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과학의 자유에 바치는 헌사 물리학자들이라면 한번쯤 일원이 되길 꿈꾸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세른(CERN)은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모여 세상이 만들어진 법칙을 찾기 위해 미세하고 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곳이다. 힉스 입자가 발견되고 월드 와이드 웹이 탄생한 본거지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매년 십만 명가량이 방문하지만, 일반인, 특히 한국인들이 세른의 일상적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스위스의 사진가 안드리 폴(Andri Pol)과 작가 페터 슈탐(Peter Stamm)은 이 소우주 깊숙이 들어가 오랜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인간 존재에 대한 호기심, 집요함, 낙천주의가 담긴 과학자들의 꾸밈없는 초상을 포착해냈다. 세른의 설립 배경과 의미를 이야기하는 롤프 호이어(Rolf Heuer) 전 세른 소장의 글과, 이십오 년간 세른 연구에 참여한 한국인 과학자 박인규(朴仁圭)의 회고는, 이 국경 없는 세계의 매력을 한층 더 북돋는다. 『인사이드 세른』은 과학이라는 인류 공통의 언어로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시각적 헌사다. 근본적인 연구를 위한 국제협력기구 세른의 씨앗은 프랑스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에 의해 1949년 스위스 로잔에서 처음 뿌려졌다. 그는 세계 공동의 과학 연구 실험실을 설립하면 규모와 비용 면에서 개별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과제들이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당시 과학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유럽 대륙을 하나로 묶어 주는 ‘평화’의 수단으로도 여겨졌기에, 1950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이 안이 다시 촉구됐고, 1952년 2월 15일에 임시기구인 유럽원자력연구이사회(Conseil Europeen pour la Recherche Nucleaire)가 창설되었다. 이 명칭의 프랑스어 약자가 세른(CERN)이었고, 스위스와 프랑스 국경의 메랑 지역 외곽이 부지로 선정되었다.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세른 협약문은 이곳의 목적을 ‘유럽 국가들 간의 순수과학적이고 근본적인 성격의 원자력 연구와 기본적으로 그와 관련된 연구에서의 협업을 제공’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또 어떤 군사적인 연구도 해서는 안 되며, 연구 결과를 직접 발표하거나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게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1954년 12개 회원국이 협약문에 서명하면서 임시이사회는 해체하고 유럽입자물리소로 이름을 바꿨지만, ‘세른’이라는 최초의 이름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해를 거듭하면서 회원국은 2018년 현재 22개로 늘었고, 준회원국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 연구소는 냉전 시대에도 줄곧 철의 장막 뒤에 있는 과학자들과 같이 일했고, 과학 분야에서의 동독과 서독의 화해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세른에서는 파키스탄인 과학자들이 인도 동료들과 나란히 일을 하고,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친선모임이 있을 만큼 나라와 언어의 경계가 무의미한 도시다. 낡은 건물 속 최첨단 장비, 최고의 연구자들 사진은 건물의 낡은 외벽, 창문의 균형 잃은 블라인드로 시작한다. 1950-1960년대에 대부분 세워진 세른의 오래된 건물들은 회원국들이 지원하는 수십억 유로가 어디로 가는지 의아하게 한다. 이곳 연구자들에 의하면 모든 비용은 실험 설비에 투자된다고 하는데, 책에 수록된 입자 검출기 사진들은 눈을 압도한다. 원주가 27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강입자충돌기 엘에이치시(LHC, pp.374-379)에는 각각 알리스(ALICE, pp.388-393), 아틀라스(ATLAS, pp.414-419), 시엠에스(CMS, pp.399-405), 엘에이치시비(LHCb, pp.424-429)라 불리는 네 개의 주요 검출기가 있다. 가장 큰 아틀라스는 길이가 46미터, 높이가 25미터에 이르고, 가장 작은 엘에이치시비만 해도 길이가 21미터, 높이가 10미터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충돌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양성자 충돌을 고도로 정밀하게 기록할 때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을 오차없이 제어하는, 동심원을 이루는 거대한 검출기의 수많은 층마다 숨겨진 기술이다. 실험을 통해 얻은 모든 데이터를 담는 데이터센터(pp.235-237, 282)의 규모가 이를 조금이나마 짐작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곳의 핵심은 바로 사람들이다. 카를로 루비아(Carlo Rubbia), 잭 스타인버거(Jack Steinberger, pp.36-37), 조르주 샤르파크(Georges Charpak), 사무엘 팅(Samuel Ting)처럼 세른에 상주하는 노벨상 수상자들뿐만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는 노벨상 수상자들도 많다. 이같은 최고의 연구자들과의 비공식적 토론이 가능한 세른은 물리학자들에게 ‘천국’일 수밖에 없다. 이론물리학자 제랄딘 세르방(pp.148-149)은 화장실에 가는 길에 너무 많은 사람과 마주쳐서 두 시간은 우습게 지나간다고 한다. ‘레스토랑 원’ 또는 ‘알원(R1)’이라 불리는 501동 건물의 제1식당(pp.230-233)은 연구자들의 만남과 소통의 장소로, 세른의 가장 중요한 연구결과는 회의실에서 발표되지 않고, ‘R1’에서 발표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비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유명한 세른의 과학자들도 그 일상은 평범하다. 가장 열악하다는 4번 건물의 알림판에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문, 성소수자연합이 계획한 오찬 모임 공지, 개신교도 모임의 초대장, 베이스와 테너를 찾는 세른 합창단의 공고가 붙어 있다. 이런 만화도 있다. ‘나는 세른의 과학자, 매일 헌신적으로 찾지... 주차할 자리를.’ 세른 댄스클럽에서는 ‘탱고의 밤’(pp.186-187)을 개최하고, 야외 식당 한쪽에서는 탁구시합이 열리며(p.125), 강아지와의 즐거운 한때도 포기할 수 없다(pp.346-347). 이곳 연구자들은 ‘정리정돈’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오히려 칠판 위 공식이 지워지거나 중요한 서류가 버려질 것을 염려하여 ‘청소 금지’ 스티커를 곳곳에 놓는다(pp. 174-175, 268). 부엌에는 더 이상 쓸 컵이 남아 있지 않고(pp.48-49), 책상 위 서류는 머리 높이까지 쌓여만 간다(p.81). 죽은 지 한참인 화분을 버릴 시간도(p.114), 동료들의 축하 풍선을 치울 시간도(pp.140-141), 짐을 풀 시간도 없다(pp.106-107). 한국 입자물리학의 미래 한국인 과학자들이 세른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는 30년, 정부에서 ‘한-세른협력사업’ 협정을 맺고 연구자들을 파견한 지도 10년이 넘는다. 엘에이치시(LHC) 실험 데이터 분석뿐만 아니라 시엠에스(CMS)나 알리스(ALICE) 실험에 필요한 주요 검출기들의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한국시엠에스실험사업팀, 한국알리스실험팀 역시 큰 연구집단이 되었다. 세계 공동의 물리연구소로 자리잡고 싶어 하는 세른은 최근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세른의 정식 회원국이 될 수 있도록 규정도 바꿨다. 이에 한국도 세른의 준회원국으로 가입하기를 희망해 본다. 준회원국은 세른의 운영방안에 대한 투표권은 없어도, 가속기나 검출기를 건설할 때 자국 기업들의 입찰권을 보장받는다. 때마침 오는 2018년 7월 4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제39회 국제고에너지물리학회(International Conference on High Energy Physics, ICHEP)가 열린다. 1950년부터 시작해 1958년부터 2년에 한 번씩 70년간 이어져 온 이 학회는, 초미세 세계인 양자부터 거대한 세계인 우주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근원을 찾는 물리학자들의 교류의 장이다. 현 세른 소장인 파비올라 자노티(Fabiola Gianotti)를 비롯한 세른의 연구자들도 대거 참여한다. 이러한 시기에 소개되는 입자물리학의 최전선을 담은 이 사진집은, 세른이 ‘순수하고 근본적인 연구를 위한 연구소’라는 협약문의 취지를 시각적으로 증거한다. 사진 속 과학자들이 보여 주는 순수함과 인내는 물리학자를 꿈꾸는 젊은이들뿐만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