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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쾌적한 도시를 위해 인간이 개조되는 현상을 ‘사회적 표백’이라고 설명. 소음과 느림, 서툼 같은 이질성을 지워버리고, 오직 도시에 어울리는 ’고도의 규칙‘을 지키는 ‘무해한 시민’만을 남긴다는 의미. 특히 서울과 도쿄는 쾌적함을 미끼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정작 그 안의 인간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압력을 견디다 못해 연소해 버리는 ‘거대한 블랙홀’. ‘서울이라는 좁은 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낙오하지 않기 위해’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옥죌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존재가 되라는 압력을 견디다 못해 질식해버린다. 블랙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서울과 도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에밀 뒤르켐이 ‘질서가 완벽히 유지된 수도원에서는 작은 일탈도 큰 죄악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듯, 지금 사회가 딱 그렇다. 예전 같으면 웃고 넘길 실수나 소음이 이제는 용서받지 못할 ‘민폐’가 되고, 척결해야 할 ‘악’으로 규정된다. 사회가 쾌적해질수록 ‘죄인’의 범위도 더 넓어진다. ‘노키즈존’ 논란, ‘운동회 소음’ 사과 사건 등은 통제 불가능한 존재를 우리 곁에 두지 않겠다는 사회적 선언과 같다. 도시가 쾌적해질수록, 이에 순응하지 못하는 약자들이 가장 먼저 배제된다.‘ ‘돈을 지불했으니 불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도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감각이 강해지며 나타난 현상이다.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깊게 침투하기 전인 1970년대에는 이런 태도가 지금만큼 당연시되지 않았다.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이런 사고가 빠르게 내면화됐다. ‘당연함’이라는 것은 시대적 맥락에서 용인되는 것이지, 이게 반드시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도한 ‘의료화(Medicalization)’ 현상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예전 같으면 조금 특이하거나 산만한 사람으로 넘겼을 이들을 이제는 ‘교정해야 할 환자’로 분류하는 식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의 범위가 극도로 좁아졌기 때문이다. 도시는 노동자에게 높은 수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이 기준에 미달하면 ‘빌런’으로 낙인찍히거나 병원 진단서를 받아야 한다. 의학이 발전해서 환자가 늘어난 게 아니라, 사회의 허용 폭이 좁아져서 ‘환자’가 양산되는 꼴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를 향해 ‘너는 정상인가’를 묻는 거대한 검문소를 운영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감각은 ‘폐를 끼치는 타인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내가 완벽한 무해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스스로 검열하는 만큼, 타인의 사소한 잡음이나 이질성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도시의 질서가 견고해질수록 타인을 감시하는 눈초리는 더욱 날카로워지고, 작은 일탈조차 용납하지 않는 ‘검문소’ 논리가 일상을 지배하게 된다.‘ ‘’무해함’을 추구하는 사회의 끝은 도시가 재생산 기능을 상실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고밀도 압박 속에서 ‘무해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매 순간 스스로를 검열하는 청년들에게, 통제 불가능한 존재(아이)를 책임지라는 것은 시스템과 사투를 벌이라는 말과 같다. ‘나 하나 무해하게 살아남기도 벅찬데, 어떻게 유해한 존재(아이)를 세상에 내놓겠는가’라는 저항이 저출산이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식이다. 결국 서울과 도쿄라는 블랙홀은 주변의 젊은 에너지를 빨아들여 화려한 빛을 내뿜지만, 그 내부에서는 인간이 소멸하며 사그라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