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There is a general lack of Art-house film 나는 영화광들이 현재 예술영화 결핍에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시국에 영화시장 자체가 무너져 가고 ott 플랫폼 맞춤 영상물(예술 영화들과 거리가 먼)들이 넘쳐 나는 시대에 각종 영화제, 제작/배급사, 평론/비평계에서 시장을 재활성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사회적 단절이 문화적 단절을 야기하고 미학적 성취와 방향성이 정반대인 창작물들이 매체를 범지구적 으로 집어삼키고 있으니 그 관성으로 각종 권위 있는 서구 영화계에서 항상 내놓는 방식 중 하나가 가깝게는 동유럽, 중동 멀리 보면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국가들의 아트시네마 발굴이며 이미 포스트모던 이후로 매년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제 3 세계 영화에 대한 열린 시선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필연적으로 조금은(?) 더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일본의 영화시장 사례를 들여다보자면 처참하다. 칼잡이들이 도깨비 떼려잡는 제패 네이션 씹덕물들이 일본흥행역사 자체를 갈아치우고 히어로 영화를 밀쳐(어벤저스 같은 히어로물이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안 통한다고 한다.) 내고 문화권력의 중심으로 고정된지 벌써 오랜 일이다. 일본의 수많은 영화 거장들은 이미 80~00년대에 늙거나, 병들고, 전설로 사라졌다. 요시다 다이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나카시마 테츠야, 고바야시 마사히로 등 후세대 영화인들의 영화는 세계 영화계가 관객이고 자국에서는 겨우 월급쟁이 감독을 면한 수준이거나 세계적 명성에 비해 외면당하는 상황이다.(물론 작품이 후진 경우도 많다.) 기타노 다케시 같은 다재능 천재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소노 시온은 일본 영화시장에 치가 떨려 미국으로 추노했다. 나는 죽어가는 일본 영화계의 라이징 스타로써 하마구치가 뽑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세계 영화계가 조금 밀어주는 느낌이 매우 강하다고 느끼고 있다. 이 영화는 일본의 버블시대 마냥 자기분수에 맞지 않게 과대평가 받고 있다. 하루키의 단편 <여자 없는 남자들>의 첫 번째 단편인 이 영화의 원작은 설령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아닌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불합리를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의 관념, 과거와 현재라는 관념, 이야기와 실체, 현실과 허구 등 이미 하루키스럽고 모호한 단편집 중 허나이다. 극작가 출신인 하마구치 감독은 하루키의 원작을 인공적으로 절개한 뒤 촘촘하게 얽혀있는 하루키의 이야기를 늘리기 위해 플롯을 어설프게 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박리되어 늘어난 허구의 공간 속에 본인이 <아사코>부터 덕질하듯 차용해온 체호프의 주제의식을 주사하는데 마치 이 영화가 하루키와 체호프의 이야기들을 보형물삼아 형식화하고 인공적이고 부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봉합함으로써, 마치 성형외과원장이 수술을 집도하듯 억지스럽게 재탄생된 미학적 결과물같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남는 거라곤 보형물을 제거하고 나면 들통나버릴 빈약한 이미지들뿐이다. 하마구치 그는 왜 체호프를 덕질하는가 ? 체호프 희곡을 읽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사실 주제도, 플롯도, 행동도 굉장히 불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체호프적 모호함(상징주의인지 인상주의인지 사실주의인지 모를 체호프의 언어)은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카>처럼 타인과의 관계에서 불완전한 이해와 그에 따른 언어와 감정, 행동들을 관념화하기 매우 좋은 특징이고 이미 수~~~많은 글쟁이들이 그 괴를 같이 걸어오거나 흉내 내기 일쑤였는데, 하마구치도 그저 그런 글쟁이 중 하나인 것이 들통났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사실 이미 <스파이의 아내>에서 들통났어야 한다.) 하마구치는 그저 그런 글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성취를 이루고자 했나? 바로 언어의 기능의 상실이다. 사실 이것도 이미 클리셰지만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의 부재를 표현하기 위해 하마구치(주인공 유스케)는 체호프의 <버냐 아저씨>를 해체한다. 노골적으로 다분히 정치적인 민족, 국가, 언어(심지어 수화까지)의 순기능을 해체시키고 허구의 공간 속에 배우들을 배치한다. 이런 전위적인 형식은 사실 이미 많은 그저 그런 작가들이 오능날까지 지겹게 다뤄오고 있다.(반면 상수형은 모든 언어를 해석하려 하는 빡대가리 평론가들 혼내기도 하고 그런 평론가들 욕하는 장면을 영화 속에 넣기도 한다.) 배우 들은 유스케(하마구치)가 시키는 대로 나라는 주체의 감정을 억제시키고 오로지 대본을 읽는 그 ‘행위’ 만을 요구받고 효율화된다. 나는 이 영화가 작가 본인(하마구치)이 이 영화를 통해 체호프적 주제의식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의 도로를 하루키라는 단편의 차를 타고 운전하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 원작에 없었던 혹은 비중이 적었던 인물들에게 살을 붙이고 캐릭터화하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나. 진.심.으.로 모든 인물 하나하나가 너무 기능적으로만 쓰인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프레임안에 기능적으로 들어왔다 빠지며, 주인공의 고뇌와 철학을 이해하는 과정으로써 떠나는 여행 중 마주친 NPC 수준으로 모든 캐릭터들이 통제되어 있고, 그것을 통제하는 방식이 바로 욕망의 부재이다. 아내 오토, 내연남 타카 츠키, 운전수 마사키, 이유나(캐스팅이 소냐인 것부터 수화로 버냐에게 마지막 명대사를 날릴 것이 이미 눈에 보이는 더 나아가서 그걸보는 관객 미사키가, 스크린 너머 관객들이 그것에 동화되어 인간 대인관계에서 오는 불합리함과 이해 불가능함, 그걸 이해하려는 절대적 합리성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삶은 고통이고 무의미이자 지옥이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된다는 점. 더 나아가 하루키의 단편처럼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잊기 위해 연기를 해야 하는 가련한 배우인 것이라는 점. )까지 모두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보이는 느슨한 각본이다. 아내의 자기 자신도 이해되지 못할 욕망은 아기의 유산이라는 대사 몇 마디 떡밥으로 흐지부지 넘겨버리고 버냐라는 허구 속 인물에 자신의 주체가 동화되어 욕망이 발동된 타카츠키는 주인공에겐 없는 비윤리적 폭력(몰카충 퇴치)을 저지름으로써 무대(이 영화)에서 기능을 다했으니 쫓겨나듯 대가리 숙이고 퇴장한다. 평생 부모에게 버림받고 학대받아온 마사키는 그 트라우마로 인해 입을 닫고 무뚝뚝하고 외모적으로나 내면으로나 꾸밈없고, 일본 여성 특유의 애교나 상냥하고 깍듯함이 없어진 다크 한 인물인데(내 기억엔 원작에서도 아마 그렇게 묘사됨) 뜨듯한 한식 식사 한 끼로 욕망이 사라지고 세상에서 제일 휴머니스트가 된다.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어딘가 푼수같고 순수한 여중생모드로 변질되는데.. 이것이 k-손맛의 위력인가 ? 어이가 없다. 사실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라는 인물도 바냐 못지않게 내적으로 결핍이 있는 캐릭터이다. 엘레나의 미모에 비교되어 자신이 짝사랑하던 시골의사와 엘레나가 입맞춤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존감 없고 못난 자신을 질책하던 소심한 인물이기에 원작에서는 소냐와 바냐의 마지막 명장면이 더욱 울림 있게 다가오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열등감과 결핍은 추하다는 듯이 삭제되고 긍정의 여신으로써 바냐를 구원해 준다. 왜냐면 소냐 역에 이유나는 장애인이라도 옆에서 묵묵히 기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해 줄 순박한 한국인 청년이 배치되어있으까(나는 이 만능 한국인 캐릭터는 진심으로 그냥 이야기를 위한 기능적인 장치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내면의 결핍을 오려다가 다른 캐릭터에게 떠넘긴게 하루키 원작의 미사키이다. 그리고 그녀가 소냐의 수화로 전하는 명대사에 동화되는 씬을 넣는다. 하지만 이건 두 캐릭터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창조했다기 보다 그냥 원래 캐릭터가 가지고 있던 이중성을 가위로 오려내서 두 인물로 나누고 그냥 어설프게 붙여낸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유스케는 어떤한가 ? 사회인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통제하며 와이프가 바람피워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부조리에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열패감이나 욕망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원작의 바냐는 그런 순응의 삶을 후회하고 소리치고 고뇌하고 감정을 표출하다가 결국 자신의 이상적 아이돌인 알렉산데르 교수에게 총을 쏘는데. 이 영화는 그런 욕망과 폭력성을 뚝 잘라다가 타카츠키에다가 덮어 씌우고는 "응 너 폭력 행했으니까 윤리적으로 결함이니 이 무대(영화)에서 빠져"라고 외치듯 머리 숙이고 사라진다. 기능을 다했으니. 좋은 캐릭터가 아니라 소모품이나 마찬가지 인것. 여기서 더욱 유치하게 다가오는 건 그 폭력성으로 혹시나 관객들에게 주입식으로 느끼게 해야할 극의 전반적인 정서를 방해할까봐 타카츠키가 구타하는 장면을 외화면으로 밀어넣고 화면에 담지 않음으로써 윤리적인 카메라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방식은 정말 보수적이고 엄근진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체호프의 <버냐 아저씨> 결이 아니다. 오래전이지만 체호프 전집을 읽었고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 희곡의 맹점은 주인공의 심리만 다루지 않고 인간존재의 부조리와, 현실과 이상의 괴리, 현실적인으로 순응할 것들과, 불가능할 것들 사이에서 고뇌하는 다층적인 인물들(인물들의 성별, 나이, 세대가 다양한 건 체호프의 특징이다.) 간의 갈등이며, 그것은 욕망과 그 욕망을 인식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을 이어내는 매우 수준 높은 극작술을 보여준 장막극인데 하마구치는 체호프의 권위를 영혼까지 끌어와 놓고는 겨우 자빠니즈 초식남 주인공 하나 질질 짜게 만드는 휴머니즘 결말(약간 저속한 표현을 쓰자면 쪽바리식 사회주의 휴머니즘, 혹은 조금 오버해서 카뮈식으로 표현하면 휴머니즘에 대한 철학적 자살이다. + 나는 하마구치 이 양반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엔딩을 영화 초반 신에 넣을 걸 보면 베케트의 부조리극도 이상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이 결말로 오기까지 3시간을 허비하니 이걸 보고 남는게 뭔가 싶다.… (3시간이면 드라이브 마이카, 버냐 아저씨 2권 읽는 게 훨씬 낫다는 소리.) 이 글을 쓰면서 점점 영화가 별로인 게 진짜 영화적인 게 없다.. 나는 일주일 전 부국제때 이 영화를 보고 매우 실망했다. 그리고 당시에 우연히 유튜브로 봉준호 x 하마구치 gv 하는 걸 보았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떤 장면을 왜 그렇게 찍었냐라고 봉 감독이 질문했는데 하마구치는 어떤 샷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사실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충격을 받았었다. 왜냐면 그 말을 듣고 드는 내 생각은 “도대체 이 감독은 영화를 왜 하려는 거지 ?” 였다. (마틴 맥도나, 찰리 카우프만, 아론 스킨, 폴 슈나이더, 하마구치 등등 그냥 띵작쓰는 글쟁이로 남아주면 안 되냐? ) 영화감독이 샷을 만드는데 관심이 없다니 영화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짓 아닌가 싶다. 나는 영화가 시선의 미학을 담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감독은 연극(희곡), 소설 등 타 네러티브 예술을 장면에 옮기기 급급한 장면 연출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상언어로, 자신의 시선을 프레임안에 담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인간은 왜 굳이 영화를 봐야 하는가 책 읽고 연극 보면 되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감독의 시선 그 자체로 하나의 고집스런 언어를 구축해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걸작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이 영화와 비슷한 형식을 1시간 30분만에 풀어내고 영화적으로 훨씬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하루키와 체호프를 걷어내면 남겨진건 샷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무려 3시간 런닝타임을 인물들의 대화를 클로즈업으로, 인물들을 행위를 연극적인 롱숏과 풀샷으로 담아낸다는 통속적인 문법과 샷과 샷을 붙이는 방식도 참… 너무 지루하다다…. <아사코>에서 몽환적인 롱테이크, 일본식 허무의 바다와 그 안에 여성이라는 피사체를 담는 씬, 사진과 프레임속 프레임 구도로 인물 담기, 슬로우 모션 등 그 패기 넘치는 연출들은 다 어디로 간 거냐… 이 영화 보고 아사코 오프닝씬만 봐도 동일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리듬이다. 이 영화에서 당장 인상적인 샷들이 아내의 외도를 겨울에 비추어 찍은 샷, 배에서 졸고 있는 마사키에게 담요를 덮어주는 샷에서 갑자기 차 안에서 주인공이 담요를 재끼며 잠에서 깨는 씬으로 점프 컷, 자동차 바퀴를 카세트 테이프로 매치 컷 하여 이어내는 트랜지션 등 뭐 가물가물 있긴 한데 문제는 그런숏들이 왜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함의하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말. 마치 이 영화에 존재처럼.. 왜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왔어야 하며, 이렇게까지 극찬 받을만 한가.. ? 평론가들/ 힙스터 영화광들 진심으로 권위라는 두꺼운 안경을 끼지 않으면 앞을 못 보나…? 라는 의심을 조심스레 해본다. 😒 + 하마구치 각본 <스파이의 아내>에서도 느낀 거지만 일본에 깔려있는 감정 억제와 체념과 순응의 정서 안에 갇혀사는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그 특유의 보수성을 뭉개버리듯 캐릭터 내면의 개인성과 욕망을 과감없이 표현했던 탈시대적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가 늘 떠오른다. 하마구치가 고작 하루키의 모던함과 19세기 후반 러시아 리얼리즘을 종결되고 과도기에 홀로 빛났던 황혼의 작가 체호프의 이야기를 영상매체로써 가까스로 '변주'하는데 그친다면 마스무라 야스조는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원작들을 매우 감각적인 몽타주와 전위적인 이미지로 '전복'하는 진정한 "씨네아스트" 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걸작들은 각본가를 따로 두긴 했지만 본인도 각색의 참여했고. 무엇보다 그의 언어가 너무 독보적이다. (모두 마스무라 야스조의 쌉변태적인 띵작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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