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화면으로 보는 픽션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당신과 달리 이 모든 걸 실제로 겪은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다. 12살의 어린 소년이 동생들을 위해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얻어온다. 그보다 조금 어린 여동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있다.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두 명의 동생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안 구석에서만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그림 옆에는 잔뜩 쌓인 일회용 음식물 쓰레기가 있다. 그런 생활이 익숙한 아이들은 너무도 태연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을 돌보는 부모는 없다. ‘엄마’라고 하는 사람이 이들에게도 존재하지만, 이들에게 ‘엄마’의 존재는 ‘엄마’라는 명칭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네 명의 아이들에겐 세상으로 데려나가 줄 어른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영화 시작과 함께 ‘이 영화는 도쿄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란 문구가 나온다. 1988년 있었던 ‘스가모 어린이 유기 사건’을 영화한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끔찍한 사건을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서 제 3자의 입장으로 그들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처럼 영화는 사람들의 일상을 천천히 그리고 꾸밈없이 보여준다. 영화 배경음악조차 한편의 영화 속에서 하나만 흘러나올 뿐이다. 이러한 영화의 서사적 구조가 자극적인 소재와 영상을 요구하는 현시대에 역행하고 있는 듯하지만, 평범한 일상이 가지고 오는 이성과 감정의 무게감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무게감은 눈을 찌푸리게 하고, 스크린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킨다. 이러한 감정을 느낄 때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문구가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화면으로 보는 픽션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당신과 달리 이 모든 걸 실제로 겪은 아이들이 넷이나 있었다고... 포스터 속 아키라의 표정 영화 포스터에 네 명의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이들 중 카메라를 향해 앞으로 똑바로 보는 아이는 맏이로 나오는 아키라 하나이다. 아키라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옅은 미소를 지니고 있다. 아키라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앞을 보고 있다. 아키라의 무표정한 얼굴속의 눈빛은 무서우리만치 담담하지만 눈동자의 뚜렷한 초점은 현실의 무게를 피하지 않고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결의가 보인다. 아키라의 역할은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어른을 대신해 동생들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주는 울타리이자 책임자이다. 자신의 옆에 앉은 동생들의 미소를 지켜줄 보호자이다.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않은 12살의 어린 아이가 책임감의 무게를 지닐 수 있을까? 그는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존재이기에 사회속에 무참히 버려졌나? 하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도 여느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친구와 어울리고 싶고 게임을 하고 싶어 생활비로 게임기를 사기도 하는 어린 아이일 뿐이다. 다만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그에게는 책임이라는 짐이 어깨에 짊어졌던 것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거기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고 오히려 12살의 조그마한 어린아이에게 미룬다. “나도 행복해지면 안돼?” 라는 얘기가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 이 얘기에 대해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떨군다. 그토록 사랑해서 아이까지 낳고 평생을 함께 하려던 그 마음은 왜 그리도 쉽게 식고, 딱딱해져 끊어버리는지, 그리고 그녀는 또다시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 한다. 엄마는 아키라를 마치 아이들의 아빠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아들에게 책임을 지워주며 그걸 당연하게 느낀다. 네 아이의 엄마는 고통이 찾아오면 참지 못하고 회피하려고만 하는 몸만 어른인 어른아이에 불과 하다. 그녀는 이사회가 낳은 또 다른 사회적 병리 현상의 하나이다. 포스터의 아키라의 표정은 이러한 상황이 나은 한 아이의 복합적 심리상태의 표현이다. 동생들과 같이 웃을 수 없는, 앞을 바라보고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감이 한 아이의 얼굴을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만든 것이다. 애어른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한 아이의 표정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들꽃과 네 명의 아이들 콘크리트로 가득한 도로 옆 하수도에 자란 들꽃을 보며 네 명의 아이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려든다. 하수도의 틈새로 피어난 들꽃은 지금의 네 남매의 생활과는 대조되게 활짝 피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누가 버리고 가버린 거 아닐까? 불쌍하다 그치?” 아이들은 들꽃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엄마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신들과 알게 모르게 많이 닮은 들꽃을 바라보며 연민의 감정과 동질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들꽃은 이들에게 잠시의 행복과 동질감을 줄뿐 온전한 치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들꽃은 아무도 보살피지 않아도 스스로 꽃을 피우고 지고 한다. 아무렇게나 자란 들꽃은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문득, 다자란 들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꽃이 지거나 영화에서처럼 도로변에 핀 꽃이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들꽃의 존재는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거치적거리로 전락한 들꽃은 제거의 대상이 되곤 한다. 전체의 아름다움을 깨트리는 방해자가 되는 것이다. 네 명의 아이들이 그렇다.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대부분의 냉정한 어른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들은 이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흑과 백, 선과 악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적 통념이 그들을 해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어른들이 만들었다는데 있다. 어른들이 만든 상처와 고통을 어린 아이들이 고스란히 받아 그들의 상처와 슬픔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들꽃의 씨를 모아와 음식용 플라스틱 용기에 심는다. 별 다른 방법 없이 심어 놓은 들꽃은 최소한의 물과 햇빛만으로 꽃을 피우며 잘 자란다. 하수구 틈새에서 꽃피우는 들꽃과 같이 생명이란 그토록 모질기도 하고 억척스럽기도 하다. 비옥하지 않은 환경에 피어난 꽃은 그렇기에 희망을 의미하고 미래를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들꽃이 가진 이런 특징을 통해 현실에 대한 슬픔과 고통의 이면에 가진 희망과 삶의 의지를 무덤덤히 담아내고 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영화의 시작과 함께 다 낡은 티셔츠를 입은 꼬질꼬질한 아키라와 그와는 정반대의 소녀가 함께 분홍색 트렁크를 가지고 전차를 타고 가고 있다. 차창엔 불빛이 들어온 다리와 함께 밤 야경이 흐르고 있으며, 두 명의 아이들은 전차의 구석에 기대어 서서 가고 있다. 첫 장면 이후의 내용을 모르는 관객들은 오히려 이와 같은 장면이 낭만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실상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막내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행기가 보이는 공항을 찾아 먼 길을 나선 것이다. 동생의 생일날 처음으로 같이 했던 외출이, 그의 소매를 붙잡고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생의 눈빛이, 초콜릿 한 알 아껴가며 먹던 그 모습이 떠올라 가만히 트렁크만 만지작거릴 뿐이다. 영화는 죽음도 무덤하게 바라보고 있다. 배우들조차 죽음을 삶의 일부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동생 죽음의 과정조차 영화는 과감히 생략한다. 다만 앞 뒤 장면의 복선과 이외의 장치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영화의 출연진들은 죽음의 과정에서 한 방울의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공항 빈 공터에 동생을 묻어주고 나서 무릎에 얹혀진 아키라의 조그마한 두 손의 떨림을 통해 슬픔을 전달할 뿐이다. 그 자그마한 떨림이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떠한 감정의 표현보다 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생을 묻어준 장소가 공항이라는 점 또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사회의 편견과 어른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오년가량의 짧은 생을 방안에서 대부분을 지내야 했던 아이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공항이라는 장소를 통해 표출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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