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처음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을 때, 적어도 3화 까지도 이 드라마가 싫었다. 엠마 스톤을 보려고 보는 듯했다. 견디듯 이 드라마를 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시작한 것을 끝맺어야 한다는 심각한 강박증에 시달리므로,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싫은 걸 견뎌낼 생각에 겁이 나지만 받아들인다. <매니악>을 다 본 지금의 나는 내가 이 드라마를 온전히 견디고 받아들였음을 느낀다. 충만함이 아니라 허전함의 긍정성을 느낀다. 허전함을 오랫동안 쫓았다. 내 공허를 당신의 공허로 받아들이게 될 때가 있다. 어느날 갑자기 그런 순간이 도래한다. 왜색이 짙은 것 같아서, 고작 10화 밖에 안 되는 미니시리즈에 거의 3,4화를 난해하게 낭비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애니와 오언처럼 정신병적인 나는 나의 병적인 증상으로 이 드라마를 견딜 수 있었는데, 다행이란 생각을 하는 중이다. 끝내 나는 동화되었고 스며들고 말았다. 내가 동화되고 스밀 수밖에 없는 서사였다.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드라마의 단점이 회차를 거듭하며 소거되는 것을 보았고 해소되는 것을 보았다.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이기까지 한 슬픔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 던지길 반복했다. 어떻게 해야 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왜 나는 슬픔에 다른 감정들을 잡아 먹혀야 하냐고. 슬픈 얼굴로 질문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애니가 그랬고 오언이 그랬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듯 보이지만 결이 같다. 나는 오언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을 때가 있고, 애니처럼 발광할 때가 있다. 서로의 이면에 서로가 있으므로 애니와 오언은 어떤 환각 상태에서든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유대를 이해한다. 이성적인 논리를 완전히 잊고 그저 나처럼 슬픈 저 사람을 덜 슬프게 하는 것이 나의 슬픔을 약화시키게 될 거라는 확신 속에서 오언은 아마도 애니를 속절없이 구하고 돕게 되었을 것이다. 애니가 오언을 구하러 와 “So what?”이라고 말했을 때, 그 순간이 좋았다. 누군가 나를 구하러 와 나를 이해한다는 말 대신 “뭐 어때?”라고 말해준다면, “누구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며 말해준다면, 아마도 이번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도망치고 싶다. 달아나고 싶다. 얼어붙은 채 이곳에 서 있는 나에게 도망가자고 말해줄 사람을 나도 모르게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좋아하게 됐다. 솔직해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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