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S

夜と霧
平均 3.9
실제의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하여 만든 극영화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일정 수준의 간극이 존재한다. 극영화에서 현실의 사물은 인공적으로 가상화되어 재현될 뿐만 아니라, 핍진성을 보장하는 이야기 구조와 영화적 장치를 활용한 극적인 구성을 통해 새로운 존재 목적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각종 역사적 사실과 실화를 소재로 다루는 경우에는 항상 영화와 현실의 간극을 경계하여야 한다. 무엇을 찍을까에 대한 고민에 앞서 어떻게 찍을까에 대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카메라 시선에 대한 폭력성과 피사체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태도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결론적으로 카메라 시선이 태생적으로 가진 ‘재현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행위다. - 영화계에서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다룬 영화는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1993), 로베르트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1997), 그리고 비교적 최근 작품인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2015) 등이 있다. 위 영화들을 비롯한 홀로코스트 영화는 늘 재현의 윤리와 같은 각종 잣대와 관점들이 부차적으로, 때론 중심 화두가 되어 영화 전체에 대한 논쟁과 질문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어떤 영화는 뛰어난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옳지 못한 윤리성에 대해 심한 지탄을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영화는 다소 부실한 완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으로 상찬받기도 한다. 이런 영화의 윤리성에 대한 가치판단의 몫은 관객의 것이다. 만약 ‘재현 불가능성’에 도전하여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을 일컬어 ‘감독의 윤리’라고 말한다면, 그 영화를 선택하고 영화의 윤리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관객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를 주체적으로 관람하는 자세를 갖고 함께 윤리성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불가피한 난제로부터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감독은 도대체 어떻게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적 현실을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알렝 레네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밤과 안개>(1955)는 홀로코스트를 가볍게 극화/재현하지 않으며, 잊힌 역사적 상흔을 다시 기억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찰과 각성을 윤리적으로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주요한 홀로코스트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 노파심에 말하자면,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 영화가 재현의 윤리에 있어 무조건적으로 뛰어난 윤리를 지녔다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픽션과 논픽션을 떠나서 무언가를 찍어야 하는 카메라 시선에는 기본적으로 피사체와 객관적인 거리 두기가 전제된다. 따라서 다큐멘터리 영화 또한 누누이 말하는 윤리적인 질문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말하자면 도움이 절실한, 혹은 상황이 급박한 피사체를 앞두고 전혀 개입하지 않은 채 관찰적 양식의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피사체의 고통을 방관하고 착취하는 직접적인 폭력이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밤과 안개>가 윤리적인 이유는 카메라와 영화가 스스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재현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음에 있다. 서사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파국을,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공포와 참상을 겸허히 혹은 무력하게 감당하려 한다. 그 대신에 과거의 뉴스릴 화면과 스틸사진을 흔적만 남은 현재의 황폐한 이미지와 병치시킴으로써 더 완강하고 솔직한 태도로 진실을 응시하려 노력한다. 함부로 비극을 재현하고 전시하여 ‘안다’는 단언을 손쉽게 내뱉기보다, 비록 사라진 진실에 다다를 수 없더라도 ‘알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형식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윤리적 의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설사 진실에 닿고자 하는 노력이 진실의 표면, 외형, 껍데기에 그치더라도 말이다. - 그런데, 바꿔 말하면 어쨌든 <밤과 안개>도 안타깝게 여타 수많은 영화들처럼 진실을 응시하는 데 실패한 영화다. 진실을 응시하려는 노력은 결국 진실을 응시할 수 없는 근본적 장벽 앞에 무력해진다. 그렇다면 진실을 포착할 수 없는 실패한 영화에 잔존한 것은 무엇일까. 끝없이 무력한 감정이 떠돌다 닿는 곳은 어디일까. 여기서 <밤과 안개>가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를 병치시키며 진행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물리적 시간차에 따른 차이를 병치하는 것은 자연스레 괴리를 만들어낸다. 특히 홀로코스트와 같은 끔찍한 비극이라면 그 괴리는 더 심각하다. 다시 말해, 과거 수용소 생활 및 모습에 느끼는 끔찍함과 현재의 표면을 훑을 수밖에 없는 무력함은 서로 영향을 주며, 결국 시간적 격차에 따른 괴리감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괴테 떡갈나무가 포로수용소의 나무가 되고, 포로수용소의 타들어 가는 목소리와 바스러진 신체는 묻혀 어느새 풀이 무성한 흔적만을 남기며, 참혹한 비극의 현장은 인파가 몰리는 관광지로 변하는 괴리. 괴리감은 불가항력적으로 관객의 폐부를 뚫는다. <밤과 안개>는 그러한 괴리감을 현재의 시점에서 프레임을 이용한 카메라의 운동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전달하려 한다. 바로 영화의 첫 숏과 두 번째 숏, 그리고 세 번째 숏이 그 괴리감을 간접 전달하는 방식의 단적인 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숏에서 프레임에 포착되어 있는 평화롭고 따스한 정경들이 카메라가 조금 움직이는 순간,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장소로 탈바꿈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이 얼마나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철조망을 비롯한 경비지대가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얼마나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고 있었는지 카메라의 운동을 통해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 그런 의미에서 <밤과 안개>는 과거와 현재의 간극 중간 지점에 서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재현 불가능성을 고백하고 포착할 수 없는 진실에 맞서 사력을 다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건넨다. 과거의 상흔을 부여잡고 중간 지점에 서서 현재의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한다. <밤과 안개>가 과거를 보여줄 때는 문학적 수사를 배제하고 간략한 설명과 당시의 뉴스릴 화면만을 사용했던 것과 달리, 현재 시점의 장면에서는 유독 강렬히 호소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다. <밤과 안개>가 결국 시적 내레이션의 영화라고 불리는 까닭은 우리가 망각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호소하며 각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알렝 레네 감독이 인간의 의식을 다루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상호작용에 대해 탐구하는 성향의 영화를 만든다는 점에서 현실과 영화 사이 시간의 중간 지점에 놓인 <밤과 안개>의 위치는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다시 말해 <밤과 안개>는 홀로코스트 포로수용소의 진실을 응시하려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대한 인간의 기억과 과거를 잊을 수밖에 없는 망각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전후 재판의 뉴스릴 화면에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카포와 사령관의 뻔뻔한 모습은 비수처럼 우리에게 날아와 망각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방금 작성한 문장에서 언급한 망각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 모르는 전범들의 뻔뻔한 기억력을 탓하고자 사용한 의도가 아니다. 잠깐 문장에 쓰인 망각이라는 단어의 사용 의중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을 떠올려보자. 아이히만 재판에 참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한나 아렌트는 대량학살범인 아이히만이 이념에 광분한 잔혹한 악마의 형상이 아니라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의 평범한 인상이라는 사실에 의아했다. 아이히만은 수많은 질문에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는데, 이 대목에서 앞서 이야기한 망각이라는 단어의 사용 의중을 도출하고자 한다. 바로 아이히만과 나치 전범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행위의 책임을 망각한 것이다. 주체적 사유가 결여되어 껍데기가 된 인간이 조직과 신념, 역사의 굴레 속에 기계 톱니바퀴가 되어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우리는 아이히만을 반면교사로 삼아 끔찍한 역사의 재발을 막아야할 것이다. 다만 반드시 주의할 점은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해야한다.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행위를 포기한다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되뇌어야 한다. 어쩌면 영화 <밤과 안개>가 역사적 상흔의 표면을 훑는 방식으로 재현 불가능한 과거를 진실하게 성찰하려 했듯이, 우리 또한 홀로코스트를 잊지 않겠다는 국가적 차원의 거시적 행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홀로코스트가 발생한 근본적 배경과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억하는 미시적인 차원의 개개인의 의식 각성이 더 중요할 것이다. - 갑작스러운 비약일지도, 혹은 영화와는 무관한 긴 사족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영화 속(현실의) 비극이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는 최악을 막아보고자, 현대 사회와 시민들에 대한 푸념과 나 자신에 대한 주체적 반성을 개인적 의식 각성 차원에서 잠깐 늘어놓겠다. 물론 나는 사회적 지식과 이론, 통찰을 전혀 가지지 않는 무지렁이에 가깝고 이러한 졸견이 누군가에게는 우스우면서 괘씸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히려 세상과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을 토대로 견해를 밝히는 것이 아닌, 단지 보통의 20대 사람으로서 겪고 느끼는 직감에 대해 조금의 거짓도 없이 서술하겠다. - 요즘은 취향 존중의 시대다. 개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존중하며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만연해있다. 그런데 취향 존중이라는 단어에는 괄호로 생략된 수식어가 존재하는 듯 하다. ‘극소수를 제외한(이를테면 1% 정도의 인원)’ 취향 존중. 즉,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보편적 절대다수의 이들만이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인정해준다는 말이다. 여기서 1%라고 규정한 극소수의 인원은 범죄나 사회 통념상 옳지 못하는 비도덕적인 행위 및 취향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저 99%의 보편적 절대다수의 인원들처럼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이들을 뜻한다. 가령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본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불리는 삐딱한 시선의 오타쿠나 씹덕과 같은 칭호. 군대 내의 그린캠프 병사에 대한 심각한 일반화(물론 그린캠프의 경우는 취향의 관점이 아니라 건강과 능률 혹은 개인 성향의 관점을 말한다.) 방금 언급한 두 예시에 속하는 인원들은 조금도 존중받지 못한다. 적어도 내가 본 세상에서는 그렇다. 나는 이렇게 취향 존중이라는 허황된 허울 아래 숨은 이면이 정말 무섭다. 우리는 취향 존중과 동시에 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취향 존중과 혐오의 공존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 물론 누군가의 취향 및 성향이 다른 누군가에는 불쾌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건 인간인 이상 당연하다. 나는 모든 사람의 취향을 무조건 존중하고, 옳다고 이야기하는 불합리한 이상론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위 아 더 월드!’에 가까운 강압적인 취향 존중을 외치는 사회 풍조이면서, 역설적으로 동시에 1%의 인원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조리돌림 당하고, 심각한 일반화를 당하며 존중의 대상에서 일체 배제된다는 사실이 무서운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을 배제함으로써 남은 99%의 사람은 취향의 정체성과 위치를 공고히 하며, 그들만의 끝없는 리스펙과 자아도취의 공간을 형성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1%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일까. 그 취향 존중의 범위가 몹시 의심스럽다. 이어서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을 고백하자면, 나 역시도 99%의 인원에 속할 것이다. 사실 이렇게 긴 사족을 다는 이유도 어떤 핑계나 기만에 가깝다. 나는 늘 이런 주장을 하기에 앞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혹은 그런 취향을 갖고 있진 않지만)’이라는 매우 이중적이고 치졸한 미사여구를 붙여 나 자신에 대한 해명을 우선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미사여구는 사회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인식에 대한 방어기제임과 동시에 존중받지 못하는 1%의 인원을 구제하겠다는 선민의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 추가로 흉악한 범죄가 벌어진 경우를 예시로 들어보자.(나는 범죄자를 옹호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흉악한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각종 SNS와 사회 집단에서 범죄자를 향해 쏟아내는 시선과 말들은 천편일률적이다. 범죄자에게는 악마 같은 인간,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을 비롯한 온갖 욕설과 비아냥의 수식이 붙는다. 그런데 이렇게 무분별한 욕설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범죄자를 자신이 속한 집단(가족, 친구, 연인, 지인) 또는 자신과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분리한다는 것이다. 마치 태생적으로 태어나는 방법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고 관념의 문제는 범죄자의 흉악한 범죄가 철저히 한 개인의 범주로 좁혀진다는 데 있다. 잠깐 마음이 편안할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욕설이 방증하듯이 나는 범죄자와 다른 인간이라는 결론이 합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범죄와 인간에 대한 본질이 사라진 자리에는 범죄자를 향한 욕설만이 가득 채워진다. 이를테면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이 청년의 분노에 관해 이야기했듯이, 응당 있어야 할 사고와 각성 없이 각종 유머와 폭력과 혐오의 난장판만이 벌어진다. 이런 현상이 나치를 악마라고 상상하며 규정하는 안일한 구시대 사람들의 사고 관념과 무엇이 다른가? 나치는 악마일 뿐이고, 비극은 과거에 존재할 뿐이며, 그 과거는 그 때, 그 사람들의 죄악과 비극일 뿐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인류의 퇴행을 의심하게 된다. 결국 영화의 내레이션이 마지막까지 우려하는 바는 단순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성찰이 아닌, 망각해서는 안 될 과거의 비극에 대한 개개인의 주체적 사고 및 의식 각성일 것이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는 재현 불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 한 편의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몇 명의 관객에게는 개개인의 성찰과 각성의 빌미정도는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영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 잔혹한 현장을 목격하던 카메라와 흔적만이 남은 공간을 쓸쓸히 포착하던 <밤과 안개>의 카메라, 그리고 관광객이 들고 있는 현재의 카메라. 총 세 대의 카메라는 우리가 지금 들어야 할 카메라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 고민은 망각을 거부하는 영화적 다짐이다. 그러한 영화적 다짐에서부터 재현된 한 쇼트가 세상까지 이르는 연쇄작용의 도화선이 되리라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까? https://blog.naver.com/rmatjdwjdals/22152358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