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디자인은 너무 중요해서 디자이너에게만 맡길 수 없다.”
중요한 디자이너가 배워야 할 최후의 세계사이자 최초의 디자인 역사책
“디자인은 너무 중요해서 디자이너에게만 맡길 수 없다.”라는 《가디언》 편집자 데이비드 헵워스의 문장을 디자이너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직업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소통 능력을 키워 더욱더 협조적으로 되는 것, 다른 하나는 몹시 중요한 디자인을 주도적으로 맡고 있는 자신이니만큼 자부심과 사명감에 한껏 고취되어 디자인에 임하는 것일 텐데, 같은 문장으로 이전보다 소극적이 될 수도 적극적이 될 수도 있다. 후자의 태도를 따르되, 깊고 넓은 공부를 제안하는 책이 바로 <역사는 디자인된다>다.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한 “중요한 디자이너가 배워야 할 역사책”이라는 표현에서 ‘중요한’은 일부가 아닌 디자이너 전체를 수식한다.
오늘날 수많은 직업과 직군이 그러하겠지만, 디자이너는 종종 혼란에 빠진다.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순수 예술가처럼 홀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디자인 작업의 시작점에 클라이언트의 요청이 자리한 까닭이다. 그렇다고 클라이언트 잡과 인하우스 직업만 있냐 하면, 꽤 다채로운 작업을 스스로 동기 부여하여 선보여 내는 일군의 디자이너들이 있다. 그들이 내놓는 그래픽 작업은, 감상자로서는 순수 예술인지 디자인 결과물인지 알아맞히기 어렵다. 테트리스처럼 떨어지는 디자인 과제, 클라이언트와의 끝나지 않는 줄다리기 속에서 디자이너들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디자인이란 건 무엇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미는 예술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경향신문에서 오랫동안 아트디렉팅을 하고, 수많은 정보를 간략한 그래픽으로 표현해 온 바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윤여경은 그가 잘하는 ‘압축’ 능력을 통해,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유구한 인류 문화의 흐름 속에 존재한 디자인의 뿌리를 발견함으로써, 외부에서 이식될 수 없는 제 주체성과 정체성을 심고 가꾸자는 제안이다. 특히 세계사의 큰 줄기를 따라 구성한 기다란 디자인 역사 연표는 디자인적 성실성은 물론 인류 역사에 대한 빛나는 통찰력을 보여 준다.
역사는 디자인된다
카는 역사적 사실이란 “널리 승인된 판단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외교관이었던 슈트제레만의 사례로 역사적 사실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슈트제레만은 독일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의 외교 정책을 담당했다. 그는 300상자 정도의 자료를 남겼다. 그의 비서는 이 자료들을 요약해 세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이 다시 영문판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1/3 정도가 생략되었다. 자료가 요약되고 생략되는 과정에는 역사가의 주관적 선택이 개입되었다. (……) 과거 사실은 현재 역사가에 의해 발견되고 서술되어야만 비로소 역사적 사실이 된다. 과거 사실은 이미 역사가의 시선으로 굴절되었으므로 순수하지 않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가가 왜 그 사실을 선택했고 어떤 맥락으로 해석했는지 고려해야 한다. 65~67쪽에서
디자이너가 디자이너 자신을 알기 위해서, 바꾸어 말해 인간이 인간 자신을 알기 위해서 살펴볼 수 있는 자기 자신은 ‘과거’(의 자기 자신)에 한정된다. 이때 우리에게 주어진 과거 우리의 단서들을 늘어놓고 연결 지어 이해하는 행동이 역사 공부다. 제대로 학문화되지 않은 디자인의 영역을 파헤치기에 앞서 저자는 E. H. 카를 들어 역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300상자의 사료는 그대로 보존되지 않고, 역사가의 손을 거쳐 세 권의 책으로, 다시 한 권 분량으로 선택되고 압축된다. 이러한 역사의 정체를 표현하는 데 design(고안하다)이라는 단어가 적격인 점은 흥미롭다. 책 제목에도 밝혔듯 “역사는 디자인된다.” 우리가 선형적으로 기록하고 전승하는 역사는 특정한 주관적 관점에 따라 고안된(디자인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특정한 가치관의 틀에 따라 파악된다는 점에서 모든 역사는 ‘디자인’의 과정을 거치는 셈이다.
18세기 말 진화론이 대두되면서 기능(function) 개념이 유행했다. 건축 분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용성의 개념을 ‘용도’에서 ‘기능’으로 전환했다. 기능은 용도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미래의 목적과 변화까지 고려한다. 용도는 과거의 형태를 답습하면 되지만 목적을 고려한 기능은 새로운 형태를 상상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글씨를 쓰는 용도인 연필 형태는 고정되어 있다. 제작자는 글씨 쓰기라는 용도를 위해 기존의 연필 형태를 따라서 만들면 된다. 반면 꽃의 형태는 기능에 따라 변한다. 즉 ‘꽃’의 형태는 주어진 생식 여건에 적합하게 변해야만 한다. 환경에 따라 생물들의 형태가 변하듯이 기능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유용성 개념이다.
이렇듯 기능은 진화론의 생물학적 특징이 반영된 개념이다. 1859년 다윈은 생물의 형태는 자연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는 자연 선택 진화론을 발표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많은 분야들이 다윈의 개념을 수용했고 공예와 건축 분야도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진화론에 근거한 기능 개념은 기계적 건축이 아닌 유기체적 접근을 요구한다. 하나의 생명체가 생태계의 일부이듯, 하나의 건물도 도시 생태계의 일부다. 생명체와 환경이 상호 진화하듯 건물과 도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한다. 291쪽에서
“역사는 디자인된다.”라는 문장은 “역사는 디자인(이) 된다.”로도 읽힌다. 18세기 말 전 영역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진화론은 디자인/공예/건축 분야에 역시 영향을 끼쳤다. 당대의 가장 강력한 시대적 가치관, 역사적 분기점은 디자인 문화를 변모시키고, 이 문화는 다시 다가오는 역사에 적응, 흡수된다.
디자인은 역사가 된다
저자가 소개한 연표의 제목은 ‘역사 연표’가 아니라 ‘디자인 역사 연표’다. 그린 목적이 인류사의 이해가 아닌, 디자인 역사와 문화의 이해이기 때문이다. 책의 초반부에서 다룬 역사의 본질과 인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후반부에서는 시대별 예술과 디자인의 시공간적 특징을 분별한다. ‘디자인 역사 연표’를 통해 시각(그래픽)적 역사를 밝힘으로써, 저자는 역사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디자이너가 지녀야 할 정체성과 소명의식을 환기한다.
B.C.550년부터 현대까지 약 2500년 동안, 회색 파동은 400년 단위로 오르락내리락하며 큰 산 네 개를 형성한다. 상승할 때는 이념과 종교 등 관념이 중요해지고, 하강할 때는 생존과 안전 등 현실적 삶이 중요해진다. 올라가는 흐름에서는 이상적인 태도가, 내려가는 흐름에서는 현실적인 태도가 강조된다. 디자인 모형의 흐름처럼 상승에서는 감성(엔트로피)이, 하강에서는 이성(네트로피)이 작동한다. 디자인 모형의 순환 구조가 연표에서는 상승과 하강의 파동으로 표현되었다. 172쪽에서
붉은색 전환기와 파란색 이행기의 패턴 구분으로 예술과 공예/디자인의 특징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환기에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 다양한 문제 제기가 쏟아져 나온다. 다소 감성적인 활동으로 개성이 강해진다. 이행기에는 파편적인 개성들이 융합되어 보편성이 강조된 사상들이 등장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적절성을 추구하며 새로운 공통 감각을 형성한다. ‘문제 제기’와 ‘문제 해결’로 구분되는 두 시기의 특징은 각각 예술과 공예/디자인에 상응한다. 195쪽에서
디자인 현상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면서, 저자는 디자인에 내재한 시대적 영향력에 주목한다. 시대상을 대변하는 디자인이 있는가 하면, 시대의 괴로움과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이 있다. 물론 두 가지의 선후는 닭과 달걀처럼 구분하기 어렵지만, 저자의 관점에 따라 예술을 “문제 제기의 행위”로 디자인을 “문제 해결의 행위”로 이해해 본다면 확실히 역사적 난제의 해결은 디자이너 손에 달려 있는 듯하다. 문맹률이 높았던 19세기 말 노동자들 대상으로 그림 문자 ‘아이소타입’을 개발한 오토 노이라트를 사회학자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