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동안 늙지 않고 살며 깨달은 것 ✍🏻

20 days ago

샐리 포터 감독의 1992년 영화 〈올란도〉를 다시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습니다. 국내에서는 32년 만의 재개봉인데요. 배우 틸다 스윈튼의 커리어 초반, 어디로 나아갈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죠. 원작 소설과 영화를 둘러싼 흥미로운 사실들을 소개합니다 ✍🏻



© 찬란



버지니아 울프의 러브레터, [올란도]

영화 〈올란도〉는 16세기 귀공자에서 여성이 되어 400년을 살아가는 ‘올란도’(틸다 스윈튼)의 일대기를 그립니다. 한 인물이 400년의 시간을 살아가며, 어느 순간 아무런 설명 없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다는 설정이 상당히 파격적인데요. 영화는 놀랍게도 한 세기 전인 1928년에 출간된,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버지니아 울프 [올란도]

 

[올란도]는 SF적 실험이나 형식적 도전으로도 주목받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버지니아 울프의 아주 개인적인 감정에서 출발한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죠. 책의 가장 앞장에서 ‘비타 색빌 웨스트에게’라는 문구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올란도]는 버지니아 울프가 사랑했던 인물인 비타 색빌 웨스트에게 헌정한 소설로, 일종의 러브레터로도 읽힙니다. 당시 비타는 가문이 소유하던 대저택을 사랑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속받을 수 없었는데요. 울프는 비타를 모티프로 한 소설 속 인물 올란도를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등장시켜 수 세기에 걸쳐 저택을 소유하는 캐릭터로 만들었죠. 비타가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영원한 형태로 돌려준 셈입니다.

 

비타 색빌 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올란도]를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관계를 시간과 성별을 초월한 서사로 확장시켰습니다. 현실에서 버지니아와 비타에게는 각자의 결혼 생활이 있었으며 사회적 제약 때문에 관계를 완전히 공개할 수 없었지만, 소설 속 올란도는 시간이 흐르고 성별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 사랑을 이어나가죠. 어떤 시대의 그 어떤 규범도 이 인물의 정체성을 완전히 제한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올란도]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재구성한 세계이자 젠더와 정체성을 해체한 선구적인 텍스트였어요. 

 

© 찬란

 

샐리 포터의 영화 〈올란도〉

샐리 포터는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스스로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해냈듯, 원작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독했죠. 샐리 포터는 원작 소설 [올란도]에서 줄거리보다는 리듬, 태도, 그리고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아이러니를 적극적으로 가져와 영화의 톤에도 반영합니다. 

 

© 찬란

 

영화 역시 소설처럼 400년의 시간을 가로지르지만, 이를 설명하거나 정리하지 않습니다. 대신 시대의 변화를 의상, 공간, 말투의 미묘한 변화로 드러냈어요. 특히, 저예산으로 제작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거대한 시대의 역사 대신 한 인물의 감각적인 경험에 집중하는 스타일을 택한 건데요. 영화에서는 각 챕터 앞에 사랑, 탄생, 죽음, 시 등의 소제목이 붙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구분선이 아니라, 영화가 각 시대에서 어떤 시선과 테마로 인물을 마주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 찬란

 

400년에 걸쳐 젠더를 넘나드는 한 인물을 연기한 틸다 스윈튼은 샐리 포터가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배우였다고 해요. 늘 자신을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틸다 스윈튼에게 〈올란도〉는 커리어를 열어준 작품일 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대화를 시작하게 해 준 영화라고 합니다. 

 

© 찬란

 

극 중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쿠엔틴 크리스프가 연기한 것 역시 상징적인데요. 당대 권력의 정점을 상징하는 엘리자베스 1세는 영화의 초반, 올란도에게 ‘늙거나 시들지 말고 영원히 지금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라’는 말을 남김으로써 올란도의 여정을 시작하게 합니다. 현실에서도 젠더 규범을 거부하는 삶을 살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배우였던 쿠엔틴 크리스프가 이 역할을 맡은 것은 단순히 남성이 여성 군주를 연기하는 것을 넘어, 권력에 성별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까지 이끌어내게 됩니다.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

 

© 찬란

 

주인공 올란도는 수백 년의 세월을 통과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물입니다. 샐리 포터는 젠더와 정체성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는 상태로 바라보고 영화를 제작했는데요.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 올란도의 성별보다, 오히려 변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올란도는 남성일 때도, 여성일 때도, 16세기에도, 현대에도 여전히 같은 존재지만 사회는 그를 다르게 대하니까요. 이 간극 속에서 영화는 유머와 질문을 동시에 유발하게 됩니다. 

 

© 찬란

 

극 중 올란도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해 제4의 벽을 깨며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샐리 포터 감독은 이 장치를 ‘관객과의 공모’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영화는 이런 방식을 통해 관객 역시 세계의 일부라고 말함으로써 지나간 시간들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시대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만들죠. 버지니아 울프와 샐리 포터는 우리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과 맥락 속에서 계속해서 다시 쓰이는 ‘이야기’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작가가 책을 출판하는 1928년 10월 11일에 이야기가 끝나지만, ‘올란도’의 여정은 현시대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논의를 남기며 2026년에도 스크린 위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같은 사람이야, 변한 건 없어.”




지금, 아래 관련 콘텐츠를 통해 영화 〈올란도〉와 관련된 작품들을 확인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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