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철학자가 쓴, 유쾌하고 다이내믹한 소설
― 희극적 비전, 견고한 서사, 능란한 구성과 인물 묘사, 도덕 문제에 대한 끈질긴 관심
철학도 출신의 작가가 쓴 소설이란 말을 들으면 독자들은 곧 난삽한 관념 소설이나 사변적 수기를 연상하기가 쉽다. 그러나 다행히도 또 신통하게도 머독은 이러한 우울한 예상을 뒤엎어 준다. 강아지 납치, 휴고와의 해후, 연설회에서의 충돌, 혁명 기념일의 파리, 심야의 병원 탈주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쉴 새 없이 다채로운 사건들이 일어나니, 독자는 긴장과 호기심을 놓을 틈이 없다.
이는 머독 자신의 소설관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 소설관은 그의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머독은 영어로 된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인 『사르트르―낭만적 합리주의자』에서 『구토』를 사르트르의 철학적 신화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인간의 가치를 탐구하는 데 있어 사르트르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끈기 있게 해명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경험한 패배와 상실의 고뇌에 의존하고 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극작가로서의 사르트르를 인정하는 대신에 소설가로서의 사르트르는 몹시 인색하게 규정한 것으로, 우수한 소설을 쓰려면 살아 있는 인간관계를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옮긴이 유종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헤미안적인 삶을 사는 제이크나 핀, 파격적인 휴고, 과격파 레프티, 희화화된 데이브, 도통한 듯한 팅컴 부인, 반속과 통속의 애너와 새디, 등 모든 작중 인물들이 신선하고도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문체는 경묘하면서도 정치한데 그 속을 깔끔한 서정이 줄기차게 흐르고 있다. 제이크가 파리로 가서 파리와 문답하는 장면이나 맥덜린의 봉을 놓고 상상의 날개를 펴는 장면 등은 발랄하고 세련된 시정(詩情)을 얻고 있어 일품의 산문시로 승화되어 있다. 독자들은 진정한 작가를 지향하게 된 제이크나 시계 제작공으로 자족하겠다는 휴고를 다시 대하고 싶은 심정이 될 것이다. (「작품 해설」 중에서)
[머독의 소설에서] 현실은 개인이 타인의 존재와 타인의 경험의 타당성을 승인함으로써 비로소 파악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개인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통해서 자유를 획득한다. 사랑은 개인들로 하여금 타인과 떨어져 있음을 이해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머독의 소설에서 사회는 각자가 우연한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풍요하고 모호하며 복잡한 환경으로 제시된다. 또 사사로운 인간관계의 상호 작용이 희극의 풍요한 원인이자 원천이 되어 있다. 희극적 비전, 견고한 서사, 능란한 구성과 인물 묘사, 도덕 문제에 대한 끈질긴 관심과 정신적 경험의 중요성에 대한 긍정이 머독을 영국 사회 소설의 전통 속에 자리 잡아 주면서 일급의 현대 영국 작가로 올려놓고 있다는 것이 비평적 정설이다. (「작품 해설」 중에서)
작가인 머독이 소설가의 특권인 허구 조성에 마음껏 재능을 발휘하면서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뜻밖의 놀라운 국면들을 찾아낸 덕분에, 철학적 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사색적 글쓰기에서 벗어나 인간들의 풍요로운 세계를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자세히 ‘핍진하게’ 담을 수 있었다.
자아 중심적인 세계관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풍요로운 세계
―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둘러싼 모험
소설의 주인공 제이크는 매사를, 그리고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인물들을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때문에 잇달아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제이크가 보기에 모두 예기치 못한 것들이 된다. 이렇게 언뜻 평범하고 무사해 보이는 일상세계의 저변에서 작가는 풍요한 또 하나의 낯선 세계를 펼쳐 보인다.
단적인 예로, 제이크는 옛 애인 애너를 다시 만나 그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아니 전보다 더욱 깊어졌음을 느끼며 그녀를 갈망한다. 그러나 우연히 재회한 휴고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제이크는 그것이 당연히 애너일 거라고 생각한다. 애너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질 만한 여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이크가 당초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휴고는 애너의 동생 새디를 연모하고 있었다. 제이크가 보기에는 경박하고 인정머리 없을 것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제이크와 휴고, 애너, 새디 네 사람의 사랑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이크는 애너를, 애너는 휴고를, 휴고는 새디를, 새디는 제이크를 사랑하는 사랑의 숨바꼭질은 머독이 말하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유머러스한 상황은, 제이크가 애초에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네 사람의 관계를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희극적 효과를 발휘한다.
번역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작업하는 작품의 문학성을 폄하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훤하다고 자부하면서 만사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정치적 신념은 없지 않다고 하나 의견을 표명하거나 정치적 행위를 하는 데는 소극적인 ‘지식인’의 모습, 이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 제이크의 모습인 동시에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기 본위로만 살아가던 제이크는 우연에 우연을 거듭한 모험들에 휘말린 끝에 진정한 인간관계란 무엇인가를 깨닫고 마침내 제대로 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언어와 이론의 그물을 헤치고 나서야 비로소 찾을 수 있는 진정한 삶
―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진실
작품의 제목인 ‘그물을 헤치고‘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 제이크가 휴고와 나눈 대화들을 바탕으로 출간한 책인 『말문을 막는 것(The Silencer)』에서 나온 것이다. 제이크와 휴고는 제약 회사의 감기약 실험에 실험 대상자로 참여해 연구소 기숙사에 만난 사이다. 제이크는 휴고의 화술과 인품과 사상에 매혹되었고 두 사람은 때로 밤을 새워가며 토론을 벌였다. 퇴원 후 제이크는 휴고와 나눈 대화를 자료로 해서 『말문을 막는 것』이란 대화체의 책을 써서 출판한다.
제이크가 매료된 휴고의 사상, 즉 『말문을 막는 것』에 ‘도용’한 휴고의 사상이란, ‘언어란 그 자체로 거짓말을 하기 위한 연장’이며,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은 모두 도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론과 일반론에서 멀어지려는 운동이 곧 진리에 가까워지는 운동이오.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은 모두 도피요. 우리는 상황 그 자체에 의해서 지배되어야 하고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이오. 이를테면 그물을 헤치고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아무리 기를 써도 이만하면 됐다는 정도로는 결코 근접할 수가 없는 것이오. (본문 중에서)
바로 이 대목에서 철학자 머독의 면모가 확인된다. 머독은 인간의 실재는 개념이나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활동으로는 포착할 수 없으며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진실에 접할 수 있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모델로 한 인물, 휴고
작중 인물인 휴고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모델로 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휴고는 비트겐슈타인을 연상케 하는 바가 있다. 오스트리아 산업계의 거물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점, 1911년에 영국에 건너와 러셀 아래서 철학 공부를 했으나 1차 대전 중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한 후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소박한 금욕주의 생활에 헌신한 점, 재산을 형제 및 친척들에게 양도한 후 철학을 포기한 것, 그 후 초등학교 교사, 건축사, 수도원 정원사로 일했다는 이력이 휴고의 그것과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현대 분석 철학의 원조라는 그의 두 저서 『논리 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의 경구적 문체는 『말문을 막는 것』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언어로 읽는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
이 소설은, 1957년 평론으로 등단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안목과 정치한 문장, 깊이 있는 분석을 발휘하며 왕성한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