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사회의 톱니바퀴에서 탈피해 예술가로서 나의 존재를 확립하는 순간 찾아오는 것들 . (스포일러) 동독에서 한 번 그리고 서독으로 건너간 뒤 한 번. 쿠르트는 도합 두 번의 제안을 학부 교수로부터 건네받는다. 그 두 가지 제안의 차이점은 곧 <작가미상> 서사의 주안점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 ‘나’라는 존재를 발라낸 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풍습을 따르며 그에 기반을 둔 벽화를 그리라는 동독 교수의 제안. 그리고 예술가로서 본인의 미비한 존재감을 지적하며 자신의 미적 아이덴티티를 확립할 것을 권고하는 서독 교수의 제안. 동독에서의 회화에 실증을 느껴 서독의 아방가르드로 향하는 예술가 쿠르트를 담은 <작가미상>의 이야기는, 달리말해 전자의 제안에 일시적으로 굴복했다가 후자의 제안으로 다시금 각성하는 한 예술가의 투쟁기다. . 쿠르트가 엘리와 함께 서독으로 건너가는 부분을 기점으로 영화를 총 2부 구성으로 쪼개어 볼 때, 그중 2부에 해당하는 서독에서의 에피소드는 앞서 언급한 교수의 제안을 기점으로 또다시 2개의 서사로 양분된다. . 서독으로 건너온 뒤, 쿠르트는 생전 처음 보는 아방가르드의 활기에 흠뻑 빠져 취하지만 곧이어 동독에서 경험했던 예술가로서의 권태를 다시금 절감한다. 그런 권태의 상태에서 듣게 된 교수의 권고는 방황하는 쿠르트에게, 어쩌면 지금 서독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이 낯선 공간의 생경함에 일시적으로 매혹된 채 그저 그곳의 주류예술을 복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라는 자문으로 이어진다. 즉, 서독에서의 서사는 제 자신의 미적 자의식을 오인한 예술가의 이야기와, 마침내 이를 자각한 뒤 진정 ‘나’다운 것을 찾아가는 예술가의 이야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 1부에 해당하는 동독에서의 서사가 체제에 억압받는 예술가가 그 체제를 몸소 탈피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였다면, 서독에서의 서사는 체제의 억압이 제거된 상황에서 (1부의 초반부에서 묘사된)자신의 미적 자양분으로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예술에 또렷이 각인시킬지에 대한 방법을 찾는 예술가 이야기라 보아도 좋겠다. 자신의 예술적 지향과 충돌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일련의 시행착오, 그리고 힘겹게 맺어진 결실. <작가미상>의 유려하고 장대한 서사엔 한 명의 예술가가 당당히 홀로서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이 단계별로 고스란히 녹아있다. . 여기서 꽤나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쿠르트가 자신만의 진실됨을 찾는 방법론이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예술적 통념과 충돌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이다. 쿠르트의 완성본에 감상평을 덧붙이는 친구의 말마따나, 쿠르트는 왜 사진의 모사를 통해 진실이란 관념에 가닿으려 했던 것일까. 회화작업의 과정이 실재하는 사물이나 풍경, 혹은 인간을 자신의 미적 감각을 통해 (누군가의 작품을 본보는 것이 아니라)곧바로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이라면, 반면 사진의 모사란 실재하는 것을 사진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에 옮긴 뒤 이를 본떠 또다시 캔버스에 2차로 옮기는 과정인 셈이니 사실상 이건 회화에 비하면 불순물이 과도하게 많아질 수밖에 없는 비교적 덜 진실한 작업이 아닌가. 게다가 그 본보기의 대상이 되는 작업물인 사진마저 본인의 작업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작품이지 않은가. . 허나 역사를 바꿔온 위대한 예술적 결단들의 다수가 그러했듯 가장 창의적인 순간은 그 통념을 전복할 때 찾아오기 마련이다. 어차피 제 자신만의 진실한 방법을 찾으리라고 단념한 쿠르트이기에, 그 유일한 길을 찾는 방법론의 일환으로 암묵적인 예술의 룰을 따르는 건 어쩌면 그 자체로 모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어떠한 과정이 그를 이러한 결단으로 이끌었던 걸까. . 엘리의 아버지인 교수 칼의 부탁으로 그의 초상화를 그리던 쿠르트는 엘리에게 자신의 예술관과 충돌하는 사람들의 통념에 대해 토로한다. 다름이 아니라 실재하는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를 포착한 사진이 아닌, 특정 예술가의 비전이 담긴 초상화를 더욱 선호하는 사람들의 관습이 자신에겐 의문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진실함’이라는 테마를 놓고 영화 속 인물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패턴화할 시, 극중 인물들은 (쿠르트의 이모 엘리자베스의 말을 빌려)진실에 눈 돌리지 않는 자들과 그 반대에 속한 이들의 유형으로 양분이 가능하다. 교수 칼이 후자의 인물상을 대표하는 반면 쿠르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전자의 인물상에 가깝다. 따라서 쿠르트가 전자의 인물상으로 거듭나는데 일종의 근간이 되는 역할이 필요하기에 그의 이모인 엘리자베스의 에피소드는 쿠르트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영화의 첫 장에 등장하여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어야 했던 것이다. . 말하자면 사진을 모사하는 그의 행위는 자신의 이모로부터 전해 받은 예술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한 오랜 고민의 끝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내린 자신만의 결론이다. 이모가 정신병동으로 이송되는 대목에서, 유년기의 쿠르트는 눈을 돌리지 말라는 이모의 말과 달리 손으로 눈을 가리며 그 비참한 순간을 외면한다.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과거의 감각에 대한 진실성을 웅변하는 교수의 말에 크게 감화된 쿠르트는 진실한 순간을 외면했던 그때의 일을 예술의 메커니즘을 통해 다시금 재현해내야만 한다. 유대인 출신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리스트>를 만들었듯, 혹은 드레스덴 대참사를 겪은 커트 보니것이 <제5도살장>을 썼듯, 모든 예술가에겐 건너뛸 수 없이 반드시 예술로 승화시켜야 할 제 나름의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유사 모자관계와도 같았던 이모와 어영부영 작별하게 된 경험은 바로 쿠르트에게 그와 같은 사건이 된 셈이다.(면회를 갔음에도 결국 이모를 다시 만나지 못한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쿠르트의 심리에 큰 작용을 가한다.) . 예술가의 자의식이 보다 더 강하게 투영된다고 말할 수 있는 단순 회화작업보다 사진의 진실함을 믿는 쿠르트의 예술관과, 이에 근거하여 택한 사진모사의 방법론은, 과거를 재생하는 주제에 있어 단순 회화작업보다 더 적합한 방식으로 보여진다. 분명히 한 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머릿속의 편린들로 남아있는 과거를 곧장 캔버스에 옮겨내는 작업은 기억의 왜곡이란 변인이 개입할 시 금세 거짓된 작업물로 전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 그러하기에 쿠르트는 복사의 과정이 있다할지라도 상대적으로 왜곡이 덜 된 상태로 실재가 포착된 사진을 과거의 재생이란 테마의 재료로서 활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건 그 사진이 영화의 제목대로 작가미상의 작품이란 사실이다. 즉, (자신의 고유성을 찾는 작업을 하는)쿠르트가 사용하는 사진엔 특정 예술가의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배재되었다 생각해도 무방한 것이다. 결국 쿠르트는 어떤 예술가의 고유성이 짙게 베인 예술을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알 수 없는 익명이 포착한 자신의 과거를 질료삼아 놓쳐버린 인생의 어느 시점을 리플레이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 물론 이러한 쿠르트의 방법론에 의문을 품거나 동의하지 못하는 의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쿠르트의 결론은 순수 창작이라 보기엔 걸리는 지점들이 적잖게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순도 100%의 진실을 옮길 수 있는 예술의 형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어쩌면 애초에 우리의 동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제 자신만의 방법론을 탐색하는 데 있어 구태여 타인의 동의까지 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쿠르트의 예술을 본 인물들의 리액션을 한 쪽으로 통일시키지 않은 영화의 선택은 쿠르트의 방식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의 가능성 모두를 열어 둔 방편이라 생각한다.) . ‘나’를 찾아 방황하던 예술가가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또렷이 확립하여 예술에 각인시키니 예상치 못했던 것이 제 발로 찾아오기에 이른다. . 쿠르트는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으로 작업했을 뿐이지만 후에 이를 판단하는 이들은 쿠르트의 예술을 자전적 범주에서 벗어나있다고 평할뿐더러, 심지어는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위시해 이를 평가하기에 앞선다. 이러한 영화의 태도는 비평가나 저널리스트들의 오독이나 헛발질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되려 이는 A라는 의도를 품고 세상에 나온 작품이 B나 C라는 또 다른 신선한 의도를 배태할 수 있다는 예술의 가능성을 반증하는 것에 더 가깝다. 요즘 유행하는 말 하나를 빌리자면, 영화 <작가미상>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범용적일 수 있음을 말한다. . 그 범용성의 일환에서, 영화는 역사의 비겁한 죄인을 단죄하는 용도로 쿠르트의 예술을 적극 활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를 확립한 예술이 처단해야 마땅한 대상은 바로 ‘나’의 존재감을 묵살시킨 이들이며 본 영화에선 칼이 그러한 인물을 대표한다. . 멀쩡한 이름을 두고도 자신을 굳이 교수님이라고 칭할 것을 타인에게 종용하는 그의 습관적인 태도는, 이름이란 ‘나’의 고유성 보다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자신의 위치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의 몰개성한 성향의 어느 단면이다. 그런 칼은 쿠르트라는 한 예술가, 혹은 한 인간의 존재감과 고유성이 선명하게 각인된 예술을 보며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날의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견딜 수 없이 크게 흔들린다. 사회적 가면을 벗긴 뒤 한 명의 죄 많은 인간을 단죄하여 평생토록 지속될 죄의식이란 심리적 형벌을 내리는 것. 이것 또한 쿠르트 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예술이 가진 어느 가능성의 일면이다. . 정신병이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들의 혈통은 무조건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개인의 개성을 부정한 채 유전에 근거하여 살릴 이와 죽일 이를 선별했던 칼은, 가장 개인적인 것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쿠르트와 영화 내내 대립한다.(성애장면에서도, 쿠르트와 엘리의 감각적인 섹스와 칼과 아내의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섹스는 정확히 대립의 구도로 병치되어 있다.) 이러한 대립구도에서 자신의 성향에 근거하여 먼저 공격을 행한 이는 다름 아닌 칼이다. . 쿠르트의 열등한 유전자를 물려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는 엘리에게 잔인한 낙태시술을 감행한다. 헌데 기적적으로 엘리는 임신에 성공한다. 수없이 묘사되는 쿠르트와 엘리의 성애장면 중 엘리는 어느 장면을 기점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는가. 바로 쿠르트가 자신만의 방법론을 확립한 직후의 섹스에서 그녀는 아이를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쿠르트 만의 공이 아니다. 둘이 사랑을 나누기 직전, 그녀는 책상에 앉아 손수 의류를 제작하고 있다. 변변찮은 생활 가운데서도 끝끝내 패션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엘리와 어렵사리 자신만의 것을 창작하는 데 결국 성공한 쿠르트가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이들은 칼의 치졸한 모략을 무릅쓰고 임신이란 기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학적 법칙을 거스른 엘리의 잉태는, 전체주의에 대한 개인의 승리이며 예술의 적에 대한 예술의 승리인 셈이다. . 만족의 경지에 다다른 후반부의 쿠르트는 엘리의 누드화를 그려 자신의 전시회에 출품한다. 그 엘리의 누드는 어릴 적 자신이 종종 스케치하곤 했던 누드화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더 나아가 탈의한 상태로 피아노를 치던 이모의 나체와 정확히 포개진다.(다름이 아니라 이모와 엘리는 본명까지 서로 동일하다.) 동독에서의 어린 쿠르트는 정신이상자로 몰리지 않기 위해 그 비밀스런 누드화를 숨겨야만 했다. 허나 서독에서의 그는, 이모의 말 그대로 눈길 돌리지 않은 채 자신을 사로잡은 그 진실하고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해내며 만인에게 그 이미지를 공개하기에 서슴지 않는다. 이제 쿠르트는 이모를 대면할 준비가 되었다. . 엘리자베스가 버스의 경적을 듣고 심취한 초반부의 장면은 관객의 입장에서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전반부의 엘리자베스는 쿠르트의 이모, 혹은 예술에 미쳐버린 인물. 로 타자화되어 우리에게 제시되는데, 해당 장면은 우리에게 그저 미쳐버린 한 인간의 미친 행동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해당 장면과 정확한 대구를 이루는 영화의 엔딩은 우리에게 장면 자체가 지닌 감각을 새롭게 초기화한다. 엔딩에 이르면, 엘리자베스가 속해있던 그 타자의 위치에 오는 건 쿠르트와 관객이다. 그 순간 쿠르트는 미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경험했던 감정적 고양을 그대로 체감한다. 물론 우리가 영화의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당신에게 마지막 버스의 경적은 어떤 의미였는가. 만약 영화에 동의하지 못했다면 마지막의 그 경적은 여전히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순간 쿠르트와 함께 그 경적을 다른 차원으로 감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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