ドライブ・マイ・カー
映画 ・ 2021
平均 4.0
1. 는 상당한 감동도 주었지만, 사실 그 감동은 영화가 아니라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비롯하였다. 영화만 두고 봤을 때 는 실망스러웠다. 일본 근대 문학에서 많이 접했던, 과거의 상처와 내면의 고독으로 움츠려 들어,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한 자폐적인 인물들. 이러한 캐릭터를 비판적으로 보았던 가라타니 고진은 이를 '내적 인간'이라고 명명했다. 이 영화는 '내적 인간'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 '내적 인간'의 치유를 위해서 영화는 연극제라는 이름의 "극적인 (Theatical) 치료 캠프"를 제공한다. 그리고 PC하게도 그 치료 캠프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위계도 없다. 나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서사는 문제적 인물의 머리에 세뇌 기계를 씌우는 것과 다를 바없다고 생각한다. 광활한 설경의 아름다움은 그 세뇌 기계가 투사하는 VR이다. 세뇌 기계가 산출하는 메세지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의 마지막 대사이다. 연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그 대사는 원래 <햄릿>에서 "사느냐 죽느냐" 대사만큼이나 유명하다. 그러니까, 메세지의 호소력은 원작에 의존하되, 그 메세지를 구현하는 구조는 시진핑핑핑이가 위구르에 운영하는 세뇌 캠프만큼 잘 못 만들어 졌다.
2. 그러나, 수화를 하는 소냐의 마지막 대사와, 연이어 덧붙여진 코시국의 일상의 모습이 강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3. 의 주인공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의 바냐에 대응된다. 그런데, 체호프의 원작 희곡에서 바냐는 소심하고 움츠려 있는 중년 남성이지만,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극의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해서 총을 꺼내들어 쏴제끼기도 한다. 그러한 바냐 아저씨마저도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일상의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라고 위로를 받는정 것이 체호프의 원작에서 마지막 소냐 대사의 의미이다. 그런데, 에서 남자 주인공은 어떠한가?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지 않는다. 아내가 바람 피는 것을 목격한 순간에도 화를 낼 줄 모르며, 주변의 여성들의 접근도 전부 거절한다는 점에서, 그는 엘레나를 연모하는 <바냐 아저씨>의 바냐와 달리 남성성을 거세당한 일본식 '내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폭력성을 대신 발휘하는 것은 연극 처음에 바냐 역할을 맡았던 젊은 배우 '미치코'이다. 이는 마치 '바냐'라는 캐릭터에서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면은 뚝 잘라다가 다른 캐릭터에게 용역을 준 것처럼 보인다. "상처는 짊어졌지만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는 순수하고 착한 나"라는 바냐의 속성만 주인공에게 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그 폭력성과 반사회성에 대해서 영화가 훈계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지점은 종종 눈에 띈다. '미치코'가 사회인으로써 부적격이라는 대사가 직접 돌출되며, 그는 연극 연습 도중 경찰에게 잡혀가는 것으로 서사적 징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의 주인공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소냐의 대사로 위로를 받은 것은 그가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며, 차오르는 감정을 묵묵히 자신의 내면으로 억누르고 또 억누르는, 전형적인 일개미 같은 일본인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의 위로가 무조건적이라면, 에서 소냐의 위로는 조건적이다. (작가에 의해 작위적으로 구성된) 고통을 겪고도 엇나가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4. 일본이 유별나지만, 왜 동양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거나 화를 폭발하거나, 하는 상황을 적대시하는 걸까? 일본 영화에서 내키는 대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야쿠자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일본 야쿠자 영화가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에서의 중2병스러울 정도로 과시적인 자기 표현은 일상에서의 대리 만족을 위한 과장일까?