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버닝
2018 · Mystery · Korea
2h 2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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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iveryman Jongsu is out on a job when he runs into Haemi, a girl who once lived in his neighborhood. She asks if he’d mind looking after her cat while she’s away on a trip to Africa. On her return she introduces to Jongsu an enigmatic young man named Ben, who she met during her trip. And one day Ben tells Jongsu about his most unusual hobby... [The 23rd Jeonju International Film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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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4.0
혐오스럽다 유아인 때문에 평점테러 이게 여성인권신장과 무슨 상관임? 당신네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이런거?
양기연
5.0
This may contain spoiler!!
이동진 평론가
5.0
다시금 새로운 영역으로 성큼 나아간 이창동. 지금이곳 청춘들의 고투와 분노를 다룬다는 점에서 한국적이고, 예술과 인식의 토대를 되묻는다는 점에서 근원적이다.
블루
1.5
<밀양>, <시> 다음이 이것이라니 매우 실망스럽다. 작가적인 시선이 있었다던 이창동은 약자를 전지적으로 헤아릴 수 있다는 오만함이 더 고루해졌을뿐 자의식에 반성이 없다. 그가 가련하게 내려다보는 젊은 세대에 '여성'은 없다. 자유로운 여자애처럼 묘사했지만 결국 발냄세나는 한국의 개저씨 문학처럼 존재하지 않고 사라진다. 이창동이 여성의 비극에 유난히 집착하고 남성이 죄를 짓고 속죄할때도 여성을 제물처럼 소비하는 것을 다룰때 폭력적인 묘사를 해왔지만 8년 동안 변할 줄 알았다. 언제까지 자기 연민만으로 영화를 만들 것인지? 본인 영화의 단점과 비판받는 지점을 다 아는척 자신의 영화를 다 장악한척 하는데 알면 뭐하나. 바뀌어야 나아지는거지. 버닝의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근작들도 아니고 80년대작인 '헛간을 태우다' 인것부터 망조의 조짐이 보였다. 문학을 시네마로 연출할때 더 나은 것을 보여주진 못할 망정, 현실을 민감하게 인식한 각색도 아니었다. 상황이나 대사 하나하나가 한물간 개저씨 문학인데, 이창동도 그렇고 한국남자감독들은 섹스신을 왜 그렇게 찍는지? 이젠 말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그저 한심하고 멍청해보인다. 내가 뭐하러 이런 새끼들의 영화를 보고 시간을 할애하나 부질없어질 정도로. 젊은이들의 미스테리를 그렸다는데, 호러장르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데, '아트'를 한다고 자부하는 이창동은 차마 호러는 B급 같아서 싫고 도전정신도 없었고 장르의 껍데기만 빌려온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결과물이다. 꼰대 감독은 시종일관 '젊은이들' 운운하면서 그들 분노의 대상이나 원인이 모호해서 미스테리다 그러지만, 기본으로 여자를 죽이는 것은 잊지 않는다. 영화계에서 몇십년전에 끝낸 여자를 죽여가며 성장하는 소년 서사를 구질구질하게 재현해낸 것을 해외에서 칭찬받는다고 뿌듯해하고 있다. 참담하다. 좋은 촬영은 인물(특히 여성)을 철저히 대상화하기 위한 것이며 자국의 모든 것들을 제1세계를 의식해서 가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백인남들 지들이 만들면 철퇴를 면하기 어려운 여성혐오적 서사를 야만의 제3세계 한국이란 나라의 얘기니까 맘껏 물화해서 찬사하는 것도 역겹다. 라스 폰 트리에의 신작을 혹평하면서도 버닝은 호평하는 가증스러움. 앞에선 여성운동을 지지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이딴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졸렬함과 비열함. 한국영화와 국내의 평가 다양성과 여론 수준을 저급하게 여기는 것이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평하는 집단이 한국에도 있고 늘어나고 있는데, 그런 노력들을 모른척 하거나 없을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백인남들이 배설하고 싶은 욕망만을 눈치채고 오리엔탈리즘을 기반으로 철저히 무시당한다는 것은 모른채 하청받듯이 출품작을 만들어내는 충무로 영화계. 이토록 해외 평단(백인남성들이 대부분인)을 의식한 결과물인데 한국적이고 근원적이라는 이동진의 호평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유구한 여성혐오가 한국적이라고 생각했다면 맞는 해석일수도 있겠다. 한국의 남자들이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염치없고 위험한 패악을 부리는 것을 현실이든 영화에서든 많이 보았다. 젊은 세대의 남자들일수록 패배의식을 내면화해 강자에겐 저항 대신 굴종하며 권력에 편입하려 애쓰고 상대적 약자에게 스스럼 없이 공격성을 표출해버리는 현실인데, 그 정서를 그대로 담은 것도 모자라 단죄의 자격까지 부여하는 영화를 한국의 근원이니 하면서 예술과 인식의 토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수고에 의미가 있나? 이창동과 이동진...니들에게 젊은이, 청춘은 남자의 대명사인지? 무엇보다 청춘들의 고투와 분노를 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있나? 가혹한 세상살이, 부와 권력에 대한 시선이 청년의 것을 빌릴뿐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른다. 한 사람은 영화를 만든 장본인이고 한 사람은 영화를 본 평론가니까 알 것 아닌가, 젊은이, 청춘이 아니라 중년 남성 시각으로 한국남자들 자위해주는 영화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비겁함들을 감히 헤아리기가 힘들다. 시기상 논란이 있을법한 지점에서 애매한 용어를 쓰고는 대단한 걸작을 발견한 듯이 빨간 뿔테 치켜올리며 호평하는 꼴이 한심스러워 그의 평론이 좋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후회스럽다. 감독이 몇몇 지점에서 전작과 다른 시도를 했더라도 반드시 발전이라 할수는 없고 오히려 문어체의 대사에 이미지만 추종해서 모호함의 강점보단 한계가 뚜렷한데,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갔다는 평이라니. 감독이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문학적 밀도보다 이미지를 차용하는 식으로 소비해버리고는 '미스테리에 대한 영화입니다' 같은 말을 남겼는데, 호평을 위한 과잉해석이다. 이동진이 서울 소재 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해서 영화의 상징이나 메타포 위주의 해석을 좋아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들을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다. 그를 평론의 정석이자 대표격으로 받아들이면서 영화 내 상징위주의 해석 방식, 즉 영화를 가지고 퀴즈를 풀듯이 머리싸움을 하는 방식이 팽배해졌다. 그런 영화들이 반드시 좋은 영화라고는 할 수 없는데 작품성 있는 영화의 기준이 그렇게 되버린 것이다. 이에 역기능으로 '좋은 영화'의 기준에 작품 내 인물을 소비하는 방식,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느냐, 창작자로서 메세지에 책임감이 있느냐 따위는 논의의 쟁점에서 뒤로 밀려났다. 영화에서 약자들이 어떻게 착취되건, 메세지가 시대착오적이건 이동진 취향에 맞아서 별점을 많이 주면 사람들은 비판의식이 부족한채로 받아들이고 영화 내 상징이 뭐니 해석에만 열중하면서 중요한 인본의 가치 정당성을 논하는 것에 배타적으로 반응한다. 이게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동진 평론가가 주최하는 GV는 영화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고 영화로 커뮤니케이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단비와 같은 이벤트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평론가 개인의 인기가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반작용이 생겼다. 이동진이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라는 평가에도 의문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시각이 의외로 편협하다는 것을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명료한 메세지보단 종교적 상징성과 시나리오의 장치로 비극을 선정적으로 전시해, 영화 안팎 가성비 좋은 문화오락을 제공했던 <곡성>. 어디가서 지적 충만감을 채우고자 하는이들에게 딱 이었던 영화였고. 이에 쏟아졌던 낯뜨거운 호들갑. 그 중심에 이동진이 있었고 그때처럼 버닝에서도 그 선봉장 역할을 재현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비밀은 없다>에 혹평을 가한 것은 기막힐 노릇이었으며, 영향력 있는 평론가가 폭넓은 시각이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의지해 평을 할때 어떤 폭력이 벌어지는지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비밀은 없다는 흥행에 실패했다. 여성영화에 대한 요구가 한참이었을 시기였고 이경미 감독 7년만의 신작이었다. 개봉하자마자 달린 이동진의 혹평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그가 별점을 달자 왓챠의 별점이 평균에 맞추는 것처럼 조정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남자배우들이 떼로 나오는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도 스크린을 웬만큼 점유하면 흥행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배우 주연의 여성영화는 상대적으로 남성영화만큼 흥행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비밀은 없다는 꽤 특이한 작품이다. 이동진의 혹평은 작품의 흥행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수준이었다. 정말 궁금했다. 아무리 취향이 있다지만 비밀은 없다가 그 정도의 혹평을 받을만한 작품이었는지를. 곡성 따위에 별 다섯개 줄 정도의 관대함이 왜 비밀은 없다에는 그럴 수 없었는지. 전개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판을 정리하는 시나리오의 떡밥 회수는 치밀했고 장르물로서 쾌감도 좋았다. 기존의 여성캐릭터들을 탈피한 현실적인 새로움의 연속이었는데, 그가 생각하는 여성상의 기준에선 과잉이고 자연스럽지 않았나? 평론가는 자신의 취향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생각해서라도 평론가로써의 자질을 심히 고려해보라고 하고싶었고, 그때쯤 그의 말과 글에서 자리를 떴다. 한국의 거장이라는 자들이 시대의 야만에 반성과 해답을 제시하기는 커녕 그대로 긍정하거나 권위를 부여하는 듯한 영화를 만들때,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가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고 비판없이 찬사를 보낼 때, 그동안 가치있다고 믿었던 것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p.s: 버닝이 칸에서 무관이란 소식에 이창동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는 뉴스를 봤다. 정말 어이가 없다. 칸 경쟁부문까지 진출한 것 자체가 운이 좋았다. 자축하지는 못할 망정 그 이상을 기대했었다니. 수상한 다른 작품들의 시놉시스와 이창동 당신이 만든 영화의 시놉시스를 비교해보라고 하고 싶다. 시놉만 봐도 궁금하고 흥미진진한 영화가 수두룩한데 버닝은 시놉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다 알겠더라. 어디서 발싸개같은걸 만들어놓고 분에 넘치는 성과를 바라는가. 모처럼 칸까지 가서 예술가 선생님 놀이 잘했을텐데 그걸로 만족해라. 대부분 남성평론가들로 구성된 매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곧바로 황금종려상 가능성!! 들뜬 국내언론들. 수상 가능성 제로인 고은 가지고 매년 노벨문학상 가능성 운운하는 것처럼 재미로 그런건줄 알았는데, 진심이었구나. 영화제는 심사위원단의 성향과 시류가 중요한데 국내 언론은 그런 요소들을 분석하지 않나? 여자가 심사위원이라서 상못탔다고 쌉소리하는데, 수십년간 남성 위주 심사위원단이 치하한 수많은 남성영화들은 모두 과대평가의 산물들이겠구나. 그건 또 아니라고 하겠지. 먼저 영화의 한계를 따져봐야한다. 어쩜 그렇게 영화 자체엔 문제가 없을거라고 장담하는가? 주제파악이 안되면 헛발질만 계속할뿐이다. 수상할만한 작품이라면 다양한 심사위원들의 호감도가 전반적으로 내제되어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단에 '여성이 많아서, 비평가 출신이 없고 배우들이 많아서' 상을 못탔다고 하는 것은 역으로 영화가 별로라는 것을 인증하는 꼴이다. 버닝은 심사위원 성별, 성향, 직업까지 갈거 없이 영화가 뛰어나지 않아서 못탄것이다. 매번 상을 맡겨놓은 것처럼 설레발 치는 것도 병적인 수준이다. 왜 오션스8 홍보행사에서 버닝에 대한 소감을 묻는건가? 버닝의 무관이 너무나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라 자리를 보면서 질문하는 염치가 없었나보다. 면전에서 '그 영화 좆같던데'라고 할 수 없었던 현대 시민 케이트 블란쳇이 배려하는 뜻으로 완곡하게 답변했으나 결국 속뜻은 '영화에 장점은 있으나 버닝보다 뛰어난 작품들이 있어서 무관이다'였다. 더욱이 인터뷰 원문을 보면 극찬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말귀를 못알아듣거나 알아들을 생각이 없는 국내 언론은 케이트 블란쳇이 버닝을 극찬했다며 실컷 정신승리했다. 정말이지 미개함에 창피스럽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하는가. 버닝이 도대체 뭐길래? 역대 무관인 칸출품작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었던 적이 있을까? 이쯤되면 단순히 영화가 아니고 이 이상의 무언가를 이입하는 것이다. 조국이여 남자들이여 너무 찌질하고 뒤끝 참 더럽다. 이렇게까지 떼쓰는 것처럼 형편없이 굴 필요는 없지 않나. '수상불발'이란 말도 웃긴다. 노려진 적도 없는데 뭐가 불발됬다는건지. 그동안 실력들에 비해 잘 먹고 잘 살았으면서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억울할까. 버닝의 수상여부에 유독 남자들이 거절당한 것처럼 난리치는 꼴은, 영화의 한계가 뭐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낼뿐이다. '남자가 힘들면 여자도 죽이고 그럴 수 있는거지, 그게 남자가 성장하는것'이 맘에 들었던 백인남들의 자위 속에 초청까진 했지만 심사위원단의 절반이 여성이다. 시대와 시류안에서 그들이 버닝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보고있으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좋은 점수를 받겠나? 단점을 감수할만큼 메세지가 좋은 것도, 연출이 혁명적인 수준도 아니다. 버닝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수작들도 많은데, 굳이 챙겨줘야 할 의의가 있을까? 뭐 이딴 게 경쟁에 올라왔나 싶을텐데. 작품 내 여성의 묘사 수준이 시대착오적이라 지적했더니 '공정한 심사'가 아니라고 꿍얼거리는 것 자체가 여성혐오적이라는걸 언제쯤 깨달을 것인가. 오동진 평론가는 '여성들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예술보다 일상적인걸 더 좋아해서' 라고 참 쉽게 말하던데, 영화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을 제대로 연기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의외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다. 도식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식화 한 서사를 위해 인물들이 장치로 기능하게 되는 점이다. 이런 류의 남성서사 중심의 예술영화에서 여성의 모습은 수동적인 객체, 남성서사의 매개체 촉발제, 성애의 대상쯤으로 쓰이다 마는 것이다. 철학적 관념적 예술을 한다는 수많은 남성거장들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활용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면 '여성들은 일상적인 것을 좋아해서 버닝이 무관이다' 라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을것이다. 버닝에 찬사를 했던 백인남들 중에 어떤 놈은, 버닝이 스넙되고 가버나움(레바논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 작품, 심사위원상 수상)에 종려상을 주면 심사위원장인 케이트 블란쳇의 작품 캐롤 블루레이를 태우겠다며 징징대던 놈이다. 고작 그 정도밖에 안되는 인간들이 이씨 영화가 좋다고 침 튀긴 것. 흥미로운 지점은, 백인남들은 주연배우인 유아인의 악질적인 여성혐오나 스티븐연의 전범기 긍정 및 한국인 멸시 등 영화의 외적인 것은 모를텐데, 자연스럽게도 버닝의 수상 여부와 케이트 블란쳇의 행보를 동일 선상에 두었다는 것이다. 남성 영화인들은 인종을 넘어, '더 이상 이렇게 영화 만들면 좋은 소리 못 듣겠구나, 예전엔 우리끼리 해먹을 수 있었는데 이젠 안되는구나'를 점점 의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치를 보거나 조금이라도 깨닫고 변화하는데, 이럴 수 조차 없는 부류들은 영화 안팎으로 대놓고 인종차별, 여성혐오, 사회적 약자 혐오하면서 민낯을 드러내거나 위악을 떤다. 그 와중에 버닝은 그들의 입이자 항문이었을것. 형편없는 백인남들의 지지는 역설적으로 업신여김이었다. 한국영화가 서양인들이 동아시아를 철저히 대상화 하고 배설하지 못한 욕망을 채우는 것에 기능해 온 것이다. 한국영화계는 바뀌어야 한다. 이번 수상결과를 오히려 깨달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칸영화제는 앞으로도 시대에 뒤쳐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다양성을 고려하며 심사위원단을 꾸릴 것이다. 영화를 보는 기준을 주류 담론에서 벗어나 성별, 인종, 지정학적 특성, 성정체성 등 폭넓은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남성서사를 위해 여성을 도구화하고 착취하는 것은 좋은 영화의 자격에 위배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은 이미 그렇게 변화하고 있다. 이창동은 신인이 아니다. 연출 경력이 몇십년이고 거장이란 호칭이 붙는 영화계 경력자다. 단순히 영화를 잘 만드는 단계 이상의 자신의 영화세계에 대한 반성과 성찰,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나. 종수를 자기 아바타로 삼아 또 자기연민과 자위를 할 것이 아니라, 해미를 중심으로 극의 구조를 바꿨어야 했다. 두 남자가 자신을 멋대로 대상화하는 것을 견디다 못한 해미가 행동하는 이야기를 썼다면 원작을 뛰어넘는 각색이었을 것이고 '여성 향한 한국남성의 고정관념을 그리려 했다'는 궁색한 변명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의미있는 작품이 됬을 것이다. 특유의 세계관도 좋지만 변화를 수용하지 않고 편협한 사고관을 고수하면 발전이 없을 것이고 과거의 영광만 되새김질하게 된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구태를 반복한다면 뒤안길로 물러나 추억팔이나 하는 내리막길을 마주하는 것이다.
JHs
4.5
벽에 비친 햇빛, 울음 없는 고양이, 행방이 묘연한 우물, 깨끗이 정돈된 이불과 침대. 뚜렷이 눈에 보이는 듯하지만 어느 것 하나 실체가 없다. 해미의 상실감, 벤의 공허함, 종수의 무력감. 담을 그릇도 없이 흘러넘치는 그들 감정은 하나같이 실체 없는 허울 앞에서 미끄러진다. 때 묻은 벽지에 부딪혀 난반사된 그들 감정과 분노는 누구라도 태울 준비가 되어있기에 땅에 널린 비닐하우스는 그들의 가장 손쉬운 제물이다. 기성들로부터 상실과 함께 존재론이라는 이름의 병을 물려받은 청년들. 아비로부터 헛간 방화의 원죄를 물려받은 아들은 이제 비닐하우스를 제 발로 찾아 나선다. 불투명한 비닐 너머에 제 욕망과 분노의 근원이 존재할 거라 믿고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그 비닐하우스에 라이터를 던진다. 그야말로 방화의 시대. 오늘도 텅 빈 비닐하우스는 방향을 잃은 분노 앞에서 애꿎은 얼굴을 하고 녹아내렸다. 존재론의 역병에 걸린 사람들. 실체 없는 무력감이 두려워 허수아비를 만들고, 그런 상실이 미칠 듯 견딜 수 없어 방화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잃음이 보편화된 시대에 실체의 집착을 놓고 사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지만, 상실 앞에서 체념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일까. 닿을 수 없는 대상을 손에 쥐고자 쏟아지는 저녁놀을 받들며 춤을 춘다. 가닿지 못할 무언가를 향해 두 팔을 뻗지만 이내 땅거미와 함께 가라앉는 석양빛. 몰려오는 상실감에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눈물, 위로 잦아드는 흐느낌은 다만 염세를 흩뿌릴 뿐이다.
Cinephile
3.5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청년층의 분노와 박탈감을 주된 감정으로 다룬 작품이다. 다만 영화는 단순히 경제적 격차에 따른 분노만을 직접 다루지 않고, 그 열악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청년층의 발버둥을 소설과 무언극 등 창작의 방법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호불호의 분기점은 가지지 못한 청년층의 분노를 서술하는 영화의 방법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영화는 세 명의 주인공을 주축으로 진행된다. 분노로 징역형의 위기에 놓인 아버지를 둔 상대적으로 가난한 ‘종수’,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으며 노을빛에 자신을 사라지게끔 하고 싶은 여자 ‘해미’,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기에 주변을 제물처럼 조작하는 남자 ‘벤’이 있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 지는 후술하겠지만 영화는 벤과 해미의 사이에서 어떤 극단적 선택을 하고야 만 종수의 이야기를 옮기고 있다. 모든 것을 가진 벤의 신적 유희, 그리고 모든 것이 없거나 시한부에 놓인 해미의 인간적 유희 사이에서 종수가 내린 선택은 해미의 방법론을 결국 따라가되 벤의 현실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 것이다. 앞서와 같이 이 영화를 정리하게끔 하는 주된 열쇠는 해미가 말하는 ‘무언극’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종수에게 귤을 먹는 무언극을 말하며, 귤이 정말 먹고 싶기에 실제로는 귤이 없다는 현실을 잊는 것이 여기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현실 속의 결핍을 망각하여 자신의 삶을 창작할 발판을 만드는 것이다. 이 무언극의 핵심은 주인공 3인과 영화의 미스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해미의 이 무언극의 방법론을 통해 종수가 쓰는 소설 혹은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미를 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반라로 촬영된 장면의 촬영에서 유추되듯 이 영화가 아름답게 생각하는 방법론을 체득한 사람은 해미이고, 종수는 뒤늦게 그녀의 이 방법을 비슷하게 따라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해미는 무언극, 부시맨, 우물 등 많은 이야기로 자신의 처지를 은유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이러한 이야기들은 자신의 현실 속 결핍을 망각하려는 일종의 변주된 무언극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우물 이야기는 그녀가 카드 빚 때문에 집에서 도망친 신세임에도 성형과 아프리카 여행 등을 통해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열망을 상징한다고 읽힌다. 그 이야기에서 종수는 그녀에게 구원자가 된 특별한 존재이기에, 이를 듣고 그는 해미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진다. 하지만 해미는 종수와 달리 물질적 열등감이 없기에, 타인의 도움 없이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헝거를 인식한다. 이렇게 종수가 해미를 자신의 특별한 피보호자로서 인식했지만, 해미는 종수를 특별한 동지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둘의 사랑은 결실을 보지 못한다. 해미는 그렇게 다른 도움 없이 현실 속의 자기 결핍을 스스로 불사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현실 도피로 자신을 마냥 채워나갈 수가 없다. 언젠가 카드 빚이나 가족과의 단절 등 그녀가 계속 잊으려 하는 현실의 결핍이 숨통까지 차오를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노을빛에서 자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읊조리는 것만큼은 그녀에게 거짓이 아닌 절박한 진실이다. 그녀는 약의 기운에 취해 반라의 춤을 추며, 소원대로 현실 속 자신에 대한 인식을 잠깐이나마 스스로 완전히 소거시킨다. 이후 벤의 언급대로 그녀가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것은 악행의 메타포일 수도 있지만, 세상 자체를 미스터리로 이해하는 영화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그녀의 무언극이 이미 그녀를 현실에서 충분히 멀어지게끔 만든 이상, 종수의 창녀 발언은 그녀가 궁극적으로 세상을 떠나게끔 만든 사소한 방아쇠였을 것이다. 그녀가 굳이 종수에게서 열등감을 확인하고 실망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그녀의 창작은 언젠가 그녀를 현실에서 지워버리게 되어있다. 벤은 그녀와 달리 모든 것을 가졌기에 오히려 결핍을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그에게는 결핍이 없기 때문에 소거할 것이 없고, 소거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해미처럼 절박하게 창조할 이유가 없다. 그는 해미와 종수가 느끼는 이 세상의 미스터리를 짓궂게도 그의 유희를 위해 실재하는 돌멩이 하나로 보여줄 수 있다. 또한 그에게는 창작의 작업이 아닌 직접 자신의 힘으로 주변을 ‘제물’로 만들 역량이 있다. 모든 것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적 존재이며, 본인 역시도 자신을 선택받은 신적 존재라고 여기는 듯하다. 벤의 그러한 인식은 그가 종수에게 말하듯 자신이 어디에나 있다는 동시 존재성에서 유추 가능하다. 약육강식과 같은 자연의 섭리에서 보면, 벤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만 같은 존재이고 종수처럼 버려진 비닐하우스 같은 사람들은 벤에 비하면 도태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그러한 섭리는 반드시 벤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를 통해 어디에나 자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메타포로 말한다면 벤은 정말로 어디에나 존재한다. 해당 씬에서 종수가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버려진 비닐하우스 같은 계급에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도태되지 않더라도, 종수는 언젠가 어떤 곳에서든 벤과 같은 존재들이 그에게 안기는 열패감에 의해 소거될 운명에 있다. 또한 벤에게 현실의 결핍이 없다는 점은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삶의 희열을 찾기 위해 억지로 주변을 유희의 소재로 만들게끔 하는 동기가 된다. 앞서 적었듯 그는 해미처럼 창작할 이유도 없지만, 결핍이 없기에 그녀처럼 스스로 창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벤이 말하는 해미의 실종은 정말로 그의 물리적 위력이 발휘된 살인 행위를 은유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벤의 최후를 바라본다면, 종수가 벤을 칼로 찌를 때 벤의 마지막 표정은 그가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처음으로 접한 감사함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관점에서 벤의 죽음은 창작의 바탕이 되는 결핍을 목숨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의 접근은 과거 신화들부터 줄곧 등장하는 모티프, 즉 영생하는 신적 존재가 유한한 인간의 생명을 오히려 욕망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물론 뒤에 적겠지만 이 부분은 현실이 아닌 종수의 소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빗댄 메타포 그 자체인 이 영화에서 그 진위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종수는 앞서 적은 두 인물과 이미 닮았으며, 또 한편으로 그들을 닮고 싶어 한다. 이 점은 벤에게서 그의 악취미를 들은 이후 종수가 꿈에서 어린아이의 고양된 시선으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지만, 현실에서는 그가 그 꿈과 상반된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유추될 수 있다.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옷을 태워 그녀를 지우려 한 것처럼, 꿈속의 종수는 버려진 비닐하우스 같은 자신의 현실 또는 비슷한 처지의 타인을 벤처럼 우월한 지위에서 소거시키고 싶은 본능을 지녔다. 하지만 현실의 종수는 막상 잠에서 깬 이후, 주변의 버려진 비닐하우스의 상태를 확인하려 할 뿐이다. 이는 벤과 나눈 대화에서 화를 낸 이유처럼, 종수는 현실 속의 자신이 해미처럼 버려진 열등한 계급의 일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버려진 비닐하우스에 라이터로 불을 지펴 보다가 금방 불씨를 꺼버리는데, 이는 아직 해미와 벤 사이에서 삶의 방법을 택하지 못한 종수의 이중적 위치를 나타낸다. 이처럼 종수는 계급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힌 인물이지만, 이 영화에서 종수는 그러한 인물상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달리 지극히 평범한 동기로 움직인다. 적어도 초반에 그가 해미에게 집착하게 되는 계기는 우물 이야기에서 자신이 그녀의 구원자라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섹스에 어설픈 모습으로 유추되듯, 그가 경험이 없는 편인 가운데 해미와 섹스를 했다는 쾌감이 오히려 주된 동기에 가깝다. 영화는 해미와 종수의 섹스에 찰나의 햇빛을 허락하며 그 특별한 의미를 강조한다. 따라서 해미와 함께 케냐에서 찾아온 벤에게 종수는 자연스럽게 열등감을 느낀다. 벤은 시작부터 종수의 트럭 안에서 그의 어머니와 통화하며, 집 나간 어머니를 둔 종수의 심기를 건드린다. 노는 것이 직업이라는 벤이지만, 식당 밖에서 종수는 자신의 트럭과 비교되는 스포츠카를 보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벤과 부유한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해미를 보고 클럽을 나오는 종수의 심경은 비록 우스꽝스럽고 구슬픈 송아지 동요로 대변된다. 종수는 벤에게 그나마 자신이 소설가 지망생이라고 일말의 자존심을 밝히지만, 사실 비슷한 처지의 해미와 달리 그는 최소한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창작할 줄 모른다. 그는 결핍을 모르는 벤과 다른 위치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미처럼 현실을 '스스로' 망각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종수에게 현실은 스스로 잊기에 너무나 무거운 존재이다. 종수는 당장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탄원서를 받아야 하며 자신에게 남겨진 소 한 마리도 대신 키워야 한다. 집안의 사진들로 유추되듯 그의 아버지는 한국 현대사의 풍파 속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아마도 자존심의 상처로 욱하여 공무원을 폭행했고 그로 인해 징역형을 살 위기에 놓인 인물이다. 아버지의 처지도 억울하고 무거운데, 불공정해 보이는 세상의 작동 원리도 종수에게는 너무 납득하기가 어렵다. 종수 부자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세상에 굽힐 줄 모른다는 이유로 자존심이 있거나 고집이 세다고 불린다. 그런데 그 세상은 청년 실업이 만연하고 물류센터 알바부터 군대처럼 부당하게 돌아가는 곳이다. 종수 아버지는 강남에 투자하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고 그 지경에 왔으며, 계급 갈등이 담긴 용산 참사는 벤의 가족이 우아하게 식사하는 배경에 불과한 곳이 이 세상이다. 그러한 현실이기에 종수는 자연스레 벤에게서 열등감을 느끼고, 점차 자기가 처한 현실을 해미처럼 망각하려 들기 시작한다. 종수의 꿈에서 그가 저수지의 벤 뒤로 언덕 아래에서 슬며시 서는 모습은 이를 나타낸다. 현실에서 열심히 인생을 산 아버지와 자신은 그 지경에 있는데, 이 노는 것이 직업이라는 벤은 재력과 교양 그리고 화목한 가정까지 지녔고 자기가 사랑한 해미도 만나는 남자이다. 이러한 그의 계급적 열패감은 해미의 실종을 기점으로 폭발한다. 종수에게 해미는 그가 우물에서 구원해야 할 여자이고, 그녀는 벤의 언급대로 종수가 유일하게 벤보다 우위에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따라서 그는 해미의 실종이 벤과 연관이 있다는 집착적인 확신으로 그를 미행한다. 소설가를 지망하는 종수는 벤을 미행하며 자신만의 소설, 즉 벤이 살인범이고 자신이 해미의 복수를 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는 해미의 동료가 찬 같은 모델의 시계와 우물 이야기에 대한 서로 다른 증언을 보여주며, 종수의 이 소설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넌지시 말한다. 특히 이 시점에서 보이지 않던 고양이가 종수에게 보인 듯한 영화의 연출은 종수가 바라보는 사실이 그가 쓴 소설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반부 현실에 매몰되어 있던 종수는 전적으로 해미의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망각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고양이의 부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그에게 고양이는 해미 말대로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시선에서 그때의 종수는 아직 창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에 반해 후반의 종수는 이미 우물 이야기 등을 통해 해미의 말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선 상태이다. 게다가 고양이를 벤의 집 주차장에서 발견할 때, 종수는 그의 화장실에서 해미에게 선물한 같은 종류의 시계를 먼저 보았다. 종수는 벤을 살인범으로 그리는 소설을 쓰고 있었기에, 벤이 해미를 죽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생각은 그의 머리에서 잊혔다. 그러한 현실의 망각이 갖춰졌기에 종수의 소설은 창작될 수가 있고, 이를 따르는 영화의 시선에서 그 고양이는 종수에게 보여야만 하며 이름은 '보일이'가 되어야만 한다. 또한 해미가 말한 우물의 진위 역시도 고양이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 종수의 어머니는 염치 없이도 그에게 돈을 말하려고 오랜 시간 후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비록 마른 우물이지만 그에게 우물은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해미의 어머니는 종수의 어머니와 달리 우물이 없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해미의 어머니가 우물을 부정한 것은 그녀가 해미처럼 창작으로 현실을 탈출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하며 초반부의 종수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하다면 종수의 어머니는 해미처럼 거짓을 창작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돈 얘기도 어떤 창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부터 이 부분은 종수가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쓰고 있는 소설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이로써 현실과 괴리된 분노로 가득한 종수는 해미의 무언극처럼 자기 뜻대로 이뤄질 궁극적인 창작을 도모한다. 그의 아버지도 이미 징역형을 선고받고 그를 떠났으며, 남은 소 한 마리도 팔아버렸기에 종수를 현실에 묶어 둘 제약은 남아있지 않다. 여기서 영화는 해미의 방에서 마지막으로 소설을 쓰는 종수의 모습을 비춘 이후, 벤이 새 여자를 제물에 걸맞게 화장시키는 모습과 종수에게 소거되는 벤의 최후를 비춘다. 장면들 사이 몽타주를 생각하면 벤의 최후가 현실인지 아니면 종수의 소설 속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는 영화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종수의 이 결정은 해미를 매개로 한 그의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앞서 적은대로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벤이 가진 그 관념의 반대편에서 종수가 가지게 된 저항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종수는 앞서와 같은 뜻으로 현실 혹은 소설에서 자신의 열등감을 상기시키는 벤을 살해하고 불태운다. 그는 벤의 위력에 한편으로 감화되는 본능을 지녔지만, 결국 벤과 그의 계급적 상징인 스포츠카를 불길에 소거시키며 전라의 상태로 해미의 방법을 따라간다. 여기서 종수가 전라인 것은 자연에서 스스로 사라진 반라의 해미와 달리, 종수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열등감의 원천인 타인을 소거시키는 극단적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즉 종수의 동기는 남에 대한 계급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는 상대적 격차를 상기시키는 자신의 모든 옷을 태워야 열패감을 모두 잊고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종수는 자신의 깊은 열등감만큼 극단적인 방법의 망각을 택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뜻대로 삶을 창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트럭 창문에 서린 김으로 가려진 그의 모습은 이 창작 역시도 해미처럼 그를 점차 현실에서 지울 것임을 불길하게 암시한다. 종수의 최종 선택은 결국 그의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숙명처럼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수의 이 마지막 선택에 관해 좀 더 생각하면, 그의 결말은 해미의 방법을 지향하면서도 벤이 지배하는 현실에 남아서 저항의 창작을 이어가는 나름 중도적인 방법을 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결말은 본능보다는 경제적 계급의 연대를 택하겠다는 일종의 정치성을 창작에서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감독 개인의 실제 정치적 경력과도 일맥상통하는 흥미로운 선택이다. 즉 영화의 결말은 세계를 직접 조작하는 재력과 권력 등의 위력에 이끌리는 평범한 인간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계급적 연대를 택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예술적 방법이 지닌 정치성을 부정하지 않는 감독의 태도를 보여준다. 세상에 굽히지 않는다는 종수 부자의 자존심은 곧 감독 본인의 예술적인 자존심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설명한 것과 같이 이 영화의 겹겹이 쌓은 메타포들과 참조들, 그리고 그것들을 한곳에 모두 모으고도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나로서는 사뭇 당연하게 칭찬할 수 있으면서도 또한 한편으로는 이 영화의 그 방법론 자체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수많은 메타포로 가득하단 것은 이 영화가 명목상 다루고자 했던 어떤 저항적인 정서의 전달이란 목적에 치중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방법론에 새겨진 지식인의 유희에 작가가 더욱 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앞서 적었듯이 이 영화의 주된 감정은 젊은 세대, 특히 종수처럼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속한 젊은이들이 지닌 분노와 박탈감이라고 할 것이다. 그 절망에 대한 반응으로 영화는 ‘없다는 사실을 잊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미처럼 현실에서 완전히 도피하거나 혹은 종수처럼 현실적 고려 없이 세상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한다. 즉 영화가 제공하는 젊은 세대의 구원론은 애초에 없다고도 할 수 있으며,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덧없고 절망적인 방법들밖에 없다. 곧 이 영화를 통해서 젊은 계층은 종수가 벤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현실에 실존하는 박탈감을 상기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영화 속 비유로 말하자면, 관객은 자기 귤이 없다는 점을 강하게 상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후 귤의 창작은 정작 현실에 통용 불가능할 절망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관객의 그 박탈감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무언극 등 수많은 메타포의 표현 수단들을 활용한다. 관객은 눈앞의 장면이 현실인지 메타포인지 양자택일의 해석 과제를 단계마다 부과받는다. 그러나 그 수많은 메타포의 표현 형태를 해석하는 일은 보통의 대중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주지 못하는 어떤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특히 이 영화가 공감하려는 현실 속 보통의 사람들은 이 영화의 분노와 박탈감에는 바로 공감할 수 있지만, 다량의 메타포는 이들에게 해석 과제를 빈번하게 부과하며 이들이 오히려 그 감정에 직면하는 과정을 방해한다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 지난한 해석 과정을 거쳐 관객이 도착할 종착지는 정작 현실을 버티는 사람들이 잊고 싶은 극도의 박탈감을 상기하는 슬픔이다. 그렇다면 이 다량의 메타포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의문스럽기도 하다. 진정 젊은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이해한다고 믿는 성인의 지적 유희인지 말이다. 특히 영화는 여자의 나체와 섹스를 다소 낡은 예술적 선택임에도 굳이 영화의 아름다운 상징으로 채택하고, 부시맨이나 무언극 등 현재 대한민국의 실제 20대가 즐겨 사용하지 않을 이질적인 은유들과 함께 어색한 문어체 대사들을 남용한다. 또한 여성 인물의 사용도 영화에서의 그 역할과 기능을 생각하면, 감독에게 과거에도 비슷한 이유로 가해졌던 그 비판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영화의 이처럼 아쉬운 접근을 생각하면, 현재 젊은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이 영화가 이 시대의 젊은 계층에게 얼마나 진정으로 공감하려 했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나아가 영화의 근본적인 관점에도 필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 영화의 세계관은 영화 안에서 짙게 보여진 사회적 계급 사이의 여러 갈등 등에 비추어 보면, 감독의 사회적인 예술론이 이 영화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거기서 한국의 청춘은 카드 빚을 내면서도 거액을 들여 아프리카는 꼭 가야만 하는 현실 도피의 여인이거나, 자신에게 계급적 열패감을 상기시키는 부르주아를 불길에 소거시키는 분노한 남성이다. 게다가 그 남성은 숙명처럼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는 점에서 구원의 여지도 없다. 영화가 말하는 개인의 자존심을 보존한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 젊은이들은 혁명하거나 아니면 사라지거나의 기로에 있다. 둘 다 거부한다면 그들은 영화 속 변호사처럼 자존심을 자연스레 굽힐 줄 알아야 하며, 이는 이 영화의 시선에서는 부끄러운 평가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여건에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는 현실을 망각하여 얻게 되는 일시적 구원만이 존재한다고 영화처럼 말할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다. 과연 그 현실에서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예컨대 마이크 리 감독의 경우처럼 노동자 계급의 결핍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일을 경시하지 않는 여러 사회적 영화를 얼마든지 상기할 수도 있다. 감독의 세계관에서 시상은 시인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직접 찾아가야 하는 행동의 문제이다. 하지만 시상은 시인에게 직접 찾아올 수도 있으며, 시상을 찾으러 다니지 못할 현실의 시인이 앉은 자리에서도 시상은 허용된다. 그 취지로 생각건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염세적 세계관은 진정으로 현실을 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감을 갖고서 현상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는 누군가의 예술적 야망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만약 그렇다면 설사 완성도가 뛰어나도 스크린 밖의 현실을 사는 사람들을 위하는 영화가 되진 못하는 것이다.
메뚜리언
4.0
세상이 수수께끼같다던 청춘은, 수수께끼 속에 갇혀 활활 타버렸다.
이상원
4.5
1. 이창동 감독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2. 개인적으로 힘이 들어간 유아인의 연기도 좋게 봤지만(특히 육룡이나르샤), 힘뺀 유아인의 연기는 더욱 엄청나다 3. 65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젊고 감각적인 영화까지 만들수 있다는 그의 한계에 그저 놀랍다. 4. 149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이끌어가는 몰입도에는 연출과 음악, 연기 등 여러 영화적요소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상당수의 것들이 모두 뒷받침이된것같다. 그만큼 정성스럽고 영화가 도달할수있는 깊이까지에 이른다 5. 사람마다 해석하기에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결말이 매우 흥미로웠다. 음악과 엔딩역시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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