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의 역사와
한 세기 넘도록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진 불의
―그 참극의 출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풀어내는 입문서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알-아크사 홍수 작전’으로
이스라엘을 급습했고, 이스라엘인 약 1천2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
이스라엘은 ‘철의 검 작전’이라는 보복으로,
지금까지 3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다.
약 3분의 1이 어린이들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독창적이고 급진적인 역사학자 일란 파페는 전작을 통해서 이미 이스라엘의 잔인성과 이기주의, 이웃 국가를 전혀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책, 그것도 아랍계 유대인을 은근히 배제하는 정책 등을 통렬히 비판해왔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아주 짧은 역사』는 전작들의 이러한 맥락을 잇는 파페의 최신작으로, 파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의 살상과 참상으로 이어졌는지, 누가 개입했고 누가 의도적으로 개입을 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어떤 눈으로 이 참혹한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들며 칼보다 날카로운 펜을 거리낌 없이 휘두른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우리 모두가 이스라엘의 개입으로 시작된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기를, 팔레스타인 쪽의 폭력은 무엇이든 유대인을 절멸하려는 기이한 잔학 행위로 바라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폭력을 자신들의 이기적인 정책을 정당화하는 백지 수표로 여기며, 서방 각국 정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 역시 가자 지구에서 말살 정책을 시행하는 구실로 활용하며, 미국은 중동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주장하기 위한 구실로 삼았고, 일부 유럽 나라들에게는 새로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민주적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구실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참상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파페에 따르면,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창건보다 훨씬 더 오랜 과거,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 오스만령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발을 디디면서 오늘날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미 50만 명 정도의 아랍인들이 자리 잡고 살았으며, 대다수를 이루는 무슬림과 더불어 소수 집단인 기독교도와 유대인도 함께 살던 곳이었다. 근대화의 문턱을 막 넘어서려던 팔레스타인에, 폭력적 반유대주의를 피하려는 유대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오만함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심화했다
영국 정부는 1차 세계대전이 치러지던 중, 범아랍 대표 세력인 하심가에게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싸우면 팔레스타인이 포함된 아랍 지역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함과 동시에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민족적 조국’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했고, 밸푸어 선언을 수용해 입법부를 구성했다. 이에 따라 90퍼센트에 이르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 나라에서 소수자 취급을 당하게 되었으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미래의 조국으로 약속받았다.
두 공동체의 공존 : 재앙은 피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쟁이 무슬림과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일이며, 유대 국가가 세워진 1948년 이전에는 팔레스타인에 어떠한 고유 민족 정체성도 없었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새로운 시민 사회가 성장하고 있었고, 팔레스타인을 독립된 아랍 시리아의 일부라고 여겼다.
영국은 시온주의 우익 잡단이 무슬림 축제를 방해하고 이슬람 성지 파괴를 조장하는 데도 방관했고, 결국은 폭력 사태를 불러왔다. 유대인 공동체는 자유롭게 국가의 기반 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던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식민지 백성 취급을 받았다. 영국의 묵인 속에 시온주의 운동은 자체 준군사 집단인 하가나를 만들었으나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의미한 규모로 무장을 갖추거나 조직을 이룰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 아니었고, 팔레스타인인은 유랑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토지를 구입하면 거기 자리 잡은 마을과 마을 사람까지 따라오는 것이 오랜 관습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시온주의자들이 토지를 매입하면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마을 사람들과 농민 들을 쫓아냈다. 그런 방침에 저항하는 유대인 고용주들조차, 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공격과 공개적인 망신을 당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마을들이 존재하는 데도 팔레스타인인들을 ‘유랑민’이라고 묘사하면서,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팔레스타인은 광활한 사막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대규모 토지 매입과 그에 따르는 종족 청소는 더 잦은 폭력적 충돌을 가져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알부라크 혁명 : 팔레스타인 군사 조직의 시작
1929년 8월, 예루살렘에서 무슬림과 유대인이 폭력적으로 충돌했고, 1주일만에 유대인 1백33명과 팔레스타인인 1백16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백 년 동안 소수 유대인 집단과 무슬림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아온 헤브론에서도 외곽 마을의 무슬림들이 도시를 습격했고, 67명이 학살당했다. 충돌은 계속되었으며, 이 일련의 사건을 팔레스타인인들은 알부라크 혁명, 시온주의자들은 폭동이라고 부른다. 종족 청소와 의도적 궁핍화 때문에 도시에는 판자촌이 등장했고, 게릴라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아랍 대항쟁 시대 : 시온주의자들의 국가 선언
1936년,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총파업을 이끌었고 농민과 젊은 층은 영국과 유대인 세력을 겨냥해 전면 항쟁을 벌였다. 영국군은 항쟁 진압을 위해 야파 구시가지를 폭격했다. 팔레스타인인 수천 명이 죽었으며, 항쟁의 배후로 지목된 군 지도자들은 가차 없이 살해되었다.
1942년 5월, 시온주의자들은 미국이 세계 강대국으로 대두되리라는 판단 아래 뉴욕 볼티모어 호텔에서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만들겠다고 선포했으며, 팔레스타인을 탈아랍화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유럽 열강은 팔레스타인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며, 각국 난민 수용소에 머무르는 유대인들 25만 명의 거취를 정하는 데에만 힘을 썼다.
팔레스타인인의 실향과 참상 : 나크바의 시작
유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시온주의자들의 여러 시도들에 대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엔과 국제 사회의 대처는 미숙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동안,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국가의 정규군 하가나를 강력하게 키웠다.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에 찬성하는 181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시온주의자들은 약속받은 유대 국가를 얻어낸 날이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대재앙 나크바가 시작된 날이자,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참상에 대한 경고 사격이 울린 날이다.
분할 결의안의 여파 : 재앙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연 국제 사회
시온주의 압력 집단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로 분할하는, 기반 시설과 자원들이 유대 국가에 포함되어 있는 분할안이 통과되도록 미국 정부를 압박했다. 미국 정부는 국가 발전 기금을 약속하거나 이미 결정된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협박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찬성을 이끌어냈다. 스탈린은 시온주의를 중동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여겼고, 영국은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 설립이 영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국제 사회의 무사 안일한 태도, 유엔에서 한 목소리로 시온주의 대의를 지지한 기묘한 동맹, 유대 국가를 이미 건국된 듯 다룬 방식은,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법의 지배와 정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