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문학웹진 거울의 작가들과
듀나가 펼치는 ‘독재자’ 테마 단편 프로젝트
SF와 환상문학은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력과 설정으로,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을 더욱 정확하게 직시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우리는 그 안에서 유토피아를 보기도 하고 디스토피아를 보기도 하며, 때로는 그 둘이 혼재되어 현실보다 더 복잡하게 얽힌 만들어진 현실을 목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SF와 환상문학이 창안한 다양한 세계관과 소재는 시간이 흐를수록 또 다르게 다가오고 새롭게 해석된다.
《독재자》는 SF와 환상문학이라는 틀을 통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 소재는 바로 독재와 권력이다. 국내 최고의 환상문학 커뮤니티인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SF작가 듀나가 펼치는 ‘독재자’ 테마 단편 프로젝트인 이 책은 고대에서 미래,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권력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비유와 상징으로 현실사회를 날카롭게 고찰한 젊은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SF와 환상문학이 오늘날 우리가 현실에서 목격한 또는 우리 안에 잠재된 독재와 권력의 실체를, 9개의 단편이 치명적 상상력으로 파헤친다.
지금 당신을 지배하는 독재자는 누구인가?
듀나의 〈평형추〉는 하나의 국가 이상으로 거대한 다국적 기업을 그려낸다. 우연한 기회에 죽은 회장의 기억을 이식받은 ‘나’는 회장이 죽기 전에 숨겨둔 계획을 쫓는다. 나는 회장의 기억을 이용해 크게 한탕하려 하지만 오히려 위험에 처한다. 결국 나 역시 회장이 생전에 계획한 과정의 일부였고, 거대 기업의 시스템은 설계자의 의도대로 사후에도 정교하게 돌아간다. 〈평형추〉는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이 많지 않음을,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사회와 조직 속에서 더욱 생존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과정을 거대 기업의 우주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준다.
곽재식의 〈낙하산〉 역시 기업을 배경으로 삼은 이야기다. 매일 밤 비행기 폭발로 땅으로 추락하는 악몽을 꾸는 주인공은 기업의 연구원이다. 어느 날 새로 온 부소장이 제주도로 연구소를 이전한다는 발표를 한다. 이유는 경영 합리화이다. 하지만 합리화시키려 할수록 구성원들은 오히려 불합리한 상황에 처한다. 결국 합리화는 다양한 의견과 행동을 관리하려는 의도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소설은 전한다.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치 않는 연구소 이전으로 인해 악몽을 꾸지 않을 해결책을 얻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 익숙한 사람들이 독재자를 떠올리는 방법은 구체적인 개인보다는, 시스템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다. 김보영의 〈신문이 말하기를〉은 홀로그램을 내세워 여론 조작이 가능해진 근미래 사회가 배경이다. 눈으로 본 것, 냄새를 맡은 것조차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까?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신문”을 믿는다. 신뢰할 수 있는, 아니 믿음을 ‘부여’한 신문을 통해 그들은 ‘진실’을 보려 한다. 그러나 그 믿음 자체가 허구일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현대 사회의 독재는, 독재자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첨병에는 언론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실 그 언론조차도,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대중의 욕망이 감추어져 있다.
정세랑의 〈목소리를 드릴게요〉에는 보통 사람들을 중독 시키는 “괴물”들을 가둬두는 수용소가 나온다. 살인자를 만드는 목소리, 사람들을 선동하는 머리카락 등을 가진 사람을 관리하는 이들은 ‘일목인’이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원하는 요소 하나만 충족해주면 뭐든지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람들. 하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시스템에 동의하고 헌신하면, 세상은 평화롭다. 즉 평화로운 독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창규의 〈파수〉는 “생태계와 열역학의 순환을 이해 못한 사람들이 에너지를 마구 낭비”하여 파멸에 이른 세계의 이야기다.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세계와 파멸을 가르는 경계”에서 파수를 서며 철저하게 에너지 생산과 사용을 규제한다. 그리고 생산량보다 많은 에너지를 쓰는 사람들을 추방한다. “사람의 가치는 계산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잖아요. …… 지금 이 세계는 다릅니다. 우리는 수치로 환원할 수 있는 가치만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계는 합리적이지만, 과연 올바른 것일까? 그 답을, 작가는 한 인물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 “그걸 왜 너희들이 정하는가. 너희들은 공포심을 이용해 내키는 대로 사람을 재단하려 드는 것 아닌가.” 독재는, 공포를 조장하여 다수가 선택하게 만든다. 정교하게, 누구도 독재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법을 통해서.
임태운의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은 독재자인 폭군을 암살하려는 무수한 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암살을 위해 또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난처함에 빠지고 만다. 정보라의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에 등장하는 왕은 가장 강력한 독재자이다. 그는 시간과 기억까지 지배하기에 이 세상에 필적할 자가 없다. 그에게 적은 오직 자신이며, 그로 인해 파멸을 맞는다.
박성환의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 지를 수 없다〉는 인간의 모든 뇌와 의식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인 미래를 상정한다. 무한한 정보들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 신세계.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욕망하는 세상, 모두가 똑같이 꾸는 꿈”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 “증오와 혐오, 분노의 대상이었던 ‘그것’이 사실은 나의 혹은 당신의 그러니까 우리 욕망의 반영”이었음을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 지를 수 없다〉는 폭로한다.
정소연의 〈개화〉는 국가가 정보망을 철저히 차단한 사회에 반기를 든 사람들을 다룬다. ‘나’의 언니는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유기를 땅에 심는 일을 해왔다. 그것을 “다른 목소리가 파묻히지 않게 햇살을 심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가 독재자에 대해 상상하거나 조롱하는 이유는, 지금 이 세상에 물질화된 독재자가 확연하게 존재하지는 않지만 ‘독재’가 우리를 꽁꽁 옭아매고 있음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작가들이 말하는 독재자는 그 모습이 모두 다르지만, 저마다의 관점과 독특한 상상으로 현실을 돌아본다는 점은 모두 같다.
독재자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독재자를 인식하기 위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선택한 빨간약이 되어 다가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