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불노리>의 시인이자 한국 근대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주요한. 그의 시는 한국 근대시의 형성과 도약, 한계와 파행을 사유하게 만드는 결절점이다. 그의 시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1900년 평양 기림에서 태어난 주요한은 도쿄 유학생 선교 목사로 파송된 아버지를 따라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요한은 문학에 심취해 있던 메이지학원 중학부 시절, 시인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에게 시를 배워 일어로 된 40여 편의 시를 발표한다. 이는 국문으로 쓴 그의 초기작 <니애기> <샘물이 혼자서>(≪학우≫, 1919. 1), <불노리>(≪창조≫, 1919. 2) 등보다 2년 이상 앞서 발표된 것이다. <불노리>의 시인이자 한국 근대시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되는 요한의 시작(詩作)은 일본 유학 시절의 문학 체험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시 형성기에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불노리>를 썼고 1979년까지 생존했지만, 그가 실제로 시 창작에 집중한 시기는 길지 않았으며, 일제 강점 말기에 발표한 대일 협력 시들을 고려할 때 주요한의 시사적 의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시사에 의미 있게 평가되는 것은 <불노리>를 비롯한 몇몇의 시편들이 이루어 낸 성과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기(1912∼1919)를 일본에서 보낸 데다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일문(日文) 시 창작 경험은 요한으로 하여금 근대적인 문학 형식과 감각에 눈뜨게 한 것으로 보인다. <불노리>는 이러한 경험 위에 식민지 문학 청년의 낭만적 감수성이 더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발군의 문학적 감각은 3·1운동 이후 상하이 망명으로 심화·확대되지 못한다. 1919년 5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한 뒤, 요한은 이광수와 함께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메시지가 강한 항일 저항시를 주로 창작하고 민족적 성격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시적 방법으로서 민요의 계승을 통한 민중시 운동을 주장한다. 1925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민중적 삶에 주목하는 시조 부흥 운동을 주창했는데, 이와 같은 요한의 행적은 근대적 시 창안에 선구적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이 문학적 삶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게다가 1930년대 후반부에는 기업인으로, 아울러 대일 협력의 적극적 가담자로, 해방 후에는 기업인과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으로 활동함으로써 주요한의 문학이 주로 청년기의 성과임을 시사한다. 주요한의 문학은 대체로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은 그의 생의 이력과 맞물려 있다. 이 시기 구분의 큰 경계는 1919년 상하이 망명과 1925년 귀국, 그리고 1937년을 전후로 한 대일 협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계에 따라 주요한 문학의 시기를 나누어 보면 첫째, 근대적 시 형식을 모색하고 발견하는 일본 유학 시절(∼1919), 둘째,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항일 저항시를 발표한 시기, 셋째,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언론인으로 일하며 민요와 시조 등 시적 전통의 계승에 관심을 기울인 시기(∼1937),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 말기 대일 협력 문학의 시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주요한이 한국어로 남긴 시는 250여 편인데, 그중에 네 번째 시기에 속하는 작품은 30편 정도다. 주요한 시 세계의 이러한 변화 과정은 일제 강점기 한국 근대 문학의 초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 우리는 요한 문학의 이력(履歷)에서 우리 시의 서늘한 내면 풍경을 생각하게 된다. <불노리>가 보여 주는 자유분방한 정념의 표출과 산문시 형식은 당대 한국 시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갱신하는 경이(驚異)였지만 요한의 시는 오래지 않아 민요와 시조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시적 전통으로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 현실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필요성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새로운 시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부족을 드러내는 증표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상하이 망명 이후 그의 시가 보여 주었던 항일 저항시의 면모들이 어떻게 일제 강점 말기 적극적인 대일 협력의 양상으로 환치(換置)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주요한의 시가 드러내는 한국 근대 문학의 결절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시에 관한 당대 시인들의 시 의식과 한국 시의 내면을 우리는 요한의 시와 삶에서 재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