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원

シンプル・アクシデント/偶然
平均 3.9
2025年10月02日に見ました。
복수와 심판의 딜레마. 에크발과 가족이 탄 차의 반대 차선으로 차가 스쳐지나가고, 그 뒤를 개들이 짖으며 쫓는다. 그리고 그는 곧 개 한마리를 로드킬하는 사고를 일으키고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내는 ‘일어나야 하는 일은 결국 일어난다’며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 이야기하고, 딸은 신이 무슨 상관이냐며 개를 죽인건 아빠라고 대답한다. 한편 에크발의 뒤를 쫓던 바히드 역시 도로에서 그의 차 주변을 위험하게 배회하는 개를 한 마리 마주치지만, 그는 악셀을 밟고도 그 개를 치지 않고 지나간다. 개는 단순히 그들의 죄와 피해자에 관한 메타포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조금 더 중요한 문제가 함축되어있다. 어째서 에크발은 개를 치는 ‘사고’를 일으키고, 바히드는 이를 피해갈 수 있었을까 ? 답은 간단하다. 에크발이 사고를 겪은 시각은 한밤중이었고, 바히드는 한낮에 개를 봤기 때문에 그를 무사히 피해갈 수 있었다. 덕분에 사고를 일으킨 에크발의 죄에 대한 고의성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본인 이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게 된다. 영화 속 하늘로 대변되는 신은 어째서인지 그의 죄를 심판할 수 없게 밤의 어둠속에 그를 가려주었다. 끔찍한 비극의 피해자인 영화의 인물들은 결국 가해자인 에크발에게 복수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를 제대로 식별하지 못해서 였지만, 곧 그가 자신들을 고문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도 그들은 복수를 완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에크발의 딸에게서 위급한 전화를 받아 그의 아내가 무사히 아들을 출산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들이 자신들의 원수의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이 선의는 으레 당연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모순적으로 보인다. 에크발이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죄인임은 확실하지만, 그의 가족들에게는 죄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태어날 아이에게 아버지의 죄를 무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선의는 강요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에크발을 납치해 누구도 이 모녀를 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돕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무고한 생명이 복수의 굴레에서 희생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죄를 저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선의를 행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해당 논리는 확장되어 에크발 본인에 대한 피해자들의 복수에도 적용된다. 에크발은 개를 로드킬한 상황에서 ‘이것은 그저 사고일 뿐이다’ 라는 해명으로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마 그에게는 이 후 차가 망가져 피해자들 중 한명인 바히드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더 큰 사고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자동차와 개’라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는 역전되어 그는 자동차의 앞에 선 개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바히드와 피해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복수를 달성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악셀을 밟아 개를 치지 못한다. 이는 에크발의 죄가 고의성이 결여되어 ‘사고’로 치부된 것과는 달리 그들의 복수는 명백히 고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차로 개를 치는 순간 사고는 더 이상 사고가 아닌 사건이 되고, 죄를 지은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어 새로운 피해자들을 복수의 고리로 끌어들인다. 이 죄의 무게는 피해자들이 마지막까지 복수를 망설이는 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복수를 달성하지 못한 결정적 두번째 이유는 그들에게 복수의 당위는 있을지언정 심판의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에크발을 묶고 몰아세워 그에게 ‘지난날의 일들을 후회한다’는 반성의 말을 받아낸 피해자들은 혼란을 겪는다. 그의 고백이 진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만일 그가 자의에 의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 또한 국가의 명령으로 이를 행했다는 논리로 변호가 가능하다. 물론 이것이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로 인해서 우리는 그의 죄에 대한 고의성을 확정짓지 못하게 되었다.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모른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피해자들은 그의 죄와 회개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의 진심을 알고 있을 유일한 존재인 ‘신’은 모순적이게도 그를 어둠속에 가려주었고, 그의 죄를 대신해서 심판해야 할 국가는 더 나아가 그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이 부조리한 시스템 속 피해자들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이것은 그저 사고였을 뿐이다’라는 가해자의 변명은 역으로 피해자들에게 ‘그저 사고일 뿐이니 잊어버려라’라는 용서의 압박으로 다가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에크발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복수를 포기당한 것에 가깝다. 결혼식을 앞둔 부부가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 것 처럼, 새로운 가해자가 되어 복수의 굴레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삶 위에서도 계속해서 ‘이것은 그저 사고였을 뿐이다’라는 자기위로로 스스로를 납득시켜야만 한다. 그럼에도 역시 상흔은 지워지지 않는다. 마지막 씬에서 바히드의 숨통을 조여오던 섬뜩한 의족소리는 그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뒤섞여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은 감독이 희망하는 평화의 메타포이지만, 우리는 이미 그들의 고통과 비극의 현실을 알고 있기에 이마저도 서글프게 느껴진다. *에크발은 죗값을 치루지 않을까 ? 영화 속 그의 진심은 제한된 시점의 카메라처럼 모호히 가려져 있지만 개인적으로 감독은 이미 영화의 첫 시퀀스를 통해 답을 주고있다고 생각한다. 에크발 가족의 뒤로 스쳐지나간 개에게 쫓기던 차는 아마 이전에 이미 로드킬을 경험한, 이른바 ‘사고차’ 였을 것이다. 개가 피해자를 의미함을 고려하면 그 차는 에크발 이전에 그와 같은 죄를 범한, 즉 잔혹한 일들을 저지른 권력에 대한 메타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에크발은 이를 확실히 보고도 같은 죄를 저지른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이미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음에도 고의적으로 악행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국가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주장도 딸의 대사로 일축된다. ‘개를 죽인건 아빠고 신의 뜻과는 상관이 없잖아.’ 이 순수한 어린이는 이미 정답을 알고있다. 또한 바히드 일행이 아내의 출산을 도와 그들의 은인이 된 것은 분명히 에크발이 다시 그들을 찾아낼 수 있는 단서이지만 동시에 딸이 피해자들의 얼굴을 기억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언젠가 부모의 추악한 진실을 알게될 것이고, 그때 에크발은 가장 큰 죗값을 치루게 될 것이다. 개들에게 쫓기는 차와 이번에는 사고를 피했지만 계속해서 위험한 차도를 배회하는 개. 감독은 이들의 최후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좋지 않은 결말을 상상할 수 있다. 일어나야 하는 일은 끝내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