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O
EO
2022 · Drama · Poland, Italy
1h 28m · R



The world is a mysterious place when seen through the eyes of an animal. EO, a grey donkey with melancholic eyes, meets good and bad people on his life’s path, experiences joy and pain, endures the wheel of fortune randomly turn his luck into disaster and his despair into unexpected bliss. But not even for a moment does he lose his innocence.
Where to 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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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
4.0
당나귀, 인간, 그리고 만물에 깃든 카메라라는 범신론.
CineVet
WatchList
심사위원상 수상도 예고편도 존나 시네마지만 감독 이름 생긴게 벌써 시네마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Jay Oh
3.5
신의 노여움을 산 것도 아니라면, 왜 제 이야기의 주체도 되지 못하는 것일까. + 당나귀는 빨강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This is not the wrath of gods.
동구리
4.0
이오는 영화의 주인공인 당나귀의 이름이다. 서커스단에서 일하던 이오는 동물권 단체의 시위와 서커스단의 파산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영화는 승마장, 농장, 동물보호소, 야생동물 불법거래단 등을 거치고, 시위대, 공무원, 소방관, 서커스단원, 다운증후군 환자들, 훌리건, 트럭운전수, 의문의 부자 등을 만나는 이오의 여정을 따라간다.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를 느슨하게 리메이크한 것만 같은 이 영화는 모든 인공적인 산물을 혐오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불법동물거래소나 서커스단, 농장처럼 실체가 있는 장소일 수도, 시위대나 축구팀과 같은 집단일 수도, 법, 제도, 동물권 등의 관념일 수도 있다. 물론 동물권 앞에는 '인간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 붙어야 겠지만. 영화 속에서 이오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상화된다. 그것은 그가 말을 할 수 없는 비인간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의사표현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이오의 모습은 그것을 빗겨간다. 아니, 빗겨가려 한다. "빗겨가려 한다"라고 말한 이유는 결국 이오를 담아내는 것 또한 인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핸드헬드, 클로즈업, 몸에 부착된 카메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오의 여정을 쫓던 카메라는 종종 이오(혹은 주변의 인간들)을 완전히 벗어난다. 난데없이 등장한 뒤집힌 스키 장면이나 붉은 숲을 드론으로 보여주다 풍력발전기의 회전에 맞추어 회전하는 움직임, 혹은 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역재생으로 보여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 혹은 이미지에 가한 조작은 카메라 자체의 인공성을 극대화한다. 과장된 붉은 조명과 음악이 동원된 서커스 장면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영화가 근본적으로 지닌 인공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음을 스스로 시인한다. 다시 말해, <EO>는 어떤 식으로도 이오를 대상화할 수밖에 없음을 자백하는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오는 공장식 축산농가의 소떼와 함께 어디론가 향한다. <옥자>나 공장식 축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으레 보았던 동물의 행렬 속에 이오가 뒤섞인 채 영화가 끝난다. 이는 영화라는 인공은 언제나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인공이 아닌 것에 배패할 수밖에 없다는 노장의 자기고백이다.
Dh
3.5
EO의 맑은 눈망울에 비친 잿빛 세상 #이리저리 #서울아트시네마 × V4영화제
134340
4.0
겨우 이렇게 처량하게 죽기 위해 어쩌면 이렇게라도 죽기 위해
양기연
5.0
이오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카메라는 이를 알고 있는가. . (스포일러) . 로베르 브레송은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당나귀 발타자르를 온갖 욕망으로 들끓는 인간사를 굽어보다 희생되는 일종의 성자처럼 묘사하였다. . <당나귀 EO>에서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역시 당나귀 이오를 통해 일견 비슷한 작업을 하는 듯하다. 인간들의 온갖 면모를 담은 숏들, 그에 대비되는 자연의 장엄함을 담은 숏들, 이오의 눈 클로즈업 숏들이 몽타주로 이어붙을 때, 마치 이오의 눈은 인간의 숏들과 자연의 숏들을 비교하머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 그러나 오프닝 씬에서부터 화면을 가득 채우는 핏빛 플리커에서부터, 영화는 이 화면에 개입된 어떤 '기계적' 효과를 관객에게 인지시키며 이것이 이오가 자신의 눈과 뇌로 인식하는 그대로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로도 영화는 지속적으로 이오가 보고 느끼는 바를, 아니, 이오가 보고 느낀다고 생각하고 싶은 바를 기계적 효과로 재현하는 숏들을 계속해서 삽입한다. 회상 플래시백 숏 내지 꿈 숏처럼 연출된 숏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텐데, 과연 그것이 이오가 그리워 하는 광경 혹은 이오가 꾸는 꿈이 맞을까? 카메라가 이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클로즈업으로 담은 숏을 그 앞 혹은 뒤에 이어붙일 때, 관객은 그것이 이오가 회상 혹은 꿈 이후 흘리는 눈물이라 믿어도 되는가? . 이 영화에는 이오가 자신의 여정을 통해 맞닥뜨리게 되는 인간들의 들끓는 욕망들 외에 또 하나의 욕망이 존재한다. 이오의 눈을 클로즈업으로 바라봄으로써 이오가 느끼는 바를 읽어내려 하는, 이오를 비롯한 짐승들의 눈의 높이에서 짐승들의 움직임을 모사하여 움직임으로써 자신이 곧 그 짐승들이 되어 보려 하는 카메라의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 영화 중반부, 뜬금없이 삽입된 로봇 씬은 바로 그 카메라의 욕망의 현현이다. 로봇은 짐승의 움직임을 최대한 모사하려 하나 여전히 그 움직임은 기계적이다. 그리고 로봇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로봇은 혼란스러워 하는 듯 보인다. 곧, 로봇은 수없이 많은 거울들을 통해 분열된 상으로 제시된다. . 결국 카메라는 아무리 이오의 눈을 바짝 클로즈업하여도 이오의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신의 렌즈와 이오의 눈을 동일시하여 이오의 시점인 양 시점 숏들을 들이대도 이오의 눈을 대체할 수 없으며, 이오를 비롯한 짐승의 시점에서 짐승의 움직임을 따라하여도 여전히 기계로 남을 뿐이다. 이 씬의 존재로 인하여 영화 전반적으로 회상 내지 꿈처럼 등장했던 그 모든 숏들마저 이오가 한 회상 내지 이오가 꾼 꿈이 아니요, 바로 카메라가 자신이 이오라 망상하며 꾸었던 꿈임이 명확해진다. 카메라가 수없이 많은 재현의 시도로 발버둥치더라도, 그 수없이 많은 재현의 시도는 로봇을 분열시킨 수없이 많은 거울처럼 카메라를 수없이 많이 좌절시킬 뿐인 것이다. . 자신이 이오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음을, 자신이 이오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카메라는 이제 무얼 할 수 있을까? 카메라는 이오의 시점인 양 똑같이 나무 판자 틈으로 내다 보거나 이오의 꿈인 양 제시해야 했던 자연 숏들을, 이제 버즈아이뷰, 익스트림 롱 숏으로 흡사 신의 위치에 선 양 과시적으로 내려다 보기 시작한다.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힘을 과시하는 방식은, 이오가 스쳐지나간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추잡한 방식들과 닮았다. . 결국 카메라가 이오 앞에서 흐르는 물길을 바꾸어 물이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기에 이를 때, 카메라가 과시하는 폭력은 극도에 달한다. 그 바로 다음 씬이 이오가 소들에 섞여 도축 행렬을 따르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씬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카메라가 어떤 객체를 렌즈 안에 담는다고 하여 그 객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가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과신하는 순간 이는 카메라의 권력을 과용한 폭력으로 돌변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자신이 이오를 온전히 알 수 없고 이오를 온전히 닮을 수 없다는 데 분노하여, 자연을 과시적으로 내려다 보고 중력을 거스르고, 이오의 목숨마저 제가 쥐고 흔들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객체를 온전히 파악하고자 하는 카메라의 욕망은, 동물을 제멋대로 휘두르려는 인간의 욕망과 과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 이 영화는 카메라의 뒤틀린 욕망을 전면에 펼쳐둠으로써, 자연 앞에 인간이 응당 그러해야 하듯 카메라 또한 자신이 담고자 하는 모든 것들 앞에 응당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암전, 그리고 이오의 죽음을 선언하는 음향이 들려온 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제작하였다'는 자막이 화면 전면에 뜰 때, 우리는 동물을 존중하지 못하였던 인간의 입장에서 한 번, 감히 객체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카메라의 과신을 묵인하였던 관객의 입장에서 또 한 번 부끄러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겨울비
3.5
인간이란 존재가 동물들에게 그저 유해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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