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Ryan

산책하기 좋은 날
平均 3.2
2025年08月16日に見ました。
목적 없이, 효율의 강박 없이, 그저 걷는다는 사실만으로 충만해지는 시간. 산책의 본질은 이처럼 '잉여'에 있었다. 하지만 목적과 효율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요즘은. 오한기의 소설 <산책하기 좋은 날>은 바로 그 낭만적 전제가 파산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의 걸음은 더 이상 자유로운 방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정해진 길을 맴도는 행성처럼, 지독한 ‘관성의 법칙’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잉여이면서도 잉여를 애써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서른일곱의 시나리오 작가인 ‘나’에게, 산책은 이제 “칼로리 소모 이상의 의미가 있어야”(52쪽) 하는 노동이 되었다. 그는 “목적 없이 걷고 있으면 조바심이”(52쪽) 나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에 어떻게든 서사를 부여하려 애쓴다. 그것은 때로 시나리오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되고, 때로는 “우연에 의지하는”(90쪽) 자기 기만이 된다. 그가 바라는 우연은 진짜 미지의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의 무기력한 선택을 ‘신의 계시’로 포장해 줄 편리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 자신이 원하는 바 - 그는 판을 쥐고 흔드는 신의 뒤에 숨기를 원한다 - 와는 달리, 사실 그를 지배하는 신은 운명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자신의 관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가 발견된다. 서른일곱이라는 나이는 더 이상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기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어진 삶의 경계선을 문득 깨닫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내가 (만으로) 서른일곱이라 잘 안다). 그는 산책 리스트에 적어뒀던 모교(동국대)를 스스로 지우며 '특별한 추억이 없다'라고 의식적으로 과거를 배제한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결국 서울 동남부라는 특정 권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그가 부정하려는 과거가 역설적으로 그의 현재를 지배하는 ‘서방 한계선’임을 증명한다. 한 인간의 삶은 이처럼 우연한 계기들로 ‘공간이 획정’되는 과정과 같다. 나 역시 전주를 떠나 처음 밟은 서울 땅이 신촌이었기에, 20대 전체를 보낸 서울 서북쪽은 물리적 거주지가 바뀐 지금까지도 나의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다. 작중의 ‘나’ 역시 마찬가지 - 그는 새로운 영토를 탐험하는 개척자가 아니라, 이미 그어진 자신의 경계 안을 하염없이 맴도는 유령처럼 보인다. 마치 자신이 설정한 ‘즐겨찾기’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비게이션 앱과 비슷하게, 주인공은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상세한 지도 위를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반경을 획기적으로 넓히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은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는 척하지만, 결국 신호가 끊기면 익숙한 ‘집으로’ 경로를 다시 불러올 뿐이다. ‘물갈이가 아직 덜 됐네요’(101쪽)라는 냉소는, 성공이라는 이름의 재개발을 끝마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향한 비아냥이다. 그는 끊임없이 걷고, 관찰하고, 사유하지만, 그 모든 행위는 즐겨찾기된 구역을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화양리’라는 이름의 비밀을 발견하고 잠시 설레다 이내 “내 인생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다운됐다”(105쪽)고 느끼는 것은,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그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영토를 구경하지만, 결코 그곳에 스며들지 못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을 등장시키는 대범함을 보이는 오한기는, 놀란 감독의 입을 통해, “나는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고, 당신은 과거를 향해 달리고 있다”(67쪽)는 능청을 부린다. 그는 미래(성공)를 향해 걷고 있다고 믿지만, 그의 발걸음은 자신이 그어놓은 과거의 영토 안에서 인버전(inversion)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산책은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해설의 말처럼 “되돌아오는 것”(141쪽)이다. 끊임없이 걷지만, 언제나 출발했던 그 자리, “과거는 슬프고 미래는 잘 떠오르지 않”는(141쪽) 자신의 영토 한가운데로 회귀한다. <산책하기 좋은 날>은 그래서 희망 대신 질문을 남긴다. 소설은 주인공이 마침내 목적지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대신, 되돌아온 그 자리에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126쪽)라고 다시 묻는다. 할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목적 과잉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산책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 서서, 수십 년간 나를 지배해 온 이 낡은 지도를 삭제하고, 아주 낯선 목적지라도 좋으니 스스로의 의지로 검색창에 주소를 입력할 기회를 주는 것. 그 막막한 첫 타이핑의 순간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익숙한 영토를 하염없이 걷는 것이다. 잉여롭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