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stalgia



The Russian poet Andrei Gorchakov, accompanied by guide and translator Eugenia, is traveling through Italy researching the life of an 18th-century Russian composer. In an ancient spa town, he meets the lunatic Domenico, who years earlier had imprisoned his own family in his house for seven years to save them from the evils of the world. Seeing some deep truth in Domenico's act, Andrei becomes drawn to him. In a series of dreams, the poet's nostalgia for his homeland and his longing for his wife, his ambivalent feelings for Eugenia and Italy, and his sense of kinship with Domenico become intertw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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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quiem: Kyrie

交響曲 第9番 ニ短調 作品125 《合唱》 IV- Presto - Allegro assai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 "Choral" / 4.: Presto - "O Freunde, nicht diese Töne!" - Allegro assai

Requiem: Kyrie

Requiem: Kyrie


Seinewol
5.0
1. 짙은 안개 영화의 시작은 매우 어둡습니다. 사실상 스크린은 흑백에 가까운 상태로 영화는 시작돼요. 안개 역시 매우 짙어서 앞이 안 보입니다. 그리고 자동차 한 대. 아마 이맘때의 자동차는 매우 귀했고, 물질문명의 상징 같은 것 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안드레이는 통역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세상의 땅들은 지리멸렬하게 분절되어있고 언어나 문화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도의 연대도, 언어적인 소통도 방해하고 인간사회를 황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제니아 같은 나와 세상을 이어줄 타자의 존재가 필요하지요. 그의 말마따나 혼자서 아무리 좋은 풍경을 본다 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유제니아. 그녀가 들어선 성당은 아크로폴리스 양식의 성당입니다. 철학이란 존재로서의 여진을 경감시켜 줄 수단이 있었던 아테네와 아테네 당대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인 아크로폴리스. 그리고 그 안에 인본주의 사회의 축인 기독교적 공간이 오롯이 존재하고 있죠. 여기서 거멓던 화면은 색을 되찾습니다. 아마 자신을 희생하여 가열차게 타오름으로서 주변을 통촉하는 위대한 촛불 덕분일 것입니다. 기독교적 공간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번민이 없습니다. 거대한 신적 존재에게 기대고 그에게 무릎 꿇으며 복속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유제니아도 그 외경스런 존재 앞에 무릎 꿇기를 신자에게 권유받지만 그 역시도 물질문명에 전신을 담고 사람이라 그런지 역시나 거부합니다. 아크로폴리스 양식의 공간 안에서 촛불은 매 순간 매 순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타오르고 있고, '불'로서 촛불이 주위를 밝히는 기본적인 원리는 자기 회생이며, 그 타자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을 위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무거운 양초더미를 짊어지고, 때로는 본인이 양초 그 자체가 되기를 마다치 않는 게 인본사회적인 신앙이죠. 2. 향수 - 안드레이 신앙의 공간에서 타오르는 촛불을 마주 보고 있던 깃털은 안드레이 쪽으로 날아가고 차디찬 물에 나앉아요. 물은 환원주의. 태초의 과학적 추론 그리고 근대적인 이성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에 나앉은 깃털의 현시를 그저 응시하고 있다 카메라는 한 나지막한 공간으로 고개를 돌리고 안드레이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공간으로부터 향수를 느껴요. 세상은 파편화 되었고, 사람은 본인이 밟고 있는 땅이 고국의 땅이 아닌 이상에야 낯섦을 느낍니다. 유제니아에게 러시이든 안드레이의 이탈리아든 간에 낯섦은 평이하게 작용해요. 가엾게도 유제니아와 안드레이 그리고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언어라는 근소한 차이로 서로가 속한 고국에 대하여. 알기 위해선 서로의 나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경계가, 그러니까 국경이 없어져야 한다고 안드레이는 말합니다. 밀리노에서 한 가정부가 주인의 집이 향수를 일으킨단 이유로 불을 지릅니다. "음악가인 소스노프스키는 노예가 될 줄 뻔히 알면서 왜 고국으로 돌아갔을까요?" 그는 노예 생활의 공포보다 황량한 세상에서 고국 없이, 의지할 데 없이 역력히 번들거리는 존재로 부유한다는 게 더 싫었다는걸. 더 끔찍했다는 걸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그에 대한 문답으로 안드레이는 소스노프스키 편지를 건네줍니다. 책이나 영화나 이런 정제된 것들은 분절된 황량한 세상에서 끊어진 연대의식을 이어 부쳐주는 국경을 초월한 하나의 매개입니다. <부다페스트호텔>에서의 주제의식처럼요. 그리고 소스노스프스키는 고국으로 돌아가서도 결국 자살을 하는데, 이건 영화의 공통된 주제의식 입니다. 상연 초반부, 흘러가는 프레임 사이사이에 백미처럼 흑백의 프레임이 현시/제시 되고 이 프레임 안에 있는 나지막한 오두막은 아까 전 깃털만을 응시하던 안드레이의 시선이 옮겨간 나지막한 오두막입니다. 여기로 향수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 공간은 어떤 물체로서 그의 고국을 상징하기도 하고 또 신앙적 공간을 상징하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그렇게 타국에서 둘이 묵게 된 호텔 안드레이의 객실 장롱 안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그가 느끼는 아릿한 향수에서 그를 구원해줄 성스런 책이자 아련하게 그리운 신앙중심의 사회로의 회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정작 그 성경 안에는 너절한 빗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가 한갓 빗의 거푸집으로 변한 사회라는 걸 보여주려고 카메라는 몇 분 동안이나 추례하게 닳아빠진 성경을 골똘히 응시하지요. 그의 객실엔 창문과 화장실이 있죠. 화장실에 들어갈 땐 전등 스위치의 자리를 헷갈려 아마 안드레이가 있던 고국의, 고장의 화장실의 전등 스위치는 분명 거기 있었겠죠. 하지만 고국을 떠나 낯선 곳이기 때문에 점지할 자리를 헤매고 창문에선 물이 쏟아집니다. 화장실은 고국으로의 향수를. 그리고 창문은 인간이 느끼는 숨길 수밖에 없는 신앙사회로의 그리움을 시각화하는 영화의 장치입니다. 물줄기는 거세지고 결국 물은 방의 땅까지 침범해버리죠. 화장실에선 그가 그토록 그곳으로 회귀하고 추억하는 흑백 장소에 있던 개가 현현하고, 그 개를 만지면서 그제야 안드레이는 잠이 들지만 꿈에서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고국에 있는 그 오두막, 그 여자, 그 개, 그 아이에 대한 향수는 점점 내면에서 짙어져만 가고 있는 상태예요. 이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의 상시 빌리테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인생사에서 전승되어 내려져 옵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1979년 조국으로부터 추방당합니다. 그리고 낯설고 이방인이 된 것만 같은 공간에서는 인간 존재의 태곳적인 불안함뿐만 아니라 존재의 지리적 근원이 멸시당한 영혼은 필시 병들어 가고 영적으로 서서히 사멸되어 간다는 걸 영화로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스노스프스키는 이 마을 처녀와 결혼했지만, 고국에 있는 여자를 사모하다 죽었대요" 그들이 탐구하던 음악가 소스노스프스키도 이방인으로서 사랑으로 살아가려 노력하였으나, 개인의 상시 빌리테는 지리적 고국의 사람들과의 망탈리테와 완전히 단절될 순 없다는걸, 고국으로의 향수는 유폐될 수 없고 영구히 지속한다는 걸.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마을 사람들의 입을 빌려 다시 한 번 강조하려 합니다. 3. 향수 - 도메니코 그러던 중 도메니코라는 한 연로한 노인이 등장해요. 잘 보면 그 초로의 노인은 안드레이가 염원하던 공간에 존재하던 강아지를 키웁니다. 여기서 그 안드레이의 강아지가 도메니코에게 실존한다는 건 안드레이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향수만큼은 노인에게 없다는 뜻입니다. 오두막 앞에 있는 나무와 비슷한 고목도 역시 존재하죠. 당연히도 그는 본인의 조국에서 나고 자랐고 아직도 본인의 고국에 현존하는 사람이니요. 하지만 그 노인은 연로하였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누구보다 인간 내면에 상주하는 존재적 불안과 근원에 대한 불안으로 늘 번들거립니다. 그래서 세계가 종말 할 것이라 믿습니다. (종말이란 예수의 예수 재림). 만물은 물이라는 최초의 근대-과학적 추론에 밑바탕을 둔, 물질세계에 근원을 두고 있는 사람들만 마을의 온천'물'에 전신을 담급니다. 어이없게도 그들이 온천을 즐기는 이유는 속세에서의 생명을 영원히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마을 중심의 온천은 물질적 근대세계에 대한 적나라한 은유 입니다. 그러나 도메니코는 발만을 담그고 족욕만을 즐깁니다. 마을 주민과 확실하게 대비되어 온천물에 발만을 담구었다, 얼마안가 발을 다시 빼버립니다. 물질중심 세계에 대한 거부, 그리고 신앙사회로의 향수 때문에 그렇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외로 이따금 하면 도메니코는 촛불을 가지고서 마을의 온천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촛불은 자신을 희생하여 주변을 밝히는 이타적인 물체자 신앙정신 자기희생 정신이고, 도메니코는 그런 것을 물질문명으로 전이하려고 하는거죠. 결론적으로 안드레이의 향수와 도메니코의 향수는 같으면서도 또 본질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드레이가 겪는 향수는 고국을 향한, 공간을 향한. 그 그립고 안온한 오두막을 향한 공간-적 향수지만 도메니코가 겪는 향수는 이미 기화되고 마모되어버린 이전 시간 선에 관한, 시간-적인 그리고 신앙-적 향수이며 향수는 곧 존재적 불안을 유발합니다. 4. 두 촛불의 공명 안드레이는 도메니코에게 기이한 끌림을 느껴요. 그래서 안드레이는 도메니코에게 찾아가죠. 그의 통역사인 유제니아가 도메니코에게 말을 걸자 같은 고국의 사람임에도 둘은 엇갈립니다. 그 답답함에 안드레이는 도메니코에게 직접 말을 거는데, 그 순간 둘은 공명하고 늘 앓이 하는 본인과, 분절된 타자 세계를 이어주는 유제니아는 이 안드레이와 도메니코. 서로 향수를 가진 두 인물이 공명하는 영화-적 공간에서 완전히 배제되어버립니다. 존재의 필요를 잃어요. 서로의 존재적 불안함으로 공명한 이상, 언어와 가시 덩굴 서린 국경의 서늘함 따윈 한순간에 깨져버리기 때문에 '통역사'는 기표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거예요. 도메니코의 집의 풍광과 베토벤의 장중함이 안드레이를 사로잡습니다. 외부의 가치가 혼재한 세계로부터 독립된 도메니코의 외부로의 피난처. 영혼을 쇠로 하게 만들고 부식시키는 물질사회의 횡일 하는 파도로부터 몸을 피하는 곳입니다. 거기서는 안드레이의 객실에서 창문으로부터 쏟아져 바닥과 영혼을 젖히던 거센 '물줄기'도 병과 대야로 받아내고 있으며, 촛불 역시 짙은 어둠이 산개된 모든 스크린안의 영화적 공간의 존재하는 색들중, 가장 강렬한 색으로 타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그 공간의 풍토와 그 신비로운 기연에서 부식된 안드레이의 영혼은 성령으로 한번 씻겨나가고 인간 내면의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안드레이는 도메니코가 건넨 성스러운 기독교적 상징인 촛불을 받아들이고 본인이 촛불 됨을 수용함으로써 그르게 쌓인 인간사회의 그릇된 층계를 무너트리고 안드레이라는 인간에 의해, 사람들의 세상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또 그 밑단부터 다시 켜켜이 쌓아나가야겠죠. 5. 구원 사람들의 세상은 구원받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두 촛불로요. 노아의 홍수에 의해 물에 잠겨버린 것만 같은 사회는 두 촛불을 들고 물을 건넘으로써 구원할 수 있다고 도메니코 말해요. 중요한 건 촛불입니다. 본인을 불사르는 희생정신. 타인을 생각하는 이타적임 같은 최고선에 한없이 가까운 인간적인 감정들로 냉기가 서려 있는 물질문명 사회는 다시 한번 타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거지요. 도메니코와 공명한 시점 유제니아와의 관계는 깨져버립니다. 타자들의 세계와 멀어지고 더 없이 진실에 가까운 광인들의 세계, 내면적 세계에 인접한 그는 완연하게 주변들과 멀어져 가요. 그리고 도메니코가 촛불을 태워 본인에게 기름을 들이붓고 속절없이 사멸하기 직전임에도 사람들은 냉소하는데, 현대사회와 아주 닮아있는 초상입니다. 도메니코의 육신은 촛불로서 타오르고 안드레이도 촛불을 켠 채로 강을 이리저리 왕래하는 장면을 카메라는 '9분간'의 롱테이크로 촬영하고 도메니코와 안드레이 둘 다 사람세상의 구원을 위해 희생합니다. 그 다음 영화는 한 장소를 비추는데, 신앙적 건축물 안에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나지막한 오두막이 있습니다. 아마 그는 거기서 영원히 안식을 취하겠죠. 신앙적, 공간적 결여가 없는 영성이 가득 찬 공간인 동시에 현실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비경이니까요. 자기 자신을 불 지름으로써 아이러니하게 본인은 구원받지만, 세상은 크게 변한 거 같지 않습니다. 아마 세상의 반향은 영화 안이 아니라, 영화 밖의 실재하는 현실 공간에서 현현해야 한다고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생각했을 겁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감독입니다. 여러 거장에게 칭송받는 감독이기도 하며, 그저 영상으로 시를 써내려가는 시인이자 단지 영상으로 미학적 그림을 그려나가는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는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그려낸 인간영혼의 풍경화!!" 라는 말이 제일 그의 성향과 그의 영화에 제일로 합치되는 부연 설명이겠지요. 새 피아톤으로 그려낸 음울한 영화의 화면이나, 여러 상징으로 인간 내면과 외로운 영혼을 현대에 비춰 보이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STONE
5.0
자유로운 예술을 갈망하더라도 결국엔 향수병에 사로잡힐 운명이라면, 외부의 이념으로부터 눈 돌려서 내면의 촛불을 밝혀본다.
Jay Oh
4.5
고독과 상실감에 뒤돌아 걸어보아도 희뿌옇게 드리운 안개 너머로 도달하지 못할 듯이. 인내를 갖고 경계를 오가는 불씨를 지켜본다. A dreamlike elegy for the bygone. + 그렇게 1+1이 위대한 1이 되었다. + 이 영화를 보다 보면 타르코프스키에게서 영화감독 말고 화가의 포스도 느껴지는 듯.
볶음너구리
5.0
어제들로 이루어진 오늘이 꿈꾸는, 내일을 향한 갈망.
Sloth K
5.0
신이시여, 왜 인간에게 뒤를 바라보게 하시곤 어째서 앞으로밖에 가질 못하게 하셨나이까
Cinephile
4.5
정치 사상이 개인을 압도한 냉전에서 향수병은 연출자의 고국을 향한 그리움이자, 또한 신에서 개인으로 세계관이 회귀한 이태리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향한 그리움이다. 개인이 도구를 자처하는 현실 정치에서 그 복고를 외치는건 숭고한 광인뿐이다.
남연우
2.5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영상 시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확실히 알겠지만 나에게 아직은 너무 힘들다...
샌드
5.0
어느 한 영화를 고르기도 어렵고 한 장면을 뽑기도 어려운 게 타르코프스키 필모인데, 이 영화 역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한 걸작이였습니다. 마치 영화를 위해 위대한 장면을 만들고, 장면을 위해 위대한 영화를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장면 하나하나가 주는 인상이나 느낌들이 상당했습니다. 느린 템포나 철학적인 말들이나 사실 어떻게 받아들이기 참 어렵긴 한데도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압도하는 면도 있었고, 이외에 영화의 수많은 부분들 역시 굉 장했습니다. 완성도 자체가 너무 뛰어나 머리에 남는 것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 게 타르코프스키 영화들인데도 그 인상 자체가 그의 영화를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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