 2020년 다양성을 위한 작품상 선정기준 공개 중 "a2; 조/단역급 배우 30%가 여성, LGBTQ. 성소수자, 소수민족이나 종교인, 신체적·인지적 장애인 등을 포함해야 한다"에서 이미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을 배려해야할 약자로 규정지었음을 알 수 있지요. 또한 해당 작품이 수상한 베를린 영화제에서 전개된 5050x2020 무브먼트는 여성할당제 주장인데, 이는 여성이 약자다/ 차별받고 있다를 전제로 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그 카테고리 사람들이 진짜 차별받고 있냐? 가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그 약자 할당을 업어가려고 하는것 같다, 어드벤티지를 먹었다라는 것 제 글의 주안점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해야할 것은 유태인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제 글에서 부르주아로 묘사한 주류)입니다. 할리우드에서 할당을 주는 약자 카테고리를 대충 업어가면서, 시오니즘/유태인 파워를 은근히 내비치려하지 않았는지 그게 첫번째 문제이고.. 두번째는 그러한 영화적 윤리성을 떠나서, 이전 영화에서 보여주진 못했던 파격적 영화 문법이나 스크린 충격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저 개인이 보기에는 이전 상업영화 공식을 잘 따라한 야심작 정도 같아 위와 같이 평가했습니다. 다만 여러모로 좋은 점도 많았기에 선생님이 즐겁게 보신 바도 이해되며, 그 감동을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Like203Comment10
이동진 평론가
5.0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과거는 어디에 맺히는가.
손정빈 기자
5.0
시대를 역행해 영화의 존재 의미를 증명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2월12일 공개)는 시대를 역행해 영화의 존재 의미를 증명한다. 온 세상이 도파민을 외치며 즉각적인 자극에 탐닉할 때 브래디 코베(Brady Corbet·37) 감독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도달하려는 경지만 바라보며 최적의 속도로 나아간다. 러닝타임 215분, 서곡과 인터미션, 비스타비전과 70㎜ 필름 카메라 촬영. 그리고 오리지널 각본. 이 작품은 한 때 영화라면 으레 해야만 했던 것들을 공들여 수집해 바로 지금 영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 간다.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쌓아 올리며 정교하고 치밀하게. 극 중 라슬로 토스는 말한다. "내 건축물은 전쟁을 견뎌 살아 남았고 앞으로도 세대를 넘어 살아갈 겁니다. 내 건축물은 어떤 침식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이건 흡사 영화를 만드는 코베 감독의 태도가 아닌가. 말하자면 '브루탈리스트'는 클래식을 갈망하는 걸작이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라슬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번 사업가 해리슨 밴 뷰런(가이 피어스)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브루탈리스트'는 웬만한 영화에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야심으로 그득하다. 가상 인물 라슬로 토스의 곡절 많은 인생엔 아픈 역사가 있고, 예리한 철학이 있다. 예술의 순수와 자본의 잔인이 있고, 건축으로 비유된 영화와 영화를 기어코 압도하려는 건축이 있다. 쇠퇴하는 시대의 자격지심과 떠오르는 시대의 열등감, 나약하기 만한 사랑과 강인하나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랑이 있다. 삶의 공허와 아이러니가 있다. 코베 감독은 이 모든 걸 아우르는 형식과 기술로 찰나의 폭발과 영원의 울림을 동시에 겨냥한다. 215분은 길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브루탈리스트'에만큼은 정합하는 시간이다. 일단 이 얘기부터 해야 한다. 브루탈리스트(brutalist)란 무엇인가. 당연히 이 말은 브루탈리즘(brutalism)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브루탈리즘은 20세기 중반을 지배한 건축 양식.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솔직함'이 핵심이다. 재료를 드러내고, 장식을 최소화해 단순화하며,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건물 자체를 경험케 하는 게 특징이다. 노출 콘크리트, 거대한 덩어리, 빛과 그림자는 브루탈리즘을 상징한다. 주인공 토스는 브루탈리즘 건축가이고, 그가 극 중 인생을 바쳐 완성하려는 작품 역시 브루탈리즘 건물이다. 그러니 '브루탈리스트'라는 제목은 당연히 토스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브루탈리즘 철학으로 토스의 삶 전체를 꿰어낸다. 그러면서 이 남자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역사와 시대와 관계와 시각을 통찰한다. '브루탈리스트'는 바로 그 브루탈리즘으로 이민자 아메리칸 드림을 직격한다. 어쩌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건 주입된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 아메리칸 드림은 이민자가 생각한 적도 없는 꿈을 꾸게 강제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뒤흔들고 그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없게 한다고 지적한다. 토스는 그저 생존을 위해 대서양을 건넜고, 그가 원했던 건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를 다시 만나는 것 뿐이었다. 건설 현장 허드렛일이나 건축 도면 그리는 일 따위도 불평 없이 받아들인 그를 천재로 추앙하며 꿈을 펼치라고 충동질 한 미국인 밴 뷰런이었다. 그리고 밴 뷰런은 토스를 후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꿈을 쥐고 흔들며 토스의 삶을 구원과 나락을 끊임없이 오가는 격동에 빠뜨린다. 미국에 도착한 토스가 처음 마주한 건 자유의 여신상. 어찌된 일인지 이 미국의 상징은 거꾸로 뒤집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코베 감독은 세뇌된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코멘트를 예술과 자본의 격렬한 공생 관계로 확장한다. 예술은 돈에 깃든 힘으로 생존을 보장 받으려 하고, 돈은 예술에 서린 결백으로 공허를 견디려 한다는 것. 토스로 의인화 된 예술은 고고하고 순수하나 여리고 나약하다. 밴 뷰런으로 형상화 된 자본은 당당하고 거침없으나 잔혹하고 변덕스럽다. '브루탈리스트'는 예술과 자본은 서로에게 오만하면서도 굴종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엔 예술의 손을 들어주며 있는 그대로 존재하려는 예술을 자본이 착취하고 변형해 굴복시키려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돈은 예술의 영속을 질투하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토스는 예술과 함께 영원히 살지만 밴 뷰런은 돈과 함께 소멸되니까. '브루탈리스트'는 이 관계를 거대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 건축 예술로 드러내는데, 이건 돈을 가장 가까이 둔 예술인 영화에 관한 메타포로 보이기도 한다. '브루탈리스트'는 아메리칸 드림과 자본을 조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오니즘마저 냉소한다. 토스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건 미국의 성공 신화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의 삶을 멋대로 재단해서 평가하는 바로 그 유대주의이기도 하다. 토스의 재능과 밴 뷰런의 야심과 지역 사회 요구가 혼재된 그 건축물은 훗날 토스의 동포들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그 의미가 변형·변질돼 있다. 이를 비웃듯 코베 감독은 건물 각 부분이 가진 의미를 시오니즘에 기반한 시각으로 해설하는 토스 조카 손주의 모습에 이런 코멘트를 단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늙고 병든 토스가 휠체어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브루탈리스트'는 개인을 일반화·범주화하고 속박하고 옭아매려는 그 모든 시도와 사상과 수단을 거부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브루탈리스트'는 마치 브루탈리즘 건축물 같이 우뚝 선다. 이 길고 깊고 복잡한 얘기들을 어느 것 하나 돌출되지 않게 매끈하고 거대한 한 덩어리 안에 담아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직후 급격한 패러다임 변화와 함께 부상한 미국이 유럽에 가진 열등감, 쇠퇴하는 유럽이 미국에 가진 자격지심이 있다. 시간과 공간과 경험을 압도하려는 토스와 에르제벳의 관계와 사랑도 있다. 기념비를 세우려던 밴 뷰런은 몰락하고, 그저 잘 살아보려던 토스가 기념비 같은 존재가 되는 건 허무와 아이러니가 뒤엉킨 전통적 비극이기도 하다. 그리고 롤 크로울리의 촬영과 대니얼 블럼버그의 음악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떠받들어 실감하게 한다. 이 영화는 잊히기 힘든 장면으로 쉬지 않고 번쩍이고, 귓속을 떠나지 않는 음악으로 내내 울려댄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파아니스트'(2002)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을 연기해 2003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대 최연소인 29살에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애드리언 브로디는 또 한 번 홀로코스트 생존자 역할을 맡아 필모그래피 최고 연기를 했다. 실제로 헝가리계 유대인인 브로디는 라슬로 토스라는 인간의 위대함과 나약함, 겸손과 오만, 위선과 위악은 물론이고 시대가 안겨준 고통과 그 고통이 유발한 트라우마를 가슴에 품은 듯 연기한다. 일각에선 '브루탈리스트'가 인공지능(AI) 기술로 그의 발음 일부를 보정한 걸 두고 진짜 연기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자유의 여신상을 마주한 토스의 감격, 사촌 아틸라를 끌어안으며 흘리는 눈물, 모진 세월 탓에 변해버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억양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브루탈리스트'는 오는 3월2일에 열리는 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남우주연(애드리언 브로디)·남우조연(가이 피어스)·여우조연(펠리시티 존스)·편집·음악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앞서 골든글로브에서 작품·감독·남우주연상을 받아 오스카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브루탈리스트'가 오스카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오스카를 품에 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카데미 수상 여부가 이 영화의 가치를 결정할 순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영화계가 싫어하고 극장업계가 꺼리는 3시간 35분짜리 영화, 인터미션이 15분 포함된 이 영화를 유튜브·인스타그램·틱톡이 장악한 시대에 내놓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두고 두고 회자될 테니까 말이다.
김필립
4.0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결과가 중요한 거라고, 끝없이 스스로를 세뇌하며 버텼을 모든 이들에게 바침
정성찬
4.0
This may contain spoiler!!
재원
5.0
긴 런닝타임이 부담스러 관람을 포기했다면 평생을 후회했을 걸작.
페리클레스
4.0
1️⃣ 배우 에드리언 브로디 영화의 주연 배우 에드리언 브로디 Adrien Brody는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 Elliot Brody와 헝가리계 유대인 Slyvia Plachy 사이에서 1973년 태어났다. 엄마인 실비아는 자신의 어린 시절인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에드리언 브로디는 영화 <피아니스트>(2002)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을 연기했다. 그의 아버지와 혈통적 배경을 공유하는 배역을 연기하며 그는 아카데미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에드리언은 약 20년이 지나, <브루탈리스트>(2024)에서 헝가리계 유대인 라슬로 토스 역을 맡았다. 아버지에 이어 이번엔 어머니와 연관된 인물 설정인 것이다. 에드리언은 해당 배역을 연기하며 그의 부모와 가계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유대계 이민자들에 대한 정서적 이해가 있었을 것이다. 2️⃣ 2부 구성과 인터미션 (스포 시작) 상영 시간이 3시간 반인 이 영화는 1•2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15분의 인터미션이 있다. 1부인 '도착의 수수께끼'와 2부인 '아름다움의 순수한 본질'을 갈라놓는 서사적 차이 중 핵심은 라슬로의 아내인 엘리자벳의 유무이다. 1부에서는 먼저 미국에 건너온 남편 라슬로와 달리 그의 아내와 조카는 아직 유럽에 남아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내 엘리자벳은 1부에서 편지의 내용을 읽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방식으로만 들려진다. 간접적 등장을 통해 부각되는 아내의 부재는 1부의 전체 내용을 묶는다. 아내의 부재 경험, 그 응축된 고통과 그리움은 라슬로에게 괴로움을 안겼으며, 그것은 라슬로의 건물 설계에도 반영될 만큼 중요하다. 15분의 인터미션은 아내의 부재라는 시간이 그만큼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15분 타이머와 함께, 라슬로의 결혼식 사진이 인터미션 시간 내내 스크린에 띄워진다. 결혼식 사진은 혼란한 전쟁 시대와 이산 가족이란 참화 속에서 라슬로와 엘리자벳이 가족이라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하다. 2부가 시작되고 '아내의 부재'는 극복된다. 아내 엘리자벳과 조카 조피아가 미국에 도착한다. 하지만 아내는 수용소 생활로 걸린 영양실조로 인한 골다공증으로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온전하지 못한 아내와의 재회를 시작으로 2부의 내용이 전개된다. 3️⃣ 건축양식 브루탈리즘의 영화적 도구화 브루탈리즘은 모더니즘 건축 이후 실용주의의 극대화로 유행한 건축 양식이다. 노출 콘크리트가 특징인 브루탈리즘은 단순하고 정직하며 기능적이지만, 동시에 단조롭고 삭막하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파이프와 빔 등 내부 자재들이 마감재 없이 그 구조를 드러내어 눈에 띄기도 한다. 이 영화는 건축적 미학으로서 브루탈리즘과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브루탈리즘은 거친 외부 표면, 거대한 규모와 육중한 양감, 특이하고 낯선 외형을 특징으로 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도 정제되지 않은 인물 묘사가 돋보인다. 인물을 포착하는 영화의 시선은 인물을 미화하거나 감추려들지 않는다. 주인공 라슬로의 추하고 못난 모습과 방황을 보여준다. 관객은 라슬로가 미국에 도착한 후 매춘부를 찾는 장면, 습관적인 아편류 마약 투여, 채석장 댄스 파티에서의 일탈 등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한 장면들을 포함한 3시간반의 상영 시간은 마치 브루탈리즘 건축물 외관처럼 장중하다. 4️⃣ 의자, 서재, 커뮤니티센터 건축가 라슬로는 영화 속에서 3가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첫번째는 미니멀리즘 양식 의자다. 라슬로는 밴 뷰런과의 대화에서 독일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건축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 의자는 라슬로가 미국으로 건너와 밥벌이를 위해 처음 만든 것으로, 그가 이 의자 디자인을 스케치한 종이는 그의 아내가 보낸 편지의 뒷면이었다. 라슬로의 사촌인 아틸라가 영업하는 가구점 'Millers&sons'의 쇼윈도에서 그 의자를 전시한다. 두번째 결과물은 밴 뷰런의 서재다. 라슬로는 해리슨 밴 뷰런의 아들인 해리 밴 뷰런의 의뢰로 저택 서재를 리모델링하게 된다. 낡은 유리 돔을 드러내고 커튼을 치워 채광을 개선했다. 특히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열리는 책장 덮개들은 세번째 결과물인 커뮤니티센터의 예배당 벽 덮개의 형식에도 고스란히 응용되어 있다. 해리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의뢰로 시작된 두번째 작업처럼, 세번째 작업은 그 아버지 해리슨 밴 뷰런의 의뢰로 시작된다. 죽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펜실베니아 Doylestown에 건축되는 커뮤니티센터는 앞선 작업물인 의자, 서재와 일맥상통한다. 구조물 위의 두 탑 사이로 내려쬐는 빛은 십자가 형상으로 바닥에 투사된다. 앞서 가구점 쇼윈도에 라슬로가 의자를 전시할 때, 아틸라의 아내 오드리는 그 의자를 어떤 가구와 함께 끼워팔지 묻는다. 그러자 라슬로는 그냥 이 의자를 그대로만 놔두라고 말한다. 서재의 독서용 의자는 첫번째 의자와 닮아 있다. 두 의자는 모두 캔틸레버 구조(한쪽 끝만 고정되어 하중을 지지하는 외팔보)이며, 실제로 앉는 용도과 함께 관상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초판본 책만 수집하는 서재의 주인인 밴 뷰런이 실제로 그 의자에 앉아 독서를 했을지는 의문이다.) 직관적이고 명확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라슬로의 의도와 달리, 커뮤니티센터 건축 의도는 미니멀리즘과 멀어진다. 의뢰자인 밴 뷰런은 처음에는 지역주민 소통 장소와 도서관을 만든다고 했다. 그러다 밴 뷰런은 어머니와의 추억이 생각나 체육관도 만들어달라고 한다. 라슬로는 수영장은 어떠냐고 묻는다. 밴 뷰런은 자기는 수영은 할 줄 모른다고 한다. 이미 사적 의미와 용도를 넣어 주민 커뮤니티센터의 목적과는 멀어져버렸다. 게다가 관할 시청의 허가와 감사 과정에서 유대인 건축가의 배경을 못마땅해하며 개신교도들을 위한 예배당을 추가해달라고 한다. 이로써 4개의 건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결국 도서관을 제외한 3개의 건물이 지어지게 된다. 5️⃣ 콘크리트, 철강, 대리석 브루탈리즘 건물을 구성하는 자재는 많지 않다. 라슬로의 건축물을 구성하는 자재는 콘크리트, 철강, 대리석이다. 라슬로가 건물을 짓는 펜실베니아 주는 미국이 1776년 7월 4일 영국령 북아메리카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읽은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이 위치한 역사적 장소이자, 미국 최초의 수도였다. 영화에 삽입된 펜실베니아 홍보 영상에서 철강은 미국의 제조업과 문명을 지탱하는 중추라고 소개한다.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위치한 철강 회사 U.S.Steel은 1901년 설립되어 현재까지도 미국 내에서 두번째로 큰 철강회사로 남아있다. 라슬로는 건축물에 사용된 철강이 펜실베니아 철강이라고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기도 한다. 펜실베니아는 미국 초기 정신의 상징이자, 아메리카드림의 표상인 것이다. 라슬로는 건물에 쓰일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 카라라(Carrara) 채석장까지 간다. 카라라 채석장은 고대 로마부터 질좋은 대리석의 채석지였고, 청회색이 섞인 무늬를 가진 대리석이 생산된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대리석 채굴 업자는 라슬로와 전쟁 때 수용소에서 만난 인연으로 보인다. 라슬로와 함께 카페에서 채굴업자를 기다리던 밴 뷰런은 느긋한 유럽인들은 약속 시간에 늦어서 같이 일하기 싫다며 고정관념적 발언을 뱉는다. 이 채굴업자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 맞서싸운 레지스탕스이며, 동료들은 파시스트들을 대리석으로 깔아뭉개는 아나키스트들이라고 말한다. 채굴업자는 그러한 저항 과정에서 체포되어 수용소까지 가게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모아온 자재인 콘크리트, 철강,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Ven Buren Institution'은 건축적 식견과 안목이 없는 밴 뷰런의 의뢰로 지어진 결정체이자 오욕과 상처가 담긴 집합체이다. 6️⃣ 조피아와 라슬로가 경험한 성추행•강간 라슬로의 조카 조피아는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말을 하지않는다. 수용소의 트라우마로 함묵증(Mutism, 심리적 이유로 발생하는 실어증)을 갖게 된 조피아에게 해리 밴 뷰런은 껄떡대며 접근한다. 해리는 '말을 건네도 대꾸도 하지 않는 조피아'에 대해 라슬로에게 불평한다. 라슬로가 불쾌하게 바라보자, 해리는 그냥 친해지기 위해였다며 본인이 불순하게 섹스하려고 다가간게 아니라며 흥분하여 항변한다. 술에 취한 듯한 해리는 '욕조에 있는 세 명의 하녀에 대한 음담패설 노래'를 부르며 '물가에 수영복을 입고 앉아있는 조피아'의 옆에 앉는다. 해리는 조피아에게 산책을 하자고 말을 걸지만, 조피아는 역시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장면은 전환되지만, 이후 장면에서 헝클어진 머리나 옷매무새를 다듬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조피아가 해리에게 겁탈당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피아는 끝까지 침묵한다. 한편 주인공 라슬로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라슬로는 대리석 채굴장의 파티에서 술에 취해 벽에 기대있다가 허리를 숙여 토를 한다. 그러다가 밴 뷰런에게 강간을 당한다. 다음날, 밴 뷰런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천연덕스럽게 앞서가고, 라슬로는 똥 씹은 표정으로 그를 뒤에서 따라간다. 라슬로는 그 후 괴팍해지고 날카로워진다. 주말에 유대교 회당에도 나가지 않고, 건설 현장에만 집착적으로 통근한다. 엘리자벳은 조피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네 삼촌이 자신의 제단을 짓고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라슬로는 건설 현장의 비계로 턱걸이를 하는 젊은 인부에게 지나치게 화를 내고, 그를 말리는 흑인 친구 고든에게도 성질을 낸다. 그렇게 라슬로도 조피아처럼 침묵을 지키고, 강간은 둘만 아는 이례적 상황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 남편의 강간 피해를 알게 된 아내 엘리자벳은 보행기를 짚고 밴 뷰런의 저녁식사 자리에 나타나 밴 뷰런의 강간 사실을 밝히고 그 자리를 파탄낸다. 영화에서 강간은 유대인들의 집단 상흔인 홀로코스트와 일련의 핍박•차별의 은유로 보여진다. 누군가는 침묵하지만, 누군가는 결국 목소리를 내 진실을 밝혔다. 유사한 사건에 다르게 대처한 두 인물 조피아와 라슬로는 겹쳐보이면서도 대비된다. 7️⃣ 아메리칸드림과 밴 뷰런 죽을 때까지의 30년치 포르투갈 마데이라 와인을 와인셀러에 쌓아놓은 갑부 해리슨 밴 뷰런은 아메리카드림의 구현처럼 보인다. 밴 뷰런 Van Buren이라는 이름은 미국의 8대 대통령 Martin Van Buren(1782~1862)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계 이민자의 후손인 그는 최초로 미국 땅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었다. 민주당 후보였던 그는 1840년 대선에서 휘그당 후보 William Henry Harrison에게 패배하여 재선에 실패했다. <브루탈리스트>의 Harrison Van Buren은 미국 8•9대 대통령 이름을 섞어 차용한 것이다. 영화에서 밴 뷰런을 만나기 전, 이민자인 라슬로는 석탄을 캐고 당구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막노동자 신세였다. 라슬로는 이민선의 어두운 선실, 가구점에 딸린 창고, 노숙자 수용소를 전전하는 떠돌이 이방인이었다. 밴 뷰런은 건축 잡지에 실린 그의 서재 때문에 라슬로를 재평가하게 되고 그의 재능과 경력을 보고 그를 고용한다. 라슬로는 그의 사촌에게 버려졌지만, 밴 뷰런이 준 새로운 기회로 다시 건축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라슬로는 그가 아내와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밴 뷰런과 그의 변호사인 마이클에게 말하자, 마이클은 그가 부통령과 일했던 실권자이며 국회에서 유럽 난민 수용법이 통과되었으니 라슬로를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밴 뷰런의 도움으로 라슬로는 유럽에서 아내를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아메리카드림은 허영과 탐욕, 좌절과 실패가 동반되었다. 그리고 밴 뷰런은 이상적 인물도, 고상한 후원자도 아니었다. 밴 뷰런은 그의 어머니를 버린 조부모에게 일부러 사인하지 않은 수표를 건네며 조롱하는 행동을 했던 경험을 라슬로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라슬로의 아내 엘리자벳을 밴 뷰런이 처음 만나는 식사 자리에서 밴 뷰런은 라슬로의 영어 실력이 구두닦이 같다며 동전 한 닢을 던지는 무례한 유머를 한다. 밴 뷰런은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고 주변인들을 모욕하며 아메리카드림을 추구한다. 밴 뷰런은 전쟁 때 화물선을 제작하며 돈을 벌었는데, 제작 기간을 단축시켜 납품하면서 거대한 부를 누리게 되었다. 밴 뷰런의 이런 방만한 졸속 처리는 결국 산업 재해로 이어진다. 센터 건설비를 감축하기 위해 협력 업체에서 해야하는 일까지 무리하게 확장해서 하다가 열차 사고가 발생했다. 라슬로는 밴 뷰런에게 사고와 관련된 인부들을 해고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만, 밴 뷰런은 그에게 구걸하지 말라고 고압적으로 말하며 라슬로를 거지 취급한다. 뒤틀린 심성의 밴 뷰런의 태도는 엘리자벳이 밴 뷰런을 강간범이라고 고발하는 장면에서 더욱 드러난다. 밴 뷰런은 라슬로가 술과 마약이 찌들어 살며 그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라슬로를 늙은 개 취급하며 늙은 개가 주인을 문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밴 뷰런이 라슬로를 휼륭한 예술가로 여긴 것이 아니라, 비천한 하인이자 경멸의 대상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8️⃣ 이스라엘과 시온주의 극중 내내 침묵을 일관하던 조카 조피아는 유대인 남자친구와 함께 이스라엘에 가겠다고 말할 때 처음으로 목소리를 크게 낸다. 그녀는 라슬로와 엘리자벳이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강력하게 자신의 이주 의지를 드러낸다. 조피아는 오히려 왜 유대인인데 이스라엘에 돌아가지 않냐고 되묻는다. 라슬로와 엘리자벳은 이스라엘에 가면 유대인이고 가지 않으면 유대인이 아니냐며, 자신들은 유대인이 아니냐고 반박한다. 그리고 조피아에게 너네가 이스라엘에 가면 집과 일자리는 있냐고 묻는다. 엘리자벳은 자신 같은 중년 여성 중에 일자리를 가진 사람이 몇이냐 되냐며 자신이 기자로 일하며 립스틱 광고나 여성 칼럼 같은 글을 쓰지만 이마저도 귀하다고 말한다. 조피아와 그녀의 남자친구는 이스라엘에 가면 아는 사람 집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고,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고 낙관적 태도를 견지한다. 그 후, 조피아는 이스라엘로 떠나고 거기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 라슬로와 엘리자벳은 미국에 남는다. 영화에서 이스라엘 건국과 시온주의는 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1948년 텔아비브에서 초대 대통령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는 연설이 부분적으로 영화에 삽입되었다. 연설에서 벤구리온은 다른 민족들이 주권국가를 설립하고 거주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유대 민족도 그러한 권리가 있으며,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거주할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에레츠-이스라엘(Eretz-Yisrael, 이스라엘의 땅)은 유대민족이 태어난 곳이다. 바로 여기서 유대민족의 영적, 종교적,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유대민족은 여기서 독립을 성취했고, 민족적이고도 보편적인 의미의 문화적 가치를 창조해냈다. 유대 민족은 여기서 성경을 기록했고, 그것을 전 세계에 전해 주었다. 에레츠-이스라엘로부터 강제 유배당한 유대민족은 열방에 흩어진 기간 내내 그 땅에 대한 신앙을 간직했고, 귀환을 위해 기도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 땅 안에서 그들의 정치적 자유가 회복되기를 기도하였고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간 조피아와 그 자식 세대들은 아랍인들을 그 땅에서 폭력적으로 쫓아낸 가담자들이고, 신제국주의 동조자다. 라슬로의 건축물은 뒤틀린 아메리칸드림과 오염된 시온주의의 이상을 모두 담고있다. 에필로그의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라슬로의 센터 건물은 공사가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고 알려진다. 라슬로와 벤 뷰런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는 1960년에 공사가 중단되고, 1973년까지 건물은 미완성이었다고 한다. 1973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되돌아보면, 제4차 중동전쟁이 있던 해다. 그 시점보다 앞선 때에 이스라엘에 건너간 조피아는 중동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휴전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73년 4차 중동 전쟁 이후 가장 큰 무력 충돌이고, 비대칭 전쟁 특성 상 민간인 피해는 더 심각해졌다. 선택된 민족이라는 유대교적 집단 망상과 자기 방어적 파시즘에 사로잡힌 이산 민족의 꿈, Eretz Israel의 꿈은 악몽이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가자 지구가 처한 곤궁과 모멸,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정치적 운동인 시온주의와 그 영토 민족주의적 성격은 종교적 의미와 결부되어 강력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우리는 작품 내에 나타난 시온주의를 작품 외부의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이어지는 팔레스타인의 비극과 가자 지구의 참상은 더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나는 벤구리온의 이스라엘 건국 선언문에 포함된 '아랍인 관련 부분'을 인용해 이•팔 분쟁의 평화적 해결 강구를 촉구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우리는 지난 몇 달 동안 우리에게 자행된 폭력의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아랍 주민들에게 평화를 유지할 것을 당부하고, 또한 완전하고 평등한 시민권과 모든 이스라엘의 임시 또는 영구적 공적 기관들에 대한 그들의 정당한 대표권에 기초하여 국가 건설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주위의 이웃 국가들과 국민들에게 평화와 친선의 손을 내밀고 있고, 유대인들의 땅에 정착한 주권을 가진 유대민족과 협력 및 상호부조의 연대를 만들어 나갈 것을 그들에게 호소한다." * 다비드 벤구리온의 이스라엘 건국 선언문 내용은 <국제관계사>(박건영 저, 2022)에서 인용
무비신
5.0
수많은 삶을 응축하여 정교하게 축조해낸 양면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대서사시.
쌩쌩이💨
2.5
<부르주아 강자를 은밀히 대변하는 약자코드, 그리고 도구로써의 영화> 확실히 현 할리우드를 알 수 있는 지표가 되는 영화. 유대인 이민자 장애인 여성 그리고 게이. 거의 모든 약자 코드가 있고 전부 다 얄팍하게 다루는데도.. 그게 다 민감한 주제라 다들 눈치보며 옆구리 찌르는 꼴이다. 이러한 아류 홀로코스트 영화가 정말 '좋은' 영화라고 도미노 넘어가듯 컨센서스를 얻는다는 것이 이제는 두려운 현상이다. 이 영화는 정식 개봉전 베니스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개봉 전부터 미리 나팔을 불었다. (제2의 존오인을 기대했던 걸까?) 난 반문하고 싶다. 이런 요소들을 한데 우겨넣은 것이야말로 해당 이슈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자본주의 베이스의 할리우드 마인드 아니냔 말이다. 덧붙이자면 약자 코드를 표방하며 사실은 가장 심도있게 다룬 주제인 시오니즘이 흥미로웠다. 에필로그의 연설까지도 시오니즘을 암시하는 연설임이 명백하다. 한국에 사는 나로써는 뜬금없기도 하고, (어느정도는 불쾌하고) 영화계에도 미치는 유대인의 영향력이 실감되기도 했다. 영화 자체를 사랑한다면(적어도 영화가 미디어 도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것을 좋아할 수가 있을까? 예컨대 에필로그의 연설은 전혀 영화적 경험이 되지도 못했다. 그런 종류의 교조적 발언을 단어의 나열로 전달하고 싶다면 글로도 웅변으로도 다른 어떤 매체를 사용해서 표현하면 되었다. 영화라는 매체로 그 장면을 보았을 때(심지어 감독은 에필로그로 따로 빼기까지 했는데) 색다른 감동을 어떻게 느낄수가 있나? 이제 영화는 그냥 약자를 표방하는 부유한 강자들의 선전물에 불과한가. ㅡㅡㅡㅡㅡ 개봉 당일 영화보고 짧게 작성한 글이라 불친절하게 쓴 부분이 있네요. 다만 이후에도 평론이나 커뮤니티 글들을 읽어보았지만, 영화 주제가 시오니즘은 아니더라도 의미심장한 함의가 있다는 점에는 생각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영화연출이 아니라 주제나 내용에 대해서 논할 때는 오독이나 정독을 정확하게 규정짓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평론의 한계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영화는 재밌게 보았습니다 ㅎㅎ (댓글에 대한 답변과 함께 이어진) 오랜 감상을 마무리하며, 답변한 부분도 코멘트에 함께 이어올립니다. (댓글에 답변 1) 에필로그 등이 사실상 시오니즘에 대한 비꼼/비판이 아니냐는 질문 이동진 평론가도 그런 말을 하셨다고 하고 찬반양론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러나 제 생각은 1. 에필로그가 시오니즘에 대한 돌려까기가 되려면, 우선 영화 전반이 시오니즘을 향한 맹목적 돌진이었어야 순서와 인-과가 맞다고 봐요. 2. 더욱이 영화에서는 캐릭터 설정을 단순화하여, 남주인공을 비롯하여 와이프, 함구증 여조카를 protagonist- 밴뷰런 일가를 antagonist로 배치하였는데 굳이 영화의 protagonist인 여조카의 입을 빌려 그 자신의 정체성을 풍자하도록 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심지어 영화 전반에 걸쳐 주인공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가정과 예술(건축물) 모두에 있어서 박해받는 측면이 골고루 보여졌잖아요. 3. 라즐로의 지친 몸, 죽어가는 몸과 대조되는 조피아의 파워 연설ㅡ이라는 내용의 방법론적 비평은, 유대인 라즐로는 자신의 기력을 다해 다음 세대 멘티 조피아에게 꿈을 이어갈 용기를 넘겨주면서 지난 회한을 돌이키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WASP 남성에게 성희롱 당하고도 말 못하던 어린 여성 조피아가 드디어 입을 열게 된다. 로도 치환될 수 있다고 봅니다. 외부적/실제적 이슈가 개입된 씬에서는 인상비평은 어느정도 자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반적 내용은 WASP 대 이민자, 기득권과 예술가의 불편한 동거를 다루었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겠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또 그것이 주제이고요. 다만 시오니즘이라는 이슈가 섞여 토론의 장작이 타는 것이겠죠. 제가 너무 짧고, 어느 정도 영화를 보고 무례하게 쓴 감이 있어서.. 답변하며 약간 더 보충하여 정리하였는데, 여러모로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 (댓글에 답변 2) 마이너리티, 그리고 유태인에 대한 이해. (유태인,게이 등이 마이너리티냐는 질문에 답함) 말씀해주신 마이너리티의 기준을 영화계로 좁혀 살펴보자면 우선, 아카데미 2020년 다양성을 위한 작품상 선정기준 공개 중 "a2; 조/단역급 배우 30%가 여성, LGBTQ. 성소수자, 소수민족이나 종교인, 신체적·인지적 장애인 등을 포함해야 한다"에서 이미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을 배려해야할 약자로 규정지었음을 알 수 있지요. 또한 해당 작품이 수상한 베를린 영화제에서 전개된 5050x2020 무브먼트는 여성할당제 주장인데, 이는 여성이 약자다/ 차별받고 있다를 전제로 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그 카테고리 사람들이 진짜 차별받고 있냐? 가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그 약자 할당을 업어가려고 하는것 같다, 어드벤티지를 먹었다라는 것 제 글의 주안점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해야할 것은 유태인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제 글에서 부르주아로 묘사한 주류)입니다. 할리우드에서 할당을 주는 약자 카테고리를 대충 업어가면서, 시오니즘/유태인 파워를 은근히 내비치려하지 않았는지 그게 첫번째 문제이고.. 두번째는 그러한 영화적 윤리성을 떠나서, 이전 영화에서 보여주진 못했던 파격적 영화 문법이나 스크린 충격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저 개인이 보기에는 이전 상업영화 공식을 잘 따라한 야심작 정도 같아 위와 같이 평가했습니다. 다만 여러모로 좋은 점도 많았기에 선생님이 즐겁게 보신 바도 이해되며, 그 감동을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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