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 in a fictional American desert town circa 1955, the itinerary of a Junior Stargazer/Space Cadet convention (organized to bring together students and parents from across the country for fellowship and scholarly competition) is spectacularly disrupted by world-changing events.
이동진 평론가
4.5
의미를 몰라도 그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다는 것. 믿지 않아도 그 세계에 소중한 것을 모셔둘 수 있다는 것.
STONE
4.5
모든 장면이 의미를 가진 영화는 없다. 모든 순간이 예측 가능한 인생은 없듯이
양기연
5.0
그 모든 세계 너머로 날아든, 당신들이 있어야 온전해질 수 있다는 따스한 시선. . (스포일러) . 흔히 웨스 앤더슨을 떠올리면 강박적인 프레이밍 하에 펼쳐지는 미장센의 기교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부터 그는 그러한 기교 이상으로, 다른 매체와 영화라는 매체를 맞붙여 놓는 데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개들의 섬>은 조금 느슨하기는 하나 일본의 ‘노가쿠’ 극을 연상시키는 숏을 군데군데 삽입한다. 그리고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웨스 앤더슨은 이제 단순히 다른 매체의 형식만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매체와 영화라는 매체를 비교하였을 때 과연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영화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가장 표면적으로는 철저히 시각적인 매체, 인쇄 매체인 ‘잡지’의 형식을 빌려오되, 그 내부 레이어에서는 다시 ‘강연’, ‘인터뷰’, ‘요리’ 등 청각과 후각, 미각 등 다른 감각에 연관된 형식을 중간 매개로 삼고, 시각적인 매체라는 점에선 인쇄 매체와 유사하나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에 기반한 점에서 인쇄 매체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그리고 그 위에 사운드가 덧대어져 있기까지 한 ‘영화’를 위치시킨다. 그리고 인쇄 매체와 영상 매체 간의 재현 방식의 간극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 이번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가장 표면적인 레이어를 구성하는 것은 ‘흑백 방송’이란 매체이다. 흑백으로 진행되는 방송은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한 작가가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연극을 무대 위에 올리기까지의 과정 및 그 후일담을 조명한다.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후일담은 방송 세트 위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일종의 또 다른 ‘연극’의 형태로 제시된다. 결국 특정 ‘연극’ 작품의 후일담이 또 다시 ‘연극’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셈인데, ‘방송’이라는 매체를 빌어 카메라의 존재가 이 자리에 끼어들게 됨으로써 일반적인 연극에서는 절대 구현될 수 없는 것들이 구현된다. 예를 들어, 작가가 자신의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 세트의 배치를 설명할 때, 그에 맞추어 방송 카메라가 각각 그 설명에 맞추어 무대 곳곳을 별개의 숏으로 보여주되 그 연극 무대 뒤의 스탭을 함께 프레임 안에 담는다. 일반적인 연극 무대였다면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으니 별개의 숏이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무대 곳곳을 분할하여 관객에게 소개할 수도 없다. 무대 뒤편의 스탭을 관객이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 한 편, 연극 무대 세팅이 끝나면, 화면은 갑자기 컬러로 바뀌더니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로서의) 오프닝 크레딧이 오르기 시작하며, 사막을 질주하는 열차의 숏이 등장한다.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1955년 가상의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배경이라고 소개된 바 있다. 컬러 TV가 60년대에 대중화를 이루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표면적인 레이어를 구성하는 흑백 방송의 방영 시점은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무대로 삼고 있는 시기와 크게 머지 않은 50년대일 것이다. 50년대에 세트장 위에서 진행되는 흑백 방송에서라면, 컬러로, 사막 한복판을 질주하는 열차의 광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컬러의 영역은 온전히 오프닝 크레딧에 등장하는 작가 웨스 앤더슨이 2020년대에 만들어낸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가상의 작가가 50년대에 완성한 ‘연극’을 재현하는 영역이라 하겠다. 이를 강조라도 하듯, ‘흑백 방송’에서의 카메라가 ‘세트장’의 무대 장치를 ‘각각 별개의 숏’으로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컬러 영화’에서의 카메라는 ‘현지 로케이션 혹은 CG’로 구현된 사막 한복판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풍경을 패닝으로 ‘한 숏’ 안에 담아낸다. . 결국 이 영화는 하나의 ‘연극’을 사이에 두고, 연극의 백스테이지를 다시 ‘연극’의 형태로 재현하여 담아내는 ‘1950년대 흑백 방송의 카메라’와 그 연극 자체를 다시 ‘영화’의 형태로 재현하여 담아내는 ‘2020년대 컬러 영화의 카메라’가 구조적 대칭을 이룬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 두 카메라는 모두 인물들이 가장 내밀한 감정을 토로하고(컬러 영화 영역에서 인물들이 광대한 우주 내에서의 외로움에 대해 공감하는 등) 서로 진심으로 소통하는 장면을 숏-역숏(이때 두 숏은 모두 클로즈업 숏이다.)의 구성으로 담아낸다. 연극에서는 클로즈업도, 숏과 역숏의 몽타주도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관객의 시각을 카메라가 바라보는 비전에 철저히 종속시키는 논리, 그 카메라의 권력 자체가 연극에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두 카메라는 한 편의 연극을 각각의 방식으로 재현하되, 연극이 절대 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연극 속 인물들의 내면을 조명함으로써 카메라의 힘을 관객에게 체감시키는 셈이다. 이 점에서 두 개의 카메라는 서로 닮아 있다. . 그러나 ‘2020년대 컬러 영화의 카메라’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50년대 흑백 방송의 카메라’에서 구현할 수 없는 시각적인 스펙터클을 제시하고, 또 반대로 ‘1950년대 흑백 방송의 카메라’는 ‘2020년대 컬러 영화의 카메라’ 상의 문법에서 조금 고루할 수 있는 방식일 수 있음에도 나레이터(사회자)의 존재를 적극 차용하고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그 연극을 둘러싼 각 배우, 감독, 작가 등의 생각을 곧바로 투영하는 등 청각적인 방식을 통하여 ‘2020년 컬러 영화의 카메라’가 구현하기 곤란한 부분들을 구현해 낸다. 이렇게 두 카메라는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상호보완하는 관계 하에 놓인다. .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재현하는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극중 서사를 볼 때, 영화의 구조는 더 다층적으로 보인다. . ‘소행성의 날’을 맞아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찾은 외지인들은 대부분 부모-자식의 관계이다. 남자 카우보이, 여자 선생님, 꼬마 학생들은 혈연 관계로 맺어져 있지는 않으나, 아이의 노래에 맞추어 다같이 춤을 추는 장면 즈음에는 흡사 유사 가족 관계처럼 보인다. 심지어 장군의 곁에도 늘 어리고 주눅든 장교 하나가 동행해 있다. 이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애초부터 머물러 있던 모텔 주인, 카페테리아 주인에게 가족이 없어 보이는 것과 철저히 대비된다. . 그 외지인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창작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과학 영재 자녀들은 각각의 발명품이 하나씩 존재한다. 그리고 꼬마 학생들 중 한 명은 노래를 작곡한다. 웨스 앤더슨은 과학 영재 자녀들이 발명품을 소개할 때 화면비를 전환하고, 꼬마 학생 한 명이 자신의 노래를 부를 때 그때까지 전혀 등장하지 않던 자막을 삽입하는 등 굉장히 튀는 연출을 보인다. 영화로 재현된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 안의 극중 인물들이 자신의 작품을 구현해 낼 때, 그 순간이 또 다른 레이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완성하는 과정과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 본편이 각각 흑백 방송과 컬러 영화로 구현되어 별개의 레이어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 내에서도 창조자인 극중 인물들의 레이어와 그들의 피조물의 레이어가 분리된다. .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한 연극 작가는 게이임이 암시되고 있기에 생물학적 자녀가 존재할 수 없다. 대신 그의 자녀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작품 ‘애스터로이드 시티’이다.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박사는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외지인 중 자녀 혹은 유사 자녀의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심지어 그의 대사 중에는 “자식을 낳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대사까지 존재한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 집착한다. 결국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둘러싼 서사 안팎의 논리에 따라, 부모-자식 간의 관계는 창조물-피조물, 발명가-발명품, 작가-예술 작품의 관계로 치환된다. . 과학 영재 자녀들은 모두 부모의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부모에게 의문을 품기 일쑤이고 자신들만의 커뮤니티 안에 있을 때 진심으로 이해받는다고 여긴다. 꼬마 학생들은 유사 부모처럼 존재하는 선생의 지시에 온전히 따르지 않고 자신들이 가진 호기심을 우선 해결하고자 한다. 부모들은 자녀를 온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심지어 오기는 자식들을 모두 장인에게 유기할 생각마저 품고 있다. 이처럼 부모가 자식들에 대해 느끼는 불안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는 극중 인물들이 모두 다같이 잠드는 장면을 구상하고 있으나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호소하나, 끝내 이를 완성하지 못한 채 죽는다. . 이처럼 다층의 레이어를 품고 가던 영화는 외계인의 존재를 등장시킴으로써 그 레이어 간의 관계를 한꺼번에 흔들기 시작한다. 굴절 장치를 쓰고 하늘을 바라보던 인물들은 외계인의 우주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때 영화는 인물들의 숏과 인물들의 시점에서 우주선이 내려오는 것을 바라보는 숏을 번갈아 등장시킴으로써, 또 한 번 연극이 절대로 구현할 수 없는 카메라의 권력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50년대 흑백 방송이 절대로 구현할 수 없는 시각적 스펙터클의 위력 또한 상기시킨다. . 외계인이 소행성을 수거해 감에 따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격리 상태에 놓인다. 인물들이 애스터로이드 시티 안에 갇힘으로써 연극적 성격은 한층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외계인의 존재가 카메라의 권력과 동일시되어 등장했기에 연극 매체와 영화 매체 간의 균열은 더욱 벌어진다. 외계인의 등장 이후 인물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로 언급하는 내용을 보면 ‘외계인이 계속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광대한 우주 아래서 더 외로움을 느낀다’ 등의 내용인데, 이는 애스터로이드 시티 밖, 더 나아가 지구 밖의 우주라는 공간을 염두에 두어야 가능한 이유이다. 이는 지구인들이 외계인을 목격함으로써 우주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실감케 된 순간이자, 연극 속 인물들이 카메라의 권력을 목격함으로써 연극 외부에서 그 연극을 재현하고 있는 또 다른 매체인 영화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실감케 된 순간이기도 하다. .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배우 중 유독 레이어 사이를 대놓고 넘나든 인물이 둘 있다. 연극 내에서 밋지 역을 맡은 배우는 연극 후일담을 다룬 방송에서 연극 개막 직전 도망쳤다가 돌아온 일화가 나온 바 있다. 밋지 역의 배우는 연극 밖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오는 일화를 통해, 연극 무대를 벗어나 1950년대 카메라의 레이어로 도망쳤다가 다시 2020년대 카메라의 레이어로 돌아온 셈이다. 한 편, 연극 내에서 오기 역을 맡은 배우는 연극 3막 중 극중 캐릭터 오기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대를 뛰쳐나온다. 그 역시 연극 무대를 벗어나 1950년대 카메라의 레이어로 도망쳤다가 에필로그에서 다시 2020년대 카메라의 레이어로 돌아온다. . 하필 이 두 인물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모두 예술가이다. 오기는 사진 작가이며, 밋지는 연극 배우로, 영화로 재현된 연극 내에서 두 인물은 창가에 앉아 연극에선 불가능한 숏-역숏의 몽타주 하에서 소통한다. 심지어 그들이 숏-역숏으로 소통하는 씬 중 어떤 씬에선 대놓고 컨티뉴이티가 맞지 않는 숏 연결(오기의 등 뒤에서 오버더숄더 숏으로 밋지를 바라보는 숏에서 밋지가 턱을 괴고 있지 않음에도, 바로 앞뒤로 이어붙는 밋지의 숏들에선 밋지가 턱을 괴고 있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실시간으로,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연극 무대 위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그들 각자 편의 창틀은 영화 카메라 프레임 내의 또 다른 프레임처럼 존재하고, 그 안에서 오기는 밋지의 사진을 찍어 또 하나의 프레임 안에 박제하고, 밋지는 창틀 프레임 너머를 자신의 연극 무대 삼아 오기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준다. 그들은 각자 연극 무대를 사이에 둔 1950년대 카메라의 레이어와 2020년대 카메라의 레이어를 오가는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프레임을 도구 삼아 소통하는 것이다. . 이렇게 극중 인물들이 서서히 외부의 세계를 인지하게 되고, 심지어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외계인이 방문했다는 소문이 외지에 파다하게 퍼져 다른 외지인들조차 외부의 세계를 인지하게 된 3막의 시점에서, 외계인은 다시 이전과 같이 ‘바라보는 인물의 숏’과 ‘시점 숏’ 간의 몽타주를 거쳐 등장하더니 소행성을 다시 땅에 내려놓고 사라진다. 우주에서 날아와 땅에 박혀 있던 소행성이 외계인에게 수거되어 다시 우주로 향했다가 외계인에 의해 반환되어 다시 땅에 박힌다. 계속해서 우주와 땅을 오가는 소행성의 존재, 이는 마치 이 영화가 제시하는 다층적 레이어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 우리는 이쯤에서 극중 인물이 우주와 땅에 대해 언급한 순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오기는 어린 시절 자신의 부모가 사망하였을 때 부모가 별들 사이 ‘우주’로 날아간 것이라는 말을 믿지 않으며 ‘땅에 묻혔다’고 말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오기의 아들은 ‘우주’를 연구하고, 오기의 딸들은 뱀파이어와 요정과 외계인 등 이 세계 외부의 존재들을 언급하면서도 어머니의 유해를 ‘땅에 묻는다’. 우주는 지구 외부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혹은 사람이 죽었을 때 영혼이 가는 공간이라고 믿고 싶은 공간이라는 점에서, 반대로 땅은 사람이 죽어서 그 육체가 묻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너머의 세계를 상징하며, 극중 인물들이 위치한 레이어 너머의 또 다른 레이어를 의미한다. 다만, 그 위치가 정반대일 뿐이다. 결국 ‘우주’와 ‘땅’은 한 편의 연극을 양극에서 잡아당기고 있는 ‘1950년대 흑백 방송의 카메라’와 ‘2020년대 컬러 영화의 카메라’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인 셈이다. . 외계인이 우주로 가져갔던 소행성을 다시 땅에 돌려놓음으로써 레이어 사이를 유영하는 운동을 인물들 앞에 선보였을 때, 장군은 다시 격리를 선언하여 인물들을 다시 연극적 무대 안에 가두려 한다. 하지만 인물들은 폭주하여 영화로 재현한 연극이라는 레이어 하부의 또 다른 레이어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과학 영재들의 발명품들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레이어 간 구조를 허물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오기는 연극 무대를 뛰쳐나가 연극 후일담을 재현하는 흑백 방송의 레이어로 나아감으로써, 정반대 방향으로 레이어 간 구조를 허물기 시작한다. . 3막이 등장하기 전, 연극의 연출자와 아내 간의 대화 장면에서 연출자의 아내는 ‘3막 5장’의 특정 장면을 언급한다. 그렇지만 오기가 연극 무대를 뛰쳐나오고 타이밍에 맞추어 복귀하지 않음으로써 그 이전에 언급되었던 3막 5장은 끝내 영화의 형태로 스크린 위에 재현되지 못한다. 그 대신 오기 역의 배우는 아내 역의 배우를 마치 오기와 밋지가 창 너머로 대화하듯, 건물 난간 너머로 마주하며 ‘작가에 의해 삭제된 회상 씬’을 재현한다. 이때, 카메라는 회상 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다시 클로즈업으로, 숏-역숏의 몽타주로, 연극이 구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결국 연극에 구현되었어야 할 씬은 생략되고, 그 대신 연극에서 삭제된 씬이 연극에서 불가능한 방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레이어 간 구조가 무너지고, 각 레이어가 서로의 영향을 받아 전혀 다른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 오기 역의 배우와 아내 역의 배우가 재현한 회상 씬 속 대사에 따르면, 오기의 아내는 외계인을 만났다면 외계인과 대화를 시도하거나 외계인을 웃기기라도 하거나 외계인에게 우주의 진리에 대해 질문했을 것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지구 너머 우주 공간을 연극 너머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외계인과 대화를 시도하거나 외계인을 웃긴다는 것은 배우가 관객과 소통하려 하거나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계인에게 우주의 진리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배우가 예술 작품의 작가나 연출자 등에게 작품의 해석에 대해 질문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오기 역 배우는 오기가 버너에 손을 대는 장면에 대해 작가와도, 연출자와도 대화를 나눈 바 있다. 결국 오기의 아내는 애초부터 레이어 너머를 인지할뿐 아니라, 그 너머의 또 다른 레이어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행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 대화 이후, 오기 역 배우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에필로그에서 연극으로 복귀한다. . (리플에 계속)
박서하
4.5
강박적인 예술로 강박적이지 않는 삶을 꿈꾸기.
재원
4.5
답을 찾지 못하면 어떠한가. 예술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우린 늘 각자의 무대 위에서 충분히 멋진 연기를 펼치고 있는데.
신상훈남
4.5
#소행성의날 #6월30일 #극중에선9월23일 깊고 몽환적인 꿈속에서 아름답게 발버둥치던 사람들. “좋은 타이밍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건, 보잘 것 없는 한 연극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격리’당하며 마을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외계인에게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에서, 몽환적인 꿈을 꾸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 스스로의 모습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덥기만 하고 불꽃놀이도 소박하게 터뜨리는 사막의 한 마을의 사람들이 하나씩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시간이 약이다’ 아니야, 반창고는 될 수 있겠지.“ 남자는 여자의 ‘허락’ 없이 사진을 찍었다.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다. 허락을 구하고 사진을 찍는 행동은 전쟁 사진 작가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지만, 잘 나온 사진은 오히려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수염 달린 남자는 싫지만 자신의 사진을 황홀스럽게 잘 찍어주는 남자는 좋았을 것이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기분 나쁠 만한‘ 태도가, ’용서‘가 필요없이 ’기분 좋아지는’ 사진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내가 ‘예스’라고 했나요?“ ”아니요.“ ”마음으로 ‘예스’라고 말했어요.“ 내면의 슬픔을 표현하지 못 해 멍이나 그리고 있던 여자는, 인기가 있어 사생활을 감춰야 하는 배우는, 결국 자신의 내면을 카메라로 담아준 남자에게 사생활의 주소를 남기게 된다. 남자는 와이프를 잃고 시간이 지나도 편해지지 않는 마음에 고통스러워하고, 그런 시간을 원망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찍은 사진들로 인해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폭발해버린 부품으로 멈춰버린 자동차가, 다시 엔진을 켤 수 있게 된 것이다. “오기는 왜 버너에 손을 갖다댄 거지? 난 아직도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린 아이든, 늙어서 은퇴한 사람이든, 전쟁 사진 작가든, 유명 코미디 배우든. 누구든지 간에. ”왜 내기를 하려고 해?“ ”그거라도 안 하면 내 존재를 알아봐줄 사람이 없을까 봐요. 이 넓은 우주에서 나를 알아줄 단 한 명도요.“ [이 영화의 명장면 📽️] 1. 소행성 도둑질 (1부 끝)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극장에 들어섰을 때’ 느낄 수 있는 황당함의 영화 1위. 공상 과학 영화 특유의 신비로움도, 입 벌어지는 놀라움도 아닌, ‘헛웃음’이 나오는 황당한 상황. 이상하게 생긴 우주선에서 이상하게 생긴 외계인이 등장하더니 카메라 앞에서 이상한 포즈도 취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무슨 연극인지 머리가 띵했는데 지나고 나니 이 장면이 특히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외계인이 소행성을 훔쳐 갔네요.“ 2. 연극의 막바지 (에필로그 전) 배우들이 극에 국한되지 않고 처음으로 그것을 보고 있던 관객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던 장면. 깊은 잠을 자며 몽환적인 꿈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던 배우들의 연기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름 잘 소화하고 있던 역할에 의심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촬영장을 나와 이젠 삭제되어버린 대본을 이전 상대 역할과 다시 맞춰보기까지의 시퀀스는 ‘역시 웨스 앤더슨’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특하고 인상깊었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 삶이라는 ‘우주’에서 의미라는 ‘소행성’을 찾기까지 “저 우주엔 뭔가 답이 있어야 하잖아요.” “괜찮아, 잘 하고 있어.”
김이름
4.0
감독님 이 연극의 의미를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당신은 지금 연기를 잘 하고 있어요 의미를 몰라도 연기를 잘 할 수 있어요 ---- 외계인의 정체, 행적, 동기보다도 우리 모두가 한 공간에서 함께 그 수줍은 외계인을 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film fantasia
3.0
”오기는 왜 버너에 손을 데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계속하는 삶. 우주 저 너머에서도 해답을 알려줄 누군가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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