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5.0두 세계를 여닫는 문에 심은 꽃 한 송이 (#스포일러 주의) - 참 간단명료한 이야기다. 실수로 친구의 공책을 자신의 집에 가져온 어린아이가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는 이 간단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다. 영화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보여주며 관객과 함께 경청한다. 오직 어린아이들의 눈망울, 발걸음,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순진무구한 행보에서 오염되지 않은 어떤 순수함의 결정체를 찍는다. 이 순수 결정체는 단지 영화에 어린아이가 등장하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는 순수함을 조명할 뿐이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여서 순수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니까 찾을 수 있는 순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무심해 보이는 세상의 풍경에서 어린아이의 발걸음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더없이 순수함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비 전문 배우와 현지 로케이션, 자연광을 적극 활용하여 다큐멘터리의 연출 방식을 사용한다. 꾸미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세속적인 풍경들은 현장감을 자아내며 진실성을 준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의 형식이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극영화의 형식과 묘하게 조화하는 이 영화는 달리 말하면 세상과 영화를 함께 포개어 놓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다. 세상과 영화, 영화와 세상이라는 이 두 개의 세계는 영화 내러티브 측면에서도 이어진다. 어른과 아이, 마을과 마을이라는 시간과 공간적인 성질을 토대로 두 개의 세계로 뚜렷이 분할된다. 만약 순수함이 존재한다면,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숨어 있지 않을까. 한 세계만 보아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을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두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관찰하다가 우리가 지향해야할 순수함을 포착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두 세계의 소통과 교류의 상징을 문과 창문, 지그재그 모습의 길과 같은 방식으로 함의한다. - 영화의 첫 번째 쇼트. 문이 보인다. 문 너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흔들린다. 언뜻 보면 문이 닫혀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문이 조금 열려 있다. 그 때 한 어른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열고 들어간다. 다음 숏은 문 너머의 공간인 교실을 보여주며 어른과 아이가 각각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린아이의 세계에 문을 열고 입장한 어른은 교실에서 가장 먼저 창문과 문을 닫는다. 두 세계의 단절된 소통을 첫 장면에서의 닫힌 문과 창문으로 암시한다. 이후에 계속되는 소통 불가능은 예정된 일이었다. 선생님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 아이들을 엄하게 교육한다. 혼이나 울음을 터뜨리고 만 아이에게 선생님은 이유를 물으며 꾸중한다. 하지만 아이의 눈높이와 심정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그 답을 듣지 못한다. 아이는 선생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꾸하지 않는다. - 영화에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두 세계를 단절시키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문이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른들은 권위적이며 아이들의 세계를 존중하지 않고, 아이들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할 정도로 어른들의 세계에서 무력하다. 벽에 대고 메아리 치는것처럼 원활하지 못한 대화의 흐름은 영화 내내 지속된다. 주인공 아마드의 엄마는 친구에게 공책을 돌려줘야 한다는 아마드의 말을 빨리 숙제를 하라는 대답으로 일갈한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이웃집 아이와 아마드를 비교하면서 더욱 강하게 나무란다. 아마드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할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꼰대' 같은 설교를 늘어놓는다. 줄곧 아마드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할아버지의 대화 앞에서 멈추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언뜻 보면 이 장면은 마치 할아버지가 카메라 앞에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구세대가 스스로 자신의 부정적인 행동을 자백하게끔 하여 잘못된 과거를 후대에 전가하려는 행위를 끊고자 하는 감독의 생각이 엿보인다. 어른과 아이의 두 세계의 거리는 좀체 좁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먼 동네인 포쉬테 마을은 또 다른 세계다. 포쉬테 마을은 영화 내에서 공간적으로 분리된 장소로 아마드의 마을과 포쉬테 마을은 물리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세계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친구를 위해 길을 밟으며 건너가는 아마드의 모습은 세계 사이를 소통하려는 노력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카메라는 마을과 마을을 건너는 과정을 친절하게 총 세 번이나 반복해서 보여준다. 풀숲을 헤쳐가는 모습과 지그재그로 된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산을 넘는 아마드의 모습을 멀찍이서 롱테이크로 계속 응시한다. 포쉬테 마을은 먼 곳이라며 어른들은 기피했던 세계를 오가는 아마드는 매우 힘겨울지도 모른다. 아마드의 숙제는 어쩌면 어른과 아이, 마을과 마을이라는 두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 포쉬테 마을에 밤은 찾아오고 아마드는 결국 친구 네마자떼의 집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가 관심 가져 계속 응시했던 것은 목적의 성취나 달성 같은 것이 아니다. 길을 오가는 과정, 이웃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모습, 친구에게 공책을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는 순수한 미안감. 그러니까 영화는 한 어린아이의 소우주가 겪는 천방지축한 과정에 계속 관심을 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늦은 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부른 외침에 창문을 연 한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유의미할 테다. 할아버지와 아마드의 만남은 영화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이뤄진 어른과 아이의 만남이다. 노쇠한 할아버지는 과거에 마을 주민들의 집 문을 제작하던 사람이었다. 요즘은 마을의 집 문이 다 철문으로 바뀐다는 사실에 할아버지는 낙담하고 있었다. 철문은 그 자체로 단단하고 견고하다. 하지만 철문은 안에서 닫으면 밖에서는 절대 열 수 없으며 동시에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곧 공동체가 남과 남으로 단절된 관계가 될 것임을 담지한다. 삭막한 현 사회를 보면 이 안타까운 미래는 점차 가속화되고 있다. 아마드는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온다. - 허락 없이 집을 나갔다가 늦은 시간에 돌아왔음에도 아마드의 부모님은 아마드를 혼내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는 배고플 테니 밥을 먹으라며 걱정한다. 두 세계의 거리가 좁혀진 것일까? 방에서 뒤늦은 숙제를 하던 아마드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바람이 강하게 들어오는 것이다. 열린 문과 들어온 바람은 두 세계의 소통을 강렬히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날 아침, 학교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와 창문을 열고 숙제를 검사한다. 공책을 잃어버린 네마자떼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아마드는 뒤늦게 교실에 들어와 네마자떼의 옆에 앉는다. 숙제를 대신 해왔다는 아마드의 말. 공책에는 꽃 한 송이가 놓여있다. 꽃은 두 세계를 오가며 아마드가 깨달은 순수함이다. 삭막한 세상에서 활기가 가득해 보이는 생명력 넘치는 꽃은 묵직한 감동을 준다. 이 영화는 닫힌 문에서 열린 문으로 끝난다. 우리는 문을 열고 바람을 맞이할 것인가. 선택은 언제나 개인의 몫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열린 문의 세상을 긍정한다. 첫 문단을 번복하고 싶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관객과 함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조금의 개입을 한다. 무미건조한 세상의 풍경에 꽃바람을 불어 넣었다.Like90Comment1
P13.5아니 다음날 일찍 학교가서 공책갖다주면 되잔아? 하지만 그런 쉬운 방법을 몰라서 그랬을까? 안절부절 못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아동의 시골 촌동네 로드 무비. 한가지 알게 된 것은 이란 아줌마도 장난아니다라는 것. 마치 뱅갈 호랑이처럼 숙제숙제숙제해! 네 이노무자슥을 그냥!어서 숙제못할까!어흥하는데 어후 무섭Like53Comment0
Cinephile5.0잘못 챙긴 친구의 숙제장을 돌려주고픈 아이의 일일 모험을 통해, 영화는 권위나 의무를 떠나 타인의 곤란한 처지에 관심을 갖는 데서 비롯된 순수한 책임 의식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평범한 서사로도 관객을 목적지까지 이끄는 영화의 재주와 마음씨에 감탄한다.Like50Comment0
다비4.5그랬기에 내 어린 시절은 참 순수했다. 자그마한 책임감은 어렸을 땐 왜 그리도 크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나도 어릴 적 방학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뤄왔던 일기를 내내썼고, 준비물을 못챙겼을 땐 얼마나 걱정됐는지 내내 조마조마했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땐 오늘이 며칠인지 생각했고, 무엇이든 나 때문이라고 생각 된다면 하루종일 속상했다. 그런 어린 아이의 거대한 책임감을 어른은 헤아려주지 않았다. 왜 아이의 마음을 몰라줄까? 이에 대해 압바스는 아이의 순수한 일상을 빌려 어른을 통찰한다. 그리고 그 불편한 관습은 그저 꽃 한송이에 해소 될 수 있다 말한다.Like45Comment0
STONE
4.0
아이의 눈물은 아이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 눈물의 시작은 어른의 그늘에서.
GS
5.0
두 세계를 여닫는 문에 심은 꽃 한 송이 (#스포일러 주의) - 참 간단명료한 이야기다. 실수로 친구의 공책을 자신의 집에 가져온 어린아이가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는 이 간단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다. 영화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보여주며 관객과 함께 경청한다. 오직 어린아이들의 눈망울, 발걸음,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순진무구한 행보에서 오염되지 않은 어떤 순수함의 결정체를 찍는다. 이 순수 결정체는 단지 영화에 어린아이가 등장하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린아이는 보이지 않는 순수함을 조명할 뿐이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여서 순수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니까 찾을 수 있는 순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무심해 보이는 세상의 풍경에서 어린아이의 발걸음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더없이 순수함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비 전문 배우와 현지 로케이션, 자연광을 적극 활용하여 다큐멘터리의 연출 방식을 사용한다. 꾸미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세속적인 풍경들은 현장감을 자아내며 진실성을 준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의 형식이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극영화의 형식과 묘하게 조화하는 이 영화는 달리 말하면 세상과 영화를 함께 포개어 놓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다. 세상과 영화, 영화와 세상이라는 이 두 개의 세계는 영화 내러티브 측면에서도 이어진다. 어른과 아이, 마을과 마을이라는 시간과 공간적인 성질을 토대로 두 개의 세계로 뚜렷이 분할된다. 만약 순수함이 존재한다면,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숨어 있지 않을까. 한 세계만 보아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을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두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관찰하다가 우리가 지향해야할 순수함을 포착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두 세계의 소통과 교류의 상징을 문과 창문, 지그재그 모습의 길과 같은 방식으로 함의한다. - 영화의 첫 번째 쇼트. 문이 보인다. 문 너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흔들린다. 언뜻 보면 문이 닫혀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문이 조금 열려 있다. 그 때 한 어른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열고 들어간다. 다음 숏은 문 너머의 공간인 교실을 보여주며 어른과 아이가 각각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린아이의 세계에 문을 열고 입장한 어른은 교실에서 가장 먼저 창문과 문을 닫는다. 두 세계의 단절된 소통을 첫 장면에서의 닫힌 문과 창문으로 암시한다. 이후에 계속되는 소통 불가능은 예정된 일이었다. 선생님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 아이들을 엄하게 교육한다. 혼이나 울음을 터뜨리고 만 아이에게 선생님은 이유를 물으며 꾸중한다. 하지만 아이의 눈높이와 심정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그 답을 듣지 못한다. 아이는 선생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꾸하지 않는다. - 영화에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두 세계를 단절시키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문이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른들은 권위적이며 아이들의 세계를 존중하지 않고, 아이들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할 정도로 어른들의 세계에서 무력하다. 벽에 대고 메아리 치는것처럼 원활하지 못한 대화의 흐름은 영화 내내 지속된다. 주인공 아마드의 엄마는 친구에게 공책을 돌려줘야 한다는 아마드의 말을 빨리 숙제를 하라는 대답으로 일갈한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이웃집 아이와 아마드를 비교하면서 더욱 강하게 나무란다. 아마드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할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꼰대' 같은 설교를 늘어놓는다. 줄곧 아마드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할아버지의 대화 앞에서 멈추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언뜻 보면 이 장면은 마치 할아버지가 카메라 앞에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구세대가 스스로 자신의 부정적인 행동을 자백하게끔 하여 잘못된 과거를 후대에 전가하려는 행위를 끊고자 하는 감독의 생각이 엿보인다. 어른과 아이의 두 세계의 거리는 좀체 좁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먼 동네인 포쉬테 마을은 또 다른 세계다. 포쉬테 마을은 영화 내에서 공간적으로 분리된 장소로 아마드의 마을과 포쉬테 마을은 물리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세계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친구를 위해 길을 밟으며 건너가는 아마드의 모습은 세계 사이를 소통하려는 노력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카메라는 마을과 마을을 건너는 과정을 친절하게 총 세 번이나 반복해서 보여준다. 풀숲을 헤쳐가는 모습과 지그재그로 된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산을 넘는 아마드의 모습을 멀찍이서 롱테이크로 계속 응시한다. 포쉬테 마을은 먼 곳이라며 어른들은 기피했던 세계를 오가는 아마드는 매우 힘겨울지도 모른다. 아마드의 숙제는 어쩌면 어른과 아이, 마을과 마을이라는 두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 포쉬테 마을에 밤은 찾아오고 아마드는 결국 친구 네마자떼의 집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가 관심 가져 계속 응시했던 것은 목적의 성취나 달성 같은 것이 아니다. 길을 오가는 과정, 이웃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모습, 친구에게 공책을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는 순수한 미안감. 그러니까 영화는 한 어린아이의 소우주가 겪는 천방지축한 과정에 계속 관심을 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늦은 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부른 외침에 창문을 연 한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유의미할 테다. 할아버지와 아마드의 만남은 영화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이뤄진 어른과 아이의 만남이다. 노쇠한 할아버지는 과거에 마을 주민들의 집 문을 제작하던 사람이었다. 요즘은 마을의 집 문이 다 철문으로 바뀐다는 사실에 할아버지는 낙담하고 있었다. 철문은 그 자체로 단단하고 견고하다. 하지만 철문은 안에서 닫으면 밖에서는 절대 열 수 없으며 동시에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곧 공동체가 남과 남으로 단절된 관계가 될 것임을 담지한다. 삭막한 현 사회를 보면 이 안타까운 미래는 점차 가속화되고 있다. 아마드는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온다. - 허락 없이 집을 나갔다가 늦은 시간에 돌아왔음에도 아마드의 부모님은 아마드를 혼내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는 배고플 테니 밥을 먹으라며 걱정한다. 두 세계의 거리가 좁혀진 것일까? 방에서 뒤늦은 숙제를 하던 아마드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갑자기 방문이 활짝 열리더니 바람이 강하게 들어오는 것이다. 열린 문과 들어온 바람은 두 세계의 소통을 강렬히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날 아침, 학교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와 창문을 열고 숙제를 검사한다. 공책을 잃어버린 네마자떼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아마드는 뒤늦게 교실에 들어와 네마자떼의 옆에 앉는다. 숙제를 대신 해왔다는 아마드의 말. 공책에는 꽃 한 송이가 놓여있다. 꽃은 두 세계를 오가며 아마드가 깨달은 순수함이다. 삭막한 세상에서 활기가 가득해 보이는 생명력 넘치는 꽃은 묵직한 감동을 준다. 이 영화는 닫힌 문에서 열린 문으로 끝난다. 우리는 문을 열고 바람을 맞이할 것인가. 선택은 언제나 개인의 몫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열린 문의 세상을 긍정한다. 첫 문단을 번복하고 싶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관객과 함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조금의 개입을 한다. 무미건조한 세상의 풍경에 꽃바람을 불어 넣었다.
다한
5.0
소년의 눈망울에 비친 세상. 한때는 소년이었던 그들은 왜 알아주지 않는걸까. 아저씨가 되어버린 지금의 나는 어떨까.
조윤아
5.0
훌륭한 작가는 한가지만 말한다.
P1
3.5
아니 다음날 일찍 학교가서 공책갖다주면 되잔아? 하지만 그런 쉬운 방법을 몰라서 그랬을까? 안절부절 못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아동의 시골 촌동네 로드 무비. 한가지 알게 된 것은 이란 아줌마도 장난아니다라는 것. 마치 뱅갈 호랑이처럼 숙제숙제숙제해! 네 이노무자슥을 그냥!어서 숙제못할까!어흥하는데 어후 무섭
Cinephile
5.0
잘못 챙긴 친구의 숙제장을 돌려주고픈 아이의 일일 모험을 통해, 영화는 권위나 의무를 떠나 타인의 곤란한 처지에 관심을 갖는 데서 비롯된 순수한 책임 의식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평범한 서사로도 관객을 목적지까지 이끄는 영화의 재주와 마음씨에 감탄한다.
조규식
4.5
그래도 난 공책을 가져다 줘야 해. 복잡한 삶에 지치고 물들어버린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것은 고생 끝의 작은 꽃 한 송이로도 충분하구나.
다비
4.5
그랬기에 내 어린 시절은 참 순수했다. 자그마한 책임감은 어렸을 땐 왜 그리도 크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나도 어릴 적 방학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뤄왔던 일기를 내내썼고, 준비물을 못챙겼을 땐 얼마나 걱정됐는지 내내 조마조마했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땐 오늘이 며칠인지 생각했고, 무엇이든 나 때문이라고 생각 된다면 하루종일 속상했다. 그런 어린 아이의 거대한 책임감을 어른은 헤아려주지 않았다. 왜 아이의 마음을 몰라줄까? 이에 대해 압바스는 아이의 순수한 일상을 빌려 어른을 통찰한다. 그리고 그 불편한 관습은 그저 꽃 한송이에 해소 될 수 있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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