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안병은은 상담하고 치료하는 아이들에게 유서를 받을 때가 있다고 한다. 왜 자신에게 유서를 주느냐고 농담처럼 물으면 “선생님과 죽음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13쪽)라는 답이 돌아온단다. 많은 아이가 자살을 생각하면서도 죽음에 관한 대화는 거의 나눠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말은 “왜 죽으려고. 죽지 마.”(15쪽) 정도다. 우리 사회에서, 특히 청소년 시기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금기시 되어 있다.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는 이를 부적응자로 대하고 특히 학교에선 곧바로 ‘문제행동’ 치부해 ‘개조’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채 병원으로 오게 된 아이들이 죽음 대한 태도가 성립되어 있을 리 없다. “죽고는 싶은데 나를 어떻게 죽일지 모르겠다. 죽고 나면 편할 텐데 죽는 순간까지의 고통은 무섭다. 죽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딱히 생각해본 적도 없다.”_37쪽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고민하지 않은 채 죽고 싶다고만 말하는 아이들에게 단순히 자살사고를 보이며,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산술적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안병은은 “자살사고라는 정신병리 소견에만 매달려 정신과적 증상으로 객관화하고 자살 위험 정도를 수치화”(19쪽)하는 것을 경계한다고 한다. 왜 죽고 싶은지는 나중에 묻는다. 아이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생각과 태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삶에 대해, 잃어버린 꿈과 아이들이 바라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된다.”(20쪽) 안병은은 아이들에게 재차 묻는다. “죽음을 통해 뭘 얻고 싶은 거니?”(15, 22쪽) 이 질문은 언뜻 보면 이상하다. 종교적인 질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다. 우리는 보통 죽음을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뿐더러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대부분 아이도 이 질문 앞에서 당황한다.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은 왜 죽음을 통해서만 무언 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분명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면서도. (“자살사고를 보이는 아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자살하는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않다면, 찰나에 끝난다면, 자신은 예전에 자살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한다.”(41쪽)). 자살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아이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방법으로 출구를 찾아 헤맸지만 실패했다고 말한다. 이런 실패가 쌓여 자살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작가는 이를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설득이 되지 않을”(21쪽) 것처럼 보인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병은은 열렬히 자살을 원하는 아이는 만나보지 못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살밖에 없다고 말하는 건 자살을 원하지 않으니 도와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살을 말하면서 삶을 거부하는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많은 진료를 하면서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건 “이 아이들은 죽음을 꿈꾸는구나”(22쪽)였다고 한다. 이때 아이들이 꿈꾸는 건 ‘죽음’ 자체가 아니다. 아이들이 꿈꾸는 건 ‘너무 힘든 지금의 삶’이 끝나길 바랄 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지금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고 싶은 바람을 내비친다. “공부에 대한 부담감으로 갇혀버린 느낌이 들었다. 남과 계속해서 비교하니 내가 없었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힘든 이 순간밖에는 없었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불안에 쫓기는 삶이 아닌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다.”_14쪽 “(자살은) ……정말 괴롭고 내가 혼자라고 느꼈을 때 생각나는 것. 내가 세상에 기댈 사람이 없을 때 생각나는 것이다.”_149쪽 “센터나 병원 선생님들이랑 있으면 살아야 할 것 같고, 혼자 있으면 죽어야 할 것 같다.”_77쪽 아이들은 자살로 삶에서 도피하거나 끝을 원하는 게 아니다. 이는 “뭔가를 바라는 하나의 행동”(23쪽)이다. 안병은은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저울에 올려보는 것이 아니라 소망하는 내일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모든 짐을 내려놓고 싶은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상태를 소망하고 꿈꾸는 것일 뿐이다.”(25쪽) 안병은은 아이들에게 재차 말한다. “육체를 죽여서는 그 꿈을 이룰 수 없다.”(23쪽) “평상시 힘들 때면 죽음에 집착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혼자 계속 생각해요. 죽으면 편하겠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제가 저를 죽일까봐 겁나기도 해요. 소원이 있다면 누군가가 저를 보호해줬으면 좋겠어요. 평범하게 살 수 있게요.”_24쪽 너의 전부를 죽이지 마라 새로운 삶을 꿈꿔본 적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우리는 긴 여행을 다녀오거나 직장을 옮기기도 하고 습관과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자신을 노출시켜 다른 자신이 되고자 한다. 이때 중요한 건 기존에 가진 삶의 습관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와 잘 결별해야 한다. “너의 전부를 죽이지 마”라는 말은 결별해야 할 것을 잘 골라서 죽이자는 의미다. “자신 안에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반복적으로 갈등을 유발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164쪽) 자신의 전부가 싫고 이를 몽땅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아이들은 무엇을 죽여야 할지 몰라서, 마주하는 게 버거워서, 힘든 것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자기 전체를 죽이려고 한다. 안병은은 “자살하고 싶다고, 죽음밖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아이들에게 말하곤 한다.”(165쪽) “너 전부를 죽이려고 하지 마라. 나와 함께 네가 정말 죽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그게 학교면 학교를 죽이고 마음속 깊은 상처면 상처를 죽여보자. 나는 네가 죽이고 싶은 것을 잘 죽일 수 있도록 돕고 싶다.”(165쪽) 이렇게 충분한 상담이 진행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자살연습’을 해보자.”(165쪽)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 초점적 자살. 둘째, 상징적 자살. 셋째, 은유적 자살이다. 첫째, 초점적 자살. 어릴 적 따돌림으로 고통받은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이때 그 아이가 죽여야 하는 건 자신의 삶과 육체 전부가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트라우마다. 안병은은 말한다.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상처를 파악해 그 부분에 집중해서 함께 소멸시키자…… 이 또한 자살이 될 수 있다.”(168쪽) 둘째, 상징적 자살. 『(죽음)을 꿈꾸는 아이들』에는 아이들을 억압하는 상징으로서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실제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입은 아이도 있지만, 상징으로서의 아버지는 “독단적이고, 명령하고, 억압하고, 폭력적인 그런 존재 ……성별에 관계 없이 또는 어른이든, 최근에는 아이조차도 스스로의 ‘아버지’”(118쪽)가 될 수 있다. “아빠라는 인간과는 단 한 순간도 함께 있고 싶지 않다. 언제 또 무슨 이유를 들어 욕하고 때릴지 모른다. 그 생각에 내 모든 정신을 쏟는다. 함께 있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다. 아빠는 가족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하고 물건을 던졌다. 어렸을 때는 밤마다 아빠가 오늘도 술을 마시고 들어올까, 아니면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고 들어올까 두려움에 떨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