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ssenger
The Passenger
1975 · Romance/Drama/Thriller · Spain, Italy, France
2h 6m · G

David Locke (Jack Nicholson) is a world-weary American journalist who has been sent to cover a conflict in northern Africa, but he makes little progress with the story. When he discovers the body of a stranger who looks similar to him, Locke assumes the dead man's identity. However, he soon finds out that the man was an arms dealer, leading Locke into dangerous situations. Aided by a beautiful woman (Maria Schneider), Locke attempts to avoid both the police and criminals out to get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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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너구리
4.5
로크는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그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본인의 직업과 인간관계에서 싫증을 느낀 그는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죽은 무기 밀매상의 신분을 도용한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자유가 아닌 또 다른 속박이다. 영화는 로크의 자기 탈피 시도를 통해 관객에게 과연 자신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로크는 자신이 택한 새로운 길에서조차 무기 밀매상이라는 새로운 구속을 떠안게 되며, 이는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암시한다. 카뮈의 철학에서 부조리는 삶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그 의미를 찾으려는 모순에서 발생한다. ‘여행자’에서 로크는 자신의 삶에서 무의미함을 느끼고, 기존의 정체성을 죽이고 새로운 인물이 되기로 선택한다. 이는 그가 부조리한 삶을 깨닫고 그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조리한 삶에서 도망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다. 로크가 다른 사람의 신분을 도용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지만, 인생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함은 신분을 바꾼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선택한 새로운 삶은 또 다른 무의미 속으로 그를 끌어들였고, 그 안에서조차 그는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시지프 신화’에서 시지프는 신들에 의해 끝없이 바위를 산 위로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시지프가 바위를 산 위로 올리면,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고, 그는 그 바위를 다시 위로 올려야 한다. 이 끝없는 순환은 인간의 부조리한 삶을 상징한다. ‘여행자’에서 로크는 부조리한 삶을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새로운 신분을 통해 시작한 삶도 결국 그에게 진정한 탈출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시지프는 부조리한 삶 속에서도 끝없이 반항하며 바위를 굴리는 행위를 지속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로크는 부조리한 현실에 반항하기보다,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이 도피는 그의 죽음을 통해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결국 인간은 부조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raffy
4.5
정체성은 흘러가는 풍경이고, 삶은 그 풍경을 바라보는 프레임일 뿐.
뜨거운데 휘 휘 휘파람새
4.5
Girl, "단 하나만요. 늘 같은 거죠.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는 거에요?" David Locke, "앞좌석을 등지고 돌아봐요."
김병석
4.5
스쳐 지나간 모든 인연들의 시선 속에서 지각되는 이미지로서의 나, 그런 이미지가 축적되어 완성된 우리의 세계. 소속을 완전히 포기하기 전까진 그 철창 밖으로 도망갈 수 없다. 결국 나로 통하는 새로운 갈래 하나를 더 만들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 모양인 거고.
윌슨
5.0
현대에서의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 마지막 롱테이크는 영화에서 한 쇼트가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세일
5.0
현재의 삶이 지겹기에 타인의 삶을 모방하며 새로운 자극을 통한 구원을 바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토록 바랬던 구원은 처음부터 모방이 아닌 함께하는 삶에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의 필연적 이치를 결코 쉽게 깨우칠 수 있도록 놔두지 않는 잿빛 현실 속 인간은, 끝내 곁에 있는 축복을 보지 못하고 막연한 구원만을 갈망하게 된다. 분명히 소실된 자아를 찾기 위해 시작된 여행이었지만, 그의 여행은 갈수록 더 큰 공허함만을 불러오게 된다. 그렇게 자아를 찾기 위한 모험인 줄 알았던 여행은 사실 질려버린 삶으로부터의 회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늦어버린 자에게 뒤늦은 깨달음은 오히려 진실에 대한 부정만을 각인시킨다. 그렇기에 끝없는 방황 끝에 다시 절망으로의 회귀는, 어쩌면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동행한 여자 또한 비슷한 이유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함께하는 삶이라는 구원의 길을 열어줄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도 느껴진다. 그녀는 그가 어떠한 과거, 어떠한 신념 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곁에 있어주고자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끝내 그는 그녀를 자신의 삶에서 밀어냈고, 결국엔 그가 모방했던 자와 같은 비극을 맡게 된다. 영화는 그러한 수미상관의 구조를 탁월하게 활용한 결말을 통해, 인생은 결국 새로운 환경의 삶을 욕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곁을 언제나 지켜주는 사람과의 하루를 소중히 하고 만끽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러한 생을 유지하기 위한 일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싸움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결국 인생의 끝에 가서 남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했다는 추억으로 빚어진 관계이다.
김재범
4.5
안토니오니, 혹은 유령의 영화 -유령들의 여정 유령 같은 영화다. 불현듯 <현기증 Vertigo>(1958)을 연상케하는, 화려한 꽃의 이미지와, 묘지와 성당의 음산한 공간성, 그리고 그곳을 가로지르는 잭 니콜슨의 혼곤한 방황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정처 없이 여러 나라를 이곳저곳 떠돌아도, 이상하게 그 이동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 유령적이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갑자기 영국으로 이동하고 또 일순간 스페인에 출현한다. 마치 유령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신출귀몰하게 유영하는 모습은 기존의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보지 못한 묘한 유동성을 발산하여, 어떤 환영성을 추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행자 The Passenger>(1975)는 표면상 '나'라는 존재를 해체하는 여정이다.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나는 어떤 경계부터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보편적으로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변모하지 않는 고정된 상수라 생각하고, 그 경계 안을 공고히 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행자>에서 '나'는 고정된 것이 아닌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유동적인 존재다. 작중에서 잭 니콜슨은 사망한 기업가 행세를 하며, 망자의 집을 침입하는데도 이웃들은 그의 변모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데이비드 로크가 아닌 로버트 로버슨으로 인식한다. 적어도 <여행자>에서 '나'라는 존재는 우습게도 여권 사진을 바꾸거나,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대충 따라 하거나, 그 사람의 집에 침입하는 간단한 방식으로도 해체되는, 경계를 상실한 채 흐물거리는 그 무엇이다. 어쩌면 그것을 유령의 형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잭 니콜슨은 '나'를 규정하던 직업, 이름, 가족관계, 형체를 해체하고 유영한다. 그의 옆에는 한 여성이 함께하는데, 그녀 또한 잭 니콜슨처럼 영국에서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스페인에서도 똑같은 자세로 출몰하는, 이름과 전사도 미스터리인, 그저 여행하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 아래에서 잭 니콜슨이 여기서 자신과 뭐 하는 거냐고 쏘아붙일 때, 그녀가 어떤 나요?라고, 되묻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 두 유령은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듯, 런던에 이어 바르셀로나에서도 재회하며, 그들은 떨어질 듯 말 듯 결코 떨어지지 않는 기이한 역학 관계를 형성한다. 예컨대 후반부 잭 니콜슨이 한 호텔을 찾았을 때, 그녀는 그가 이 호텔에 도착할 것을 미리 아는 듯, 호텔에서 그를 기다리던 모습은 비현실적이면서도, 두 유령의 인력이 작동하는 신비로운 장면이다. 잭 니콜슨과 그녀의 이 기이한 역학관계는, 잭 니콜슨과 아내의 관계와 대조되어 더욱 뭉툭해진다. 잭 니콜슨과 불명의 여성이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모종의 인력 관계라면, 그에 반해 잭 니콜슨과 아내는 서로 만날 듯 만나지 않는 척력 관계다. 아내는 그의 흔적을 쫓으며, 여러 나라를 이곳저곳 이동하지만 둘은 계속해서 어긋나고, 심지어는 불과 몇 미터 간의 거리를 두고 지나치기도 하지만, 그의 존재를 아내는 인식하지 못한다. 잭 니콜슨과 아내의, 계속해서 어긋나는 이 척력의 움직임은, 서로 접촉할 수도 교착할 수도 없이 표면에서 미끄러질 뿐인, 인간의 육체와 유령의 불화를 드러낸다. 유령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인간과 만날 수 없다. 영화의 엔딩에서, 마침내 아내가 잭 니콜슨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의 그를 처음으로 만지는 순간에도, 잭 니콜슨이라는 육체를 제재로 삼던 유령은 이미 어딘가로 홀연히 떠난 후다. 하지만 <여행자>가 특권화하는 것은 육체와 유령의 불가능한 만남이 아닌, 앞서 언급했듯이 유령들의 여정이다. 잭 니콜슨과 그의 아내는 제도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만나지 않는 데 반해, 우연히 만난 불명의 여인과 잭 니콜슨은 함께 여정을 떠나고, 자동차로 질주하거나 서로 속마음을 나누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쇼트라 할 수 있는 가로수 길의 질주는, 사막에서 바퀴가 헛돌아 멈춘 차와 대구를 이루어, 시원한 해방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차에서 몸을 뒤돌아, 팔을 벌리는 여인의 모습은, 케이블카에서 몸을 빼내 바다를 향해 팔을 벌리던 잭 니콜슨의 인상적인 쇼트와도 조응하여, 그들의 형태적 연결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두 쇼트는 모두 다리를 상실한 채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듯한 형태를 띄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여행자>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유령 간의 연결을 믿는 유령들의 영화인 것이다. 물론 단지 피사체의 괴이한 유동성만으로 이 영화를 유령적이라고 단정 짓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여행자>는 카메라의 움직임마저도 유령적이라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여행자>를 '안토니오니가 처음으로 카메라에 능동적인 힘을 실어준 작품'이라 평하며, <여행자> 속 카메라의 주관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여행자>의 카메라는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며, 그 궤적은 마치 두 유령처럼, 떠다니는 느낌이다. 예컨대 반복되는 유려한 패닝은 기존의 안토니오니 영화의 상징적인 정지 쇼트들 - <일식 L'eclisse>(1962) 엔딩의 그 메마른 몽타주들을 상상해 보자- 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유동적인 움직임이며, 무엇보다도 엔딩에서 서서히 떠다니다 벽과 벽 사이의 창살을 관통하여, 물리적 제약을 일순간 무화하는 그 경이로운 카메라 움직임은, 마치 유령의 소행이라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유령적인 그 무엇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두드러지는 유령성에는 뒤따르는 의문이 있다. 잭 니콜슨은 왜 유령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혹은 그는 왜 '나'를 버리고 떠나야만 했던 것인가? 잭 니콜슨은 갑자기 아무런 징후도 없이 도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행자>는 어떤 현상은 존재하지만, 그 원인은 불투명한 영화다. 달리 말하자면, 표면은 드러나 있지만, 그 속은 오리무중이다. 이 물음은 단지 개인적인 궁금증이 아닌, <여행자>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가로수 길 질주 장면에서조차 여인은 잭 니콜슨에게 자신의 유일한 궁금증은 바로 그가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인지라고 말하지 않는가. 잭 니콜슨은 그 물음에 그녀에게 좌석을 등지고 뒤를 돌아봐라는 다소 모호한 말로 대답한다. 그 질주하는 자동차의 뒤편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보다 정확히 잭 니콜슨은 대체 세계의 이면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도피하는 유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단지 그 도피의 전말을 마치 <정사L'Avventura>(1960)의 의문의 소멸처럼, 텅 빈 공란으로 남겨 두기에는 어딘가 꺼림직하다. -이면의 폭력 어쩌면 잭 니콜슨에 대한 시작점을 다시 잡을 필요가 있겠다. <여행자>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다소 독특한 쇼트가 삽입되어 있다. 극영화의 외양을 띄고 있는 본작에, 중간중간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푸티지들이 삽입되어 있는데, 그 푸티지가 예사롭지 않다. 그중에서도 영화의 중반부 반군으로 추정되는 한 아프리카 남성을 총살하는 푸티지를, 그 준비 과정부터 총살의 순간, 그 후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까지, 극영화에서는 유례없을 정도로 가감 없이 길게 보여준다. 실제 처형 장면으로 의심되는 이 충격적이고 리얼리티한 푸티지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삽입되어, 영화의 내러티브와도 불화하여, 일순간 영화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어떤 소격 효과를 자아낸다. 돌연 관객과 작품 간의 거리를 환기하는, 이 맥락 없고 불균질한 총살 푸티지를 어떻게 봐라 봐야 하는가. 연출자 안토니오니의 말이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여행자>의 잭 니콜슨 캐릭터를 '자신의 운명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자, 보도된 것을 통해 현실을 보는 남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안토니오니의 말대로라면 그는 보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현재 어떤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는 북아프리카의 게릴라군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리포터이며, 계속해서 폭력을 목도하고 그것을 유통하는 폭력의 중계자이기도 하다. 그의 시야에는 계속해서 폭력이 재현된다. 그는 오프닝의 거대한 모래 언덕에서 돌연 무장한 폭력 단체를 목격하거나, 무장단체의 총사령관을 만나 거짓된 인터뷰를 진행하거나, 숙소에서 한 남자의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하기도 한다. 앞의 질문에 연관 지어 말하자면, 그는 폭력에 잠식된 세계를 바라보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잭 니콜슨에게 폭력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일까. 주목할 점은 [잭 니콜슨 - 폭력- 세계]라는 이 관계망이, 의미심장하게도 앞서 예시로 들었던 [관객 - 푸티지 - 내러티브]의 관계망과 놀라울 만큼 그 구조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폭력과 세계' 그리고 '푸티지와 내러티브'는 각각 서로 충돌하고, -폭력은 세계를 잠식하고, 푸티지는 <여행자>의 내러티브와 불화한다- 잭 니콜슨과 관객은 그 충돌을 모두 바라보는 입장이다. 달리 말하자면, 앞서 우리가 내러티브와 불화하는 총살 푸티지를 보며, 돌연 '영화'와 '관객' 간에 낯선 거리감을 형성했던 것처럼, 잭 니콜슨 또한 세계를 잠식하는 폭력을 보며, 돌연 '세계'와, '나' 간에 아득한 거리감을 환기하는 구조인 것이다. '영화'와 '관객' 간의 거리감, 그리고 '세계'와 '잭 니콜슨' 간의 거리감. 그 거리감을 환기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며, 그것은 돌연 시선의 주체와 객체 간의 거리감을 환기하는, 세계의 소격효과와 다름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행자>의 핵심이자 구조다. 잭 니콜슨은 폭력을 보고, 처음으로 '세계'와 '나' 간의 거리감을 환기한다. 한 장면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그전까지 텔레비전 리포터 생활을 하던 그가 불현듯 신분을 바꾸고 세계로부터 도피 여정을 실행하는 순간은, 죽은 남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 본 직후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남성을 뒤집어 본 잭 니콜슨은 그 죽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그 주위에 있던 권총을 매만진다.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어떤 폭력과 죽음의 이미지. 그 후 그는 도피 여정을 떠나고, 세계 이곳저곳을 혼곤히 떠돌며 자신을 세계로부터 멀어진, 붕 뜬 상태와도 다름없게 만든다. 어쩌면 그가 질주하는 차 안에서 도망치려 했던 것은 어떤 폭력과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그는 폭력으로 잠식된 세계로부터 붕 뜬 유령과 다름없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 <여행자>의 후반부 잭 니콜슨과 여인은 호텔에서 인상 깊은 대화를 나눈다. 잭 니콜슨은 그녀에게 창문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어보고, 한 장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수술로 시력을 되찾은 직후 장님이 바라본 세상은 얼굴들, 색채들, 풍경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장님은 세상이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초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어둠으로 잠적하고 만다. 무언가를 바라본 후, 다시 그곳으로부터 멀어져 어둠으로 잠적하는 장님의 이야기. 이것은 다름 아닌 <여행자>의 주제와도 공명한다. <여행자>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그 시선의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를 돌연 낯설고 이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서로 간에 거리를 아득하게 붕 뜬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우리가 총살 푸티지를 보았을 때 느꼈던 '영화'와 '나' 사이의 이질적인 거리감, 혹은 잭 니콜슨이 폭력의 이미지를 목도했을 때 느낀 아득한 거리감. 그리고 장님이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느낀 초라한 거리감. 시선을 던지면, 어김없이 그 대상으로부터 튕겨져 나가, 세계를 홀연히 떠돌 뿐인 <여행자>의 기괴한 세계는 그런 의미에서 유령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린 <여행자>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더 총체적으로 우린 지금 세계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여행자>는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더 이상 특권일 수 없는 세계 속에서, 그 주변을 떠도는 중인 유령의 영화이다.
프링글스어드벤쳐
4.5
황량하고 메마른 곳에서 '나'의 존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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