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Ryan

와이카노
平均 3.3
2025年08月02日に見ました。
*제대로 된 말을 배운적이 없어서, 그냥 "와이카노". 그렇게 말했는데도 찰떡 같이 알아들으면 놀랍고 감동받아 또 "와이카노" 주인공 선희는 27년 동안 시장의 작은 국숫집을 운영해 자식 둘을 건사한, 환갑이 넘은 여사장이다. 시장, 여사장, 자식 따위의 단어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그녀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모두가 그랬다. 자신을 위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비슷하게 희생을 했고, 그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비슷하면 이해가 (상대적으로) 쉽다. 세상은 분기했고, 삶의 모습은 더 다양해졌다. 복잡해진 만큼 세상은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이해하는데 품이 든다. 그래서 말이 계속 미끄러진다. 언어는 세계를 구축하지만, 때로 가장 잔인한 감옥이 된다. <와이카노>를 읽는 내내, 바로 이 언어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희미한 숨소리를 듣게 된다.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관계가 ‘퇴직금’이라는 차가운 단어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 이 소설은 우리를 단순한 갈등의 현장이 아니라, 소통이 불가능해진 시대의 가장 깊은 폐허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막막한 이해보다 먹먹한 오해를 택하는’ 사람들의 뒷모습과, 그 오해의 틈바구니에서 길어 올린 가장 서툴고도 절실한 사랑을 마주한다. "손님들에게 받은 돈 덕분에 가정을 건사할 수 있었다. 그 고마움을 잊고 이제 와서 받아야 할 친절과 다정을 뱉어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유원, <와이카노>, 124p) 손님들에게 주었던 친절과 다정을 다 거둬들여 딸에게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바빴으니까. 먹고 살아야했으니까.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게 나를 위한 것이라 믿었었으니까. 그런 당연한 희생의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자연스레 지워진다. 그리고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의 아이가 자라면 “스스로를 위하는 방법을 모르고 위하는 말을 할 줄도 모르는”(같은 책, 133p) 어른이 된다. 스스로를 위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다정을 베풀 줄 모른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 속에서, 딸 해리가 느끼는 감정은 ‘원망’이다. 미칠 노릇이다. 평생을 희생했는데 돌아오는 게 원망이라니. 선희는 “자식들이 자신을 원망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지만, 딸이 자신을 원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딸이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친절이었다. 다정이었다. 해리는 선희가 손님에게 보이는 친절, 그 얕은 친절도 부러워할 만큼 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것이다.”(123p) 사랑과 신뢰라는 이름으로 작동해야 할 가족이라는 세계가, 생존이라는 팍팍한 현실의 논리에 잠식당해 버린 것이다. 바로 이 언어의 폐허 속에서, 소설의 제목인 ‘와이카노’라는 기묘한 단어가 등장한다. 선희가 내뱉는 이 정체불명의 단어는, 제대로 된 말을 배워본 적 없는 자가 필사적으로 건네는 소통의 시도다. "경숙이 하얀 봉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테이블을 치우는 척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해리는 벽이 책이라도 되는 양 뚫어지게 앞만 봤다. 선희는 딸의 가슴에 쌓인 원망을 알아줘야 할 때란 걸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고백에도 말이 여전히 자신을 원망할까 봐 두려웠다. (…) 그래서 딸이 배어 나온 축축해진 손으로 보드라운 딸의 손을 어루만지며 음식 부리듯 말했다. - 니 진짜 와이카노?" (같은 책, 125p) 이것은 질문의 형태를 띤 가장 완벽한 고백이다. ‘왜 그러니’가 아닌 '와이카노'라는 서툰 물음 속에는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해하고 싶다’는 수만 개의 문장이 시간, 장소와 함께 겹겹이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서툰 언어를 상대가 ‘찰떡같이’ 알아들을 때, 소통은 이성의 영역을 넘어 기적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작가의 말처럼, “예전에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깊은 이해를 바랐다. 지금은 어렴풋한 이해와 알아주려는 노력이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아니 그 덕분에 나는 넉넉히 살아간다.”(126p)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거창한 이념이나 체계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고생을 알아주려 노력하고, 서로의 감정을 물어봐 주는, 그 시시하고도 위대한 노력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기묘하고도 슬픈 이야기 끝에,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한 희망이며, 가장 서툰 언어야말로 가장 진실한 사랑의 증거일 수 있다는, 따뜻하고도 명징한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