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18세기 말 프로이센의 계몽 논쟁에서 칸트가 제시했던 계몽의 정의 그 고전적 정의는 지금도 유효하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엄밀히 정의하자.”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계몽인가 무엇인가. 근대는 계몽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16~18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 구시대의 인습과 제도를 타파하고자 한 혁신적 사상과 운동”이었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독립투쟁과 민족해방 운동의 동력이 될 만큼 근대 전체의 역사에서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해왔다.(우리에게도 계몽의 시대가 있었고, 언문일치 운동과 국채보상 운동 등이 그 핵심이었다.) 지금은 21세기, “계몽”은 유럽의 16~18세기와 우리의 개화기・식민지 시대에 유행했던 낡아빠진 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 책은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던 칸트가 처음으로 “계몽”에 대한 정의를 제시했던 시점으로 돌아가본다. 18세기 당시 “계몽”은 시대정신을 집약하는 첨예한 화두였다. 그리고 “계몽”에 관한 생각은 그때도 역시 매우 복잡다기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칸트가 써낸 것이 바로 1784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다. 18세기 계몽 개념을 둘러싼 논쟁의 시작과 주요 쟁점 이 책은 칸트의 에세이를 포함해 계몽을 정의하고 또 제대로 실현하고자 치열하게 논쟁하고 고민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글 16편을 골라 엮은 것이다. 1783년부터 1798년까지 프로이센의 지식인들이 매달 첫째, 둘째 주에 회원들의 자택에서 비공개 토론모임을 가졌다. ‘계몽의 벗들’이라는 이름의 이 모임은 열두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고, 모이는 날이 수요일로 정해져 있어서 일명 ‘수요회’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베를린 월간 학보》라는 잡지를 간행했고, 이 매체는 모임의 토론 주제인 계몽에 관한 논의를 주도했다. 회원 중에는 프로이센의 재무장관, 국법을 기초한 법학자, 왕의 주치의, 출판인, 신학자, 왕립극장장, 교육부 장관 등이 있었다. ‘계몽의 벗들’과 그들의 기관지 격인 《베를린 월간 학보》는 계몽 군주를 자임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신임이 두터운 고위 관료와 학자들이 계몽에 관한 토론과 계몽사상의 전파를 선도한 구심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임과 매체의 성격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주창한 계몽 담론은 소수의 지식인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계몽’의 성격을 띤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사전에서는 “계몽”을 이렇게 정의한다. “계몽(啓蒙): 지식 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 이 풀이를 보면, 한국어에서도 계몽이란 먼저 깨우친 (잘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이끌어 깨닫게 만드는 것, 역시 ‘위로부터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듯싶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칸트가 생각한 계몽 개념은 원칙적으로 ‘위로부터의 계몽’을 배제한다. 《베를린 월간 학보》에서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토론이 시작된 직접적인 계기는 전통적인 교회결혼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었다. 교회에서 치르는 혼례성사는 번잡한 허례허식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결혼은 신성하므로 교회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 이를 통해 풍기문란과 도덕적 타락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똑같이 ‘계몽’의 이름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에 쵤너는 ‘계몽’의 이름으로 야기되는 혼란을 비판하면서 무엇보다 계몽에 대한 분명한 개념 규정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계몽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이 문제에 답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된 논쟁에서 많은 글들이 생산되었는데, 우선 이 책의 제1부에서는 계몽 개념의 정의를 시도한 대표적인 글들을 소개하고자 했다. 그런데 계몽은 단지 개념적 정의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국민대중의 이성적 각성을 추구하는 실천적 과제와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계몽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제2부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논한 대표적인 글들을 수록하였다. 다른 한편 진취적인 이성적 각성과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계몽정신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이후 혁명의 문제와 연동되는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제3부에서는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계몽과 혁명의 상관성을 논한 대표적인 글들을 수록하였다. 자율적 주체 형성의 요청과 과정이 곧 계몽이다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은 1784년 12월 《베를린 월간 학보》에 발표되었다. 이 글은 곧장 계몽 개념을 정의하면서 시작한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미성년 상태가 지성의 결핍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결핍 때문이라면 미성년 상태는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것이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우선 칸트가 ‘계몽되지 않은 상태’를 ‘미성년 상태’에 비유하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성년은 부모나 친권자의 동의 없이는 온전한 인간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또한 미성년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지지 못한다. 요컨대 미성년 상태란 오로지 타인의 지도와 감독, 보호와 후견에만 의존하고 자율적 주권과 책임을 포기한 예속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한 예속 상태를 극복하고 자신을 스스로의 주인으로 만들어가는 자율적 주체 형성의 요청과 과정이 곧 계몽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성년 상태인 것이 지적 능력이나 지식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 때문이며, 그런 한에는 미성년 상태가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자기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선각자가 무지한 대중을 각성케 하고 지식을 전파하는 것을 계몽이라 여기는 통념을 허물어뜨리는 발상의 전환이다. 단지 무지를 타파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그런 통념적 계몽관은 ‘문외한’과 ‘전문가’의 구별을 전제하고 ‘전문가’가 ‘문외한’을 인도하는 것을 계몽의 과제로 설정한다. 칸트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스스로 사고하려는 시도에서 지식의 많고 적음이 문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심지어 아무리 풍부한 지식을 갖춘 사람도 지식의 활용 면에서는 오히려 가장 계몽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지식의 활용 면에서 오히려 가장 계몽되지 않은 경우란, 예컨대 단지 외부의 강압이나 권위에 무조건 순응하거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그런 유혹에 빠질 공산도 크기 마련이다. 그처럼 보편타당한 이성적 원칙에 위배되는 지식의 사용을 칸트는 ‘미신’과 ‘맹신’이라 비판한다. 그러나 근대 이래 체계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고 타인의 권위와 도움에 의존해 삶을 유지해 나가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게으름’에 못지않게 그런 비주체적 삶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조장하는 사회체계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개인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이성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하라 칸트는 고립된 개인과 달리 ‘공중’(公衆)은 스스로를 계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공중’(Publikum) 개념은 18세기에 들어와 서적 보급의 급속한 확대로 광범위하게 형성된 독자층을 가리키며, 나아가 그들이 의견을 개진하면서 여론을 형성해 나가는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