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나고

Merely Known as Something Else (英題)
平均 3.2
유정이 무대에서 애타게 찾던 날개 달린 개와, 수진의 근처에서 떠돌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검은 개와, 인주를 마주쳐서 당황하게 만들었던 검은 개는 과연 같은 개였을까?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은 세 인물을 걸쳐서 나오는 “개”라는 장치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영화의 전체를 아우르는 지 궁금해 했을 것이다. 영화를 전부 보고난 후 생각하게 된 나름의 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의미 없는 장치라는 것이 영화에서 웬 말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오히려 “연관성,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라곤 없다”는 주제를 철저히 노린 것으로 느껴졌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서는 철저히 이미지의 ‘반복’을 이용한다. 특정한 현상이 눈 앞에서 반복을 하게 되면, 그것을 마주한 논리적인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그 반복의 기저에 깔린 규칙성, 내지는 본질을 귀납적으로 유추해보게 된다. 이렇게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귀납적인 유추를 하고 현상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노는 듯하다. 극중 대부분의 인물들은 (세 주인공인 인주 수진 유정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조연, 단역들까지) 한 번씩 눈 앞의 상황을 파악했다고 자신해버리는 착각을 하는 과정을 한 번씩 거친다. - 수진 (공민정 역)은 불륜이지만 자신에게는 진실 되었었다고 믿어왔던 사랑이 훈성에게는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소재거리 정도라는 사실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본인이 착각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재밌는 점은 그 깨달음 또한 일종의 착각이고 (사실은 훈성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으며, 남들에게 알려졌다 것에 대한 핑계는 어떻게 말로 해명이 안 되는 지점이라는 부분에서), 그 훈성에게 다시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인이 선택한 착각 속에 안주하기로 한 걸로 보인다. - 인주 (정보람 역)는 자신의 죽을 병에 걸렸다는 착각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착각으로 인해 자신이 용기있게 저질러버린 사랑 고백을 러닝 타임 내내 수습하는데 애를 먹는다. - 자신이 시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병원에서 돌아가는 인주가 길 가던 아저씨와 대치했을 때의 상황도 재미있다. 나 시한부요! 하며 쏘아댈 때의 인주는 곧 죽을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 착각 속에 아직 남겨있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저 상황을 단순하게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영화 속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 극중에서 연기를 업으로 삼고 있던 유정 (정회린 역)은 같은 대사를 다르게, 두 번 보여준다. 런닝 타임 초반에, 오디션씬에서 치는 대사는 마치 피에 홀린 듯한 미친 사람, 장르 영화 속에서 남들과는 굉장히 다른 삶을 살고 있을 법한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준다. 피다! 피! 하는 텍스트가 마치 당연히 아주 극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 나올법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한참 후 생각보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무기력함에 괴로워하던 유정은, 고양이가 할퀸 아주 작은 생채기의 피를 바라보며 똑같은 대사를 새로운 깨달음을 장착하곤 아주 다르게 읊는다. - 유정은 영화의 주제를 극중에서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카페에서 정은에게 <밤에 커피를 마시는 행동을 보여주고> 비슷한 시간에 <울렁거리는 모습>도 보여주면 정은으로 하여금 두 눈 앞의 현상에서 인과 관계를 만들어내고, 정은에게 유정은 밤에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거냐고 물어본다. - 유정과 교제 중이던 우석 또한 그녀와의 관계에서 불쌍하게 착각을 하고 만다. 유정은 과거에 자신이 만나던 정호의 영향을 받아 우울하고, 우석과의 관계에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우석은 자신의 철 없는 모습 때문에 그녀가 이 관계에 권태를 느끼는 것이라고 착각한 채, 이 사랑의 메타포로 홀로 여기고 있는 죽어가는 식물을 열심히 살려낸다. 하지만 유정에게 죽어가던 식물은 다시 살아나건 그대로 죽건, 우석과의 관계와 또 자신과는 무관한 식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유정은 우석을 그러한 자신만의 착각 속에 내버려둔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에서 주어진 현상들을 보며 착각하는 존재들은 극중 인물들만이 아니다. 그 사람들의 착각, 또 진실보다 차라리 착각의 상태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인물들을 지켜보며 안타깝게 여기던, 혹은 조소를 짓던 우리 관객들 또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임을 영화는 철저한 비틀기와 함정들을 통해 경험시켜준다. 초반부에 얘기했던 검은 개도 그렇고, 세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정호”라는 이름 또한 그렇다. 인주가 짝사랑하고, 수진과 교제 중이던 정호를 보며 유정과 함께 나오는 씬은 없지만 우리는 아주 당연히 유정의 전남친인 “정호”라는 이름이 같은 존재일 거라고 내내 착각을 한 채 영화를 따라간다. 영화라면 무릇 그래야 하니까, 세 주인공을 아우르는 한명의 남자가 가장 말이 되니까말이다. 그 믿음을 단순히 ‘동명이인’이었다는 반전 아닌 반전으로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관객을 허탈하게 할 때, 우리는 극중 인물들이 착각을 하다가 진실을 깨달으면서 오히려 충족보다는 결핍이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우리도 비슷하게나마 체감해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끔은 진실보다 착각이 더 말이 되니까, 그게 더 받아들여지기 편하니까 말이다. 가끔은 새벽까지 힘든 노동을 하다가 돌아왔을 동양인 청년에게 자신의 비싼 가구들을 맡기고 생을 마감한 암스텔담의 할아버지의 착각이, 기왕이면 나의 손금이 무병장수를 의미하리라 믿는 착각이 더욱 속 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민주의 작품이 파편화가 되어 기획된 것이리라 믿고 있는 전시회의 관람객들에게, 그것이 의도치 않은 파손으로 인한 결과물이었다는 진실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영화는 그렇게 후반부에 이르러 한 골목에서 두 명, 세 명의 사람들이 연달아 주저앉아 신발 끈을 묶고 지나가는 씬을 보여주며, 우리는 여지껏 본능적으로 그 길목에게 이유와 책임을 묻고 있었던 꼴이라며 놀리는 듯하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은 단순한 나열일 뿐, 태초부터 있던 진실 따위와는 무관하다. 귀납적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착각이다. 최초의 진실이었다고 믿었던 것은 새로이 나타나는 수많은 현상들로 인해 뒷전으로, 뒷전으로 무한히 밀려나며 우리에겐 “다른 것”이 각자의 새로운 진실로 자리 잡게 된다. - 2024 BIFF에서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