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왓챠정리몬함

왓챠정리몬함

9 years ago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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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本 ・ 2004

平均 3.8

니체의 잠언들은 그야말로 ‘악마의 혓바닥’ 같다. 자칫하면 그의 철학은 ‘힘의 논리’에 대한 예찬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포리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글쓰기 방식부터 오도했음을, 즉 텍스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니체는 은유와 반어라는 문학적 성질의 글쓰기를 통해 자기 사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 여기는 공동 규칙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지, 그러한 공동 규칙에는 어떠한 권력이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 인식을 어떻게 붙잡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인 체계적 글쓰기 방식을 거부한 것도 이와 연관 지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니체의 혓바닥은 악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철학이 방대한 체계를 이끌고 감에 있어 그 사유의 깊이와 세밀함에 감탄하게 된다면, 니체는 화려한 수사와 비유를 통해 읽는 이를 압도한다. 니체의 주장대로 거시적인 주장들은 거대한 공동체의 정신을 따르거나, 한 이념을 바탕에 둔 채 촉발된다. 그러나 유념해야할 것은, 모든 이념의 틀이라는 것이 과연 개인을 억압하는데 그치는가, 라는 질문이다. 기실 어떤 사회적 척도를 제시하는 주장에서 이념성이나 사회구조의 영향을 배제하는 것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니체는 사회주의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비판한다. 아니, 중요한 건 그 이념성 그 자체에서 벗어나느냐가 아니라, 그 이념이 지배적으로 작동하느냐, 해방적으로 작동하느냐의 문제이다. 어떤 공동체가 억압적으로 주어진 폭력적 통념이 아닌, 상호소통을 통한 보편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때, 그것을 단지 부정적으로만 격하시킬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니체가 제기한 칸트에 대한 비판도, 칸트를 협소한 영역에 서만 해석한 결과라 여겨진다. 칸트는 윤리 행위가 주관에 실용적이고 유용한 측면에서 행해진다면 진정한 윤리행위라 할 수 없다고 했으며, 이는 윤리를 지배적 이념 하에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도구로써 사용하는 행위조차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칸트의 합리성은 지배적 이념에 내재된 합링성과는 구분되어 진다. 후자가 편향적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계산적 합리성을 강조한다면, 전자는 각 이성 능력을 가진 개별자들의 충분한 소통을 전제하고 있다. 칸트의 도덕은 그 자체로 억압성을 견뎌낸, 합리적 상호소통을 지향한다. 합리적 소통이 가능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는 기존의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유연한 억압을 하는 지 통찰할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하며, 성찰적 이성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오히려 이러한 사고는 니체가 제시한 ‘주인의 도덕’을 가진, ‘주체적 인간’이 되고자 함과 유사하지 않는가? 니체 또한 집단적인 지배 이념의 맹점을 꿰뚫어 본 사람이기도 하다. 때문에 주체성 회복의 목적을 권력쟁탈로만 환원하는 것은 이념 간의 차이를 단순화한 결과이며, 의무론을 그저 노예의 도덕이라 격하시키는 발언 또한 협소함에 따른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주체를 공고히 하는 이유는, 개별자들의 최대한의 주관적 능력들이 사회적 보편성에 기여될 수 있는 해방적 사회로 나아감에 있는 것이지, 집단에서 도피해 있는 하나의 개인이 되기 위함이 아니다. 니체와 같은 그럴싸한 ‘악마의 혓바닥’의 공격에 발이 채이지 않을 때, 아니, 그들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다시 합리적 소통의 성벽을 쌓아올릴 때, 이상적으로만 보이던 세계의 길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