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뱀’이라 부르겠다 하면, 그래, 그러라고 해라.
영화 <드라큘라>와 <왓 이프>에서 보고 무척 매력적이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사라 가돈이 주인공 ‘그레이스’를 연기한다. 위 두 작품에선 딱히 연기력이 발휘될 역할들이 아니라 몰랐는데, <그레이스>에서 보니 정말 엄청난 연기력의 소유자였다! 눈빛이 무척 좋고, 배우에게는 목소리도 중요한데 목소리가 섬세하고 차분해서 나레이션이 많은 이 작품에 잘 어울렸다.
40분 남짓으로 각 에피소드가 짧은데다 6편뿐이라 일요일 낮에 틀고 보기 시작해서 저녁이 되기 전에 다 봤다. 사건이 계속 터지는 박진감 있는 쇼는 아니지만 흡입력이 있고 스토리에 힘이 있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정말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오해인지, 그것도 아니면 일부만 참여했거나 방관한 정도였는지, 그 진실이 궁금했으나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드라마는 ‘그레이스’의 범죄가 사실이었는지, ‘그레이스’가 석방되는 게 옳았는지 틀렸는지와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만들어진 게 아니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성에 의해 끊임없이 억압받고, 규정되고, 짓밟히며 존재해야 했던 여성의 삶을, ‘그레이스’라는 한 인물을 통해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일부러 ‘그레이스’의 유무죄 여부를 알려 주지 않는 것이라고도 해석했다. 이 드라마 속 수많은 남성들은 ‘그레이스’라는 사람 자체를 알아가려 하는 대신, 성적 도구로서 접근하고 이용하려 들기만 한다. 그러니 적어도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우리만이라도 ‘그레이스’를 멋대로 판단하지 말자는 의도지 않을까.
모든 역사는 남성에 의해 쓰여져 왔다. 남성중심 사회였으니 교육도 대접도 모두 남자가 받으며 남자들은 더더욱 승승장구 하여 사회와 정치, 역사 등 모든 것의 중심에 섰다.
반면 교육받지도 대접받지도 못 하고 자란 여성들은 남성의 뒤에서 집안을 돌보거나 그들의 뒤치닥거리나 하는 게 그나마 나은 삶이었다. 그마저도 여건이 안 된다면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거나 몸을 팔며 살아야 했으니까. 그 시대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저 그런, 사소하고 천한 것들뿐이었으니까.
아버지도, 교도관도, 심지어 같은 여자도, 여성(‘그레이스’)에게 ‘whore’, ‘slut’과 같은 성적인 욕을 얼마나 쉽게 하는지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 시절, 여성의 몸은 수단이었고 도구였다.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의 몸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성들은 여성의 몸을 수단과 도구로 취급한다. 여성 본인이 그것을 원치 않고 피하고 싶더라도, 남성이 강제적으로 취하고 까내리면 그만이다.
극중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그레이스’를 비롯한 여성들에게 성적인 농담을 내뱉고, 탐하려 하고, 애정의 주인이 되길 희망했는지를 보면 끔찍하다. 어느 한 놈도 ‘그레이스’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 다가선 적이 없다. 심지어 그나마 멀쩡한 줄 알았던 ‘조던’도 ‘그레이스’를 향한 성적인 욕망을 어쩔 줄 몰라 힘들어 했다.
왜 여성은 항상 성적 욕망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역사 속에서, 또 각종 매체와 문학 속에서 여성을 늘 싸구려로 다뤄 왔기에 그런 걸까? 여성이 남성보다 더 월등하게 역할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업적을 남기는 서사보다, 남성의 뒤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그들을 즐겁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로 작용하는 서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남성보다 여성을 향한 성적 잣대와 프레임이 더 강력하고, 그와 관련된 표현들이 더 많은 걸까? ‘김치녀’, ‘된장녀’, ‘창녀’, ‘꽃뱀’, ‘맘충’, ‘문란하다’, ‘발랑 까졌다’, ‘발칙하다’와 같은 표현들은 대부분 여성을 향해서만 쓰이며 남성을 향한 대구의 단어들은 찾기 어렵다.
여성은 역사적으로 늘 변방에 있어 왔다. 만일 여성이 예전부터 남성과 똑같이 교육받고 집안에서도 똑같이 대접하는 등, 남성과 다를 바 없이 자라고 사회에 진출하고 일해 왔다면, 세상은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초중고뿐 아니라 대학교나 입사 시험에서도 그러하듯 여성의 성적이 더 높다. 역사 속에 쓰인 수많은 남성의 이름은 여성의 것으로 대체되었을지도 모르며, 각종 임원에 여자들도 많이 올라가 있어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고 자리잡기가 지금처럼 어렵지도 않았을 거다.
남성과 여성은 똑같이 아이를 낳고 육아하고 살림하며 지내고, 그러니 여성이 출산 이후 경력이 단절되는 일도 없었겠지. 예로부터 남성과 여성이 똑같이 돈을 벌고 사회에 진출해 왔다면 여성에게 자궁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임금 차이가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둘 다 돈을 쥐고 생활함으로써, 데이트 비용이나 결혼 비용과 같은 걸로 갈등이 빚어지는 유치한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현실은 슬프게도,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회다. 가부장의 잔재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 남자는 더욱 위로, 여자는 그렇지 못하도록 ‘유리천장’을 만든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다.
‘그레이스’는 홀로, 여성의 몸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악착같이 일하고 주변 남성들의 눈치에 맞춰 가며, 독하게 버텼다. 똑같이 버티려 했던 ‘메리’나 ‘낸시’가 결국 남성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그레이스’는 결코 남성에게 곁을 내어 주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약속하려 들든, 믿지 않았다. (당돌하고 당차고 꿈 많던 소녀인 ‘메리’가 남자 하나 때문에 어떻게 인생이 망하게 됐는지를 보라.)
남성은 여성에게서 약탈하는 존재다. 그들이 원하는 건 그녀와 함께하는 안정된 미래도 핑크빛 사랑도 아니다. 그들은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써 소비하고, 흥미가 떨어지면 다른 상대로 옮겨 갈 뿐이다. 그걸 잘 알고 있던 ‘그레이스’는 남성 인물들에게 적당히 맞춰 주는 법을 이른 나이부터 터득했다.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제이미’에게 적당히 맞춰 준다. 그 시절 여성이 혼자의 몸으로 살아남는 법은 그것 아니고는 없으니까. ‘그레이스’에게는 그것이 나름의 생존 방법이었다.
‘그레이스’의 삶을 보며 지금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비단 여성을 향한 대접뿐 아니라, 신분제나 자본의 논리에 관한 것도 그렇다. 지금은 신분제가 없다지만, 극중 여러 주인들이 ‘그레이스’를 돈 주고 사서 쓰며 이런저런 잡일과 더러운 일을 시키는 것처럼, 지금 사회에서도 돈만 있으면 사람을 거느리며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킬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점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연출도 좋고 분장도 좋았다. 하녀로 일할 때, 감옥에 있을 때, 몇 년이 지나고 석방됐단 소식을 들을 때, 그보다 더 몇 년이 지난 후 ‘제이미’와 지낼 때의 모습이 정말로 모두 달라 보이고 점점 더 나이가 들어 보여 신기했다.
책이 원작이라 거의 그대로 따 왔을 나레이션들도 무척 좋았다. 나레이션 때문에 굉장히 집중해서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그레이스’로 분한 사라 가돈의 연기는 모두 좋았지만 최면 장면에서 가장 소름이 돋았다. ‘메리’와 함께하던 가장 행복했던 시절, ‘메리’가 죽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던 얼굴, ‘낸시’ 밑에서 일하던 때, 담담하게 의사에게 과거 이야기를 털어 놓는 장면 등 모두 느낌과 분위기가 확확 달라졌다. 덕분에 쉽게 그 감정에 빠져들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자를 쉽게 뱀에 비유한다. 뱀이 가진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 여성이란 존재를 그들이 어찌 규정하고 판단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레이스’는 과감히 자신의 첫 퀼팅 이불에 뱀을 만들어 넣는다. 그들이 여성을 뱀이라 부르고자 한다면, 그러라고 해라. 어차피 상관 없다. 뱀이 돼야 한다면, 반드시 독사가 되어, 여성을 우리에 가두려 하는 자의 목을 물어 버릴 테니까.
2018.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