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는 곳,
막막한 우주에서 지구로 띄우는 ‘청혼’의 편지
“보고 싶었어.” 하고 내가 너에게 말했을 때,
네가 나에게 “나도.” 하고 대답해주기까지의 시간이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나는 행복이라고 기억해.
네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줘도
너에게 닿는 데 17분 44초가 걸리고,
또 거기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 17분 44초가 더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두고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뭔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갑갑함이야.
─본문 중에서
『타워』『신의 궤도』『은닉』『총통각하』에 이르는 작품들을 통해 세계와 존재에 대한 고민, 촌철살인의 현실풍자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려왔던 배명훈 작가가 이번에는 ‘청혼’의 편지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했다. 우주에서 지구의 연인에게 띄우는 한 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 『청혼』은,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과 로맨스를 교차시킨, 아름답고 슬픈 프로포즈이다.
배명훈 작가는 지구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공간인 ‘우주’의 스케일에 로맨스를 담았다. 아득한 시간과 거리의 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서로에게 별이 될 만큼 멀리 있는 두 사람의 ‘보통의 연애’ 속에 흐르는 섬세한 감정선은 배명훈 작가의 다른 어떤 소설에서도 아직 만나지 못했던 ‘서정성’을 보여준다.
천체물리학, 군사학 등 배명훈 작가가 꾸준히 탐독해온 지식들이 이야기를 탄탄하게 받쳐주어 우주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살아난다.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팽창된 우주 속에서 ‘나’와 ‘그녀’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들의 외로움과 사랑, ‘응답의 문제’는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우주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상상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 사랑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외로움, 애틋함이 촘촘히 엮여 있는 이 고백의 편지는 시간과 존재, 사랑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며, 때때로 멈추어 우주와 인간, 사랑과 외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구까지 날아서 170시간,
아득한 거리의 장벽을 넘어 너에게 닿기를……
빛으로 딱 30초 거리만 떨어져 있어도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이
30초 뒤에도 그대로일 거라고는 확신을 못해. 이미 진실이 아닌 거지.
거리가 멀수록 모든 게 왜곡돼서 결국 그 어느 것도 투명하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오는 거야.
빛의 속도로 30초. 그게 얼마나 먼 거리인지 실감이 나니?
―본문 중에서
막막한 우주공간에서 정체불명의 적과 대치하고 있는 궤도연합군의 작전장교인 ‘나’. 우주에서 태어난 ‘나’는 날 때부터 중력을 느껴본 적 없이 우주공간에서 살아왔다. 그런 ‘나’의 여자친구는 지구출신으로 현재도 지구에 살고 있다. ‘나’는 중력을 감당하기 힘들지만,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면 지구에서라도 살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에서의 이 전쟁이 끝나야만 한다.
궤도연합군에 공격을 해오고 있는 적은 그 정체가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예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연합군 사령관인 데 나다 장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의심하여 감찰군을 파견하고, 사사건건 감시하고 통제하는 감찰군 덕분에 누가 진짜 적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상황으로 흘러간다.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함대를 정비하는 동안 휴가를 받은 ‘나’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170시간을 날아 지구로 가지만 떨어져 있던 거리만큼 뭔가 서먹해진 관계 속에서 그녀에게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느끼며 귀환한다.
몇 차례 전투가 벌어지는데 적은 마치 시간을 건너오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 공격하고 사라지곤 한다. ‘나’는 정정당당하지 못한 적의 존재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쟁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고, 그 무렵 지구에서부터 그 먼 거리를 날아 그녀가 찾아온다…….
찾아왔다. 네가 그렇게 말했어.
지구에서 거기까지, 그렇게 먼 거리를 건너 나를 만나러 왔다고.
표면적으로는 ‘한 통의 편지’인 이 소설 속에서는 다양한 감정의 겹들이 펼쳐진다. ‘나’는 중력을 당연하게 느끼며 살아온 지구의 여자친구에게 무중력 상태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건넨다. 태생의 본질적인 차이에서 오는 다름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
우주에 나오면 위아래 방향이 없어져서 우주 멀미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던 너의 말이 떠오르곤 해. 예전에도 다른 사람들한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하려고 해본 적이 없었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도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가 않아. 아, 너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 같은 우주에 갇혀 사는데도 우리는 전혀 다른 우주에서 사는 것 같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깜짝깜짝 놀라기도 해. ―본문 중에서
또 우주라는 공간이 얼마나 넓고 아득한지, 그 무(無)의 공간 속에 조난당해 있는 듯한 기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대기가 없기 때문에 소리 없이 벌어지는 우주공간에서의 전투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아름답지만 차마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는 광경을 눈앞에 그리듯 묘사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어.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또 있었던가. 번쩍번쩍, 그 거대한 거리의 장벽을 가로질러갈 때마다 온 우주를 다 밝힐 듯 요란하게 반짝이는 우주의 빗줄기. 버글러 기동 중인 동료 함선들. 루시퍼 입자에 이끌려 아마도 연옥 입자를 짙게 흩뿌리며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에 양쪽 함선들이 내뿜는 마지막 불꽃. 이걸 너에게 꼭 한번 보여주고 싶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우주 어디에서도 다시는 이런 광경이 펼쳐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야 옳은 걸까. ―본문 중에서
천체물리학, 군사학 등 배명훈 작가가 꾸준히 탐독해온 지식들이 이야기를 탄탄하게 받쳐주어 우주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게 살아난다.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팽창된 우주 속에서 ‘나’와 ‘그녀’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들의 외로움과 사랑, ‘응답의 문제’는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더 아프고 절실해진다. 작가가 굳이 저 먼(모두가 멀다고 생각하는) 우주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놓은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시간과 존재, 사랑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는 이 소설은, 때때로 멈추어 우주와 인간, 사랑과 외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