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의 선비, 저잣거리 사람들을 주목하다
최근 몇 년 사이 18세기 조선에 대한 출판계의 관심이 높다. 예전에는 그 관심이 실학자나 당파 등 집단적인 것에 머물렀다면,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특별한 점을 포착하는 데 열광하는 요즘은 18세기 조선을 살아간 사람들 개개인에 초점을 맞춘 기획이 많다. 수라간 상궁과 내시와 광대가 사극의 주인공이 되고, 시호로만 알려지던 왕의 이름이 부각되는 것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선비들이 북경의 유리창에서 견문을 넓히고 수많은 책을 들여온 것, 학문을 좋아한 왕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키운 것,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것이 모두 18세기 조선의 풍경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한 가지 재주만 있으면 사람대접하는 분위기가 18세기 조선에 있었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추재 조수삼이 《추재기이》에서 소개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저잣거리의 기이한 사람들에게서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가치를 발견한 선비의 특별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만인보’
18세기 조선에서는 화려한 삶을 살았던 사대부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지은 전傳이 많았다. 그래서 19세기에는 이런 작품들을 한데 모은 《호산외기壺山外記》, 《이향견문록 里鄕見聞錄》, 《희조질사熙朝?事》 같은 전기집이 편찬되었다. 그런데 스스로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 조수삼의 《추재기이》는 이러한 3대 전기집보다 더 특이한 업적이다. 기이한 인물 이야기를 모아 담았다는 뜻에서 책 제목이 정해졌으니, 제목에서부터 다른 전기집과는 차이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추재기이》의 장점은 틀을 벗어나서 살아간 인물들을 기록했다는 데 있다. 앞에 소개한 전기집의 주인공들은 대개 중인 신분이었다. 그런데 담론談論을 복福으로 타고났다고 평가받은 조수삼이 보여 준 인물들은 중인 이하의 계층에 속한다. 안경알 가는 절름발이, 원숭이를 구경시켜 빌어먹는 거지, 고소설 낭독꾼 전기수, 성대모사에 뛰어난 박 뱁새 등 오늘날 독자의 눈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뒷골목 사람들의 이야기는 고은 선생의 역작인 《만인보萬人譜》에 견줄 만하다.
한시를 읽는 맛, 옛 그림을 보는 멋
《추재기이》를 완역하고 해설을 붙인 허경진 교수는 ‘한국의 한시’ 번역자로 이름이 높다. 이 시리즈의 책을 100권까지 내는 것이 꿈이라고 하는 그는 한시 번역에 각별한 노력을 쏟았으며, 한시 감상의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산문과 한시가 함께 글 한 편을 이루는 《추재기이》의 주인공은 71명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의적 일지매 . 소설 낭독꾼 전기수 . 제주 여걸 만덕 등 흥미로운 인물 몇 사람만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딱 맞는 번역자를 통해 온전한 《추재기이》를 감상할 기회가 생겼다.
한편 독자에게 《추재기이》에 실린 옛 그림 보는 재미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마지막 페이지의 도판 목록을 보면 분명 여러 화가의 작품이 실렸는데도 마치 이 책을 위해 새로 그린 삽화처럼 보일 만큼 글과 그림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특히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 중 구경꾼이 내려놓은 갓을 주인공 대접한 장난기는 웃음을 자아낸다. 자신의 책은 졸음을 막고 더위를 피할 쓰임에나 맞는다고 한 ‘추재 선생’이, 국보급 그림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마음껏 오려 붙인 것을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