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의 잔존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2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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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저서. 그는 '예술'이라는 단어보다는 '이미지'라는 단어를 훨씬 선호한다. 그 이유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자칫 미술사의 연구대상을 전통적인 의미의 순수예술로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방법론을 예술작품에 대한 양식사적 접근으로 축소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술'이 많은 경우 비정치적이고 순수하게 유미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반면, 그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제시하면서 상상력과 정치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권력이 정치적 실력을 행사하기 위해 광고와 매스컴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항권력도 미약하게나마 빛을 발하는 이미지를 통해 권력에 응수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미학은 '이미지의 정치학'을 표방하고 있다.

著者/訳者

目次

제1장 지옥? 11 ― 천국의 강한 빛(luce) 대(對) "사기와 기만을 교사한 죄인들"의 지옥 구렁의 약한 빛(lucciole) ― 세계대전 시기에 위아래가 뒤바뀐 단테 ― 1941년 한 젊은이가 반딧불을 보며 욕망과 순결의 미광을 발견하다 ― 한 정치적인 물음 : 1975년의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네오파시즘, 반딧불의 소멸 ― 새로운 독재가 파괴한 민중, 민중의 저항, 민중의 잔존 ― 실현된 지옥? 오늘날 파솔리니의 묵시록은 배척되고, 체험되고, 찬동되고, 추앙된다 제2장 잔존 43 ― 반딧불은 모두 소멸했는가?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존하는가? 드니 로슈가 전하는 산발성에 관한 시적이고 시각적인 경험 : 재출현, 재소멸 ― 소수적인 빛 : 탈영토화된 빛, 정치적인 빛, 집단적인 빛. 파솔리니의 정치적이고 성적인 절망. 현시의 현상학 없이는 살아 있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반딧불의 빛나는 몸짓 ― 발터 벤야민과 변증법적 이미지. 모든 상상의 방식은 정치를 하는 방식이다. 잔존의 정치 : 아비 바르부르크와 에르네스토 데 마르티노 제3장 묵시록? 65 ― 범례와 철학적 고고학을 통해 동시대성에 대해 질문하기 : 조르조 아감벤과 파솔리니 ― "경험의 파괴" : 묵시록, 유아기에 대한 애도. 파괴와 구원의 사이 ― 자크 데리다가 비판하는 묵시록적 어조. 테어도어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사유되지 못한 부활 ― 잔존의 이론에는 근본적인 파괴도 궁극적인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 대 지평 제4장 민중 87 ― 권력의 빛 대 대항권력의 미광 : 카를 슈미트 대 발터 벤야민. 모든 분리 저편의 아감벤 ― 아감벤이 슈미트와 기 드보르를 경유하며 말하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 갈채에서 여론으로. 통합과 부정으로 환원된 민중 ― 벤야민의 철학적 고고학은 타격과 대항타격, 갈채와 혁명의 "리듬"을 요청한다 제5장 파괴? 111 ― 이미지 대 지평 : 변증법적 미광은 산발적인 방식으로 "지평을 돌파한다" ― 이미지의 방책 대 방책 없는 지평. 퇴조는 소멸이 아니다. 편위, 파급 효과, 이탈 ―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 대 가치절하. 욕망의 불균질한 시간성 대 파괴와 구원의 어쩔 도리 없는 시간. 말과 이미지를 출현하게 만들기 제6장 이미지 129 ― 꿈을 출현하게 만들기 : 샤를로테 베라트 또는 반딧불-지식. 증언과 예견. 죽어가는 자의 권위 ― 어둠 속으로 후퇴, 미광. 전쟁기의 조르주 바타유 : 균열, 에로티즘, 내적 경험. 정치적 해명과 비지(非知) ― 파괴될 수 없는 것, 남아 있는 공동체 : 모리스 블랑쇼.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에 있는 일말의 인간성 : 한나 아렌트와 "대각선의 힘" ― 왕국의 빛 대 민중의 미광. 로라 워딩턴의 반딧불-이미지. 비관주의를 조직하기 옮긴이 해제 157 옮긴이의 말 208 찾아보기 213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회화, 조각 등 전통적인 미술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 전방위적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 나치 집단수용소 아우슈비츠의 특수부대 구성원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렵사리 촬영한, 넉 장의 초점을 벗어난 사진에 대한 디디-위베르만의 논고와 이 논고가 불러일으킨 격렬한 논쟁은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그는 약 30여 권의 저작을 발표했으며, 그 중 다수가 이미 영어ㆍ독일어ㆍ에스파냐어ㆍ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ㆍ소개되었으나, 국내에는 이번 책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이자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미술사학자로서 그의 연구대상은 회화나 조각 등 전통적인 미술사의 연구영역에 한정되지 않으며, 특히 그는 사진이나 영화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다. 그 관심을 보이는 방식도 사진이나 영화를 어떤 '예술작품'으로 한정하여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서 사진이나 영화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개별 장치이다. 즉 그는 '예술'이라는 단어보다는 '이미지'라는 단어를 훨씬 선호한다. 그 이유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자칫 미술사의 연구대상을 전통적인 의미의 순수예술로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방법론을 예술작품에 대한 양식사적 접근으로 축소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술'이 많은 경우 비정치적이고 순수하게 유미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반면, 그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제시하면서 상상력과 정치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권력이 정치적 실력을 행사하기 위해 광고와 매스컴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항권력도 미약하게나마 빛을 발하는 이미지를 통해 권력에 응수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미학은 '이미지의 정치학'을 표방하고 있다. 이미지의 정치학 ― 바르트식의 이미지의 '존재론'이라기보다는 푸코식의 이미지의 '고고학'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그에게서 이미지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 또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그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사진에 대한 저작에서 사진 이미지가 오로지 고유하게 과거에 귀속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즉 이미지를 과거에 배타적으로 귀속시키는 경우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현재와 무관한 과거의 고정된 대상으로 전락한다고 비판한다. 그에게서 이미지는 고유한 운동성을 지닌다. 이 명제는 단순히 영화처럼 운동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매체에 국한되는 명제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이미지에 해당되는 명제이다. 예컨대 사진은 사진을 찍는 행위와 분리될 수 없고, 그림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즉 이미지는 이미 어떤 선택의 행위이고, 편집의 행위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상상하는 행위, 즉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미지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행위를 읽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이미지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동사가 필요한 것이다. 즉 현전(pr?sence)보다는 현시(pr?sentation), 형태(forme)보다는 형성(formation)이 이미지를 읽기 위해 동원되어야 하는 동사적 표현들이다. 따라서 이미지에 관련된 그의 작업은 롤랑 바르트처럼 이미지의 '존재론'이라기보다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적 의미의 '고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반딧불'의 정치학 ― 동시대 정치철학적 담론과의 대결 『반딧불의 잔존』에서 그는 미술사학자로서 개별적인 이미지를 다루기보다는 철학자로서 동시대의 정치철학적 담론과 마주하고 경합한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기 드보르(Guy Debord),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등이 그의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조르주 바타유 등이 그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그는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민중과 공동체에 대한 사유와 연결하여 논한다. 이때 이미지의 정치는 인간의 모든 경험에 관련된 폭넓은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책의 핵심어는 '반딧불'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로 새겨 읽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언급될 수 있다. 첫째 그가 이 단어를 단테의 『신곡』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단테는 「지옥편」 제26곡에서 기술된 지옥의 여덟 번째 구렁에서 신음하는 죄인들을 반딧불에 빗대어 묘사하는데, 단테의 이 장면을 검토하는 것에서 저자의 반딧불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다. 둘째 '반딧불'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 '루치올라'(lucciola)에 담긴 독특한 중의성(重義性) 때문이다. 루치올라는 반딧불이라는 뜻을 지닌 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한 빛, 즉 미광(微光)을 뜻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어로 '빛'은 '루체'(luce)이며, '루치올라'는 '루체' 뒤에 뜻을 약화시키는 지소사(指小辭)가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는 '루치올라'의 이런 중의성에 착안하여 반딧불을 하나의 의미심장한 비유로 활용한다. 따라서 '반딧불' '약한 빛' '미광'은 모두 동일한 이탈리아어 '루치올라'에서 파생된 단어들임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독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반딧불' 또는 '미광'은 적어도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강한 빛'(luce)과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두 단어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단테에게서 강한 빛과 미광은 각각 천국에 도착한 영혼들이 누리는 영광의 빛과 지옥의 죄인들이 토해내는 고통의 빛인 반면에, 우리의 세계에서는 영광의 강한 빛은 오히려 부패한 권력자들을 위한 것이다. 강한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을 끊임없이 찬양하고 조명하며, 도처의 강한 서치라이트들은 그들의 반대자들을 절멸하기 위해 살기 어린 눈초리로 희번덕거린다. 이처럼 모든 종류의 강한 빛은 부패한 권력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저항하는 민중은 '약한 빛'(미광)의 처지가 되어 권력자의 감시를 피해 어둠 속을 떠돌아다닌다. 이처럼 지상의 세계에서 반딧불은 위험에 내몰린 민중을 비유한다. 하지만 반딧불들이 도망만 다니는 것은 아니다. 반딧불이는 미광을 발산하고 춤을 추며 서로를 부르고 사랑하고 짝짓고 번식한다. 그러므로 반딧불이들의 춤은 공동체를 만들려는 욕망의 춤이다. 이처럼 반딧불이들이 내뿜는 반딧불은 내쫓기는 민중의 비유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존하고 저항하는 민중의 비유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반딧불은 이미지에 대한 비유이기도 한데, 이는 산발적으로 미광을 발산하며 어둠 속에서 출현하는 반딧불이는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이미지도 반딧불과 마찬가지로 어떤 "번쩍임" 속에서 "단속적으로" 출현하는 것임에 그러하다. 그의 말대로 "이미지는 산발적이고, 취약하고,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소멸하고, 재출현하고, 재소멸한다." 잔존의 정치, 이미지의 정치 이처럼 반딧불을 구심점으로 삼아 민중과 이미지가 서로 조우한다. 이제 이미지의 정치는 미술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과 관련된 보편적 범위를 획득한다. 결국 정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상력을 통한 출현의 가능성이다. 이미지가 하나의 징후로 출현함으로써 연대기적 시간에 맞서는 시대착오적인 시간, "다른 시간", 대항시간을 열어젖히듯이, 민중도 역시 하나의 징후-이미지로 출현함으로써 정치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대항권력ㆍ대항정치를 열어젖힌다. 이렇듯 모든 정치적인 것은 이미지로서 출현한다. 이것이 저자 디디-위베르만이 역설하는 잔존의 정치, 이미지의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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