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민준

민준

9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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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英題)

映画 ・ 2011

平均 3.6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의 일이었다. 1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가 나에게 덜컥 본인 집에서 놀자고 했다. 나는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친구의 집에 간다는 게 매우 생소한 일이었기 때문에 고민을 좀 했지만 친한 친구였기에 가보고도 싶었다. 결국 가기로 결정하고 친구의 집을 무척 장대하게 상상하고 갔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친구의 집은 아파트 옥상에 위치한 매우 좁은 환경이었다. 한 쪽 벽에는 부모님이 써놓고 가신 포스트잇이 마구 부쳐져있었다. 그때 나는 왜 친구가 나를 초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잠시 당황한 나를 보더니 5살 쯤 돼 보이는 동생을 보여주며 자신이 나갈 때 동안만 동생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차마 거절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들어와 버렸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다급하게 나가버렸고 나는 어색하게나마 친구의 동생을 보살펴주었다. 그런데 친구는 밤늦게까지 돌아오질 않아 점점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친구의 동생까지 잠이 든 시간, 친구는 허겁지겁 달려 온 것이 한 눈에 보일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친구는 옷 안에서 다량의 불량식품을 꺼내 놓으며 나에게도 하나를 주었다. 나는 늦은 시각인지라 친구가 오자마자 집으로 갔다. 그날 하루 종일 친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상상했다. 그러나 도저히 친구에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친구는 전학을 갔고 나는 가끔 후회를 한다. 그때 친구가 어딜 그렇게 다녀온 것인지, 무슨 일을 하고 온 것인지, 집 안에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말이다. 나는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던 친구의 모습이 한편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친구가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수많은 생각을 한다. 그럴 때 마다 늘 한 가지는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는 죄가 없다, 만약 죄가 있다면, 굳이 죄가 있어야 한다면 그건 분명 친구의 부모님 탓이 클 것이다. . 영화는 깔끔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단 두 공간으로 전반, 중반, 후반을 나누어 보는 이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두 공간은 집 안과 집 밖이고 자경이 집 밖의 길에서부터 집까지 가는 것이 전반부, 집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이 중반부,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나가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후반부이다. . 오프닝 시퀀스에서 자경은 집을 향해 도로를 걸어 올라가는데 표정과 몸짓에서부터 이미 혼란스러움과 분개한 감정이 드러난다. 영화는 이를 핸드헬드 기법으로 많은 흔들림을 주어 인물의 혼란스러움과 분개한 감정을 더 극대화시킨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는데 그때는 카메라 흔들림이 거의 없다. 이를 미루어 보아 후반부 자경의 심정은 분개의 감정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영화는 BGM 대신 엠비언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써 인물의 감정선을 조금의 과장 없이 섬세하고 유동적으로 끌고 간다. . 자경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부터 극은 중반부로 돌입한다. 자경은 자신의 아빠와 바람 난 여자와 한판 부딪히려고 왔지만 집 안에는 어린 아이 둘 뿐이다. 그런 나루와 기림에게 자경은 속없는 척을 하며 괜스레 못되게 군다. 하지만 자경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이들의 의젓하고 순수한 모습에 서서히 동화되어 간다. 나루는 9살이지만 집안일을 모두 도맡아한다. 동생을 돌보는 것은 기본이고 밥 하는 것과 빨래까지 모두 본인이 해결한다. 또 기림은 못되게 구는 자경에게도 우유를 줄 정도로 순수하고 착한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극의 중반부는 다량의 셔레이드가 존재한다. 먼저 서서히 아이들에게 동화되어 가던 자경이 화장실에서 네 식구의 칫솔을 발견할 때 아이들의 칫솔을 제외하고 두 어른의 칫솔만 변기통에 버린다. 이로 인해 자경이 아이들은 죄가 없고 어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바로 그 다음 장면은 기림이 머리에 난 상처 때문에 붙였던 밴드를 자경이 다시 붙여주는 장면이다. 이때 자경과 기림은 머리에 난 상처를 서로가 공유하게 된다. 이는 자경과 기림 사이에서 가족의 연대감이 형성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집 안으로 아버지가 들어오면서 당황한 자경은 방으로 숨어버린다. 그런데 나루는 아버지를 매우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가 나가자 나루는 처음 자경의 모습과 같이 분개한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나루가 소중히 여기는 장난감을 현관문으로 던져서 부서 버린 게 그 수단이었다. 이를 본 자경은 나루와 자신이 똑같은 처지임을 깨닫고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이 부서진 장난감 파편은 아이러니 하게도 자경과 나루 사이의 연대감을 상징하게 된다. 후반부 자경이 길을 내려갈 때 장난감 파편 한 조각이 자경의 신발에서 발견된다. 이는 자경이 나루를 향한 연민의 감정을 넘어선 연대감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셔레이드가 가족적인 연대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은 어디일까. 바로 셋이 라면을 먹을 때 확실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셋은 공통적으로 모두 왼손잡이 이다. 이러한 상징과 함께 극의 상황을 짐작했을 때 셋은 어머니만 다른 이복남매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 자경은 그토록 기다리던 여자가 거의 다 왔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포기하고 그냥 간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이들에게 화를 내며 모르는 사람한테는 절대 문 열어주지 말라며 마구 훈계를 해댄다. 이 장면은 자경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애틋함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어서 기림이 “언니는 누구야?” 라고 묻자 자경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여기서 영화의 제목이 왜 손님인지 반문을 던질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영화 제목은 왜 손님인 것일까. 이것은 영화의 제목부터 그들의 가족적 연대감을 넌지시 제시한 것이라고 예상된다. . 극의 후반부는 철저히 자경의 감정을 중심으로 셔레이드를 풀어낸다. 오프닝 시퀀스에 자경의 머리끈은 고무줄이었다. 그러나 후반부의 집 밖을 나간 자경의 머리끈은 기림과 비슷한 분홍색 머리끈이다. 더불어 나루의 장난감 파편이 자경의 신발 안에서 발견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자경, 기림, 나루, 이 세 사람 사이의 가족적인 연대감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경은 신발 안에서 장난감 파편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분개한 감정으로 길을 올라와 집을 왔을 때와는 상반되게 길을 도로 내려갈 때는 팔과 다리를 크게 벌리며 활기를 띤 채 걷는 장면이 백 샷으로 나온다. 이는 기림, 나루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자경의 의식을 의미함과 동시에 전반부의 분개했던 자경의 감정이 후반부에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왜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친구가 떠올랐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마 영화의 공간적 분위기, 자경과 아이들의 모습 등에서 내 친구와 동생이 떠오른 듯싶다. 자경은 처음 아이들을 볼 때는 자신의 아버지를 빼앗아간 여자의 아이들이기 때문에 더 무례하게, 더 못되게 군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에겐 죄가 없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는 아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아이들에게 다소 결여된 연대감을 같이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을 보며 왜 나는 그때 내 친구와 동생에게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이 밀려오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하루하루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 와중에 아주 작은 단면만을 보고 다소 이르게 판단을 내려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내 친구가 어딘가에서 불량식품을 훔쳐온 것, 자경이 집에 막 들어와 아무거나 어지럽히며 아이들에게 못되게 구는 것은 이렇게 단면만 봤을 때는 분명한 죄지만 나처럼, 혹은 이 영화처럼 더 폭넓은 시각으로 경험하고 지켜봤다면 과연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싶다. 우리는 점점 빨라져가는 사회 속에서 좀 더 다채로운 시각과 깊은 통찰력으로 일반적인 사회에서 결여된 그들을 배려하며 우리와 같다는 연대감을 심어주는 것이 병든 사회를 생성하지 않는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